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수직여진인 연구 경인한국학연구총서 95
한성주 지음 / 경인문화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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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은 고대에는 숙신과 읍루로, 남북조시대에는 물길로, 수당시대에는 말갈로 불리운 바가 있다 한다. 뭐 이렇게 단순히 명칭의 변경만 있는게 맞느냐는 의문이 들기도 하나 여기 이 책의 관심사도 아니고 나의 관심사도 아니므로 패스.

여튼 여진은 고려시대 즈음 해서는 통일된 세력을 이루어 금을 건국하기도 했다. 멸망 이후에는 원나라의 제어를 받아 이동도 여의치 않았던 모양인데, 이후 원명교체기때 그 기회로 지금은 요동과 두만강 일대에 내려 왔다고 하는데 본서에서 연구하는 대상이 이 지역의 여진인들과 조선과의 관계이다.

이 여진인들에 대한 수직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에서 최초의 여진인에 대한 수직은 당연하게도 태조대에 있었다. 태조의 세력 기반 자체가 여진인들이기도 하였고, 고려말 인기스타가 될 수 있었던 여러 전쟁에서 같이 종군하기도 하였으므로. 여튼 태조 이후부터 수여진인에 대한 수직이 시작되어 세종대에서 많은 정비를 이루었다 한다. 여진인들에게 관직을 내려준 건 조선의 변경에서 침입과 소란을 미연에 방지하게 위함이며, 그들이 이렇게 조선의 관직 받기기를 원한건 다분히 경제적이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족 내부에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함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진에게 영향력을 행사 하려고 한건 조선뿐만이 아닌 명도 마찬가지였다.
영락제가 즉위 한후 여진인에 대한 초무를 시작한 것이 그 일례다. 두 군데 방향으로 이루어 졌다 하는데 흑룡강 일대와 압록강 두만강 일대의 여진인들이었다.

흑룡강 일대의 여진세력으로는 몽골 세력을 견제 하고, 압록강 두만강 일대 여진인들로는 조선을 견제 하려 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 탓인지 상당히 명과의 외교적 마찰을 겪는데, 일단 차치하고 드는 생각이 조선중후기와 조산 내부의 대응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조심은 하는데 명이 조선에 대한 힐책에 겉으로는 순응하는 듯 하면서도 조선의 입장에서 위신을 갖추고 이익이 될수 있는 방향을 잡아 가려고 한 점이 그것이다. 개인의 입장에서야 원칙을 고수 하는 것이 크게 장점으로 적용 될 수도 있겠으나 나라의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그러면 안된다. 후에는 명에 대한 사대 강화라는 경직성이 너무 큰 화를 불러 온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지만 대북관계 에서도마찬가지다. 우리가 단독으로 북한을 응징할 수 있는 무력이 확실히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가능하다고 하도 무력행사는 바람직 하지도 않고.

유연함이 어느정도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바가 되니 너무 하나의 원칙만 이야기 하는 건 외교무대에는 오히려 독이 되는 건 아닐까 싶다. 본 책을 읽고 여기까지 가는 건 우습지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여하튼 여진의 문제로 큰 외교적 마찰이 있었던 것은 세조대에 건주위에 있던 이만주의 아들과 동창을 아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녹봉까지 주었던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명 자신의 관직을 가진 자들에게 왜 관직을 부여하는 것이다. 명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서는 서로의 번국간의 교통을 금하는데 하물며 관직을 주는 것이라면 문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진인에 대한 이중 수직(조선과 명의 관직을 받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상에 따라 달랐다. 세종대에도 두만강 일대의 안정을 위하여 수직 한바 있었는데 그때는 문제를 삼지 않은 것이 그 예다. 결국 자신들의 세력권(?)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 행위가 자극을 준 듯 하다. 명도 건국초기라 이런식의 괴롭힘이 잦아는데 철령위 반환(?)요구라던가 표전문제로 정도전을 부르라 기싸움을 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게 조선은 여진인에 대한 수직정책을 통하여 회유하고 말 안들으면 한대 패주면서 말듣게 하는 등 강온양면을 통해서 훌륭한 국가의 울타리로 만들어 제어 하였고, 그런 번리도 발전을 거듭하여 중기에는 번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이것도 임진전쟁 이후로는 관리가 안되기 시작하고 누르하치 같은 추장에게 번호를 뺏겨 버리다 광해군때에는 그 영향력을 완전 상실 해버리고 말았다. 조선의 여진인수직정책은 국가의 울타리로 만들어 국경의 방어를 튼튼하게 하는 등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일종의 분열책(얄타이,올량합과 올적합간의 반목을 이용한 모련위 정벌 등)도 겸했는데 임진,정유년의 전쟁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탓에 그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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