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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본을 읽다
강신준 / 길 / 378쪽
(2016. 01. 25.)

 

 

경제에서 임금이 갖는 성격은 참으로 요상합니다. 우선 임금에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두 편이 관계합니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그것은 수입인 반면 임금을 주는 기업 입장에서는 지출 항목에 해당하지요. 노동자에게는 임금이 많을수록 좋지만 기업에게는 적을수록 좋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노동자의 경제와 기업의 경제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각기 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경제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입니다. 그리고 한쪽의 경제가 성공하면 다른 한쪽의 경제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것을 적대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경제가 이처럼 두 개이기 때문에 경제를 잘되게 하기 위한 경제학도 당연히 두 개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를 위한 경제학과 기업을 위한 경제학이 바로 그것이지요. 한국에서는 이들 두 경제학 가운데 하나만 소개되고 다른 하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이 책에서 소개하려는 것은 그 나머지 다른 하나의 경제학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자본> 즉 노동자를 위한 경제학입니다. 이 경제학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억울함의 진정한 원인을 찾아내는 길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자본>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P.22)

 


  마르크스는 의지와 현실의 간격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의자가 변혁하고자 하는 사회가 '완전히 응고되어버린 결정체가 아니라...... 지속젹으로 변화하는 유기체'(제1권: 48)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명은......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단계로 이행하고 나면 곧바로 다시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요컨대 경제생활은 생물학이라는 다른 영역에서의 발전사와 비슷한 현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제1권: 59)
  이 법칙이 바로 변증법입니다. 사회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조직체입니다. 인간은 부모의 몸을 빌려 출생한 다음 충분히 성장을 하고 나면 늙어가면서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불려주고 소멸하는 과정을 순서대로 밟아나가는 유기체입니다. 사회도 이런 유기체의 발전과정을 똑같이 밟아갑니다. 이런 발전과정에서는 모든 유기체가 앞선 유기체에서 비롯되고 자신도 또한 다음 유기체의 근원을 이룹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 없이 태어날 수 없으며 자신도 또한 다음 세대의 부모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즉 부모와 자식이 세대를 이어가는 형태로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도 봉건제라는 부모에게서 탄생한 자식이며 자신도 미래의 새로운 경제체제의 부모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형명이 과거와 단절되는 헝태가 아니라 과거를 전제로 그것과 연속성을 오지하면서 이루어져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P.44)

 


  자본주의에서 부가 상품이며 부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노동입니다. 그래서 개미처럼 열심히 노동을 하고도 막상 손에 쥐는 부의 크기가 보잘것없는 까닭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 교환가치의 크기를 결정하는 노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산과 소리를 분리하는 교환을 통해서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에게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자본>의 첫째 안내판인 '혁명을 일으킨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이 이처럼 두 개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자신의 경제학에서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강조합니다.
(P.73)

 


  하나의사용가치는 다른 사용가치와 만나면서 교환을 위해 가치가 필요하고 그 가치는 형태로 표현되기 위해 일반적 가치형태를 위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을 포기하고 상대방과 동일한 기분을 사용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우리'가 되어야만 비로소 교환에 성공합니다.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것이 사회적 관계의 발전방향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두 사람의 '나'가 만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합쳐지는 '우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성숙해갈 것이며 자본주의의 변혁도 '나'를 강조하는 방향이 아니라 '우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만 성공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화폐는 바로 바로 그것을 몸소 말해주고 있습니다.
(P.82)

 


