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 여인 범우문고 74
패터 한트케 지음, 홍경호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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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지망하는 분은 <왼손잡이 여인>을 읽지 마시라. 당신이 절망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겠는가. 싼 맛에 사서 읽었다가, 세상에 이런 일이, 대박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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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0-08 16: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소설가지망생은 읽지 말라는 리뷰라니. 저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니 왜요, 왜 그러는건데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0-08 19:2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다 아시면서.....

청아 2021-10-08 1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런 유혹이 어디있습니까 저도 찜ㅋㅋㅋㅋ😆👍👍

Falstaff 2021-10-08 19:30   좋아요 1 | URL
아우, 증말 좋더라고요. 전 한 방에 뻑 가버렸습니다!
ㅋㅋㅋㅋ 물론 약 올리는 겁니다. ^^

테레사 2021-10-08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주문대열에 합류하는 중입니다만..ㅋ

Falstaff 2021-10-08 21:21   좋아요 0 | URL
코드만 맞으시면, 저한테 고맙다고 하실 겁니다. ㅋㅋㅋㅋ
이걸 자뻑이라고 한다네요. ^^

행복한책읽기 2021-10-08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휴 낚시밥 지대루 던지시는 폴스타프님. 얄미워요^^

Falstaff 2021-10-09 22:52   좋아요 0 | URL
책값이 싸잖아요. 한 번 속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요, 이 책에 <소망 없는 불행>이 커플링되어 있답니다. 가성비 진짜 갑이예요. ^^

독서괭 2021-10-09 0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세상에 이런 백자평이!! 궁금증 폭발!!

Falstaff 2021-10-09 22:5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오랜만에 제 스타일을 만났습니다!

coolcat329 2021-10-09 0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폴스타프님
아 너무 궁금하네요. 어떤 코드길래 자뻑의 경지로 이끌었을지요.

Falstaff 2021-10-09 22:53   좋아요 0 | URL
아오, 읽어보셔요! 죽입니다.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10-09 1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트케 뛰어난 작가 맞는것 같아요
전 페널티킥... 읽고 소름!

전 이 책 있어요
전자책으로 ! 함께 수록된 <소망없는 불행 >만 읽었는데 좋았어요~^^

Falstaff 2021-10-09 22:54   좋아요 1 | URL
저는 한트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가 이번에 대박을 쳐서, 기쁨이 두 배인 거 같습니다. ㅎㅎㅎ 기분 좋아라..... ^^

파이버 2021-10-09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께서 대박이라고 하시니 저두 보관함 속으로 쏙~!

Falstaff 2021-10-09 22:54   좋아요 1 | URL
훌륭한 선택입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1-10-09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판매지수 확 올라서 범우에서 어리둥절…. ㅋㅋㅋㅋ

Falstaff 2021-10-09 22:55   좋아요 0 | URL
앗, 많이들 사신 모양이지요?
책만 좋으면 영업은 알아서 독자가 한다니까요, 진립니다, 진리. ㅋㅋㅋㅋ
 
