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
앤디 위어 / 박아람 / 알에이치코리아 / 600쪽
(2016. 6. 4.)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 될 줄 알았던 한 달이 겨우 엿새 만에 악몽으로 바뀌어버렸다.
  이 기록을 누가 읽기나 할지 모르겠다. 결국엔 누군가가 발견할 것이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백 년쯤 후에 말이다.
  공식적인 기록을 위해 밝혀두자면...... 나는 6화성일째에 죽지 않았다. 다른 대원들은 분명히 내가 6화성일째 죽은 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잘못이 아니다. 아마 조만간 나의 국장이 치러질 것이고 위키피디아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면 이렇게 나올 것이다. '마크 와트니는 화성에서 사망한 유일한 인간이다.'
  그리고 십중팔구 그것이 현실이 될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죽을게 확실하니까. 다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6화성일째에 죽지 않았을 뿐이다.
(P.14)



  인생 최악의 순간들은 대개 아주 작은 예고에서 시작된다. 옆구리에 생간 작은 혹, 아내 혼자 있는 집에 돌아왔을 때 싱크대에 놓여 있는 와인 잔 두개. "뉴스 속보를 전해드립니다......"라는 메시지는 언제든 들을 수 있다.
(P.368)



  여기까지라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정말 떠난다니. 이 춥디 추운 황무지는 1년 반 동안 나의 집이었다. 나는 한시적으로나마 생존하는 법을 알아냈고, 이곳의 섭리에 익숙해졌다.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투쟁이 어느새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농작물을 돌보고, 고장 난 물건을 고치고, 점심을 먹고, 이메일에 답장하고, TV를 보고,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어떤 면에서는 현대 농부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트럭 운전사가 되어 장기간 세상을 횡단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건설 노동자가 되어 이전까지 아무도 고려하지 않은 방식으로 우주선을 개조했다. 이곳에서 나는 온갖 것들을 조금씩 해보았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 끝났다. 더 할 일도 없고 자연과 맞설 필요도 없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의 화성 감자를 먹었다. 마지막으로 로버에서 잠을 잤다. 먼지가 날리는 붉은 모래에 마지막으로 나의 발자국을 남겼다. 나는 오늘 화성을 떠난다. 어떤 식으로든.
  빌어먹을, 얼마나 기다리던 일인가.
(P.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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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드 니버 / 이한우 / 문예출판사 / 294쪽
(2016. 6. 3.)




  개개인 인간은 자신들의 이해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해 관계도 고려하며, 또한 때에 따라서는 행위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더욱 존중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도덕적(moral)이다. 그들은 본성상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심을 갖고 있다. 이 경우 동류 의식을 느끼는 범위는 사회 교육에 의해 얼마든지 확장된다. 그들은 이성적 능력을 통해 정의감을 키워간다. 이 정의감은 교육적 훈련에 의해 연마되고, 그 결과 자신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사회적 상황을 공정한 객관성의 척도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이기주의적인 요소들을 정화시킨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들은 인간 사회와 사회 집단에서는 -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 개인들에 비해 월씬 획득되기 어렵다
(P.9)



  인류의 성장된 지성과 민중에 대한 군주의 증대된 책임감은 권력층의 변덕을 억제하기는 하였지만 권력층의 자기 이익은 견제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을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야먕과 결합할 수 있다면, 자만심과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 갈등에 관여할 것이다.
(P.44)



  전체의 이익을 위해 도덕적 선의지를 희생시킬 만큼 무책임한 권력을 갖고 있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도덕적 선의지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힘은 강제적 방법에 의해 파괴되어야 하는데, 이 방법들은 항상 그것이 파괴한 불의의 자리에 새로운 형태의 불의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
(P.49)



  이성의 개발과 정신의 성장은 점차 공정하고 정의로운 관계들을 형성하는 데 큰기여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의 모든 충동들을 포괄적인 사회적 이상과 관련 지어 그 통제 아래 두기 때문이며, 또한 사회적 상황 내의 모든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는 통찰력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P.62)




  인간의 탐욕은 고유한 상상력으로 인해 더욱 커지며, 상상력이 품고 있는 보편적인 목적들을 달성할 때까지는 결코 만족을 모른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저항은 제국주의적 희망들의 보편적 성격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정신이 온전할 때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화로운 전체의 유기적인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인간이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이성보다는 상상력에 의해 지배되는데, 이 상상력은 정신과 충동의 결합물이기 때문이다.
(P.76)