  우리는 가치가 늘어나는 자본유통의 비밀이 노동자의 여가시간을 노동시간으로 바꾸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구매과정은 예를 들어 '화폐(100원)-[생산수단(60원)+노동력(40원)]'이 됩니다. 그런다음 노동력은 구매된 가치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만큼 소비됩니다. 생산수단은 가치가 변동하지 않습니다. 가치는 인간의 노동으로만 이루어지니까요. 단지 생산수단은 소비된 노동을 담아주는 그릇 역활을 할 뿐입니다. 노동이 소비된 결과 노동생산물, 즉 상품이 나옵니다. '[생산수단(60원)+노동력(40원→80원)]...... 상품(140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품의 가치(140원)=생산수단의 가치(60원)+소비된 노동력의 가치(80원)'가 됩니다. 그런 다음 자본유통의 마지막 단계, 즉 생산된 상품이 판매되어 화폐로 되돌아오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상품(140원)-화폐(140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유통의 전모입니다. 두 번의 교환이 모두 정상적으로 동일한 가치끼리 이루어졌지만 가치는 늘어났습니다. 구매된 상품과 파매된 상품의 가치가 다르고 그 가치의 차이는 노동력의 소비가 구매된 가치보다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을 바꾼 원리, 즉 교환을 통해 한 사람의 노동이 다른 사람의 수중에 이전되는 바로 그 비밀이 이렇게 해서 모두 해명된 것입니다.
(P.118)

 


  '노동자가 사실상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소비하던 노동시간의 일부가 자본가를 위한 노동시간으로 전화한다. 즉 변하는 것은 노동일의 길이가 아니라 그것이...... 분할되는 비율인 것이다. (제1권:438)'
  일반적으로 생산력의 증가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계의 발명을 인류 문명의 발전으로 간주합니다. 노동의 고단함을 줄여주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두 가지이고 생산력의 증가는 노동시간 전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노동자를 위한 노동시간만을 줄일 뿐입니다. 기계로 인해 업무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근무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줍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노동의 절약은 노동일의 단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제1권:447)'
(P.136)

 


  자본주의 모순의 본질은 노동하는 사람은 가난하다는('노동 빈곤')이상한 현상에 있고, 그것은 사전에 결정된 임금과 사후에 만들어지는 잉여가치의 격차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의 결정은 아직 분배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모두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처방은 분배영역이 아니라 그 이전의 생산영역에서 챶아야 합니다. 정해진 임금 이상으로 과도하게 잉여가치가 '생산'된 것이 바로 격차의 주범이니가요. 그래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경제 양극화를 해소할 방안은 2013년 대선에 쟁점이 된 것처럼 분배의 대상을 한정하는 문제(선별복지냐 보편복지냐)나 대기업의 업종을 제한하거나 혹은 기부의 확대를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최저임금과 사회적 임금(의료, 교육, 연금, 산재 등)의 인상과 노동시간의 단축에 있습니다.
(P.169)

 


  자본주의 생산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재생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임금은 노동자 자신을 위한 노동시간입니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계속 구매하는 데 필요한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로 조달됩니다. 자본주의 생산의 두 요소는 모두 노동자가 만들어서 공급하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두 노동시간이 각각 자본과 노동자 자신을 모두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가는 물론 자본주의 자체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산체제입니다.
  '노동자는 끊임없이 객관적인(타인을 위한) 부를 자본...... 으로서 생산하고, 자본가는 끊임없이 노동력을 주관적인(자신을 위한) 부의 원천으로서 생산한다. ...... 노동자의 끊임없는 재상산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제1권:783)'
(P.186)

 


  교환이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힘이 있다면 노동 빈곤이나 공황은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 현상일 뿐 자본주의와는 무관한 것이 됩니다. 마라크스는 제2권에서 교환에는 그런 능력이 없으며 노동 빈곤과 공황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하늘의 섭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마르크스는 교환의 능력을 신봉하는 위의 경제학 이론들을 분석하고 어떤 점에서 틀렸는지를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이들 경제학 이론에 대한 비판을 따로 모아 <잉여가치론>이라는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P.217)

 


