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가 보고 싶어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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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월에 정세랑의 <이만큼 가까이>를 읽고, 나는
  “문학에, 소설판에도 그런 게 있다면 <호밀밭의 파수꾼>, <노르웨이의 숲>과 계급장 떼고 한 판 붙여보고 싶은 <이만큼 가까이>다.”
  라고 메모한 적이 있다. 파주 근방을 무대로, 더 이상 젊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쓸쓸하며 따뜻했고, 멀고도 가까웠으며, 낡아 누추하면서 찬란했고, 그립지만 결코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장소를 깔끔하고 담백하게 묘사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이후 정세랑의 작품들이 연쇄적으로 출간되는 걸 알면서도 어찌하다 보니, 제을러서 언뜻 선택을 하지 않았었다.
  이제 <덧니가 보고 싶어>를 읽었다. 여백이 많은 편집으로 220쪽의 짧은 소설. 다 읽으려면 반나절하고 조금 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당연히 전에 읽었던 <이만큼 가까이>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었고, 읽는 과정에 크게 실망했고, 다 읽고는 완전히 실망했으며, 이 책은 절대 책꽂이에 꽂히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정세랑이 쓴 책은 딱 한 권만 더 읽어보고 또 읽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사무실 내 앞자리에 지난주에 결혼한 스물여섯 살 덧니 난 직원이 있어서 보라고 줘버렸다.
  이게 사랑 이야기라고? 나는 아무리 좋게 봐도 죽도 밥도 아니던데. 오히려 장르 소설로 보는 게 맞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장르 소설이라기보다 한 발만 그쪽에 올려놓고 짝다리 짚은 형국이다.
  정세랑의 언어유희 하나만 건지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시라. 사서 읽으시라.

 

 

* 서사가 없다. 그래도 문장이 날아다닌다. 문장이라도 보고, 옛 정을 기억해서 별 하나, 아나, 여깄다, 더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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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9-16 08: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문장도 날지만 발차기도 날고 그래서 제겐 경쾌하고 귀여웠….습니다. ^^ 보건교사 안은영과 닿아있는 기분이었고요. (제가 좀 젊은 건가봐요? ….)

Falstaff 2021-09-16 08:18   좋아요 3 | URL
ㅎㅎㅎ 독자마다 감상이 달라야지 똑같으면 재미 없잖아요. 그게 재미죠 뭐. ^^

수이 2021-09-16 08: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세랑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거 같아요. 사랑 소설이라고 해서 저도 별 하나만 주고 아 잼없어 이랬다가 친구가 별 다섯 주는 거 보고 깜놀했고 또다른 정세랑 소설은 읽고 오 좋아 이러면서 별 다섯개 주고_ 왔다갔다 이 템포가 너무 극과 극인지라 쭉 읽는데는 좀 무리가 가더라구요. 그리고 별표 하셨으니_ 저는 서사 없는 소설(?), 이야기 흐름도 좋아하는데 표지 사진 보니 읽고싶지 않아졌어요 소심

Falstaff 2021-09-16 09:13   좋아요 2 | URL
저는 이제 두 권 읽어서 정세랑에 대해 뭐라 하기는 좀 그렇고요, 하여튼 이 책은 꼽표였습니다. 아우....
서사가 없으면 의식이라도 흘러다녀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내용은 감각적이었다가 끝내 엽기를 향해 치닫고, 도대체 이게 뭔지 잘 모르겠더랍니다.
제가 책 읽는 내공이 부족해서 그렇겠지만요. ^^
표지 그림이야 뭐.... 좀 남사스럽긴 합니다. 전철에서 내놓고 읽기엔 좀. -_-;;

수이 2021-09-16 09:24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이 내공이 부족하시면 ㅋㅋㅋㅋㅋㅋ 저 굴 파고 머리만 박고 있어야겠네요. 위에 유부만두 언니는 좋게 보셨다고 하니 호기심도 살짝 생기고

