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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이장욱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이장욱. 이이가 68년생 잔나비 띠라서 그런지 재주가 많은 모양이다. 고려대 노어노문학으로 학사, 석사, 박사를 한 건 뭐 그렇다고 해도, 스물여섯 살에 현대문학에 시인 추천 완료하고, 11년 후인 서른일곱 살엔 문학수첩 작가상으로 소설가 데뷔를 한다. 요즘에 별로 작업을 하지는 않지만 비평까지 곁들였다고 하니 시인, 소설가, 평론가, 이렇게 삼관왕에 빛나는 문재를 휘날리고 있다. 박사학위를 소지했고, 시인이자 소설가에다 평론가이기까지 하니 주로 교육계에 몸담으면서 창작행위를 하고 있어서, 조선대 문예창작과를 거쳐 현재는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에서 문예창작 교수를 하고 있다. 시를 가르치는지, 소설을 가르치는지는 내가 그 학교를 다녀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암만해도 교수라는 직업이 긴 방학 등등 창작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편한 모양이다. 유대계 소련 의사 레오니드 치프킨이 쓴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번역했고, 창비, 문지, 민음사 등에서 시집을 내고, 장편소설과 소설집 여러 권, 평론집 등을 거의 매년 출간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그렇다. 진짜로 한가한 직업이라는 말은 아니다. 언짢아도 고소하지 마시라.
작가의 이런 스타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야 그의 작품집 한 권을 읽었다. 《에이프릴 마치의 사랑》. 표제작을 포함해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2019년에 출간을 했으니 이장욱의 나이 쉰두 살 때다. 작가를 굳이 586세대로 구분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하여튼 소위 86세대 이후 등장하는 작가들이 쓴 “요즘 소설”하고는 조금 다른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특별히 한 시절을 규정할 단어를 찾지 못해 그냥 펀한 대로 쓰자면, 덜 까탈스러워 읽기에 편하다. 그러면서도 발랄하다. 심지어 자살 등의 어두운 내용의 음울한 주인공을 소개하는 장면까지도 그러하다. 예컨대 <낙천성 연습>의 초두를 인용하면,
“예전에 자살을 하겠다고 예고 문자를 보내온 위인이 있었다. 자살을 ‘암시’만 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통보’해온 것이다.
‘나는 앞으로 삼십 분 후 자살할 예정이다. 잘살길 바란다.’
이게 전부였다. 그 문자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 미친 새끼.
하마터면 나까지도 그렇게 외칠 뻔했으니, 말 다했다.”
이렇게 시작해서 문자를 보냈던 위인이 저지른 네 번의 자살미수 사건을 소개한다. 자살미수라는 것을, 자살을 시도해보지 않은 인간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자살을 결심하기 전까지의 갈등에 관해서는 공감하지 않은 채, 죽음에까지 이르지 못한 결과만 판단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네 번째로 살아난 뒤에는 아무도 그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위인 앞에서 나는 노골적으로 탄식하며 이렇게 뇌까렸다.
─ 아, 쪽팔려.
병상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 그게…… 애비 앞에서 할 말이냐.”
그러니까 <낙천성 연습>의 화자는 과거에 네 번에 걸친 자살미수를 저질렀던 아버지가 문자를 보내 앞으로 삼십 분 후에 자살할 예정이라고 하자, 그간의 자살미수 소동을 떠올리며 아버지한테 하마터면, “미친 새끼”라고 중얼거릴 뻔했다는 얘기다.
물론 단편선의 작품들은 발랄하지 않다. 그러나 그동안 수없이 읽어서 이제 나왔다 하면 대강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 가정 내 괴물과 치유 곤란의 상처와는 달리, 가정 내 괴물이라도 지금 하고 있는 얘기가 어디로 튈 줄 모르는 게 색다르다. 첫 번째 실린 작품이 <행자가 사라졌다!>인데, 제목에서 들먹이고 있는 행자는 아흔 살이 넘어 정신이 혼미한 할머니의 이름인 동시에 볼파이톤 또는 공비단뱀이라고 불리는 파충류, 저 먼 옛날 이브에게 금단의 열매를 딱 한 입만 베어 먹으라 유혹을 해 다리가 몽땅 사라져 평생 배로 땅 위를 기어 다니는 형벌을 받은 짐승의 후예다. 근데 뱀한테 이름이 있느냐고? 당연하다. 이 뱀은 지금 이태리 아파트 2동 301호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중으로 특기는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아버리는 능력이다.
이 집, 2동 301호의 가장은 화자 ‘나’가 아빠라고 부르는 인간인데, 386 세대로 대학을 졸업한 후 긴 방황기를 거쳐 재무설계사가 되었다가 외환위기 이후 폭락장을 역이용해 대박을 치면서 업계에 등장했지만 리먼 브라더스 사태 때 폭탄을 맞자 가산을 탕진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가산을 탕진했는데 입지전적이라고? 그렇다. 근데 그건 책을 직접 읽어봐야 안다. 아빠는 꼴보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문화인이자 교양인이며,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바그너를 사랑하는데 백남준과 김환기에 대해서도 견해를 피력할 줄 안다. 보기 드문 오페라 마니아로 <라 트라비아타>에서 <마담 버터플라이>까지 오페라의 내용과 공연사를 줄줄이 꿰고 다닌단다. 오페라 마니아답게 내연관계에 있는 여자가 1년마다 바뀌어서 ‘나’는 오페라 마니아이기 때문에 내연녀가 그리도 숱하게 바뀌는 거라고 여기기에 이르렀단다. 손버릇이 더러워 기분이 안 좋을 때 눈에 띄는 모든 가솔들에게 폭력을 감행하고는 했지만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실질적으로 가내 경제의 책임을 엄마가 부담하기 시작한 후로 이 버릇은 없어졌단다.
뭐 대강 이런 집구석에서 ‘나’가 가장 아끼는 가족 구성원인 볼피아톤 종 뱀 행자가 사라졌으니 ‘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누가 행자를 버렸는지,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고의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누가 행자로 하여금 탈출에 성공하게 만들었는지를 추리하는 일이다. 그렇지? 근데 이 작품이 단편이라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더 진도를 나가면 분명히 스포일러가 될 것이라 급하게 입을 막고 있겠지만, 하여튼 이장욱, 이이가 “발랄한 우울” 하나는 절묘하게 만들어낸다. 한 권쯤 더 읽어볼까 생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