  임금과 이들 잉여가치에서 비롯된 소득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소비하는 노동자가 직접 만들어내지만 잉여가치는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즉 잉여가치는 타인에게 의존합니다. 그런데 이 잉여가치가 바로 자본주의의 토대입니다. 제3권에서 마라크스는 잉여가치에서 비롯된 소득이 기생소득이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매우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변혁의 지렛대가 어디에 있으며 누가 그것을 쥐고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바로 이들 소득의 기생적 성격을 자립적 성격으로 바구는 것이 지렛대이며 이들 소득의 원천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그 지렛대의 주인인 것입니다.
(P.252)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구조는 봉건사회의 경제적 구조에서 생겨났다. 후자의 해체가 전자의 요소들을 해방시켰던 것이다. (제1권:963)......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 이 생산양식은 자신을 파괴할 물적 수단을 창출해낸다. 이 순간부터 사회의 태내에서는 이 생산양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힘과 열정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 그리하여 이 생산양식은 소멸한다. (제1권 1020~21)'
  자본주의는 봉건제 내부에서 출생하여 성숙하다 결국 봉건제의 소멸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이후는 어떻게 될까요? 자본주의를 계승할 다음 생산양식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출생하여 성숙해가고 결국 자본주의를 소멸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그것이 변증법의 자연법칙입니다.
(P.273)

 


  자본주의가 봉건제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개이적 생산력을 사회적 생산력으로 조직함으로써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생산력의 발전을 이끈 유인이 이윤이었고 이제 그 이윤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자본주의적 생산력도 발목이 잡힙니다.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더 발전하기 우해서는 발목을 잡고 있는 이윤을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의 퇴장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이전의 모든 생산양식이 생산력 발전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소멸해간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생산력의 한계에 부딪힌 바로 그 지점에서 소멸의 운명을 맞으면서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이행할 것입니다.
(P.280)

 

  지대의 증가와 자본축적은 서로 모순된 관계입니다. 지대의증가가 자본축적에 기생하기 때문이지요. 지대는 자본주의가 손조롭게 발전하는 동안에는 함께 증가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가 정체되면 함께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의 생산력이 한계에 부딪히는 곳에서 축적은 멈추고 지대의 신기루도 함께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10년'으로 알려진 일본과 2008년 공황 이후 미국의 주택들에서 이런 거품이 어떻게 홀연히 사라지는지를 이미 보았습니다.
  타인의 노동에 의존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변혁되고 모든 사람의 소득이 자신의 노동에만 의존하는 생산관계가 성립하고 나면 지대는 기생 할 수 있는 토대를 잃고 소멸할 운명입니다. 토지소유라는 허공의 신기루는 자본주의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지소유의 사회화가 부동산 문제의 올바른 해답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 생산물의 교환가치에 기초한 것이지 토지나 그 비옥도의 차이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만일 자본주의적 사회형태가(지양된다면) 토지생산물은 그 속에 포함된 현실적 노동시간보다 ...... 부풀려진 가치로 판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토지소유주 계급의 토대는 붕괴될 것이다. (제3권:897)
(P.322)

 


  마르크스는 삼위일체 정식의 모순이 제1권의 본질적인 논의를 통해서만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본>의 이정표에 해당하는 물음, 즉 사회변혁의 목표에 대한 물음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노동자이 여가시간을 타인을 위한 노동시간으로 바꾼 생산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러크스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자발적 기부나 국가의 소득 재분배 정책과 복지 정책으로 자본주의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일시적인 처방에 불과해보입니다. 그것은 분배관계의 조정일 뿐 원인이 되는 생산관계의 변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P.334)

 


  <자본>은 예언서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제시한 답도 메시아와는 다른 것입니다. <자본>이 제시한 답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변혁입니다. <자본>이 제시한 답은 메시아의 예언이 아니라 개미 자신의 손에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자본>의 답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미가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 답은 실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미의 실천에는 중요한 장애요인이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노동을 멈추는 방법은 생산수단의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이고 이것은 사회 구성원 다수가 동의해야만 이루어집니다.
(P.356)

 

 

 

 <강신준 교수님의 자본론 강의 동영상>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중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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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강신준 / 사계절 / 240쪽
(2016. 01. 16.)

