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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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다 읽자마자 넬라 라슨을 검색했다. 이 짧은 장편이 1929년에 출간된 것이라고?

  넬라 라슨. 1891년 4월, 시카고 남부 둑마을(Levee)라고 불린 빈민 지역이자 홍등가에서 아프로-캐리비안 출신 남자 피터 워커와 덴마크 이민 출신인 페더린 마리 한센 사이에서 넬리 워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친아버지 워커 선생은 복잡한 혼혈 과정을 통해 자신이 흑인Negro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갑자기 넬라와 아내를 둔 채 사라져버린다. 이후 넬라가 어려서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올 뿐. 하여튼 넬라가 첫돌을 갓 넘긴 6월에 엄마 마리 한센은 덴마크계 이민자 피터 라슨과 결혼해 바로 그 해에 씨 다른 자매 안나 엘리자베스 리치를 생산한다. 1863년에 노예해방이 되고 벌써 삼십 년이 지났지만, 노예들이 주로 살고 있던 남부에서 시작한 흑인들의 대이주Great Migration는 아직 시작하기 전이었다.

  어머니 마리는 넬라와 안나를 데라고 덴마크에서 잠깐 거주하기도 하고, 미국 내에서도 딸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힘을 다한다. 그래 테네시주 내슈빌에 있는 완고한 기독교 흑인 학교인 피스크 대학을 다닐 수 있었는데 일 년 만에 퇴학당하고 홀로 다시 덴마크에서 이 년 동안 머물며 코펜하겐 대학의 청강생 생활을 하기도 한다. 다시 미국에 돌아와 넬라 라슨이 선택한 것이 간호사의 길. 뉴욕으로 가 링컨대학에서 간호사 교육과정을 마친 라슨은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와 뉴욕의 링컨병원에서 간호사 생활을 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패싱>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아이린 레드필드는 남부 시카고 출신으로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뉴욕 할렘에 정착한 전문직 여성으로 보인다. 업무상 출장으로 고향인 시카고에 도착해 바쁜 일정을 보내고, 각종 파티에도 참석해야 하며, 비싼 백화점에서 두 아들을 위해 쇼핑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지금 뉴욕의 할렘에서 남편 브라이언과 아이들 브라이언 주니어, 시어도어와 함께 산다. 브라이언 레드필드는 신체 건장한 흑인으로 각종 법규를 통해, 즉 합법적으로 흑인을 탄압하는 미국을 떠나 저 브라질 정도에서, 아니면 하여튼 남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꿈을 꾸었으나 아이린과 큰 규모의 전쟁을 한판 벌인 다음 자신의 희망을 숨기고 사는 의사다. 병원이 할렘 근처에 있는 것으로 보니, 가난한 흑인들을 위해 독지가들의 성금으로 시작한 뉴욕 링컨병원에 근무하는 것 같다.


넬라 라슨 


  넬라 라슨의 친아버지 워커 씨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어머니 역시 덴마크 출신의 백인이다. 복잡한 혼혈 과정을 거친 흑인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1920년대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불행하게 자신은 흑인임을 부정할지언정 피 속에 검정 피부를 갖게 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언제 검은 피부의 아이를 출산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생식해야 하는 운명이다. 넬라 라슨의 사진을 보면 결코 자신을 흑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또 다른 주인공 클레어 캔드리 벨루는 아이린과 동네 친구로 상아색 피부와 짙은 눈동자, 주홍 꽃 같은 시원한 입매를 한 매력 넘치는 여성이다. 머리카락마저 금발로 염색해 만날 피부를 맞대고 사는 남편 존 벨루마저 클레어의 몸에 흑인의 혈액이 흐른다는 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우연히 짙은 눈동자와 염색한 원래의 검은 머리카락 같은 것이 흑인과 유사할 뿐. 그래서 정말로 흑인이라면 극도로 모멸적인 호칭인, ‘닉’ 깜둥이라고 아내를 부르는 습관이 있다.