유부만두 2021-09-16 09:39   좋아요 1 | URL
제 취향은 천방지축입니다! 하하하

청아 2021-09-16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와 제목은 신박한데 안타깝네요. 덧니난 직원에게 주셨다는 대목에서 빵ㅋㅋㅋㅋ <이만큼 가까이>보니 판매순위는 많이 밀려 있는데 샐린저와 맞짱수준이라니 궁금해서 찜합니다~🤭

새파랑 2021-09-16 09:58   좋아요 2 | URL
저도 폴스타프님이 극찬하시니 읽어봐야겠어요 ^^

Falstaff 2021-09-16 10:07   좋아요 3 | URL
앗, 조심하세요!
<이만큼 가까이> 감상평이 극과 극입니다. 반면에 책 읽고 독후감 쓰기 시작한지 겨우 한 달 정도밖에 안 될 시점이라 과장이 심했을 지도 모릅니다. ㅎㅎㅎㅎ

잠자냥 2021-09-16 10: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하필이면 그 직원은 왜 덧니가 나가지구....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9-16 10:26   좋아요 5 | URL
문제가 표지였습니다.
너 가져. 이랬는데, 직원 얼굴이, 책 표지 보더니 저 새끼가 성희롱 하는 거 아냐, 뭐 이런 기색이 팍, 나는 거예요. 떱떠름해 하는 게.
아 참. 세상 왜 이리 어려워요?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09-16 10:4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표지 어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9-16 11:13   좋아요 3 | URL
아 ㅠㅠ 덧니ㅠ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빵집에서 곰보빵 열개만 달라고 하고 주인을 보니 주인 얼굴이 곰보였다는 ㅠㅠ 너무 미안해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돌아가신 아빠가 해주신 얘기가 생각나네요.

공쟝쟝 2021-09-16 11:21   좋아요 1 | URL
아..... 표지...... 폴스타프... 직원에게...............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9-16 11: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이런 표지에 약하신듯 하네요. 캣퍼슨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ㅋㅋㅋ

Falstaff 2021-09-16 11:27   좋아요 3 | URL
이런 표지에 약하지 않아요! ㅋㅋㅋㅋ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덧니 난 여직원한테 너나 읽어라, 하고 줬지요.
덧니 직원이 눈을 내리 깔고 책 표지를 힐끗 보더니 저를 다시 올려다 보는데, 그 눈길이 꼭 째리는 거 같았다니까요. ㅠㅠ

초딩 2021-09-16 1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음 남자 두명인줄 알았습니다. 표지가
전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인가 앞 부분 좀 듣다 치웠습니다 ㅎㅎㅎ 리스트 추가하고요 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Falstaff 2021-09-16 12:10   좋아요 3 | URL
표지가 남자 두 명으로 생각하셨다고요?
음하하하하..... 굿 아이디어입니다!! ^^

잠자냥 2021-09-16 14: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트위터 보다 보니까, 어제(9월 15일) 정세랑 작가 생일이었답니다. ㅋㅋㅋㅋ 이 리뷰 어제 안 올리신 거 왠지 다행(?) ㅋㅋㅋ