 


  <자본>이 교환의 수수께끼를 풀기 전까지 경제학의 본디 이름은 'political economy'였습니다. 그런데 <자본>이 푼 해답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려고 경제학의 주체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고 이름까지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경제학의 <자본>이 푼 해답을 담고 있는 경제학과 그 해답을 기피한 경제학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자를 노동자(또는 개미) 경제학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자본가(혹은 베짱이) 경제학이라고 부릅나다. 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 자본가를 부르주아라고도 하기 때문에 각각 프롤레타리아 경제학, 부르주아 경제학이라고도 합니다. 앞서 제테크의 경제학과 <자본>이 전혀 다른 경제학 책이라고 했는데 이제 그 차이점을 하나 더 알게 된 셈이군요. 제테크의 경제학은 바로 부르주아의 경제학입니다. 물론 <자본>은 프롤레타리아의 경제학이고요.
(P.69)

 


  자본주의에서도 도구는 진화하고, 도구의 진화는 당연히 노동시간을 줄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는 데만 사용되고,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인가요? 앞에서 임금은 개미들의 생계비로서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합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도구가 발달할수록 어떤 물건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개미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데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떨어드리는 데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혼동하지 말라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 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노동의 절약은 노동일(노동자들의 하루 노동시간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입니다.)의 단축을 목적으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일정 상품량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단축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1권 447쪽)
(P.111)

 


  생활필수품의 가격 하락으로 개미의 몫을 줄임으로서 베짱이의 몫을 늘리는 방식에는 처음부터 전제가 있습니다. 개미와 함께 나누어야 할 부의 전체 크기, 즉 개미의 총 노동시간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초 도구의 진화가 개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베짱이에 의해 이루어지고 베짱이의 목적은 자신의 몫을 늘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구조에서 도구의 진화가 줄이는 노동시간은 오로지 개미의 몫을 줄이는 데만 사용될 뿐, 개미의 총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히 도구의 진화가 이루어지는데도 개미의 노동시간이 전혀 줄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P.113)

 


  자본주의에서 부자가 되려면 반드시 타인의 노동을 빼앗아야 하는데, 모든 개미들이 자본가가 되어 버리면 노동을 빼앗을 타인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개미가 부자(또는 자본가)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생산자 협동조합이나 종업원 지주 회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개미 가운데 일부가 자본가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개미가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아닙니다.
(P.125)

 


  개미는 자신의 노동으로 자본을 만들어 주는 셈이고, 자본은 스스로 자본을 만드는 셈입니다. 자본이 계속해서 자본을 새끼치는 방식, 바로 그것이 베짱이의 대물림 속에 숨겨진 인위적인 장치입니다. 자 이제 베짱이가 대물림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치는 얼마나 오래 작동하는 것일까요? 이 장치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장치를 교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장치의 결함이 드러나야 합니다. 동시에 그 결함을 고칠 방법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자본>이 판도라의 상자인 까닭은 바로 이 결함과 그것을 고칠 방법을 모두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P.131)

 


