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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산책- 식물세밀화가가 식물을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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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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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의 심장- 완전범죄 살인릴레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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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정치사연구
최승희 지음 / 지식산업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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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같이 조선 초기(태조부터 성종까지)를 대상으로 정치사를 살펴본 연구서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한바와 같이 :

“정치사연구의 대상은 국왕과 관료 및 인민의 존재양태, 국정의 제도적 틀인 정치체제, 국정운영의 실제, 정치세력의 동향” 등으로 주로 각 왕대의 정치체제, 국정운영의 실제(의정부서사제 및 6조직계제들의 운영실태등), 그에 따른 왕권의 위상 등을 살피고 있다.

 

 

 

  기본적으로 조선에서 운영된 관서의 역할과 기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여 그리 심도 깊게 이해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에 알고 있었던 상식에 대한 의문과 교정정도? 그런 예로 태조에 대한 평가를 들 수 있겠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에 활약했던 슈퍼스타로 그의 결단력이나 정치력 등은 위화도 회군 같은 중대한 결단을 하는데서도 드러나는 대도 개창 이후의 태조에 대해 평가가 너무 박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태조대의 국정운영을 살펴보면서 저자는 태조 대에 왕권이 약했다는 평가에 반박하면서 그에 대한 예증을 해갔다.

 

 

일단, 공신의 선정에서도 태조 위주로 주도 했다는 점을 든다. 공신의 선정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당시 위세가 누가 강했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후 정종이 즉위하고 정난공신을 선정하였는데 당시 방원이 그에 관여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듯 공신의 선정을 당시 왕권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으므로 공신선정에 누가 관여 했는가를 살펴보면:

   태조 원년 8월 20일에 태조는 개국공신의 위차를 정하고 포상지전을 유사에 거행하라는 구전왕지를 우승지 한 상경을 통하여 도평의사사에 내렸고, 이 왕지를 받은 도평의사사에서는 왕지의 내용을 전재하고 왕지의 뜻을 받으러 시행하라는 출납을 공신도감에 내렸다고 한다. 그 왕지의 내용에는 누구누구를 무엇 무엇한 공으로 이들에게 차례로 공신의 칭호를 내리고 포상지전을 유사에서 거행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개국공신을 정만 도평의사사와 의논하여 선정하였다면 왕자들 가운데 가장 역할이 컸던 방원이 들 수도 있었을 텐데 이에 빠진 것은 태조가 주도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나도 동조하는 편이다.

 

  

 

생각해 보면 태조의 앞선 선조들도 정치력과 결단력은 비범하였고 태조 또한 그러했는데 왜 유독 그 시대에 왕권이 약했다고 보았던 것일까? 아무리 신하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올랐다 하더라도 결국 태조와 그의 동조자들의 정치적인 기획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에 대한 다소의 오해 같은 것이 일제관학자의 영향이라 하는데... 그것 까지는 글쎄...

 

 

 

이후 왕위는 정종에게 이어졌으나 주지하듯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방원의 연막작전으로 얼떨결에 올라 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종은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방원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잘 먹고 잘 산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기존에 정종에 대한 평가도 허수아비 정도였는데 뭐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현실적인 판단이 빨랐다고 보면 될 듯하다. 방원의 정치력을 보자면. 여하튼 방원은 정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자신의 명분과 정통성이 약했음을 인지하고 왕권강화에 힘썼는데 뭐... 참 잔혹하구나 싶었다. 흔히 썼던 수법이 자신을 상왕으로 물러남을 자주 이야기 했는데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세력(반왕세력)의 반응 떠보고 그를 빌미로 제거하기도 하고... 서로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정치세력등을 다양하게 등용하여 서로 대립, 견제토록 하였다. 조만간 왕위를 이을 것이라 예상된 세자 제에도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그에 대한 무리들도 반왕세력으로 인식하여 제거하기도 한 것을 보면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강했다. 세조도 그런 것처럼 명분과 정통성이 결여된 왕위는 항상 불안정했다는 점이 보여진다. 이후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주면서도 자신의 인사권과 병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을 보면 참... 이 인간 참 지독하구나 싶었다. 그런 탓에 태종이 죽은 세종4년대까지는 실질적으로 왕권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자는 세종을 현택한 것만으로도 최대의 업적이라며 평을 내린다. 나도 동의하는 바다.