Falstaff 2021-09-16 14:45   좋아요 2 | URL
아, 그랬습니까?
아이고, 하마터면 천하에 재수없는 인간이 될 뻔했습니다. ㅋㅋㅋㅋㅋ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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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욱. 이이가 68년생 잔나비 띠라서 그런지 재주가 많은 모양이다. 고려대 노어노문학으로 학사, 석사, 박사를 한 건 뭐 그렇다고 해도, 스물여섯 살에 현대문학에 시인 추천 완료하고, 11년 후인 서른일곱 살엔 문학수첩 작가상으로 소설가 데뷔를 한다. 요즘에 별로 작업을 하지는 않지만 비평까지 곁들였다고 하니 시인, 소설가, 평론가, 이렇게 삼관왕에 빛나는 문재를 휘날리고 있다. 박사학위를 소지했고, 시인이자 소설가에다 평론가이기까지 하니 주로 교육계에 몸담으면서 창작행위를 하고 있어서, 조선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현재는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에서 문예창작 교수를 하고 있다. 시를 가르치는지, 소설을 가르치는지는 내가 그 학교를 다녀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암만해도 교수라는 직업이 긴 방학 등등 창작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편한 모양이다. 유대계 소련 의사 레오니드 치프킨이 쓴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번역했고, 창비, 문지, 민음사 등에서 시집을 내고, 장편소설과 소설집 여러 권, 평론집 등을 거의 매년 출간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그렇다. 진짜로 한가한 직업이라는 말은 아니다. 언짢아도 고소하지 마시라.
  작가의 이런 스타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야 그의 작품집 한 권을 읽었다.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표제작을 포함해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2019년에 출간을 했으니 이장욱의 나이 쉰두 살 때다. 작가를 굳이 586세대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하여튼 소위 86세대 이후 등장하는 작가들이 쓴 “요즘 소설”하고는 조금 다른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특별히 한 시절을 규정할 단어를 찾지 못해 그냥 펀한 대로 쓰자면, 덜 까탈스러워 읽기에 편하다. 그러면서도 발랄하다. 심지어 자살 등의 어두운 내용의 음울한 주인공을 소개하는 장면까지도 그러하다. 예컨대 <낙천성 연습>의 초두를 인용하면,

 

  “예전에 자살을 하겠다고 예고 문자를 보내온 위인이 있었다. 자살을 ‘암시’만 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통보’해온 것이다.
  ‘나는 앞으로 삼십 분 후 자살할 예정이다. 잘살길 바란다.’
  이게 전부였다. 그 문자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 미친 새끼.
  하마터면 나까지도 그렇게 외칠 뻔했으니, 말 다했다.”

 

  이렇게 시작해서 문자를 보냈던 위인이 저지른 네 번의 자살미수 사건을 소개한다. 자살미수라는 것을, 자살을 시도해보지 않은 인간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자살을 결심하기 전까지의 갈등에 관해서는 공감하지 않은 채, 죽음에까지 이르지 못한 결과만 판단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네 번째로 살아난 뒤에는 아무도 그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위인 앞에서 나는 노골적으로 탄식하며 이렇게 뇌까렸다.
  ─ 아, 쪽팔려.
  병상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 그게…… 애비 앞에서 할 말이냐.”

 