  임금이란 원래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입니다. 가격은 쌍방간에 결정되는 것으로, 한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결정되는 교환에서 마주 선 두 사람은 개미와 베짱이입니다. 즉 임금은 개미의 의사를 무시하고 베짱이가 혼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압니다. 그럼에도 베짱이는 자신의 대물림을 위해 임금을 마음대로 결정해야 합니다. 기술자들은 먼저 임금의 모순에 두 가지 장식을 달아 놓았습니다. 하나는 임금의 명칭이고 다른 하나는 임금의 지불 시기입니다.
  먼저 임금의 명칭을 보면 아주 다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급, 일급(일당), 월급, 연봉 이렇게 다앙햔 임금의 명칭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 노동시간을 타나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 노동시간은 개미들이 일하는 시간이지 개미들이 임금으로 받아 가는 노동시간이 아닙니다. 임금의 명칭이 이처럼 노동시간 전체의 길이를 나타내면 개미들은 자신의 노동시간 가운데 일부를 베짱이의 몫으로 빼앗긴다는 사실을 쉽게 잊게 됩니다. 개미는 자신의 총 노동시간을 남김없이 모두 임금으로 돌려받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베짱이가 챙겨가는 몫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그 점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노동의 가치(임금)는 언제나 노동의 가치생산물(총 노동시간)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 자본가는 언제나 노동력을 그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오랫동안 사용하기 때문이다.  (1권 740쪽)
  개미의 착각을 더 확실하게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장식은 임금의 지불 시기입니다. 임금은 반드시 개미가 자신의 몫은 물론 베짱이의 몫가지 모두 하고 난 다음에야 지불됩니다. 즉 임금은 개미가 모든 노동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후불 형태로만 지불됩니다. 사실 개미는 자기가 벌어 온 돈 가운데 일부를 임금우로 돌려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짱이는 개미가 자신의 몫가지 포함한 돈을 벌어 오면 그중 일부를 개미에게 임금으로 되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노동자는 늘 자본가에게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미리 꾸어 주는셈이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격에 대해 지불을 받기 전에 그것을 구매자로 하여금 소비하게 하며,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항상 신용 대부를 해 주는 셈이다.(1권, 259쪽)
  이런 장식들 때문에 개미들은 자신의 임금에 의문을 품지 않고 그것이 마땅한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짱이가 개미의 노동 가운데 일부를 빼앗아 간다는 사실은 감추어져 버리죠.
(P.136~141)

 


  마르크스의 <자본>이 인류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까닭은 진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은 임금을 개미의 총 노동인 양 혼동시킴으로써 베짱이의 몫을 감추려 했다는 사실과, 개미의 총 노동시간 속에는 개미가 받아 가는 임금 외에도 베짱이가 빼앗아 가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결국 <자본>에 의해 결함이 드러난 이들 장치는 벌써 상당 부분 교체되었습니다. 개미들은 <자본>이 일러 준 방법에 다라 이들 장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임금은 베짱이가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미와 베짱이가 흥정을 통해서 결정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개미와 베짱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임금 흥정을 우리는 '단체 교섭'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단체'라는 이름이 붙는 이유는, 하나의 베짱이가 다수의개미를 고용하므로 베짱이와 흥정하기 위해서 개미들은 집단을 이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본>의 내용이 이미 공개되고 따라서 이들 장치의 결함이 공공연하게 드러난 유럽의 주요 나라들에서는 임금이 노동조합과의 교섭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예 노동조합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머지 노동자들 중에서 단체 교섭을 제대로 하는 노동자는 전체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앞으로 <자본>에 담겨 있는 진실이 개미들에게 충분히 알려지기만 하면 우리나라도 분명 유럽의 주요 나라들을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P.145)

 


  마르크스는 위태롭게 운행되는 버스에서 승객들이 내리지 못한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운행 중인 버스에서 내리려면 버스가 위태롭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버스 승객들인 원래 저마다 가야 할 목적지들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려면 자기가 가야 할 목적지로 태워다 줄 다른 대안이 마련되어야 했던 것이지요. 버스가 위태롭다고 해서 아무 대책 없이 그냥 내리기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P.191)

 


  민주주의는 개미들을 사회적 집단으로 조직한 다음 교환이라는 경제 법칙을 통해 자본주의를 점차 사회화하면서 '자유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갑니다. 민주주의라는 지렛대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이 잘 조직된 사회일수록 자유의 나라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앞 장에서 자유의 나라에 훨씬 가까이 다가섰다고 한 북유럽의 여러 나라가 바로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당이 잘 발달된 나라들입니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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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것 (고병권 선생님의 철학 이야기)

(너머학교 열린교실 01)

고병권 / 너머학교 / 136쪽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한답니다. 그런데 그 잘 살아보겠다고 벌인 일이 오히려 자기 삶을 망칠 수도 있음을 함께 살펴보았잖아요. 잘 사는 데도 기술이 필요해쇼. 바로 그 기술이 철학이지요.