  완전히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현대 공산주의자들의 꿈은 고전적인 종교적 환상의 세속화된, 하지만 여전히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꿈이다. 그 세속화는 부분적으로 종교적,사회적 바람이 중산 계급의 종교적 공동체 안에서 변질됨으로써 생긴 비현실적인 감정에 대한 반작용이며, 또 현대 생활의 기계화와 종교적 상상상력의 파괴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그것이 세속화된 형태의 종교적 희망이기는 하지만 종교적 특성은 종말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강조에서 드러난다. 공산주의는 점진적이고 불가피하게 진화 과정 중에 출현하는 새로운 사회를 무시한다. 또한 공산주의자는 현재 사회의 흐름에 대해 비관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재앙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모든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절망에서 희망이 생겨나며, 재앙으로부터 새로운 사회가 출현한다고 본다.
(P.97)



  특권적인 지배 계급의 도덕적 태도는 전반적인 자기 기만과 위선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특수 이익을 일반 이익 및 보편적 가치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이미 국가의 태도를 고찰할 때 살펴본 것이지만 계급의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특권 계급이 비특권 계급에 비해 더 위선적인 이유는, 자신의 특권을 평등한 정의라는 합리적 이상에 의해 옹호하기 위해 특권이 전체의 선에 뭔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특권의 불평등 상태는 합리적 변호에 의해서는 정당화될 수 없을 만큼 심화되어 있기 때문에, 특권 계급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일반적으로 보편적 가치는 자신들의 특권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이론, 그리고 자신들의 특권이 보편적 이익에 봉사한다는 이론을 옹호할 수 있는 교묘한 증거와 논증을 창안해내려고 노력한다.
(P.165)



  지배 계급은 자신들이 행사하는 권력과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특출난 지적 능력을 내세우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위선을 저질렀다.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논거는 사실 지적 우월성보다는 도덕적 우월성이다. 그래서 18세기와 19세기의 신흥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이 노동 계급에 비해 더 큰 혜택을 누리고 또한 특권을 가질 수 잇는 것은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에 대한 정당한 보수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신흥 자본가 계급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유한 계급 및 노동 계급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19세기 정치 경제에서의 개인주의 및 청교도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근면성을 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개인주의 및 절약과 근면에 대한 찬사는 역으로 노동 계급의 빈곤이 그들의 게으름과 저축심의 결여에서 비롯된다는 믿음을 널리 확신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P.172)



  이성이나 지성은 궁극적으로 계급적 이기주의를 철폐할 수 없다.데이비드 흄은 이기주의가 인간 본성의 유일무이한 경향은 아니지만 지배적인 경향이기는 하다는 격률이 실제로는 진리가 아니지만 정치 현실에서는 참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이 격률이 정치 현실에 있어서 진실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집단 행동은 언제나 다수 의견에 의해 좌우되는데, 대다수는 항상 이기주의적 동기에서 행동ㅎ아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읽어보면, 흄의 이런 주장을 반박할 만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계급적 특권에서 비롯되는 사회 불의를 도덕적 설득이나 설교만으로 치유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사실은 사회 불의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와 고통을 당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수세기 동안 엄청난 좌절을 몸으로 겪으면서 최종적으로 도달한 결론이자 신념이다.
(P.196)



  인간은 자신이 수행하는 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와 독립된 객관적인 특정 관계들에 편입된다. 이러한 생산 관계는 특정한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한다. 이들 생산 관계의 총체가 경제적 사회 구조를 이루고, 이 구조를 현실적인 바탕으로 해서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또 그에 사응하는 일정한 형태의 사회 의식이 생겨난다. 물질 생활에서의 생산 양식이 사회적, 정치적 삶의 과정의 일반적 성격을 규정한다.
(P.200)



  사회 공동이 부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정당한 몫을 탈취당했다고 느끼면서도 어느 정도의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음으로 해서 완전한 소회감을 느끼지는 않는 집단은 보다 완화된 마르크수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식과 입장을 표출한다. 이 집단은 혁명적인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집단주의적 목표를 함께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방법을 버리고 의회주의적,진화적 방법을 채택한다.
(P.273)



  경제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힘(주로 파업이라는 무기)은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기에는 그리 적합치 않다. 왜냐하면 갖가지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힘은 지배 계급의 영향력 아래에서 파업의 힘은 약화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국가에 의해 약화된다.
  이러한 정치 권력의 강압적인 탄압이 없더라고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경제적 무기는 그리 강하지 않다. 게다가 그것은 점점 약화되어간다. 노동자들은 분쟁이 일정 기간 계속되면 자본가의 경제적자원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노동 계급은 굶주림에 굴복하게 된다.
(P.274)