  그러니까 <낙천성 연습>의 화자는 과거에 네 번에 걸친 자살미수를 저질렀던 아버지가 문자를 보내 앞으로 삼십 분 후에 자살할 예정이라고 하자, 그간의 자살미수 소동을 떠올리며 아버지한테 하마터면, “미친 새끼”라고 중얼거릴 뻔했다는 얘기다.
  물론 단편선의 작품들은 발랄하지 않다. 그러나 그동안 수없이 읽어서 이제 나왔다 하면 대강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 가정 내 괴물과 치유 곤란의 상처와는 달리, 가정 내 괴물이라도 지금 하고 있는 얘기가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게 색다르다. 첫 번째 실린 작품이 <행자가 사라졌다!>인데, 제목에서 들먹이고 있는 행자는 아흔 살이 넘어 정신이 혼미한 할머니의 이름인 동시에 볼파이톤 또는 공비단뱀이라고 불리는 파충류, 저 먼 옛날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를 딱 한 입만 베어 먹으라 유혹을 해 다리가 몽땅 사라져 평생 배로 땅 위를 기어 다니는 형벌을 받은 짐승의 후예다. 근데 뱀한테 이름이 있느냐고? 당연하다. 이 뱀은 지금 이태리 아파트 2동 301호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중으로 특기는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아버리는 능력이다.
  이 집, 2동 301호의 가장은 화자 ‘나’가 아빠라고 부르는 인간인데, 386 세대로 대학을 졸업한 후 긴 방황기를 거쳐 재무설계사가 되었다가 외환위기 이후 폭락장을 역이용해 대박을 치면서 업계에 등장했지만 리먼 브라더스 사태 때 폭탄을 맞자 가산을 탕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가산을 탕진했는데 입지전적이라고? 그렇다. 근데 그건 책을 직접 읽어봐야 안다. 아빠는 꼴보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문화인이자 교양인이며,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바그너를 사랑하는데 백남준과 김환기에 대해서도 견해를 피력할 줄 안다. 보기 드문 오페라 마니아로 <라 트라비아타>에서 <마담 버터플라이>까지 오페라의 내용과 공연사를 줄줄이 꿰고 다닌단다. 오페라 마니아답게 내연관계에 있는 여자가 1년마다 바뀌어서 ‘나’는 오페라 마니아이기 때문에 내연녀가 그리도 숱하게 바뀌는 거라고 여기기에 이르렀단다. 손버릇이 더러워 기분이 안 좋을 때 눈에 띄는 모든 가솔들에게 폭력을 감행하고는 했지만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실질적으로 가내 경제의 책임을 엄마가 부담하기 시작한 후로 이 버릇은 없어졌단다.
  뭐 대강 이런 집구석에서 ‘나’가 가장 아끼는 가족 구성원인 볼피아톤 종 뱀 행자가 사라졌으니 ‘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누가 행자를 버렸는지,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고의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누가 행자로 하여금 탈출에 성공하게 만들었는지를 추리하는 일이다. 그렇지? 근데 이 작품이 단편이라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진도를 나가면 분명히 스포일러가 될 것이라 급하게 입을 막고 있겠지만, 하여튼 이장욱, 이이가 “발랄한 우울” 하나는 절묘하게 만들어낸다. 한 권쯤 더 읽어볼까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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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9-14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작가가 저렇게 다양한 이력이 있군요. ‘저는 작가의 이런 스타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 권도 읽은 게 없네요. ㅎㅎㅎㅎ

Falstaff 2021-09-14 09:45   좋아요 1 | URL
시인으로 더 이름이 난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시와 소설을 동시에 잘 쓴 사람은.... 생각나지 않네요.
그리고, 전 시인이 쓴 소설, 소설가가 쓴 시도 잘 읽지 않습니다. 믿고 읽으면 나중에 꼭 똥 밟은 기분이 되거든요.ㅋㅋㅋㅋㅋㅋ (대표선수, 김x환, 듣고 있나!)

다락방 2021-09-14 1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장욱 이름이 귀에 익어 뭔가 읽은 것 같아 검색해보니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을 읽었네요. 그거 한 권 딸랑 읽고는 그를 잊고 사네요. 하핫

Falstaff 2021-09-14 10:05   좋아요 1 | URL
잊히는 작가는 빠짐없이 다 이유가 있습지요. ㅎㅎㅎ 물론 작가 탓입니다!!

황금모자 2021-09-14 1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이장욱쌤은 소설 창작 담당입니다. 그리고 인기 수업입니다ㅋ