  철학은 여러 기술 중에서도 특히 '생각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생각 좀 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걸 의미해요. 즉 철학자들이 '잘 산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롭게 산다'는 뜻입니다.

(P.33)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난 그걸 해내지 못할 거야.' 혹은 '그건 너무 창피한 일이야. 난 할 수 없어.' 그러면서 자신이 할 수도 있었을 일들을 포기해 버립니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 채 죽습니다.

  난 아직 어리니까, 난 여자니까, 난 아저씨니까, 난 노인이니까, 난 가난하니까, 난 모이 약하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너무 빨리 무언가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낼 수도 있었을 많은 일들을 내버려 둔 채 삶을 마감합니다. 

  삶을 가꾼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한 우리의 능력들을 마음껏 펼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철학은 그런 능력을 펼치는 기술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용감하면서 현명하게, 할 수 없다고 믿었던 일들을 해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겠죠.

  "우와, 내가 이걸 해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 자신이 대단한 능력자들임을 깨닫는 일이지요.

(P.40)




  철학하며 산다는 것은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당연히 생각 없이 사는 것과 반대이지요. 솔직히 우리는 생각 없이 살 때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거나 의식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생각하자'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다시 생각하자'거나 '달리 생각자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명령에 따라 생각하는 것, 과거에 해 오던 대로 생각하는 것, 자기 편견에 빠져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남들의 말이나 관습, 자신의 편견에서 빠져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마치 꿈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꿈속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는 생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P.61)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의심해 보는 일이기도 해요. 철학자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왜'냐고 묻곤 하지요. 당연한 것에 '왜 그럴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조금씩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 익숙한 일은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을 마주칠 때, 그때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P.73)




  다르게 생각하고,다르게 살아가는 것은 언제 가능할까요? 우리가 뭔가를 깨달았을 때부터일 겁니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아, 이제부터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뭔가를 깨닫는 것, 우리는 그것을 '공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게 될 때, 그래서 다르게 살게 될 때, 뭔가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즉 '공부했다'는 것이지요. 철학을 하는 것은 결국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철학이라는 과목을 공부한다는 게 아니라, 철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공부한다는 말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P.83)




  공부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자유란 공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지요. 편견이나 습관, 통념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자유를 느낍니다. 

  "나는 여기까지야."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런 한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갈 때 자유가 시작된답니다. 그러고 보니 한계는 우리의 자유가 끝나는 곳이 아니라 시작되어야 하는 곳이라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여러 번 말했듯이, 혼자서는 자기 한계를 넘어서기 어렵습니다. 공부할 때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철학은 친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누군가의친구가 되세요.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운명과 친구가 되세요.

  '철학을 한다'는 말은 참으로 여러 말과 통하는 것 같네요. 행복하게 산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 자유롭다는 것, 친구를 만든다는 것, 이 모든 말들이 '철학을 한다'는 말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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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 서병훈 / 책세상 / 254쪽
(2016. 01. 11.)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읽는 이의 영혼을 울릴 것'. 이것이야 말로 고전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 아닐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쯤에 나온 책이다. 이 책은 그가 살았던 영국을 비롯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독자들을 겨냥해 쓴 것이다. 그런데 밀의<자유론>을 곰곰이 읽다보면 자꾸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마치 밀이 2000년대 초엽의 한국 사회와 한국인, 특히 한국의지식인들을 향해 이 책을 준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밀의 <자유론>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경구로 가득하다.
(P.8)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확신이 넘칠 수 있을까' 의아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할 정도다. 사회가 어지럽다 보니 독선에 빠진 사람들을 나무라는 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글조차 대개는 아집과 주관 사이를 맴돌고 있는 것 같다. 독선이 독선을 탓하는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주의의 시대를 살면서도 모두가 불만스러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가 교차되는 현실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자유론>은 이 모순율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이라면 <자유론>에 줄을 그어가며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
(P.9)