 

 

 

상왕인 태종의 죽음이후 국정운영은 의정부와 6조, 대간 등에 핵심기관에서 국사를 상달하게 하고 이를 왕이 이를 재가하여 시행했다. 그리고 의정부와 6조의 중신을 불러 국사를 직접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화하고 의논하여 국정을 운영했는데 이와 같은 운영형태가 세종대의 문화와 정치의 밝음의 원동력이지 않은가 저자는 평가한다. 그리고 세종대의 운영형태를 살펴보면서 의정부서사제를 채택하건, 6조직계제를 채택하건 간에 의정부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6조 직계제에서는 의정부의 역할을 축소되는 면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 중요성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왕권이 강화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종 대를 보자면 알 수 있다. 결국 왕의 자질에 비롯되지 않아 싶다. 이에 대한 이해는 조만간 한충의 교수의 <조선전기 의정부와 정치>를 읽으면서 이해 해보려 한다.

 

 

 

세종 이후 문종이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일찍 죽어버렸다. 세자시절에도 첨사원에서 국정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기에 다루어도 좋을 것 같은데 이 연구서에는 다루지 않았다. 여튼 문종이 죽고 노산군이 즉위하니 단종이다. 어린나이에 즉위하니 국정운영에 주도권을 가지기가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탓에 의정부 대신들의 위세가 강했는데 그를 명분으로 당시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하는 꼴이 동네 양아치 수준에 다름없다고 보인다. 이러한 행적과 언행에도 유교정치를 표방하는 조선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자신의 호적수였던 안평대군도 죽이고, 즉위하고 나서도 다른 동생을 죽였다. 조카인 단종도 죽이고. 다른 책의 평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게 뭐라고 동기간에도 죽고 죽이는 혈전을 벌이는 것인지. 14년간이면 업적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고 하며 저자도 평이 박하다.

 

 

 

이후 예종도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죽었고 어린 자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세종대에 시작한 문물의 정비가 이때 와서 일단락되기는 하였지만 뭐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았다. 조선조 최초의 수렴청정에서부터 폐비 윤씨 사건 등. 성종은 즉위부터 대비의 수렴청정으로 대비와 원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탓에 친정이 시작되면서 부터도 상당한 부담을 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계비 윤씨에 대한 폐비와 사사의 논의에서 상당한 취약함을 드러냈다. 유교 정치에서 강조되는 것이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면 제가를 못한 국왕이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느냐는 의문도 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한 논의 자체가 성종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고 그도 제가를 못했던 자신의 잘못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기도 하다. 더욱 별로인 것은 그에 대한 윤씨에 대한 잘못된 점을 늘어놓으며 구구절절 변명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성종대 이르러서는 언론활동이 활발해져 갔다. 목숨을 걸고 간쟁하기는 했지만 태종, 세조대의 위험만큼은 아니었나 싶다 성종대의 언론활동에 대해서는 김범의 <사화와 반정의 시대>를 다시 읽어보며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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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신정을 뒹굴뒹굴하면서 보냈네요.  주변 사람들에게 새해소감을 물으니 다들 그냥저냥하네요...  왜 새해가 있고 한건지 하는 소리도 하고...  이제 주변 또래들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조금 삶에 지쳐가기 시작하는 나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얼마전에 알쓸신잡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서  한 건축학 교수가 한해를 구분 짓는 이유를 대나무를 들어 이야기 했는데요.  대나무가 빈 공간이 있는데도 무리 없이 잘 성장하는 것은 중간에 매듭(이라고 해야 하나요...  여튼 구분 지어 지는 부분)을 짓기 때문으로  아마 한 해를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냐는 의견을 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에 일정 부합되는지는 모르겠어도 인상깊게 들었어요.  그 탓에 저도 지난 해를 반성하자면  너무 나태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네요.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건강관리도 제대로 못해서 몇번 아파 직장에 병가를 연속으로 낸 적이 2번 있었고요.   이제는 큰 계획을 세워봤자  의지박약이 저는 반의 반도 지키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작은 범위의 몇가지 목표만을 세우려고 합니다.

 

  일단 당장에 격렬한 운동은 어렵기 때문에 퇴근 후에 가볍게 산보정도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몸에 습관을 들여야죠. 그 다음에 어찌할지는 그때 정하고...  그리고 독서말고 사람을 조금이나마 더 접촉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한번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직장이 유일하게 사람을 접하는 곳이다 보니 너무 우물한 개구리 처럼 지내는가 싶기도 하고요.   독서량도 오래만에 100권을 목표로 하고,  안 읽는 책은 조금씩 버리는 것이 목표 입니다. 강박증 환자 마냥 책을 너무 모아서 원룸에 간신히 잘 공간만 있는 탓에요.  이건 좀 힘들 것 같긴 하지만...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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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5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넷님 무진년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가넷 2018-01-06 11:57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arine 2018-01-0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넷님 올해는 건강하시고 건승하세요~~
전 나이가 40을 넘어가니 인생에 별다른 계획이 없고 오직 독서계획만이 의지가 생기네요

가넷 2018-01-06 11:59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ㅋ marine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저도 올해는 건강도 좀 잘 챙기고 다시 책도 좀 많이 읽어보려 합니다 ^^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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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내용을 말하는 것 뿐 아니라 그런 책을 탐독하고 애정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일화도 좋아한다. 아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비슷한 성향이 아닐까 싶은데(물론 실용적인 이유에서 크게 좋아하지 않는 분도 보았지만.)  이 책도 그런 기대에 어느정도 부응하는 책이다.  다만 이 책에 평을 남긴 다른 알라디너 분의 이야기 처럼  나도 정민 교수의 이런 류(연구하다가 곁가지로 나온 책)의 책이 좀 지겨워서  정색하고 집필한 연구서나 교양서가 아니면 읽지 않을 것 같다.