다른 목소리, 다른 방 트루먼 커포티 선집 1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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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트루먼 커포티 역시 자신이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인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은 자신의 유소년 시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의 초년 팔자를 한 번 보자.
  1923년이 저물어가던 시절, 아출러스 퍼슨스라는 이름의 어느 세일즈맨이 뉴올리언스에 왔다가 크리스마스 베이비를 만들어, 24년 9월에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트루먼 스트랙퍼스 퍼슨스라는 이름이었는데, 이때 엄마 릴 매 포크가 글쎄 열일곱 살이었다. 그러니 열여섯 또는 갓 열일곱의 청소년을 건드렸다는 말이다. 지금 같으면 미성년 약취 간음으로 수십 년 동안 콩밥을 먹어야 하는 중죄이거늘 그냥 혼인신고 한 장으로 때웠다. 이런 아빠는 결국 사기죄로 큰 집에 들어가 인생교도의 목적 아래 도를 닦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어린 아내는 당연히 이혼을 해 유년 트루먼은 엄마의 친척집에서 5년가량 지내야 했단다.
  엄마 릴 매 포크는 쿠바 출신 사업가와 새로 결혼을 했고, 이이의 성이 커포티라 이제 정식으로 트루먼 커포티라는 이름을 단다. 이때 나이 아홉 살.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의 주인공 조엘 해리슨 녹스는 열세 살 사내아이로 목요일에 뉴올리언스를 떠나 금요일에 남부의 파라다이스 채플 고속도로변 모닝스타 카페에 혼자 도착해 하루를 묵었다. 오늘 눈시티에 가야 하지만, 눈시티로 가는 어떤 버스나 기차도 없어서 주 6회 우편물 따위를 전해주는 추레리 터펜타인 컴퍼니 소속, 기사 샘 래드클리프가 몰고 다니는 포드 픽업트럭에 얹혀 타고가려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소설은 시작한다.
  조엘과 함께 외출을 했다가 열병에 걸려 그길로 엄마가 숨을 거두자 친절하고 다정한 엘렌 이모가 조카를 거둔다. 하지만 이모 역시 다섯 명의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키우는 처지고, 가정의 유일한 수입원이 신발가게 점원을 하는 이모부 한 명이라 폰차트레인에서 가까운 더러운 2세대 주택에서 그냥저냥 살고 있었다. 조엘이 아주 어려서 부모가 이혼을 한 터라 이제 초년 팔자 걱정이 한창일 때, 저 멀리 눈시티에서 정기 구독하던 신문을 통해 조엘의 엄마가 세상 등진 것을 알게 된 조엘의 생부가 직접 엘렌 이모에게 편지를 써서, 반드시 학교공부를 시키겠다는 것, 크리스마스 휴가는 엘렌 이모와 함께 지내게 해주겠다는 것 등 전혀 지킬 생각 없는 약속을 남발한 채, 그래도 눈시티까지 여행비용에 쓰라고 서명한 수표를 동봉한 거였다. 편지를 받은 엘렌 이모가 한 숨 돌린 건 당연했겠지.
  근데 조엘 해리슨 녹스를 데려가기 위해 그를 부른 아빠의 이름은 에드워드 R. 샌섬. 음. 녹스는 엄마가 재혼한 남자의 성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주민등록에 올라있는 이름이 녹스라서 조엘은 책이 끝날 때까지 녹스라고 불린다. 이쯤 되면 조엘 녹스와 트루먼 커포티의 초년 팔자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인지 신경 안 쓰고 그냥 읽어나갔더라도 마지막 문단 쯤 오면 저절로 성장소설이란 걸 알게 된다.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쓴 대로 읽으면 제일 먼저 탁, 감잡히는 게, 미국 남부의 고딕소설이라는 것. 누가 생각나느냐 하면 당연히 카슨 매컬러스. 그이의 전매특허인 거친 여자아이 아이다벨이 등장하고, 눈시티로 태워주는 터펜타인 컴퍼니 소속 운전수 샘 래드클리프를 비롯해 다수의 남부 사람들은 거대한 체격에 털이 숭숭난 마초들이며, 식음료 판매점인 ‘R.V. 레이시의 프린시스 플레이스’ 사장 로버타 V. 레이시 양은 거구에다 입 주변에 난 사마귀 근처의 빳빳한 털을 쓰다듬는 취미를 즐기고 있으며, 조엘의 의붓어머니, 어쨌건 간에 호적상 계모인 에이미 스컬리는 분명히 샌섬 씨와 혼인신고를 했건만 여전히 에이미 양이라고 불리는 건 뭐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에이미의 사촌인 랜돌프 스컬리는 천식발작을 가끔 일으키는 허약체질이다.
  이 집안의 마차꾼이면서 젊은 시절엔 거의 집사 일을 했던 지저스 피버 노인은 아흔 살이 넘은 건 확실하고, 아마 백 살도 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게 눈시티 사람들이 의견을 같이 하는 바인데, 이 흑인 노인이 언제 죽을지 몰라 노후를 조금이나마 편히 보내게 해주려고 세인트루이스에서 살던 소녀 미주리를 불러온 것도 벌써 12년 전이다. 에이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주’라고 부르는 미주리는 열네 살 때 케그 브라운이라는 불한당 깡패 같은 작자에게 몸을 망친 것도 모자라 면도칼로 목을 주욱 그었음에도 흉터만 남기고 아직까지 건강하게 살아 있는 우아한 얼굴과 몸매의 20대 초반 흑인 여성이다.
  이것들 말고도 이 소설을 남부 고딕으로 규정할 요소를 무지하게 많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고딕소설이다, 맞지?

 

  고딕소설, 카슨 매컬러스를 이야기하면 작품 속의 동성애 코드도 꼭 거론한다. 트루먼 커포티의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저 위에 작가의 초년팔자 얘기할 때 커포티라는 이름을 준 쿠바 출신의 계부를 언급한 적 있다. 이 책에서 쿠바가 한 번 나온다.
  스페인에 그림공부를 하러 간 에이미 양의 사촌 랜돌프는 스페인 박물관에서 대가의 그림만 죽자사자 모사하고 있다가 미모의 돌로레스를 만난다. 당연히 연애 시작. 이들은 마음먹고 쿠바로 가서 열대와 해변을 만끽하는데, 거기서 멕시코 출신 권투선수 페페 알바레스와 안면을 튼다. 근데 가만 보니까, 돌로레스, 이 촌스런 이름의 아가씨가 페페 알바레스, 건장하고 힘세고, 돈도 잘 벌고, 인기도 많은데다가 생기기도 잘 생긴 권투선수하고 연애를 하는 거였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나. 페페 알바레스하고 맞장을 뜨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정도의 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불쌍한 사촌 랜돌프. 그러나 안심하시라. 랜돌프의 질투는 돌로레스를 향한 것이 아니라 페페 알바레스를 향해 있던 거니까. 이렇게 드러나는 동성애적 취향. 물론 동성애에 대한 관심은 조엘의 뉴올리언스 시절에 친구들과의 탐정놀이에서 언뜻 내비치기도 하지만. 이 와중에 여기까지 와서야 알게 되는 거. 권투선수 페페 알바레스의 매니저가 바로 조엘 녹스의 친아빠 에드워드 샌섬.
  근데 이 네 명 사이에서 어떻게 계모 에이미가 등장할까. 랜돌프, 돌로레스, 페페, 에드워드가 난마처럼 엉겨버린 가운데 돈 많고 철없는 젊은이들이 항용 그렇듯 (뉴올리언스로 자리를 옮겨) 방탕한 생활을 영유하다가 하루는 페페가 술을 잔뜩 먹고 숙소에 들어와 온갖 기물을 다 때려 부수고 불쌍한 랜돌프의 코뼈를 부러뜨린 다음 쫓아내버린다. 열을 받은 랜돌프는 위험한 장난감 권총을 들고 이들에게 다시 접근해 술을 마셔 어질어질한 상태에서 페페인줄 알고 총을 두 방 쐈는데, 에그머니, 에드워드가 맞아버렸다. 자기 혼자는 문제해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베이비 보이 랜돌프는 급하게 눈시티 스컬리시 랜딩으로 전보를 쳐 사촌 누이 에이미와 그 집에서 오래 집사생활을 하는 지저스 피버 노인을 부른다.
  한 눈에 상황을 정리한 에이미. 이이는 지극정성으로 에드워드 샌섬 씨를 간호하는 한편 즉각 돌로레스와 페페를 떨쳐버리고 목사를 초빙해 샌섬 씨와 혼인을 해버린다. 이어 새신랑과 함께 스컬리시 랜딩으로 돌아와 새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 샌섬의 전 아내가 죽어 이제 천애고아가 된 조엘의 팔자를 신문에서 읽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것.