  인간의 삶의 역사는 언제나 자연 세계의 반영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간파했다시피, 역사의 종말에 가서 세계의 평화는 투쟁에 의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 평화는 결코 완전한 평화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현재보다는 더 완전할 것이다. 인간의지성과 정신이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자연을 정복하거나 제거하려 하지 않고 자연의 힘을 인간 정신의 수단으로 그리고 도덕적 이상의 도구로 삼으려 한다면, 우리는 점차 보다 높은 정의와 안정된 평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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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의 공부법
윤영선,윤석윤,최병일 / 어른의 시간 / 252쪽
(2016. 4. 10.)



  나는 은퇴가 눈앞에 다가올 즈음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역동적인 성년기의 삶을 살아왔으며 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도 나름대로 충실히 이행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지난 삶을 공허하다고 느끼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내 의식 속에는 늘 '이류인생'이란 단어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늘 주눅 들어 있었고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나만의 내밀한 콤플렉스였다. 학교와 직장에 나는 늘 이류의 삶을 살아왔다. 적당히 중간쯤,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높은 중상쯤의 위치까지는 올라가 보았어도 단 한 번도 꼭대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단 한 번도 일류, 즉 확실한 성공의 삶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직장 생활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직장 문을 나서면서 나는 앞으로 주어진 인생만큼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길고 긴 제2의 사춘기가 답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낡은 틀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벗어나 나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부지런히 나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길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P.17)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죄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살다 보면 초조함 때문이 일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해낼 수 있을까. 이것을 내일까지 마쳐야 하는데, 이런 초조함이 결국 일을 망치고 만다. 왜 그럴까? 초조함이 두뇌의 긍정적인 작용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초조함으로 인하여 집중력이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다. 초조함으로 인하여 영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밤을 꼬박 새우고도 아무런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세월이 나에게 가르쳐 준 가장 소중한 지혜는 초조함을 버리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 나는 초조함을 버림으로써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초조함을 버림으로써 잠에서 깨어날 때, 화장실에 앉아서 혹은 길을 걷다가도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받아 적을 수 있었다. 메모지와 펜만 필요했다.
(P.54)



  입력은 없고 출력이 많으면 인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늙는다. 입력이 없고 출력이 많은 자를 우리는 고정관념에 빠진 '꼰대'라고 부른다. 소위 듣고 배우려 하지 않고 혼자만 말하고 끝없이 가르치려드는 자들이다. 입력은 그냥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와 몸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사고와 행동의 변화를 유발하고 그래서 어제와 다른 나를 만든다. 공부는 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자기 자신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것통 통해 몸은 지금까지의 관성을 벗어나 다른 삶을 향하게 된다.
(P.71)



  '공부하는 어른이 많은 사회는 결코 썩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래를 지향하면서 바른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상만 말하는 무책임한 자들에게는 현실의 엄중함을 일개우는 한편, 속내를 숨기며 이 땅의 리더가 되려는 부패한 자들에게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 것이다. 공부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는 결코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지금 세대 간 갈등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세대 갈등에 베이비붐 세대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대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 하루에 한 시간만이라도 책을 읽자. 그러면 한 달에 두세 권을 읽을 수 있다. 그런 다음 열린 토론의 광장으로 나가자.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과 만나 토론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P.77)



  신영복은 <담론>에서 고전을 읽을 때 삼독하라고 권한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자신을 읽으라는 말이다. 자신을 읽는다는 것은 내면의 자아와 대면한다는 말이다. 문학은 결코 독자에게 답을 알려 주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하고 질문이 곧 답을 끌어낸다.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 톰 피터슨은 고전을 읽는 이유를 "대부분의 경영학 서적은 다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고전은 나에게 오히려 근본적인 질문을 한다.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라고 말한다.
(P.135)



  저는 은퇴자에게 공부는 취미이기 이전에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는 다른 취미들과 좀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되 공부를 전혀 도외시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생 후반의 공부가 노년의 삶을 더욱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건 여러 전문가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또한 노년에는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육체운동과 더불어 정신운동, 즉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듯이 인생 후반은 정말 공부하기 좋은 시기입니다.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책 읽는 생활을 꾸준히 실천해 보기를 권합니다.
(윤영선)
(P.244)



