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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ㅣ 제안들 15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지음, 장진영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3월
평점 :
원래 이름은 샤를-마리-조르주 위스망스(Charles-Marie-Georges Huysmans). 어릴 때는 당연히 이 이름으로 살다가, 나이가 좀 들자, 자신의 부계 쪽이 네덜란드 화가 집안에서 흘러들어온 지라 프랑스 식 이름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이름을 조리스-카를(Joris-Karl)이라고 바꾸어 사용했다. 1848년생으로 프랑스 자연주의의 위대한 작가 에밀 졸라보다 여덟 살 적은 나이인데, 사람이 진득하고 중뿔나게 나서지도 않고 그저 무난해 하급공무원으로 평생을 보내면서 소설도 쓰고, 미술평론도 하고 그랬단다. 젊은 시절엔 에밀 졸라에 경도하여 자신도 자연주의 소설을 써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시절은 벨에포크 시대. 과학은 날로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발전하고, 혁명의 기운과 관계없이 부르주아들은 본격적인 좋은 시절을 맞아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을 착취해가며 온갖 영광을 누리는 와중에 세기말을 맞이한 위스망스. 그가 보기엔 자연주의가 점점 따분해지는 거였다. 그리하여 세기말주의, 예술지상주의, 심미주의로 치달아 쓰게 된 책이 <거꾸로>. 그 유명한, 온갖 보석으로 등껍질을 치장한 거북이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1884년 작품인 <거꾸로>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59번으로 판매를 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그리 열광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는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 위에서 말한 세기말, 예술지상, 심미주의 같은 계열의 작품들, 퉁 쳐서 데카당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독자와의 합이다. 작품-독자의 합이 좋으면 장땡이고, 맞지 않으면 망통. 중간이 없다. 짐작하건데 <거꾸로>의 별점을 어중간하게 준 독자들은 혹시 위스망스의 이름에 눌린 건 아닐까 싶다.
작품을 발표한지 14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현대인이 읽기에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거꾸로>를 쓴 위스망스는, 사실 읽기 만만하지 않는 게 작품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독자가 받는 느낌이 생소해서 그런 건데, 당시엔 당연히 획기적인 소설이었을 <거꾸로>, 즉 데카당스 문학을 맹목적인 부류의 문학 장르라고 규정하면서 “플롯, 묘사, 인물까지 거부하며 영적인 대화랍시고 전보문 같은 헛소리를 나열”한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더 진보된 작품을 구상한다. 이런 진보(라고 주장하는 과정)를 거쳐 7년 후에 발표한 작품이 바로 <저 아래: La Bas>.
La Bas를 우리나라에선 <피안> 또는 <저승에서>로 번역을 해왔으나 절판, 이번에 그동안 말로만 듣던 이 책을 워크룸프레스에서 <저 아래>라는 이름으로 발간했으니 눈이 확 띄어 단박에 골랐다. 내 취향엔 <거꾸로>가 아주 잘 맞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예술지상과 데카당스다운 엽기발랄에서 한 발 더 나갔다. 티포주 성에서 남녀 어린이들을 강간한 후 목 졸라 죽이고 온갖 방법으로 시신을 훼손해 나중에 “푸른 수염”의 원형이 된 ‘질 드 레’ 원수(또는 장군, 성주). 그의 일생을 소설로 쓰고 있는 ‘뒤르탈’을 주인공으로 한, 나 같은 비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들과 생각을 같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신성모독의 방법과 전통을 담고 있다.
뒤르탈 역시 그동안 간통, 사랑, 야망 등 당시 현대소설의 매혹적인 주제를 즐기다가 문득 자각을 했는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백년전쟁 당시 샤를 7세의 명령에 의하여 잔 다르크의 뒤를 받쳐 프랑스에 헌신을 하다가 한 순간에 휙 눈이 돌아 악마숭배와 흑마법의 세례로 뛰어든 질 드 레를 선택한 것이, 자연주의를 포기하고 세기말로 선회한 위스망스와 조금은 비슷하게 보인다. 백년전쟁까지는 중세로 봐야 마땅할 터. 뒤르탈과 그의 저술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의사 친구 ‘데 제르미’는 레 원수의 행적을 따라가다 자연스레 온갖 흑마법과 악마숭배의 전통, 더 나가서 연금술과 이 모든 것들이 19세기 말의 프랑스에서 여전히 구현되고 있는 현장까지를 추적한다.
작품의 초기에 사십대에 이른 뒤르탈이 전에 독일의 카셀 박물관에서 본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그린 예수수난그림을 회상하는 여섯 쪽에 이르는 대단한 묘사가 나온다. 여태까지 본 십자가에 매달려 오른쪽 가슴에 창에 찔려 늘어진 고귀한 모습의 예수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 벌어진 상처와 상처의 색깔과 몸에서 분비되는 장액,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경직 현상이 나타나는 근육 등.