 

  성장소설이라니까 조엘이 눈시티에 올 때 시작해 떠나면서 작품이 끝나나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년기가 어떤 기점으로 끝난다는 것을 모르고 어영부영 살다보니 청소년이 되고, 성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늙어가는 것을 느끼지만 한 소설 작품의 주인공이 되려면 적어도 자신의 소년시절이 이것으로 끝났다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가보다. 조엘도 마찬가지. 자기가 그런 마음이 들 때를 딱 짚어서 땅 위에다 줄을 긋고 이렇게 말하면서 끝난다.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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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생트 제안들 7
앙리 보스코 지음, 최애리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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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26번 시내버스 타면 대방동 돈 보스코 회관 앞을 지난다. 돈 보스코는 19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사제로, 뒷골목 빈민가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죽은 지 46년 만에 시성諡聖되었다. 이 돈 보스코의 친척 가운데 한 명이 프랑스 사람으로 공부 잘 해 이탈리아어 교수를 지내면서 소설을 쓴 앙리 보스코다.
  앙리 보스코는 1937년에 <반바지 당나귀>를 열린 결말을 갖는 소설로 쓰고,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 곧이어 후속작 <이아생트>를 시작해 3년 후인 1940년 발표한다. 그래도 미진했던지 1946년에 3부작을 완성하는 <이아생트의 정원>을 출간한다. 이래서 <이아생트>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으면 <반바지 당나귀>의 내용을 미리 알아두어야 편하다.

 

  <반바지 당나귀>의 장면은 저 산골 마을 오스피탈레에서도 몇 시간 산을 오르면 마법사 시프리앵이 만들어 살고 있는 멋진 정원과 과수원이다. 마법사는 당나귀에 반바지를 입혀 오직 당나귀만 마을로 보내 물건을 사 오고, 농사지은 것들을 내다 팔기도 한다. 오래전에 읽은 작품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아서, 마을의 성령에 바쳐진 초라한 성당, 막달라 경당에서 복사로 있었던가, 심부름 다녔나, 아니면 그냥 동네 소년일 뿐이었나 까무룩한데, 소년 콩스탕탱 글로리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고자 했던 마법사 시프리앵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다. 좌절한 시프리앵은 콩스탕탱의 집에 얹혀살던 소녀 이아생트를 유괴해 사라지고 만다. 이게 끝이다. 그러나 다는 아니다. 작품은 시프리앵이 가꾸던 정원과, 여우를 제외한 모든 짐승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시프리앵의 능력, 사과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사는 뱀의 출현 등 많은 상징이 등장하는 환상 풍의 소설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렇다고 <반바지 당나귀> 3년 후에 출간한 <이아생트>를 전작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서사 위주의 책이라 생각하면 <이아생트>는 못 읽는다. 3백 쪽 분량의 장편 소설이지만 읽는 속도가 여간해서 붙지 않는다. 재미없는 책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107쪽에 와서야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 ‘나’의 멀고 먼 기억 속에서 자신을 키워준 시골의 순박한 할아버지와 지혜로운 할머니를 떠올리고, 집 앞에 무표정한 눈을 하고 다닌 이아생트라는 어린아이가, 어느날 떠났고,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하면서, 처음으로 ‘이아생트Hyacinthe’를 소개한다.
  그러면 처음부터 107쪽에 이르기까지는? ‘나’가 도착한 곳은 성 가브리엘 고원이다. 완전히 적막한 고장. 황량한 벌판. 언뜻 미셸 트루니에의 <마왕>에서 거구의 아벨 티포주가 소년들을 납치하기 위해 하늘같은 검은 말을 타고 배회하던 동프로이센의 황야가 떠올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황량한 고원에 성모에게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알린 대천사 성 가브리엘의 이름을 붙였을까. 내 의견으로는 백 쪽이 넘어야 등장할 이아생트와 콩스탕탱이 마법사 시프리앵이 만들고자 한 낙원, 에덴으로의 실바칸에서 도망한 곳이 이곳, 황량한 벌판이라, 작가가 아담-하와-뱀의 완전히 반대 위치에 있는 황야의 예수-성모-가브리엘을 선택했으리라는 것이다.