  공부는 삶 자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늘 배우고 익히고 사랑하며 살고 있잖아요.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호모 쿵푸스>에서 주장한 것처럼 삶 자체가 모두 공부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중 지적인 삶에 초저을 맞추고 싶어요. 결국 '책'이죠. 그런데 혼자 읽는 책이 아닌 함께 읽는 책 읽기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대간의 대화, 시민 교육의 현장이 독서토론이에요. 노인의 세 가지 고통이 '돈 없음, 질병, 외로움'이래요. 외로움은 책 읽고 토론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세대간 갈등도 완화시킬 수 있고, 사회적 문제도 함께 조망해 볼 수 있죠. 글쓰기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데 가장 좋은 수단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요.
(윤석윤)
(P.245)


  인간의 판단에 문제를 일으키는 세 가지가 있는데 고정관념, 선입관념, 편견이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면 이 세 가지가 점점 쌓이고 굳어져 인간관곅 불편해지고 주위 사람들과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몸이 굳어지면 병이 들고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생각도 굳어지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외로워집니다. 생각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찾아와서 상담하고 싶은 지혜를 갖춘, 향기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죽는 날까지 공부하려고 합니다.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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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자
너대니얼 호손 / 김욱동 / 민음사 / 432
(2016. 4. 9.)




  이 들장미 덤불은 기묘한 우연으로 지금까지 역사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본디 들장미 덤불을 뒤덮고 자라던 우람한 소나무들과 참나무들이 쓰러지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황량한 옛 황야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인자, 아니면 꽤 믿을 만한 근거가 있듯 성자 같은 앤 처친슨이 감옥 문 안으로 들어갈 때 그녀의 발바닥이 닿은 땅에서 솟아닌 것인지, 이에 대해서는 지금 뭐라고 단정을 짓지 말기로 하자. 지금 막 저 불길한 감옥 문에서부터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들장미 덤불을 그렇게 직접 발견했으니 우선 그 꽃 한 송이를 꺽어 독자들에게 선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꽃 한 송이가 어쩌면 이 야이기 도중에 만나게 될지도 모를 어떤 향기로운 도덕의 꽃을 상징하거나, 아니면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을 다룬 이 이야기의 어두운 결말을 좀 더 밝게 개 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P.9)



  이 세상에는 숙명이라는 것, 말하자면 억누를 수도 뿌리칠 수도 없는 운명적인 힘을 지닌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어서,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일평생을 어떤 색깔로 물들게 한 어느 큰 사건이 일어난 장소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유령처럼 맴돌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삶을 슬프게 물들인 색깔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런 감정을 억누르기가 더욱더 어려운 법이다. 헤스터의 죄와 치욕은 그녀가 땅속에 박아 놓은 뿌리였다.
(P.52)



  펄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헤스터 프린이 숙명적으로 가슴에 달지 않으면 안 도는 그 징표를 자신도 모르게 어쩔수 없이 떠올리는 것은, 이론 옷이나 이 아이의 외모가 풍기는 두드러진 특색 때문이었다. 아이의모습은 다른 형체를 갖춘 주홍 글자요, 살아 숨 쉬는 주홍 글자가 아니던가! 어머니 자신이, 마치 치욕의 묽은 불길이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태워 버리는 바람에그녀가 품은 생각도 모두 그 모양을 지니게 된 것처럼, 주홍 글자와 꼭 닮은 것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냈다. 병적이라고 할 만큼 교묘한 창의성에 아낌없이 시간을 들여,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죄와 고뇌의 징표 사이에서 유사한 것을 창조했다. 그러나 실제로 펄은 이 두 가지 모두였다. 또 그 아이가 이 두 가지를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헤스터는 그 아이의 외모에 주홍글자를 그렇게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P.84)



  딤스데일 목사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 줄기 섬광이 구름에 뒤덮인 하늘 사면팔방에 번쩍거렸다. 밤하늘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자주 볼 수 있듯이 망망한 허공 속에서 불타다 사라져 가는 유성이 만들어 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광채가 어찌나 강렬한지 하늘과 땅 사시에 있는 두터운 구름층을 골고루 환히 비춰 주었다. 모든 것이 하나같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도덕적 의미를 주고 있는 듯한 특이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목사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해스터 프린은 가슴 한가운데 희뿌옇게 빛나는 수놓은 글자를 단 채, 펄 자신도 한 상징이며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인 듯 제각기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하게도 대낮같은 밝은 이상하고도 장엄한 광채에 휩싸여 서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온갖 비밀을 들추어내는 빛이요 서로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을 한데 뭉치게 해 줄 새벽과 같았다.
(P.156)