 

 

 책 중 제일 재미있었던 것이 맥망에 대한 이야기 였다.  책벌레가  책 속의 글자 중 신선이란 단어를 세번 먹으면 된다고 하는 것인데, 그 맥망을 밤중에 하늘의 별에 비추면 별이 내려와 환단약을 구할 수 있게 되고 이 약을 물에 타서 먹으면 환골달태하여 그 자리에서 하늘을 오른다고 하였다.   <유양잡조>라는 책에서 나오는 고사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는 책벌레도 먼지다듬이를 이야기 하는 건지 모르겠다.  먼지다듬이가 책을 직접 갉아 먹기도 하나?   또  저자가 옌칭연구소에 방문교수(맞나>) 자격으로 가서 한창 도서관에서 고서를 뒤적일때 보았던 은행잎을 본 이야기도 짤막하게 들어 있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몇번 책벌레를 예방한다고 넣었두었던 게 기억나서 뒤적여 보니 아직 있다.  고등학생때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밤색으로 변해 버린 은행잎을 보니 문득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나갔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꼼꼼하게 읽는 기분은 베껴쓰기라는 걸 다시 확인한다.  다산도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것도 하나가 그것이고 그의 제자들이면 베껴쓴 책들이 총서라고 하여 몇개나 있었다고. 그리고 베껴쓰기를 위한 책을 선정하는 것부터 공부라고 한다.  1년전부터 한번 시도 해보려고 했었는데 나의 나태함은 너무 큰 듯 하다. 난 간서 수준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첫 장부터 나오는  한중일 사람들의 장서인에 대한 태도도 재미있게 읽었다.  뭐 어차피 결론을 생각하면 책이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장서인을 찍지 않는게 좋을 것 같지만 욕심이란게 그런가.  중국 사람들은 보통 이전 주인의 장서인을 둔 채로 옆에 자신의 장서인을 찍었고, 일본인은  이전 주인의 장서인 위에 소消라고 찍어 놓고 옆에 자신의 장서인을 찍었다고.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예 절취하는 방식으로 없애 버렸다고.  뭐 이걸로 중국 사람은 어떻고 일본 사람은 어떻고 한국 사람들을 어떻다... 라고 하는 것도 우습긴 하겠다.  하지만 대충 어떤  나라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특히 일본인의 장서인을 찍는 모습을 보면 좀 냉정하고 사람다운 맛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람들 처럼 절취하는 모양새도 아니지만.  그런 것 좀...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저서를 동료교수께  '존경을 담아'라는 헌사를 담아 드린 적이 있다고 하는데  마침 그 교수가 퇴직하면서 무신경하게  화장실 앞에 버려두고 간 것을 보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 교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가 되었지만 썩 감정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중고도서를 많이 구입하는 건 아니지만 구한 도서 중에 저자의 서명이 있는 책이 있었는데 <백제정치사연구>였고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이라는 책이었다. 그런데 느낌 상으로는 <백제정치사연구>는  출간된 연도도 오래되었고,  허름한 채이라  짐작으로는 그 책의 주인이 세상을 등지고 나서 그 유족되는 이들이 정리하다가 무신경하게 내다 판 것이 아닌 짐작이고,  후자인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는  받았던 이가 직접 정리하면서 팔은 것 같다.  책장을 여니 신간도서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빽빽했다. 그런데 정리하면서 그 부분은 좀 잘라버리기라도 하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헌사하면서 그 대상의 이름도 적혀져 있어 정말 무신경했다는 점도 느낀다.   정민 교수도 공간 정리의 필요 때문에 이런 책들이 처지 곤란일때가 있어  자신은 아예 서명을 할때  길쭉하게 된 종이를 들어 거기게 서명을 하고 책 위쪽에 살짝 붙여 준다고.  센스 있는 부분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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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8-01-0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글씨를 못 써서 손으로 쓰는 게 좀 그래요.
대신 키보드로 써서 옮기고 나중에 한 번씩 읽어 보면 좋더라구요.