 

  성 가브리엘 고원은 16 평방킬로미터(484만평)의 광활한 황야로 고원의 북동쪽 가장자리엔 습지가 펼쳐져 있다. 이 넓은 대지의 사막 속에 단 두 채의 집이 있을 뿐. 이 가운데 라 코망드리, 기사관騎士館, 기사knights들의 숙소라 이름 지은 집에 ‘나’가 세 들어 살기 시작하면서 이 몽롱한 몽상의 작품을 시작한다.
  그러면 고원의 다른 한 집은 어떨까. 그 집은 규모가 라 코망드리와 비교해 작아서 마치 소작 농가처럼 보이는데, 이름을 라 주네스트, 금작화라고 불렀다. 야트막한 담벼락과 경사진 지붕만 땅에서 솟아나 있는 집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근 십 미터가량 되는 암벽 위에 지은 집이다. 그것보다 ‘나’와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등불이 켜져 있다는 점이다. 근 5백만 평의 거친 황야의 밤에 오직 하나의 지표가 될 불빛. 이것을 볼 때마다 ‘나’는 마치 인류의 마지막 영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집주인과 늙은 하인 내외가 워낙 비사교적이라 ‘나’의 거의 유일하게 남은 취미인 산책 중에도 라 주네스트 쪽으로는 발걸음을 삼갈 정도.
  생각해보시라. 넓고 넓은 거친 황야. 조명이 없어 무한히 보이는 별의 홍수와 돋보이는 별자리들. 이 어둠의 대해에 단 하나, 구리 등잔에 석유 등불이 이 광활한 벌판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지침이 된다는 것. 기어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 누구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감안 한다는 것. 라 주네스트. 그들을 그토록 오래 견디게 한 것은 한 인간의 고통뿐이었으리라는 ‘나’의 사색, 침잠, 상상, 이런 것들을 다 합쳐 몽상은 점점 깊어만 간다.

 

  그렇다. 이 소설의 특징을 한마디로 하자면 “몽상”이다. 작품의 앞자리에 삼분의 일 분량을 성 가브리엘 고원과, 밤이 새도록 등불을 밝히는 라 주네스트와, 라 주네스트 옆에서부터 펼쳐지는 늪지대를 대상으로 아름답지만 장황하게 펼쳐지는 몽상의 파노라마를 견딜 수 있는 독자는 행복할 것이고, 견디지 못하는 독자는 책을 덮을 것이다. 그리고도 앞으로 이 몽환은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책을 읽으면서 단 한 순간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적어도 문장을 다시 읽어야 하는 고난을 계속할 수 있는 끈질긴 독자라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잘난 척이지만, 난 견뎠고, 즐겼고, 만족했다. 대신 읽는 시간은 다른 작품에 비해 배는 들었던 거 같다.
  읽는 내내 생각났던 보스코와 동시대 프랑스의 미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그는 모네의 수련 그림이나 칠리다의 비구상 조형물을 보면서 독자가 질릴 때까지 미학적 몽상을 풀어내는 사람이다. 이런 미학적 몽상을 각오하지 않는 독자라면 책을 열고 백 쪽에 이르기 전에 덮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라.
  크리스마스, 12월 25일 자정이 되기 조금 전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황야에서 ‘나’의 집 현관을 두드리며 (전부 해 310쪽의 작품에서) 140쪽에 등장하는 이아생트. 앞뒤 다 잘라버리고 얘기하자면, <반바지 당나귀>에서 이아생트를 데리고 사라진 마법사 시프리앵은 일단의 집시 무리를 규합해 6월 24일 성 요한 축일과 성탄일을 맞추어 성 가브리엘 고원의 늪지에서 이를 기념하여 회합을 갖는다. 올해는 하필 ‘나’가 라 코망드리에서 살고 있을 때 이아생트가 마법사의 손길에서 벗어나 무리로부터 탈출을 감행한 것.
  그리고 밝혀지는 등불의 집 라 주네스트 집주인의 정체. 바로 콩스탕탱 글로리오, 오래전 시프리앵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바로 그 아이였던 것. 이렇게 황량하기 그지없는 성 가브리엘 고원에서 다시 만난 옛 시절의 인물들. 만남이 필연적으로 마련해두는 이별. 화자 ‘나’는 이의 해소를 위하여 걸어서 여섯 날이 걸리는 먼 옛 시절의 장소 오스피탈레 마을, 막달라 경당, 그리고 잊어버린 낙원일 뻔했던 실바칸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독자들은 주의하시라. 쉽지 않은 소설이다. 천천히, 느린 속도로 읽으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 그리고 싶은 풍경, 꿈꾸고 있는 몽상을 함께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살다 보면 내 돈 내고 산 책을 읽으며 스스로 어려운 과정을 사서 거칠 때가 있는데, 이 책을 읽는 일이 그렇다. 그러나 다 읽기만 한다면 절대 후회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러기 위하여 다시 한번 말씀드리오니, 아무쪼록 <반바지 당나귀>를 먼저 읽으시옵기를.


 

 내가 읽은 책.

 

요즘 민음사 세계문학에서 팔고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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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0-07 0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눈길을 확 잡아끄는데요?

Falstaff 2021-10-07 09:03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 유일한 불빛에 관해 무지하게 장황한 미학이 펼쳐진답니다.

