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자
너대니얼 호손 / 김욱동 / 민음사 / 432
(2016. 4. 9.)




  이 들장미 덤불은 기묘한 우연으로 지금까지 역사 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 본디 들장미 덤불을 뒤덮고 자라던 우람한 소나무들과 참나무들이 쓰러지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황량한 옛 황야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인자, 아니면 꽤 믿을 만한 근거가 있듯 성자 같은 앤 처친슨이 감옥 문 안으로 들어갈 때 그녀의 발바닥이 닿은 땅에서 솟아닌 것인지, 이에 대해서는 지금 뭐라고 단정을 짓지 말기로 하자. 지금 막 저 불길한 감옥 문에서부터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 들장미 덤불을 그렇게 직접 발견했으니 우선 그 꽃 한 송이를 꺽어 독자들에게 선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꽃 한 송이가 어쩌면 이 야이기 도중에 만나게 될지도 모를 어떤 향기로운 도덕의 꽃을 상징하거나, 아니면 인간의 연약함과 슬픔을 다룬 이 이야기의 어두운 결말을 좀 더 밝게 개 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P.9)



  이 세상에는 숙명이라는 것, 말하자면 억누를 수도 뿌리칠 수도 없는 운명적인 힘을 지닌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어서, 바로 그것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일평생을 어떤 색깔로 물들게 한 어느 큰 사건이 일어난 장소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유령처럼 맴돌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삶을 슬프게 물들인 색깔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런 감정을 억누르기가 더욱더 어려운 법이다. 헤스터의 죄와 치욕은 그녀가 땅속에 박아 놓은 뿌리였다.
(P.52)



  펄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헤스터 프린이 숙명적으로 가슴에 달지 않으면 안 도는 그 징표를 자신도 모르게 어쩔수 없이 떠올리는 것은, 이론 옷이나 이 아이의 외모가 풍기는 두드러진 특색 때문이었다. 아이의모습은 다른 형체를 갖춘 주홍 글자요, 살아 숨 쉬는 주홍 글자가 아니던가! 어머니 자신이, 마치 치욕의 묽은 불길이 그녀의 머릿속을 온통 태워 버리는 바람에그녀가 품은 생각도 모두 그 모양을 지니게 된 것처럼, 주홍 글자와 꼭 닮은 것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냈다. 병적이라고 할 만큼 교묘한 창의성에 아낌없이 시간을 들여,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 죄와 고뇌의 징표 사이에서 유사한 것을 창조했다. 그러나 실제로 펄은 이 두 가지 모두였다. 또 그 아이가 이 두 가지를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헤스터는 그 아이의 외모에 주홍글자를 그렇게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P.84)



  딤스데일 목사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 줄기 섬광이 구름에 뒤덮인 하늘 사면팔방에 번쩍거렸다. 밤하늘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자주 볼 수 있듯이 망망한 허공 속에서 불타다 사라져 가는 유성이 만들어 낸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광채가 어찌나 강렬한지 하늘과 땅 사시에 있는 두터운 구름층을 골고루 환히 비춰 주었다. 모든 것이 하나같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도덕적 의미를 주고 있는 듯한 특이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목사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해스터 프린은 가슴 한가운데 희뿌옇게 빛나는 수놓은 글자를 단 채, 펄 자신도 한 상징이며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인 듯 제각기 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상하게도 대낮같은 밝은 이상하고도 장엄한 광채에 휩싸여 서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온갖 비밀을 들추어내는 빛이요 서로에게 속해 있는 사람들을 한데 뭉치게 해 줄 새벽과 같았다.
(P.156)



  사람은 오랫동안 남몰래 심한 고통을 당하면 병적일 정도로 내성적으로 변하여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대자연 전체에 자기 중심주의를 확장하여 마침내 하늘 자체가 자신의 영혼의 역사와 운명을 기록하기에 적합한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본 목사가 흐릇한 붉은 광채로 나타난 큼직한 글자를 - 바로 그 'A'자 말이다. - 본 것은 오직 그의 눈과 가슴속의 질병 탓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마침 그때 그 지점에 보였던 것은 구름 사이에서 흐릿하게 불타오르는 유성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죄읙식에 가득 찬 그의 상상력이 빚어낸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적어도 그 형체가 너무 몽롱했기 때문에 다른 죄를 지은 사람이 보았더라면 아마 다른 상징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P.158)



  이제 헤스터 프린은 치욕을 겪었던 처음 무렵과 똑같은 처지에 있지는 않았다. 그동안 몇 해가 바뀌었다. 펄도 이제 어느덧 일곱 살이 되었다. 환상적으로 수놓은 주홍 글자가 가슴에 빛나는 그 아이의 어미는 벌서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눈에 낯익은 존재가 되었다. 세상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공적이건 사적이건 이해나 편의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흔히 그러하듯이, 헤스터 프린에 대해서도 마침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일종의 애정 같은 것이 싹트게 되었다. 인간의 천성이 이기심에 작동하지 않는 한, 남을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성이 지닌 장점이다. 본래의 적대감을 끊임없이 새롭게 건드리지 않는 한, 미움도 조금식 조용히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P.165)



  내 주홍글자는 가슴속에서 남몰래 불타고 있소!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지난 7년 동안 세상을 속이느라고 괴로워하던 끝에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의 눈을 바라본다는 게 얼마나마음의 위안이 되는지 당신은 잘 모를 거요! 만약 내게 친구가 있어서, 설령 세상에 더없는 원수라도 말이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칭찬이 신물이 날 때면 날마다 찾아가 나야말로 세상의 어느 죄인보다 가장 추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밝힐 수만 있다면, 그 덕택에 내 영혼은 그 생명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소. 이만큼의 진실만 있더라도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위선일 뿐이오! 모두가 허무일 뿐이오! 모두가 죽음을 뿐이오!
(P.211)



  가엾은 목사! 꿈같은 행복의 유혹을 받아 목사는 생전 처음으로 끔찍스러운 죄악의 손아귀에 자진해서 몸을 내맡겼다. 그러자 죄악의 독소가 그의 정신 조직 속으로 그토록 빠르게 전염되어 골고루 퍼졌다. 그 독소는 축복 받은 총동을 모두 마비시키고 악의 충동을 모조리 활짝 깨어나게 했다. 경멸이며 냉혹함이며 까닭 없는악의며 근거 없이 죄를 저지르려는 욕망이며 선하고 성스러운 것이라면 무턱대고 조롱하려는 충동이 모두 깨어나 한편으로는 그를 놀라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유혹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히빈스 노파와 만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목사가 악인들과 사악한 악령들의 세계에 동감하고 친교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따름이다.
(P.225)


  헤스터로서는 펄이 가정을 꾸민 낯선 지방보다는 이 곳 뉴잉글랜드에서 좀 더 진실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죄를 범했고, 이곳에서 슬픔을 당했으며, 또한 이곳에서 속죄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에 다시 돌아와 그 상징을 다시금 가슴에 달았다. 그 뒤로 그 징표가 그녀의 가슴을 떠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괴롭고 수심에 잠긴 헤스터의 헌신적인 삶이 이어지면서 주홍 글자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와 멸시를 받는 낙인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두렵지만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 어떤 상징이 되었다.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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