그러나 신성모독이란 주제로 보면 뒤르탈과 비교가 안 될 고수는 병약한 노르웨이인과 까다로운 영국인의 피가 흐르는 파리 의과대학 박사, 데 제르미. 첫 장면부터 뒤르탈과 문학적인 관심사에 대해 격렬하고도 유익한 토론을 벌일 정도로 문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보다 확실하게 작품을 평가하는 안목을 지니기도 했지만 중세 문화에 경도되어 있으며, 중세 이후로 지하로 잠적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악마주의, 흑마법, 연금술 등에 광범위한 지식과, 현존하는 관계 인물들을 알고 있다. 제르미 박사는 뒤르탈에게 미셸 신부와 더불어 파리에 단 두 명 있는 종지기 가운데 한 명인 카렉스와, 점성학자 제뱅제를 소개한다.
이렇게 모인 네 명의 특별한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카렉스의 종탑에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곁들여 나누는 대화를 통해 갖은 방법의 흑마법과 특히 악마주의의 핵심인 몽마夢魔와 몽정마녀를 이야기한다. 여기에 병렬로 뒤르탈의 작품 속 질 드 레 원수의 생애가 보태진다.
데 제르미가 말하는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의 악마숭배의 전통을 한 번 보자.
16세기에는 카틀린 드 메디시스와 발루아 왕가 사이의 악마와의 계약이 유명했고, 17세기 들어서는 우르술라 수녀회 수녀원에서 더욱 은폐된 환경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는데 최고 전문가는 사제 기부르로 벌거벗은 여자의 배 위에서 미사를 집전했다고 한다. 이 미사엔 수많은 여성들이 기원발복을 위하여 참석하였으며 루이 14세 치하에서는 아주 흔했단다. 18세기엔 뒤레 참사원이 마법에 몰두해 강령술로 악마를 소환하다 적발되어 1718년에 마법사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고, 베카렐라 사제는 남성과 여성을 강간하고 교미촉진제를 개발해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어 1708년에 7년간 갤리선의 노 젓는 노예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19세기에 들어서 1843년에 잡지 <라 셉텐의 목소리>에 한 악마단체가 25년 동안 악마의식을 통해 3,320명을 살해했다고 보도했는데, 살인과 관련된 모든 가학적인 광기를 엑소시즘이라는 고대의 경건한 외투로 가리고 있단다. 19세기, 그러니까 당시 현대에 강신 미사가 집전되는 것으로 파리, 로마, 브뤼헤, 콘스탄티노플, 낭트, 리옹, 아일랜드로 모두 가톨릭이 성한 곳이다. 왜냐하면 강신 자체가 신화神化, 즉 성체를 다룰 줄 아는 사제에 의하여 행해져야 했기 때문이란다.
이 외에, 잔 다르크 사후에 티포주 성에 틀어박힌 질 드 레 원수의 사치스러운 행동을 기술한 것도 매우 흥미롭다. 전쟁이 끝나자 원수에게서는 완고하고 난폭한 군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열성적인 예술적 세련미로 삼오한 문학, 악마를 부르는 예술에 관한 눈물 저술에 힘써, 수많은 장서에 직접 칠보로 그림을 그리고 화가를 고용해 장식글자와 세밀화로 꾸미고, 수소문해서 간신히 찾은 전문가가 금세공된 장정본 표지에 상감을 새겨 넣는 등 온갖 사치를 하느라 거의 무한대였던 재산을 다 탕진하게 된다. 이 모습을 위스망스는 “15세기의 데제생트”라고 말하는데, 데제생트가 누구냐 하면, 7년 전의 자기 작품 <거꾸로>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질 드 레 원수의 파산이 가까이 오자 그는 소생할 방법으로 연금술에 몰두했고 서서히 빙의망상에 빠져버린다. 그리하여 과격한 악마숭배자, 잔혹한 학살자로 변해버리는 것. 이어서 그의 악행이 소개되는데, 레 원수의 악행에 비하면 사드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그저 소심한 부르주아이자 보잘 것 없는 몽상가에 불과할 정도다.
이 독후감을 읽는 분께, 나는 이 책 <저 아래>를 선택하기에 앞서 <거꾸로>를 먼저 읽어보시기 권한다. <거꾸로>가 위스망스의 대표작이고, 분량도 약간 적고, 가격도 얼마 아니지만 저렴하니 우선 읽어보시고, 위스망스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판단한 연후에, 호기심이 돋는다면 <저 아래>를 구입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단지 내 의견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당신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