얄라알라 2021-10-07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스타고 어디를 지나든 그냥 눈에 나무나 차만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Falstaff님의 시선에서는 돈 보스코라는 먼나라 먼 시대인물의 친척까지 들어오는 군요. 이야!!! 같은 대방동 버스를 타도 말이죠^^

문학 읽는데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Falstaff님 서재만 들어오면 새록새록!

Falstaff 2021-10-07 12:51   좋아요 3 | URL
근데 저는 아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아직 26번 버스가 다니나요? 아주 오래 전이라서 에휴.....
ㅋㅋㅋ 무슨 분발 씩 하십니까. 그깟 소설책 한 권 읽는 것으로요. 그냥 즐기는게 장땡입니다. 제 철학입지요. ^^

얄라알라 2021-10-07 1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 ˝분발˝ 요 단어 엄청 FM적으로 들리네요^^ Falstaff님 철학에 동의합니다. 저도 어려서는 오로지 문학작품만 읽었는데 제대로 이해 못하고 읽은 책이 90% 같아요^^;; 다시 천천히 친해져야겠습니다
 
마리안의 변덕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도훈 옮김 / 연극과인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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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아의 고백>을 별로 인상 깊게 읽지 못해 그저 드 뮈세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지나간 작가. 그러다 올해 초여름, 조르주 상드의 책 <모프라>를 읽었다. 사실 작센 왕의 사생아가 낳은 사생아의 후예인 소설가 아망튄 뤼실, 필명 조르주 상드는 문학작품보다 알프레드 드 뮈세와 프레데릭 쇼팽 등 주로 자신보다 한참 아래 청년들과의 연애로 이름을 드높인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모프라>, 조르주 상드, 알프레드 드 뮈세. 이렇게 연상작용이 일어났고, 때를 맞춰 드 뮈세의 희곡작품이 눈에 들어왔으며, 작품집의 책값도 저렴해 선뜻 사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알프레드 드 뮈세가 스물세 살이었던 1833년, 당시 애 둘 딸린 돌싱 예비자였던 조르주 상드와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행복했을 거 같지? 물론 가슴 깊이 사랑하기는 하지만 상드는 폭발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상드가 드 뮈세에게 말로 폭력을 가하기를, “너는 침대 위에서 남자 구실도 못하는 고자 같은 인간이야, 알아?” 이제 겨우 스물세 살 청년에게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 바람이 바지 앞자락에만 스쳐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드는 나이였으니 자극에 너무 민감한 조루증세가 있지 않았나 싶다. 실의에 빠진 드 뮈세는 갑자기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한다. 뇌막염 진단을 받고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라서 상드 역시 만사를 뒤로 하고 드 뮈세의 병간호에 매달리는데 은근히 그의 허리를 감는 손길이 있었으니, 드 뮈세를 치료하러 방문한 성명불상의 이탈리아 의사. 그래서 상드가 딱 한 번 마음을 놓는 순간, 에그머니나,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인 것도 모자라 침대에서 엎어치고 메치고 여자 다루는 기술 하나는 파리의 내로라하는 한량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일 수준이라, 그만 몇 번이나, 아이고 나 죽네, 껌벅 넘어가, 드 뮈세야 죽든 말든,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 이제 병세가 안정된 수준이었겠지, 남자 구실 못하는 청년을 병상에 내팽개친 채 의사와 떠나버리고 만다.
  근데 나중에 상드가 어떻게 병약한 쇼팽과 연애를 하게 되느냐고? 쇼팽이 결핵이잖아. 내 주위에 한 인간이 같은 병증을 앓아 알기도 하고, 어떤 책인지는 잊었는데 프랑스 아니면 러시아 소설에서 읽어서 짐작했다시피, 결핵에 걸리면 자꾸 섹스를 판다고 한다. 유전자 보존의 법칙인 모양이다. 물론 내가 직접 걸려보지 않았으니까 얼마나 믿을 만한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게들 이야기하기도 하니 그런가보다, 할 밖에.
  이 치명적인 사건을 당한 알프레드 드 뮈세는, 대개 이런 사건을 핑계로 대는 것이 작가들의 버르장머리이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전에 읽은 <세기아의 고백>. 그 책의 주인공이 옥타브. <마리안의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 이름도 옥타브. 세기아 옥타브는 실연 경험자, <마리안의 고백> 옥타브는 사랑 같은 건 개나 먹어라, 인생 달관한 철학자, 라고 할까?

 