  사람은 오랫동안 남몰래 심한 고통을 당하면 병적일 정도로 내성적으로 변하여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대자연 전체에 자기 중심주의를 확장하여 마침내 하늘 자체가 자신의 영혼의 역사와 운명을 기록하기에 적합한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본 목사가 흐릇한 붉은 광채로 나타난 큼직한 글자를 - 바로 그 'A'자 말이다. - 본 것은 오직 그의 눈과 가슴속의 질병 탓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마침 그때 그 지점에 보였던 것은 구름 사이에서 흐릿하게 불타오르는 유성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죄읙식에 가득 찬 그의 상상력이 빚어낸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적어도 그 형체가 너무 몽롱했기 때문에 다른 죄를 지은 사람이 보았더라면 아마 다른 상징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P.158)



  이제 헤스터 프린은 치욕을 겪었던 처음 무렵과 똑같은 처지에 있지는 않았다. 그동안 몇 해가 바뀌었다. 펄도 이제 어느덧 일곱 살이 되었다. 환상적으로 수놓은 주홍 글자가 가슴에 빛나는 그 아이의 어미는 벌서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눈에 낯익은 존재가 되었다. 세상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공적이건 사적이건 이해나 편의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흔히 그러하듯이, 헤스터 프린에 대해서도 마침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일종의 애정 같은 것이 싹트게 되었다. 인간의 천성이 이기심에 작동하지 않는 한,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성이 지닌 장점이다. 본래의 적대감을 끊임없이 새롭게 건드리지 않는 한, 미움도 조금식 조용히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P.165)



  내 주홍글자는 가슴속에서 남몰래 불타고 있소!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지난 7년 동안 세상을 속이느라고 괴로워하던 끝에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의 눈을 바라본다는 게 얼마나마음의 위안이 되는지 당신은 잘 모를 거요! 만약 내게 친구가 있어서, 설령 세상에 더없는 원수라도 말이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칭찬이 신물이 날 때면 날마다 찾아가 나야말로 세상의 어느 죄인보다 가장 추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밝힐 수만 있다면, 그 덕택에 내 영혼은 그 생명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소. 이만큼의 진실만 있더라도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위선일 뿐이오! 모두가 허무일 뿐이오! 모두가 죽음을 뿐이오!
(P.211)



  가엾은 목사! 꿈같은 행복의 유혹을 받아 목사는 생전 처음으로 끔찍스러운 죄악의 손아귀에 자진해서 몸을 내맡겼다. 그러자 죄악의 독소가 그의 정신 조직 속으로 그토록 빠르게 전염되어 골고루 퍼졌다. 그 독소는 축복 받은 총동을 모두 마비시키고 악의 충동을 모조리 활짝 깨어나게 했다. 경멸이며 냉혹함이며 까닭 없는악의며 근거 없이 죄를 저지르려는 욕망이며 선하고 성스러운 것이라면 무턱대고 조롱하려는 충동이 모두 깨어나 한편으로는 그를 놀라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유혹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히빈스 노파와 만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목사가 악인들과 사악한 악령들의 세계에 동감하고 친교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따름이다.
(P.225)


  헤스터로서는 펄이 가정을 꾸민 낯선 지방보다는 이 곳 뉴잉글랜드에서 좀 더 진실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죄를 범했고, 이곳에서 슬픔을 당했으며, 또한 이곳에서 속죄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에 다시 돌아와 그 상징을 다시금 가슴에 달았다. 그 뒤로 그 징표가 그녀의 가슴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괴롭고 수심에 잠긴 헤스터의 헌신적인 삶이 이어지면서 주홍 글자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와 멸시를 받는 낙인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두렵지만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 어떤 상징이 되었다.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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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중독
하지현, 엄기호 / 위고 / 196쪽
(2016. 4. 10.)



열정페이말로라는 현혹스러운 단어로 인턴이라는 대중적인 단어로 아직은 준비 중이라는 거짓말 아래 쉽게 청년들은 임금을 착취하는 현상들과

아직까지 준비중이라는 계속 공부중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현재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부중독에 대한 사회문제를 풀어헤쳐 보고 있다.
사회에서 원하는 한 몫 즉 1인분이 되기 위한 아직도 계속 공부 중인 대학 5학년 청년들의 문제에 대해서

사회에 도전해서 깨지기를 무서워하는 사회 현상인가, 아니면 자존감을 죽여버리는 사회의 해악인가를 생각해보게 해준다.