Falstaff 2021-09-14 13:56   좋아요 1 | URL
아, 요새 동대 문창과가 특히 소설에서 무지 핫하던데 소설 창작 가르치는군요. ㅎㅎㅎㅎ 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골동품 상점 1 비꽃 세계 고전문학 22
찰스 디킨스 지음, 김옥수 옮김 / 비꽃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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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를 누가 쓴 거야? 뭐 결론이 다 나와버렸잖아! 길면 장땡인줄 아나? 디킨스가 디킨스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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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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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소란. 소란笑蘭. 1981년생이다. 이름을 누가 지었을까. 웃는 난초. 그냥 읽으면 소란. 소란騷亂. 어지럽게 떠드는 장면이 떠오른다. 한자 이름의 뜻으로 해도, 그냥 우리말로 읽어도 이이의 이름을 발음하면 일단 경쾌하다. 서울에서 낳고 경남 마산에서 자라, 요즘 우리나라 문학 창작 분야에서 핫한 동국대 문창과를 졸업했다. 신동엽문학상, 내일의한국작가상을 받은 적 있고, 이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으로 시인 홍사용을 기리는 노작문학상까지 거머쥐었다. 2009년에 등단해 11년 만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시인이라는 뜻이다. 이 정도면 이이의 이력과 출판사 창비의 이름값으로 선택한 것도 이해가 가시겠지 뭐.
  그런데 시집을 선택한 이면에는 시인의 이름, 소란의 발음 속에 이미 깔려있는 경쾌한 즐거움의 공명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숨기지 않겠다. 그동안 통곡의 벽과, 피를 토하는 격정과, 미노타우로스가 숨은 미궁과, 스핑크스의 난수표 등에 하도 질려서 적어도 덜 심각한 시를 읽어보고 싶어, 박소란, 소란한 시집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결과는?
  이 시집이 이이의 두 번째 시집이라고 하는데, 첫 번째 시집 《심장에 가까운》은 시인이 마음먹고 울고 싶어서 썼다고 한다. 그걸 읽어보지 못해서 두 번째인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전혀 모르지만, 이번엔 울음보다는 외로움 또는 외로움을 능가해 홀로 틀어박힌 상태를 자주 볼 수 있다. 세상과 스스로든 타자에 의해서든 하여튼 차단된 지경에서 어떻게 내가 바랐던 ‘덜 심각함’의 끄트머리나마 볼 수 있었겠나. 차단도 급수가 있어서 심지어 차단 속에서 이런 놀이도 하는 와중이니.

 


  끈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있다

 

  짐짓 골똘한 표정으로
  헐거운 매듭을 만지작대며 답을 미룰 수도 있다

 

  나는 지금
  교외로 향하고 있다 버스는 이상하리만큼 굼뜨고
  창밖 도로변에는 꽃들이 빽빽이 심어져 있다 이상하리만큼
  눈이 부셔

 

  슬며시 훔쳐다 감거나 묶을 수도 있다
  괴성을 지르며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은 아닐 수도 있다
  엉클어진 시간을 풀 수도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다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조각을 내어
  아무 바닥에나 던져버릴 수도 있다
  오래 벼린 칼이 있고 마침 칼은 가방 속에 있고

 

  나는 지금
  교외로 향하고 있다 끈과 칼은
  이상하리만큼 닮았고

 

  끊을 수도
  더 잘 끊을 수도 있다

 

  울 수도 웃을 수도 있다 (전문)

 


  시인이 오랜만에 방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교외로 나간다. 그의 핸드백 속엔 끈과 칼이 들어 있다. 끊을 수도 있고, 더 잘 끊을 수도 있는 도구란다. 뭘 끊는다고? 칼로 끈을 끊을 수도 있지만, 헐거운 매듭에 머리통을 집어넣고 (목을)감거나 묶을 수도 있다. 창밖 도로변에 빽빽이 심어놓은 꽃들만 ‘훔쳐다 감거나 묶을 수도 있’는 게 아니다. 이상하리만큼 굼뜬 버스를 타고 교외로 향하면서 목을 맨 채 (축 늘어진 이미 죽어버린 내 몸이, 또는 훔쳐다 묶은 꽃들이)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사랑할 수도 있단다. 물론 이런 식으로 시를 읽은 건 틀림없이 오버다. 나도 안다. 그래도 끈과 칼이 내포하고 있는 건 확실하게 죽음, 말라버림의 이미지다. 내가 시집을 선택할 때 기대했던 경쾌한 즐거움하고는 너무 거리가 있다. 망했다. 그랬겠지?
  시들을 읽어보면 박소란이 하여튼 출퇴근을 하는 임금생활자였던 모양이다. 혼자 사는 살림이 다 그렇듯이 밤에 집에 들어가 밥 지어 먹기도 뭐하고, 제대로 음식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해서 그렇게 드물지 않은 빈도로 하여튼 뭔가를 사서 귀가했을 것이다. 뭔가를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서.