  <마리안의 변덕>은 이탈리아의 전통 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영향을 받았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카를로 고찌의 <까마귀>에서 봤듯 이탈리아의 희극 양식으로 배우들의 즉흥 연기, 소위 애드립과 재간, 춤, 노래, 곡예 등을 중시하는 장르로 광대들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는 나이 많은 도시행정관 클로디오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마리안에게 잘 생긴 귀족 청년 셀리오가 구애하기 위해 고용한 가수와 광대들이 이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등장인물 간의 대화, 예를 들어 셀리오와 옥타브, 클로디오 행정관과 그의 사촌 옥타브의 대사에서 숱하게 언어희롱이 나오는데, 실제 연극에서는 대사가 모두 속사포를 쏘듯 빠른 발음으로 하지 않았나 싶다. 주고-받고 하는 만담 식으로. 다만 목숨을 걸고 구애하는 청년 셀리오와 그의 어머니 에르미아, 이 커플만은 비극적이다. 둘의 대화 가운데 한 번의 허튼 농담도 등장하지 않는다.
  짧은 희곡이라서 그런지 벌써 내용을 다 설명한 느낌이 든다.
  나이든 남편과 정숙한 젊은 아내 마리안. 마리안을 짝사랑하는 셀리오의 안타까운 노력. 마리안과 셀리오를 엮어주려고 노력하는 술주정뱅이 옥타브. 이들의 노력이 성공할까,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인가는 물론 안 알려드리겠지만, 하여튼 거의 모든 비극적 갈등은, 당시엔 왜 그랬을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결혼에서 시작한다.
  초장에 페르난도 데 로하스의 소설 주인공인 라 셀레스티나 같은 매파 할미 치우타가 마리안에게 접근해 셀리오의 사랑을 전하지만 일언지하 거절당하자, 셀리오는 옥타브를 만나 차라리 죽어버릴 무기를 달라 엄살을 부린다. 옥타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는 ‘아를르캥의 나무칼’ 밖에 없다 한다. 아를르캥은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광대의 이름.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선 알레키노, 독일 오스트리아에선 하를레킨이라 불린다. 19세기 초중반엔 이런 양식이 적어도 중남부 유럽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나보다, 라고 짐작했었지만, 당시에는 <마리안의 변덕>을 포함한 드 뮈세의 작품을 공연하기 어렵고 과도한 주관적 정서를 담았다고 혹평을 받아 오히려 20세기가 온 후에야 본격적으로 공연도 하고, 영화로도 만들고 그랬다고 한다. 21세기엔? 뭐 그냥, 이런 것도 있다, 하는 수준으로 독후감을 끝맺는 게…….

 

 

 

* 조르주 상드와 드 뮈세, 그리고 이탈리아 의사에 관한 일화는 제 오랜 인터넷 벗이 해준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서 옮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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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05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곡이네요ㅎㅎ 요즘 희곡 책이 없었는데 가격이 참 착하네요 ㅋ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인가 보네요 😆

Falstaff 2021-10-05 09:36   좋아요 2 | URL
자전적 이야기, 절대 아닙니다. 누가 ㅎㅎㅎㅎ 자기 이야기를 코메디아 델라르코로 만들겠습니까. ^^

coolcat329 2021-10-05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 뮈세가 창작의 길로 빠지게 된 계기가 참 ㅋㅋㅠㅠ
정말 그 증세가 있었나 보네요.ㅠ

‘코메디아 델라르테‘ 오늘 또 하나 알아갑니다. 배우들 애드립과 춤 곡예가 어우러져 정말 재미있었을거 같아요. 현대 뮤지컬과 비슷하기도 한거같구요.
또 이탈리아 말이 무지 빠르니 더 신 나고 정신없었을거 같기도 하네요.

Falstaff 2021-10-05 10:09   좋아요 3 | URL
ㅎㅎㅎ 어쨌건 비탄으로 인해 예술을 만들었으니 그걸로 된 것이지요. 센 강에 빠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
 
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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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다 읽자마자 넬라 라슨을 검색했다. 이 짧은 장편이 1929년에 출간된 것이라고?

  넬라 라슨. 1891년 4월, 시카고 남부 둑마을(Levee)라고 불린 빈민 지역이자 홍등가에서 아프로-캐리비안 출신 남자 피터 워커와 덴마크 이민 출신인 페더린 마리 한센 사이에서 넬리 워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친아버지 워커 선생은 복잡한 혼혈 과정을 통해 자신이 흑인Negro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갑자기 넬라와 아내를 둔 채 사라져버린다. 이후 넬라가 어려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올 뿐. 하여튼 넬라가 첫돌을 갓 넘긴 6월에 엄마 마리 한센은 덴마크계 이민자 피터 라슨과 결혼해 바로 그 해에 씨 다른 자매 안나 엘리자베스 리치를 생산한다. 1863년에 노예해방이 되고 벌써 삼십 년이 지났지만, 노예들이 주로 살고 있던 남부에서 시작한 흑인들의 대이주Great Migration는 아직 시작하기 전이었다.

  어머니 마리는 넬라와 안나를 데라고 덴마크에서 잠깐 거주하기도 하고, 미국 내에서도 딸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힘을 다한다. 그래 테네시주 내슈빌에 있는 완고한 기독교 흑인 학교인 피스크 대학을 다닐 수 있었는데 일 년 만에 퇴학당하고 홀로 다시 덴마크에서 이 년 동안 머물며 코펜하겐 대학의 청강생 생활을 하기도 한다. 다시 미국에 돌아와 넬라 라슨이 선택한 것이 간호사의 길. 뉴욕으로 가 링컨대학에서 간호사 교육과정을 마친 라슨은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와 뉴욕의 링컨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패싱>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아이린 레드필드는 남부 시카고 출신으로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뉴욕 할렘에 정착한 전문직 여성으로 보인다. 업무상 출장으로 고향인 시카고에 도착해 바쁜 일정을 보내고, 각종 파티에도 참석해야 하며, 비싼 백화점에서 두 아들을 위해 쇼핑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지금 뉴욕의 할렘에서 남편 브라이언과 아이들 브라이언 주니어, 시어도어와 함께 산다. 브라이언 레드필드는 신체 건장한 흑인으로 각종 법규를 통해, 즉 합법적으로 흑인을 탄압하는 미국을 떠나 저 브라질 정도에서, 아니면 하여튼 남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꿈을 꾸었으나 아이린과 큰 규모의 전쟁을 한판 벌인 다음 자신의 희망을 숨기고 사는 의사다. 병원이 할렘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니, 가난한 흑인들을 위해 독지가들의 성금으로 시작한 뉴욕 링컨병원에 근무하는 것 같다.