  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똑똑한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내가 펼치는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사례'에 학생들이 감탄한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눈동자들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찾기가 힘들다. 짝짝짝. 서커스 보고 박수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관객이 떠나고 난 다음 빈 서커스장에서 목에 족쇄를 차고 앉아 있는 원숭이가 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가르치는 내가 이런데 배우는 학생들의 입장은 어떨까?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그들 역시 원숭이가 된 느낌이라고 한다. 배우긴 배우는데 뭘 배우는지 모르겠고, 배웠기는 배웠는데 할 줄 아는 건 없다. 배워서 알면 그 아는 것을 익혀서 할 줄 아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으로 만드는 익힘의 과정은 공부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이런 공부의 과정은 삶의 무능력자들만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똑똑하되 명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하나를 배워 다른 하나에 적용할 줄 아는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내가 배운 하나와 다르면 멘붕하고 열폭한다. 그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럴수록 사람들은 더 '공부'한다. 공부만 한 것이 문제의 근원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격이다. 자기 자식과 문제가 생기면 자식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거나,혹은 서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떨어져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하는데 반대로 상담을 공부하러 간다. 상담을 공부해서 자식을 대하는 기술이 늘어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P.6)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내가 처한 현실이나 난처함이 나만의 것이아니라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 공부의 과정이다. 동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P.9)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를 구겨 넣는 방법, 맞추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이 두 개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우리는 적응을 해나가는 거계죠. 그런데 일부 친구들의 자아 중심성의 세게에서는 나를 구겨 넣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환경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환경이 알아서 바뀌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이게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여긴 왜 이래?" 이런 말을 많이 해요. 할아버지들이 태국 여행 가면 많이 하는 얘기 있잖하요. "여긴 왜 이래?"
(P.63)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토론식 수헙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견을 만든다는 것은 다른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그 속에서 자기 생각을 만들어나가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누구나 의견을 말할 수 잇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답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보니까, '아니, 당신은 교수니까 알고 있잖아, 정답을 애기해주면 되지 왜 자꾸 귀찮게 우리더러 토론하라고 하면서 민망하게 만드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죠.
(P.66)



  교육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칠 수 없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쳐야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미분과 적분은 가르치치 않으면 배울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학교가 필요한 것이고 교과과정이 필요하죠. 반면 인성은 가르칠 수는 없ㄱ고 삶의 과정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걸 지금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것이죠. 가르칠 수 없는 걸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 저는 이게 정확하게 삶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P.120)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틀 밖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공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죽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훨씬 더 영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꼭 책을 씁니다. 꼭 학원을 해요. 결국 자신의 성공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거에요. 본인이 그러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죠. 결국 한국에서 블루오션은 공부밖에 없어요. 출판계도 레드오션이잖아요. 그런데 출판학교는 잘되고 있어요. 출판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말에요. 이런 식으로 지금 공부 산업만 블루오션이 된 거죠.
(P.129)


 

  저는 "너 하고 싶은 뭐니?" 끝없이 물어봐요.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산하거든요. "그걸 위해서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제가 상담하는 것이 주로 그런 거죠. "저는 애니메이션이 좋아요" 그러면 "그걸 위해서 뭘 할까?" 의논을 해요.
(P.164)


  지능의 영역이란 낯선 상황에 잘 적응하기 위해 지금 이곳이 굴러가는 보이지 않는 이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거든요. 그 이치를 깨달아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쌓는 것이 핵심이죠. 공부라는 것은 그 지능이 실제 내 삶에서 실행 능력을 높여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백데이터들을 모이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덧들이 모여서 인포메이션이라는 정보체가 만들어지면 그걸 지식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런 지식을 통해서 여러 영역에서 비슷한 맥락들을 공부하다 보면 여러 군데에 다 통용되는 하나의 정수를 찾아내게 돼요. 그럼 우리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고 하죠.
(P.167)


  학생들이 "이걸 공부한다고 제가 뭔가가 될 수 있나요?"라고 하는 말을 단지 실용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직업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혹은 살아가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를 묻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걸 공부하는 것이 자신을 무엇으로 어떻게 성장시키는가'에 대한 질문이죠.
  이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사람의 성장에 대해 '성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공부를 통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수긍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공부를 하는 자가 아니라 공부를 시키는 자가 공부 말고는 시킬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그저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키는 자의 '공부 중독'이에요.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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