  클레어 캔드리는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에 거주하는 흑인의 전형이었다. 클레어의 그레이스와 에드나 두 대고모는 티끌 하나 없는 백인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근데 오빠가 젊은 날의 방종으로 흑인 여자를 만나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클레어의 아빠 밥 켄드리였다. 밥 켄드리가 점점 자라 독립을 하긴 했으나 친척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으니 젊은 시절부터 오죽이나 외로웠을까. 그래도 다행히 클레어와 둘이 살면서 아파트 경비 일을 할 정도로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했다. 비록 술에 취해 욕을 하고 외동딸을 위협하면서 밤새 거실을 배회했을지언정. 1920년대에 술 좋아하는 건장한 흑인이 걸어야 했던 길을 밥 캔드리도 빠짐없이 걸어서 어느 날, 술집에서 벌어진 싸움에 실없이 기어들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리어카에 실려 온다.

  그래 클레어는 기독교적 윤리에 충실한 대고모댁에 들어가 기독교 사상에 입각해 밥값을 하기 위해 온갖 집안일에 빨래까지 도맡아 해야 했으니 이때가 열여섯 일곱 살. 클레어는 이를 악물고 열여덟 살이 되도록 버티다가, 남미에 가서 돈을 왕창 벌어온 존 벨루를 꼬드겨 납작 결혼하고 대고모댁에서 뛰쳐나오기에 이른다. 당시 존을 꼬드기기 위해 가난한 클레어가 못할 말이 뭐가 있었을까. 백인우월주의자인 존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상앗빛 피부와 흑인 유전자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아가씨가 기독교 정신이 과하게 충일한 대고모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길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아니라고? 그럼 당신이 클레어 인생을 책임지든가 말이지.

  반면에 아이린. 클레어보다 두 살 정도 더 많다니까 서른두 살의 아이린은 비록 뉴욕의 할렘에서 살지언정 남자는 라틴 아메리카의 꿈을 꾸고 있는 의사고 자기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인텔리 여인, 공부 잘 하는 아들 둘을 엄마 생각대로 유럽의 사립학교에 보낼까, 아빠의 신념에 따라 뉴욕 공립학교에 보낼까, 다툴 정도면 백인을 포함한 전 유럽인 가운데서도 중산층이다. 그러니 이들이 뭐가 아쉽다고 백인도 아니면서 백인 흉내를 내겠는가. 이 부부는 흑인으로 산다. 다만 악명높은 짐 크로 법을 피하기 위해 다행스럽게도 갖추고 있는 밝은 피부를 이용해, 교통수단이나 카페나 식당, 호텔 등지에선 남미나 스페인, 이탈리아, 그것도 아니라면 집시족인 것처럼 보이려 노력한다.

  두 명의 주인공 아이린 레드필드와 클레어 켄드리. 비록 아이린은 호텔, 식당, 카페, 대중교통에서의 추방을 면하기 위해서일 뿐이고, 클레어 켄드리는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서지만, 어쨌거나 둘 다 자신의 흑인 신분, 인종을 백인이나 라틴족인 척하려 한다. “~인 체 행세하다.”, “~인 것처럼 속이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가 패스pass. 일찍이 우리는 이런 주제를 다룬 작품을 읽은 적 있다. 토니 모리슨의 <재즈>와 <러브>. 나는 읽는 내내 다분히 화자의 입장에 선 아이린을 향해서, 함부로 클레어를 재단하지 않기를 바랐다. 삶의 지속을 위해 허위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인생을 향해 난타할 수 있는 계급은 같은 유색인종이면서 자신의 피부색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경제적으로 살 만한 인생”밖에 더 있나.


  이 작품을 읽은 독자는 여러 시각으로 해석할 권리를 갖겠지만, 내 경우에 중간 부분, 1부가 끝날 즈음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내내 떠오르던 생각은, 클레어가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숨기고 싶어서 그랬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아이린이나 역시 밝은 피부의 흑인 거트루드처럼 부모, 형제, 선의로 대해주는 가까운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정도의 현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천지에 적수공권의 맨몸으로, 1920년대의 여성 흑인이 패싱 정도의 양심을 속이면서 사는 게 뭐가 어때서.

  만일, 제시 포셋과 더불어 라슨과 함께 할렘 르네상스의 시대를 열었던 조라 닐 허스턴이었다면 아이린 레드필드의 속물성을 발가벗길 수도 있었을 거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초두에 말했다시피, 이 작품이 1929년에 쓰인 건 대단하다. 상당한 부분, 시카고의 여름 더위에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에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 혹시 쫓겨날지도 몰라 불안해하던 장면이 나올 때까지는 전혀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없었을 만큼 모던하다. 이런 글을 쓰니까 <유사Quicksand>와 <패싱> 두 작품만 쓰고도 당대 문학의 대표적 작가라고 손꼽히는 것이겠지 싶었다. 지금 이 말은 정말로 이 책을 읽어봐야 뜻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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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0-04 0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엇 전 이거 다른 분들이 리뷰 쓰신 거 읽었는데도 최근작인 줄 알았어요;; 내용이 정말 모던한가 봐요.