넬라 라슨 


  넬라 라슨의 친아버지 워커 씨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어머니 역시 덴마크 출신의 백인이다. 복잡한 혼혈 과정을 거친 흑인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1920년대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불행하게 자신은 흑인임을 부정할지언정 피 속에 검정 피부를 갖게 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언제 검은 피부의 아이를 출산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생식해야 하는 운명이다. 넬라 라슨의 사진을 보면 결코 자신을 흑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또 다른 주인공 클레어 캔드리 벨루는 아이린과 동네 친구로 상아색 피부와 짙은 눈동자, 주홍 꽃 같은 시원한 입매를 한 매력 넘치는 여성이다. 머리카락마저 금발로 염색해 만날 피부를 맞대고 사는 남편 존 벨루마저 클레어의 몸에 흑인의 혈액이 흐른다는 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우연히 짙은 눈동자와 염색한 원래의 검은 머리카락 같은 것이 흑인과 유사할 뿐. 그래서 정말로 흑인이라면 극도로 모멸적인 호칭인, ‘닉’ 깜둥이라고 아내를 부르는 습관이 있다.

  클레어 캔드리는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에 거주하는 흑인의 전형이었다. 클레어의 그레이스와 에드나 두 대고모는 티끌 하나 없는 백인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근데 오빠가 젊은 날의 방종으로 흑인 여자를 만나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클레어의 아빠 밥 켄드리였다. 밥 켄드리가 점점 자라 독립을 하긴 했으나 친척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으니 젊은 시절부터 오죽이나 외로웠을까. 그래도 다행히 클레어와 둘이 살면서 아파트 경비 일을 할 정도로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했다. 비록 술에 취해 욕을 하고 외동딸을 위협하면서 밤새 거실을 배회했을지언정. 1920년대에 술 좋아하는 건장한 흑인이 걸어야 했던 길을 밥 캔드리도 빠짐없이 걸어서 어느 날, 술집에서 벌어진 싸움에 실없이 기어들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리어카에 실려 온다.

  그래 클레어는 기독교적 윤리에 충실한 대고모댁에 들어가 기독교 사상에 입각해 밥값을 하기 위해 온갖 집안일에 빨래까지 도맡아 해야 했으니 이때가 열여섯 일곱 살. 클레어는 이를 악물고 열여덟 살이 되도록 버티다가, 남미에 가서 돈을 왕창 벌어온 존 벨루를 꼬드겨 납작 결혼하고 대고모댁에서 뛰쳐나오기에 이른다. 당시 존을 꼬드기기 위해 가난한 클레어가 못할 말이 뭐가 있었을까. 백인우월주의자인 존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상앗빛 피부와 흑인 유전자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아가씨가 기독교 정신이 과하게 충일한 대고모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길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아니라고? 그럼 당신이 클레어 인생을 책임지든가 말이지.

  반면에 아이린. 클레어보다 두 살 정도 더 많다니까 서른두 살의 아이린은 비록 뉴욕의 할렘에서 살지언정 남자는 라틴 아메리카의 꿈을 꾸고 있는 의사고 자기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텔리 여인, 공부 잘 하는 아들 둘을 엄마 생각대로 유럽의 사립학교에 보낼까, 아빠의 신념에 따라 뉴욕 공립학교에 보낼까, 다툴 정도면 백인을 포함한 전 유럽인 가운데서도 중산층이다. 그러니 이들이 뭐가 아쉽다고 백인도 아니면서 백인 흉내를 내겠는가. 이 부부는 흑인으로 산다. 다만 악명높은 짐 크로 법을 피하기 위해 다행스럽게도 갖추고 있는 밝은 피부를 이용해, 교통수단이나 카페나 식당, 호텔 등지에선 남미나 스페인, 이탈리아, 그것도 아니라면 집시족인 것처럼 보이려 노력한다.

  두 명의 주인공 아이린 레드필드와 클레어 켄드리. 비록 아이린은 호텔, 식당, 카페, 대중교통에서의 추방을 면하기 위해서일 뿐이고, 클레어 켄드리는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서지만, 어쨌거나 둘 다 자신의 흑인 신분, 인종을 백인이나 라틴족인 척하려 한다. “~인 체 행세하다.”, “~인 것처럼 속이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가 패스pass. 일찍이 우리는 이런 주제를 다룬 작품을 읽은 적 있다. 토니 모리슨의 <재즈>와 <러브>. 나는 읽는 내내 다분히 화자의 입장에 선 아이린을 향해서, 함부로 클레어를 재단하지 않기를 바랐다. 삶의 지속을 위해 허위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인생을 향해 난타할 수 있는 계급은 같은 유색인종이면서 자신의 피부색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경제적으로 살 만한 인생”밖에 더 있나.


