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안의 변덕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1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도훈 옮김 / 연극과인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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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아의 고백>을 별로 인상 깊게 읽지 못해 그저 드 뮈세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지나간 작가. 그러다 올해 초여름, 조르주 상드의 책 <모프라>를 읽었다. 사실 작센 왕의 사생아가 낳은 사생아의 후예인 소설가 아망튄 뤼실, 필명 조르주 상드는 문학작품보다 알프레드 드 뮈세와 프레데릭 쇼팽 등 주로 자신보다 한참 아래 청년들과의 연애로 이름을 드높인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모프라>, 조르주 상드, 알프레드 드 뮈세. 이렇게 연상작용이 일어났고, 때를 맞춰 드 뮈세의 희곡작품이 눈에 들어왔으며, 작품집의 책값도 저렴해 선뜻 사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알프레드 드 뮈세가 스물세 살이었던 1833년, 당시 애 둘 딸린 돌싱 예비자였던 조르주 상드와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행복했을 거 같지? 물론 가슴 깊이 사랑하기는 하지만 상드는 폭발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상드가 드 뮈세에게 말로 폭력을 가하기를, “너는 침대 위에서 남자 구실도 못하는 고자 같은 인간이야, 알아?” 이제 겨우 스물세 살 청년에게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 바람이 바지 앞자락에만 스쳐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드는 나이였으니 자극에 너무 민감한 조루증세가 있지 않았나 싶다. 실의에 빠진 드 뮈세는 갑자기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한다. 뇌막염 진단을 받고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라서 상드 역시 만사를 뒤로 하고 드 뮈세의 병간호에 매달리는데 은근히 그의 허리를 감는 손길이 있었으니, 드 뮈세를 치료하러 방문한 성명불상의 이탈리아 의사. 그래서 상드가 딱 한 번 마음을 놓는 순간, 에그머니나, 잘생긴 이탈리아 남자인 것도 모자라 침대에서 엎어치고 메치고 여자 다루는 기술 하나는 파리의 내로라하는 한량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일 수준이라, 그만 몇 번이나, 아이고 나 죽네, 껌벅 넘어가, 드 뮈세야 죽든 말든,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 이제 병세가 안정된 수준이었겠지, 남자 구실 못하는 청년을 병상에 내팽개친 채 의사와 떠나버리고 만다.
  근데 나중에 상드가 어떻게 병약한 쇼팽과 연애를 하게 되느냐고? 쇼팽이 결핵이잖아. 내 주위에 한 인간이 같은 병증을 앓아 알기도 하고, 어떤 책인지는 잊었는데 프랑스 아니면 러시아 소설에서 읽어서 짐작했다시피, 결핵에 걸리면 자꾸 섹스를 판다고 한다. 유전자 보존의 법칙인 모양이다. 물론 내가 직접 걸려보지 않았으니까 얼마나 믿을 만한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게들 이야기하기도 하니 그런가보다, 할 밖에.
  이 치명적인 사건을 당한 알프레드 드 뮈세는, 대개 이런 사건을 핑계로 대는 것이 작가들의 버르장머리이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전에 읽은 <세기아의 고백>. 그 책의 주인공이 옥타브. <마리안의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 이름도 옥타브. 세기아 옥타브는 실연 경험자, <마리안의 고백> 옥타브는 사랑 같은 건 개나 먹어라, 인생 달관한 철학자, 라고 할까?

 

  <마리안의 변덕>은 이탈리아의 전통 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영향을 받았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카를로 고찌의 <까마귀>에서 봤듯 이탈리아의 희극 양식으로 배우들의 즉흥 연기, 소위 애드립과 재간, 춤, 노래, 곡예 등을 중시하는 장르로 광대들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는 나이 많은 도시행정관 클로디오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마리안에게 잘 생긴 귀족 청년 셀리오가 구애하기 위해 고용한 가수와 광대들이 이 역할을 한다. 이외에도 등장인물 간의 대화, 예를 들어 셀리오와 옥타브, 클로디오 행정관과 그의 사촌 옥타브의 대사에서 숱하게 언어희롱이 나오는데, 실제 연극에서는 대사가 모두 속사포를 쏘듯 빠른 발음으로 하지 않았나 싶다. 주고-받고 하는 만담 식으로. 다만 목숨을 걸고 구애하는 청년 셀리오와 그의 어머니 에르미아, 이 커플만은 비극적이다. 둘의 대화 가운데 한 번의 허튼 농담도 등장하지 않는다.
  짧은 희곡이라서 그런지 벌써 내용을 다 설명한 느낌이 든다.
  나이든 남편과 정숙한 젊은 아내 마리안. 마리안을 짝사랑하는 셀리오의 안타까운 노력. 마리안과 셀리오를 엮어주려고 노력하는 술주정뱅이 옥타브. 이들의 노력이 성공할까, 실패로 끝나고 말 것인가는 물론 안 알려드리겠지만, 하여튼 거의 모든 비극적 갈등은, 당시엔 왜 그랬을까?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결혼에서 시작한다.
  초장에 페르난도 데 로하스의 소설 주인공인 라 셀레스티나 같은 매파 할미 치우타가 마리안에게 접근해 셀리오의 사랑을 전하지만 일언지하 거절당하자, 셀리오는 옥타브를 만나 차라리 죽어버릴 무기를 달라 엄살을 부린다. 옥타브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라고는 ‘아를르캥의 나무칼’ 밖에 없다 한다. 아를르캥은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광대의 이름.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선 알레키노, 독일 오스트리아에선 하를레킨이라 불린다. 19세기 초중반엔 이런 양식이 적어도 중남부 유럽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누렸나보다, 라고 짐작했었지만, 당시에는 <마리안의 변덕>을 포함한 드 뮈세의 작품을 공연하기 어렵고 과도한 주관적 정서를 담았다고 혹평을 받아 오히려 20세기가 온 후에야 본격적으로 공연도 하고, 영화로도 만들고 그랬다고 한다. 21세기엔? 뭐 그냥, 이런 것도 있다, 하는 수준으로 독후감을 끝맺는 게…….

 

 

 

* 조르주 상드와 드 뮈세, 그리고 이탈리아 의사에 관한 일화는 제 오랜 인터넷 벗이 해준 이야기를 조금 각색해서 옮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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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05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곡이네요ㅎㅎ 요즘 희곡 책이 없었는데 가격이 참 착하네요 ㅋ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 인가 보네요 😆

Falstaff 2021-10-05 09:36   좋아요 2 | URL
자전적 이야기, 절대 아닙니다. 누가 ㅎㅎㅎㅎ 자기 이야기를 코메디아 델라르코로 만들겠습니까. ^^

coolcat329 2021-10-05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 뮈세가 창작의 길로 빠지게 된 계기가 참 ㅋㅋㅠㅠ
정말 그 증세가 있었나 보네요.ㅠ

‘코메디아 델라르테‘ 오늘 또 하나 알아갑니다. 배우들 애드립과 춤 곡예가 어우러져 정말 재미있었을거 같아요. 현대 뮤지컬과 비슷하기도 한거같구요.
또 이탈리아 말이 무지 빠르니 더 신 나고 정신없었을거 같기도 하네요.

Falstaff 2021-10-05 10:09   좋아요 3 | URL
ㅎㅎㅎ 어쨌건 비탄으로 인해 예술을 만들었으니 그걸로 된 것이지요. 센 강에 빠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