 


  비닐봉지

 


  알 수 없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지

 

  퇴근길에 김밥 한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에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밥을 먹을 때면 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째서
  그것은 죽은 사람의 얼굴인가

 

  쉽게 구멍이 나는

 

  버리면 된다, 이런 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검게 읊조리는

 

  자정이 지난 골목을 혼자 서성이는
  까닭도 없이
  달리는
  내처 나는, 날아보는, 제 더러운 날개를 찢어버리려는 새처럼
  어디로든

 

  언제든
  도무지 썩지 않는 (전문)

 


  시를 읽어보면 전도 현상이 발생했다. 김밥 한 줄을 사서 묵묵하게 길을 걷는 건 시인인데, 입가에 묻은 참기름이며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고 있는 건 검정 비닐봉지다. 다음 연은 시인과 비닐봉지의 합체가 일어나 “밥을 먹을 때면 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그게 하필이면 죽은 사람의 얼굴이란다. 이제부터 검정 비닐봉투는 흔하디흔하고 쉽게 구멍이 나 그냥 버릴 수 있어서 골목에 바람이라도 불면 내처 바람에 쓸려 허공을 나는, 도무지 썩어주지도 않는 무가치성 쓰레기인데, 조금쯤은 시인의 자의식까지 담고 있다. 이러니 시가 건강하기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듯.
  처음에 이 시집의 특징으로 차단을 거론했다. 그러면 차단, 혹은 고립을 다룬 시도 한 번 읽어봐야겠지. 사실 <비닐봉지>도 검은 차단막으로 감싸인 공간으로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예컨대 이런 시.

 


  쓰러진 의자

 


  고아처럼 웅크려 잠이 들었네

 

  얘야,
  무슨 꿈을 꾸었니?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저는 의자가 되었어요

 

  의자로 살다 의자로 죽었어요

 

  저런, 악몽이로구나

 

  무서워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요 자꾸만 죽은 몸을 일으켜 세워요 자꾸만

 

  무슨 꿈을 꾸었니? 물어요

 

  저는 거짓말해요
  아무 꿈도 꾸지 않았어요 (전문)

 


  애초에 시인이 고아처럼 웅크려 잠을 자고난 후, 아무도 얘야, 무슨 꿈을 꾸었느냐고 묻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나는 단정한다. 질문자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다가와서 자꾸만 이미 죽은(잠든) 시인의 몸을 일으켜 세운다. 화자는 사실 아무 꿈도 꾸지 않았지만 자기가 웅크릴 수 있는 의자로 살다가 의자로 죽는다고 거짓말을 해버린다는데, 누구한테? 원고지 또는 노트북 화면한테. 의자 대신 책상, 마룻바닥 등 딱딱한 재질로 된 약간의 공간이 있기만 하면 아무 것이나 상관없을 것이다. 시인에게는 벽마저도,

 

  슬퍼 모로 누웠을 때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벽,
  하나의 벽이 있었다 (<벽> 부분. 이하 같음.)

 

  니까. 시인에게 “벽은 온화하고 벽은 진중하니까 벽은 꼭 벽이니까” (같은 시)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키는 기재로, 시인이 “벽 쪽으로 누워 / 잠을 청했다 불길한 꿈이 찾아들었다 / 벽이 무너져 엉엉 우는 꿈”을 꾸고 “눌라 눈을 떴을 때 / 아침이 왔다 벽은 / 색색의 이지러진 얼굴을 감추며 어디론가 황급히 달아나버리고 // 누가, 그 누가 // 부른 적 없는 사랑이 쳐들어”온단다.
  이래서 그나마 다행이다. 박소란의 시가 비록 소란스럽지는 않더라도 차단과 고독과 죽음의 골짜기에서 저 뒤로 가면 벽이 황급히 달아나, 부르지도 않았는데 사랑이 쳐들어온다니.
  비의와 암호, 파편화 경향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 요즘 시인의 작품들이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읽히지는 않았다. 이게 시의 발전과정이리라 믿는다. 시 스스로 쉽게 읽히고 싶지 않아 하는 경향. 이런 진화 또는 변증의 단계를 통해서 시와 시인과 독자가 발전하는 것이리라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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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13 1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의자는 조금...ㅠ
파편화되어 있는 요즘 시들, 따라가기 힘드네요 ㅎㅎ