  이 작품을 읽은 독자는 여러 시각으로 해석할 권리를 갖겠지만, 내 경우에 중간 부분, 1부가 끝날 즈음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내내 떠오르던 생각은, 클레어가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숨기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아이린이나 역시 밝은 피부의 흑인 거트루드처럼 부모, 형제, 선의로 대해주는 가까운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정도의 현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천지에 적수공권의 맨몸으로, 1920년대의 여성 흑인이 패싱 정도의 양심을 속이면서 사는 게 뭐가 어때서.

  만일, 제시 포셋과 더불어 라슨과 함께 할렘 르네상스의 시대를 열었던 조라 닐 허스턴이었다면 아이린 레드필드의 속물성을 발가벗길 수도 있었을 거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초두에 말했다시피, 이 작품이 1929년에 쓰인 건 대단하다. 상당한 부분, 시카고의 여름 더위에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에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 혹시 쫓겨날지도 몰라 불안해하던 장면이 나올 때까지는 전혀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없었을 만큼 모던하다. 이런 글을 쓰니까 <유사Quicksand>와 <패싱> 두 작품만 쓰고도 당대 문학의 대표적 작가라고 손꼽히는 것이겠지 싶었다. 지금 이 말은 정말로 이 책을 읽어봐야 뜻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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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0-04 0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엇 전 이거 다른 분들이 리뷰 쓰신 거 읽었는데도 최근작인 줄 알았어요;; 내용이 정말 모던한가 봐요.

Falstaff 2021-10-04 10:54   좋아요 4 | URL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가 주목한 건 표현, 특히 문장적 특징이었습니다. 매력적이더군요.

프레이야 2021-10-04 14: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전 홀리네요. 책 찜해 갑니다. 넬라 라슨을 알게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1-10-04 18:58   좋아요 2 | URL
ㅎㅎㅎ 천천히 읽으셔요.

바람돌이 2021-10-04 15: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는 흑인들의 이런 욕망이 꽤 많은가봐요. 유명인으로는 마이클 잭슨도 있잖아요. 전 마이클 잭슨 살아 생전에도 그 위대한 가수가 왜 그렇게 피부색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잘 안가던데, 아무래도 비슷한 색깔끼리 모여사는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바로 이해하기는 힘든 부분인것도 같아요.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던데, 역시 문화가 다르니 문제를 느끼는 부분도 달라지는듯합니다. 이 책도 찜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조만간 읽게 되지 싶습니다. ^^

Falstaff 2021-10-04 19:00   좋아요 3 | URL
오, 마이클 잭슨은 그렇다고 치고, <휴먼 스테인>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던가요? 아이고, 읽은지가 하도 오래가 가물가물합니다.
근데 솔직히 우리끼리 하는 얘기니까 까 놓는 건데, 필립 로스 선생이 좀 과대평가 되고 있는 거, 유대인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거 아닌지, 의심이 들지 않으셔요? ㅋㅋㅋㅋㅋ 저도 아니길 바랍니다만.

바람돌이 2021-10-04 20:53   좋아요 2 | URL
<휴먼 스테인>의 남주인공이 평생을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바로 그 인종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필립 로스에 대해서는 전 2권밖에 안봐서 딱히 평가하기는 힘드네요. 휴먼 스테인과 네메시스 읽었는데 걸작이다 이런 느낌은 못받았어요. 괜찮은 작가 정도? ㅎㅎ

mini74 2021-10-04 2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 표지가 ? 싶었는데 제가 읽은 건 민음사거군요. ~

Falstaff 2021-10-04 20:57   좋아요 3 | URL
ㅋㅋㅋ 전 민음사 패싱이 출판사 지원도서가 많아서 문학동네로 왔는데, 여기도 지원도서가 있군요. 우와.... 거 참. 대세인 모양입니다.

mini74 2021-10-04 20:58   좋아요 3 | URL
제 돈 주고 샀어요.ㅠㅠ 저는 뭔가 번역이 문학동네가 더 나아서 폴스타프님이 선택하신건가 잠시 억울한 생각을 ㅎㅎㅎ 별 차이는 없겠지요 ~

Falstaff 2021-10-04 21:14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 민음사가 또 2천원 가량 비싸네요.
걔네들 미쳤나봐요. 옛날 번역 다시 찍은 거면서 말입니다. 요즘 민음사 세계문학은 새로 번역해서 내 놓는 책이 별로 없어요. <나는 고백한다> 말고 못본 거 같아요.
그래 같은 컨텐츠면 일단 제외합니다. 시리즈 출판 의도와 완전히 반대로 나가고 있어서 그 사람들이 좀 밉습니다. ㅋㅋㅋㅋ 그래봤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겠지만요.

scott 2021-10-08 00:10   좋아요 1 | URL
민음 꼼수 ㅋㅋㅋ

잠자냥 2021-10-05 09: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꽤 오래전에 읽었는데 정말 깜놀했었어요(민음사가 다시 찍어낸 그 원래 버전으로요). 그래서 아마 최근에 영화화된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 영화로 만들어도 뭔가 손색없달까…

Falstaff 2021-10-05 08:38   좋아요 3 | URL
그죠?
저도 애초에 현대 작품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다가 호텔에 들어가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라는 말이 나와서 출간 연도를 확인했다니까요!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