Falstaff 2021-10-04 10:54   좋아요 4 | URL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가 주목한 건 표현, 특히 문장적 특징이었습니다. 매력적이더군요.

프레이야 2021-10-04 14: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전 홀리네요. 책 찜해 갑니다. 넬라 라슨을 알게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1-10-04 18:58   좋아요 2 | URL
ㅎㅎㅎ 천천히 읽으셔요.

바람돌이 2021-10-04 15: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는 흑인들의 이런 욕망이 꽤 많은가봐요. 유명인으로는 마이클 잭슨도 있잖아요. 전 마이클 잭슨 살아 생전에도 그 위대한 가수가 왜 그렇게 피부색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잘 안가던데, 아무래도 비슷한 색깔끼리 모여사는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바로 이해하기는 힘든 부분인것도 같아요.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던데, 역시 문화가 다르니 문제를 느끼는 부분도 달라지는듯합니다. 이 책도 찜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조만간 읽게 되지 싶습니다. ^^

Falstaff 2021-10-04 19:00   좋아요 3 | URL
오, 마이클 잭슨은 그렇다고 치고, <휴먼 스테인>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던가요? 아이고, 읽은지가 하도 오래가 가물가물합니다.
근데 솔직히 우리끼리 하는 얘기니까 까 놓는 건데, 필립 로스 선생이 좀 과대평가 되고 있는 거, 유대인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거 아닌지, 의심이 들지 않으셔요? ㅋㅋㅋㅋㅋ 저도 아니길 바랍니다만.

바람돌이 2021-10-04 20:53   좋아요 2 | URL
<휴먼 스테인>의 남주인공이 평생을 숨기고 싶었던 비밀이 바로 그 인종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필립 로스에 대해서는 전 2권밖에 안봐서 딱히 평가하기는 힘드네요. 휴먼 스테인과 네메시스 읽었는데 걸작이다 이런 느낌은 못받았어요. 괜찮은 작가 정도? ㅎㅎ

mini74 2021-10-04 2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 표지가 ? 싶었는데 제가 읽은 건 민음사거군요. ~

Falstaff 2021-10-04 20:57   좋아요 3 | URL
ㅋㅋㅋ 전 민음사 패싱이 출판사 지원도서가 많아서 문학동네로 왔는데, 여기도 지원도서가 있군요. 우와.... 거 참. 대세인 모양입니다.

mini74 2021-10-04 20:58   좋아요 3 | URL
제 돈 주고 샀어요.ㅠㅠ 저는 뭔가 번역이 문학동네가 더 나아서 폴스타프님이 선택하신건가 잠시 억울한 생각을 ㅎㅎㅎ 별 차이는 없겠지요 ~

Falstaff 2021-10-04 21:14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 민음사가 또 2천원 가량 비싸네요.
걔네들 미쳤나봐요. 옛날 번역 다시 찍은 거면서 말입니다. 요즘 민음사 세계문학은 새로 번역해서 내 놓는 책이 별로 없어요. <나는 고백한다> 말고 못본 거 같아요.
그래 같은 컨텐츠면 일단 제외합니다. 시리즈 출판 의도와 완전히 반대로 나가고 있어서 그 사람들이 좀 밉습니다. ㅋㅋㅋㅋ 그래봤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겠지만요.

scott 2021-10-08 00:10   좋아요 1 | URL
민음 꼼수 ㅋㅋㅋ

잠자냥 2021-10-05 09: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꽤 오래전에 읽었는데 정말 깜놀했었어요(민음사가 다시 찍어낸 그 원래 버전으로요). 그래서 아마 최근에 영화화된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 영화로 만들어도 뭔가 손색없달까…

Falstaff 2021-10-05 08:38   좋아요 3 | URL
그죠?
저도 애초에 현대 작품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다가 호텔에 들어가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라는 말이 나와서 출간 연도를 확인했다니까요!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