가넷 2018-01-10 20:54   좋아요 0 | URL
전 몇번 시도는 해보았는데 별 소득이 없더라구요. 나중에 한번 더 시도해보려고 해요. ~
 
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한국학연구총서 95
한성주 지음 / 경인문화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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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은 고대에는 숙신과 읍루로, 남북조시대에는 물길로, 수당시대에는 말갈로 불리운 바가 있다 한다. 뭐 이렇게 단순히 명칭의 변경만 있는게 맞느냐는 의문이 들기도 하나 여기 이 책의 관심사도 아니고 나의 관심사도 아니므로 패스.

여튼 여진은 고려시대 즈음 해서는 통일된 세력을 이루어 금을 건국하기도 했다. 멸망 이후에는 원나라의 제어를 받아 이동도 여의치 않았던 모양인데, 이후 원명교체기때 그 기회로 지금은 요동과 두만강 일대에 내려 왔다고 하는데 본서에서 연구하는 대상이 이 지역의 여진인들과 조선과의 관계이다.

이 여진인들에 대한 수직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서 최초의 여진인에 대한 수직은 당연하게도 태조대에 있었다. 태조의 세력 기반 자체가 여진인들이기도 하였고, 고려말 인기스타가 될 수 있었던 여러 전쟁에서 같이 종군하기도 하였으므로. 여튼 태조 이후부터 수여진인에 대한 수직이 시작되어 세종대에서 많은 정비를 이루었다 한다. 여진인들에게 관직을 내려준 건 조선의 변경에서 침입과 소란을 미연에 방지하게 위함이며, 그들이 이렇게 조선의 관직 받기기를 원한건 다분히 경제적이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족 내부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함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진에게 영향력을 행사 하려고 한건 조선뿐만이 아닌 명도 마찬가지였다.
영락제가 즉위 한후 여진인에 대한 초무를 시작한 것이 그 일례다. 두 군데 방향으로 이루어 졌다 하는데 흑룡강 일대와 압록강 두만강 일대의 여진인들이었다.

흑룡강 일대의 여진세력으로는 몽골 세력을 견제 하고, 압록강 두만강 일대 여진인들로는 조선을 견제 하려 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 탓인지 상당히 명과의 외교적 마찰을 겪는데, 일단 차치하고 드는 생각이 조선중후기와 조산 내부의 대응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조심은 하는데 명이 조선에 대한 힐책에 겉으로는 순응하는 듯 하면서도 조선의 입장에서 위신을 갖추고 이익이 될수 있는 방향을 잡아 가려고 한 점이 그것이다. 개인의 입장에서야 원칙을 고수 하는 것이 크게 장점으로 적용 될 수도 있겠으나 나라의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그러면 안된다. 후에는 명에 대한 사대 강화라는 경직성이 너무 큰 화를 불러 온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지만 대북관계 에서도마찬가지다. 우리가 단독으로 북한을 응징할 수 있는 무력이 확실히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가능하다고 하도 무력행사는 바람직 하지도 않고.

유연함이 어느정도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바가 되니 너무 하나의 원칙만 이야기 하는 건 외교무대에는 오히려 독이 되는 건 아닐까 싶다. 본 책을 읽고 여기까지 가는 건 우습지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여하튼 여진의 문제로 큰 외교적 마찰이 있었던 것은 세조대에 건주위에 있던 이만주의 아들과 동창을 아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녹봉까지 주었던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명 자신의 관직을 가진 자들에게 왜 관직을 부여하는 것이다. 명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서는 서로의 번국간의 교통을 금하는데 하물며 관직을 주는 것이라면 문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진인에 대한 이중 수직(조선과 명의 관직을 받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상에 따라 달랐다. 세종대에도 두만강 일대의 안정을 위하여 수직 한바 있었는데 그때는 문제를 삼지 않은 것이 그 예다. 결국 자신들의 세력권(?)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 행위가 자극을 준 듯 하다. 명도 건국초기라 이런식의 괴롭힘이 잦아는데 철령위 반환(?)요구라던가 표전문제로 정도전을 부르라 기싸움을 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게 조선은 여진인에 대한 수직정책을 통하여 회유하고 말 안들으면 한대 패주면서 말듣게 하는 등 강온양면을 통해서 훌륭한 국가의 울타리로 만들어 제어 하였고, 그런 번리도 발전을 거듭하여 중기에는 번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이것도 임진전쟁 이후로는 관리가 안되기 시작하고 누르하치 같은 추장에게 번호를 뺏겨 버리다 광해군때에는 그 영향력을 완전 상실 해버리고 말았다. 조선의 여진인수직정책은 국가의 울타리로 만들어 국경의 방어를 튼튼하게 하는 등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일종의 분열책(얄타이,올량합과 올적합간의 반목을 이용한 모련위 정벌 등)도 겸했는데 임진,정유년의 전쟁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탓에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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