 


  집단의 생각이나 의사가 일정한 한계를 넘어 개인의 독립성에 함부로 관여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런 한계를 명확히 하여 부당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정치적 독재를 방지하는 것 못지않게 긴요하다.
(P.25)

 


  나는 이 책에서 자유에 관한 아주 간단명료한 단 하나의 원리를 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사회가 개인에 대해 강제나 통제 - 법에 다른 물리적 제재 또는 여론의 힘을 통한 도덕적 강권-를 가할 수 있는 경우를 최대한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 개인이든 집단이든 -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선한 목적에서라면 그 사람에게 총고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며, 설득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간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강제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을 억지로라도 막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결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P.32)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견이 본인에게는 모를까 다른 사람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고 따라서 그 억압이 그저 사적으로 한정된 침해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사람에게까지 -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P.44)

 


  자기 생각에 명확하게 맞설 수 있는 모든 의견들에 대해 소상하게 잘 파악하고 이런저런 반박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사람 - 즉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이나 듣기 싫은 소리를 피하기보다 그것을 자청해 나서고,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을 봉쇄하지 않는 사람 -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자신의 판단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P.51)

 

 

  고대의 가장 위대한 웅변가라고 할 수 있는 키케로는 자기 문제에 대해 하는 것만큼 이나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의주장을 이해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진리를 찾고하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변론술을 연마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을 꼭 따라야 한다. 그저 자기가 전공하는 분야에 대해서만 아는 사람은 실로 그 분야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사람이 제시하는 논가가 상당히 탄탄하고 따라서 다른 사람이 쉽게 공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자세히 알고 그 장단점을 꿰고 있지 않으면 왜 자신의 주장이 더 타당한지 설명하기 어렵다.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더라도, 자기 편 이론가들이 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나름대로 각색해서 정리한 근거 위에서 듣게 되면 별다른 효과가 없다. 그렇게 해서는 반대 쪽 주장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상대방이 왜 그런 주장을 펴는지 그 핵심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실제 그런 생각을 하고 있고 온 힘을 다해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내용 가운데 가장 그럴듯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의 진실을 가려내기 위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대하는 진리를 결코 얻을 수 없다.
(P.76)

 


  오늘날 공부깨나 했다는 사람들, 심지어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도 그들의 결론이 타당할지 몰라도, 그들이 내세우는 논거에 따라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그들이 왜 그런 마을 할 수밖에 없는지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도 잘 모를 수 있다. 자신의 주장 가운데 일부가 사실은 상대방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모른다. 그래서 서로 모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측면이 알고 보면 같은 내용을 담고 있고,  따라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주장 가운데서 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되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긴다.  저울의 추를 움직이듯 어떤 문제를 놓고 망설이는 사람의 생각을 확정해주는 진리, 정통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특정 판단을 내릴 때 따르게 되는 그런 진리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두 주장에 똑같이 귀를 기울이고, 각각의 가장 강력한 논거를 편견 이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도덕과 인간의 문제에 대해 진실한 지식을 얻으려면 이런 자세가 필수적이다.
(P.77)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은 기본적으로 철학과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부정형 질문으로 구성된다. 변증법은 어떤 문제에 대해 그 본질은 모른 채 그저 상식적인 수준의 지식만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본인은 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나아가 스스로의 무지를 깨달은 뒤 그 의미와 논거를 확실하게 파악한 바탕 위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고안된 최상의 기법이었다.즉 학생이 자신의 의견과 그와 반대되는 의견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 자신의 논거는 강화하고 상대방의 의견은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가르쳤다.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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