Falstaff 2021-09-13 12:41   좋아요 2 | URL
아이고, 동감입니다.
시집 연달아 읽다가 두 손 들고 백기투항 했답니다. 그래 알라디너께서 시 감상 하는 거 따라가다가 괜찮을 듯 싶은 것들로만 골라 조금씩 읽고 있어요. ㅜㅜ

hnine 2021-09-13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팟캐스트에서 박소란 시인의 예전 인터뷰를 듣고 있던 중에 Falstaff님의 이 리뷰를 보게 되었네요. 신기해요 ^^
17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정도로 영향이 컸다고 해요. 그리고 지금도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들때 꿈에서 어머니를 본다고요. 시집의 키워드를 ‘애도‘라고 붙이고 싶다고 하네요. 감정에 파묻혀 써서 시도 그렇게 읽힐까 늘 주의를 한다고 해요.

Falstaff 2021-09-13 14: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팟캐스트 보셨으면 제 감상이 얼마나 아마추어적인지 아시겠습니다.
박소란에게 그런 가정사가 있군요. 아이고, ‘애도‘라니 거 참. 하여튼 시인들은 뭔가 특별한 걸 타고 나는 거 같아요.

초란공 2021-09-13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Falstaff님의 시 읽기(즐기기)를 항상 부러운 마음으로 읽습니다^^

Falstaff 2021-09-13 19:34   좋아요 1 | URL
어머나! 저 시 잘 몰라요. ㅎㅎㅎㅎ
근데도 이렇게 생각해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

초딩 2021-09-14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를 잘 못 읽는데 여기서 읽으니 좋네요 ㅎㅎㅎ
전도 현상 단락 좋네요 :-)

Falstaff 2021-09-14 11:3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근데요, 전도현상이란 것도 제가 읽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그게 딱 전도현상이라 말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ㅋㅋㅋ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저도 시는 정말 모르겠거든요. ^^;;;
 
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 1 대산세계문학총서 114
헨리 필딩 지음, 김일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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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뭐하다가 독후감을 올리지 않았지? 그래 뒤적이다 보니, 아하, 그때가 2015년 12월이었는데, 한 5년만에 독감을 심하게 앓았었구먼 그랴. 이 작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8세기 소설 주인공의 당연한 권리, 탄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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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9-10 12: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K-드라마의 향취가 느껴지는데요? ^^

Falstaff 2021-09-10 12:53   좋아요 3 | URL
K-드라마의 향취가 영국에서 건너온 것이었습니다...는 아니고, 하여튼 ㅋㅋㅋ 향취가 비슷하군요. ^^;;

독서괭 2021-09-10 12: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8세기나 21세기나 출생의 비밀은 빼놓을 수 없ㄴ군요^^

Falstaff 2021-09-10 13:01   좋아요 3 | URL
18세기는 그렇다고 치고, 21세기의 출생비밀은 정말...으, 못 견디겠어요.
하긴 점 하나 찍어서 못 알아보는 것보다는 낫지만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9-10 13:17   좋아요 4 | URL
근데 그 점찍는 드라마 저 넘 웃겨서 좋아합니다.ㅋㅋ

coolcat329 2021-09-10 13: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냥 출생의 비밀이네요!

Falstaff 2021-09-10 13:40   좋아요 4 | URL
아, ‘업둥이‘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말 됩니다. 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9-11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톰 존스. 학교 졸업 후 첨 들어요. 폴스타프님, 공대생이라 하지 않으셨어요?? 영미소설을 저보다 백만배 많이 읽으신듯^^

Falstaff 2021-09-11 08:23   좋아요 0 | URL
아이고 사실 별거 없는디요. -_-;;
이 책은 책 읽다가 작가들이 자주 인용하는 작품이라 읽어본 것 뿐입니다. 재미는 별로 없더라고요. <트리스트럼 섄디>는 지금 읽어도 포스트 모던한데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