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토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 박성수 / 문예출판사 / 340쪽
(2016. 2. 16.)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재산이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마라. 신용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러한 착각에 빠졌다. 이런점에 주의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지출과 소득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일단 세부적인 것까지 주의하는 노력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즉 당신은 매우 사소한 지출이 모이면 엄청나게 불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고, 무엇을 저축할 수 있었고 또 앞으로 무엇을 저축할 수 있을지 알게 된다.
<벤저민 플랭클린>
(P.41)




  '자본주의적' 형태의 경제와 이 경제를 운용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적합적'관계이지만 '법칙적' 상호의존관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벤저민 플랭클린의 예에서 분명히 했던 방식으로 직업으로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에 대해 이 책에서 잠정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신적 태도는 근대의 자본주의 기업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를 발견했고, 자본주의 기업은 그 정신에서 가장 적합한 정신적 추진력을 찾았기 때문이다.
(P.54)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적 구성 요소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러한 요소인 그 '직업' 사상과 - 앞서 말했듯이 순수한 행복주의적인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보면 그토록 불합리한- 직업 노동에 대한 헌신을 낳은 구체적인 '합리적' 사고와 삶의 형식이 어떤 종류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 우리의 관심대상은 모든 직업 개념에 내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특히 이 직업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비합리적 요소의 근원이다.
(P.66)




  '자본주의 정신'(물론 이 책에서 잠정적으로 사용된 의미에서)은 종교개혁의 일정한 영향에 따른 결과로만 발생할 수 있었다든다, 경제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종교개혁의 산물이라는 등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공론적 태제 역시 결코 옹호될 수는 없다. 이미 종교개혁 훨씬 이전에 몇 가지 중요한 자본주의적 영리기업의 형태가 있었다는 주지의 사실은 그러한 견해를 단적으로 부인한다. 오직 다음과 같은 것들만이 확인될 필요가 있다. 즉 그 '정신'의 질적 규정과 세계로의 양적 팽창에 있어 종교적 영향이 함께 작용했는지, 작용했다면 어느 정도인지 하는 점과, 자본주의적 토대에 입각하는 문화의 어떤 구체적 측면이 종교적 영향에로 소급되는지 하는 점이다.
(P.78)




  현세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낭비적 향락에 반대해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버렸다. 반면에 이 금욕은 재화 획득을 전통주의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익 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 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육욕과 외적 재화의 집착에 대한 투쟁은, 청교도 외에도 퀘이커교의 위대한 호교론자인 바클리가 입증했듯이, 합리적 영리 활동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재산의 비합리적 사용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비합리적 사용은, 특히 신의 뜻에 따라 개인과 전체의 생활 목적을 위해 합리적이고 공리주의적으로 사용하는 대신에 피조물 신격화로 비난된 본겅적 감각에 맞는 과시적 형태의 사치를 높이 평가하는 데서 나타난다. 합리적 사용은 재산가에게 고행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재산을 필요하고 실천적으로 유용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P.152)




  '나는 부가 증대될 때마다 종교의 내용은 그만큼 감소되었던 것을 염려한다. 따라서 나는 문제의 성격상 어떤 참된 신앙의 부흥이 오래 지속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근면과 절약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바로 부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가 증대하면 자만과 열정과 세속적 애착이 그 모든 형태로 또한 증가한다. 순수한 종교의 이러한 점진적 타락을 방지할 수단은 없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절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도록 권고하고,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절약하도록 권해야만 한다.' <존 웨슬리>
  금욕주의적 교육 효과를 낳은 점에서 우선 경제발전에 중요했던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 운동이 위에서 웨슬리가 말한 것과 같은 경제적 결과를 뚜렷이 드러낸 것은, 대개 순수한 종교적 열광의 정점이 이미 지나간 뒤에 신이 왕국에 대한 추구의 투쟁이 점처 냉정한 직업적 덕으로 해소되기 시작하여 종교적 뿌리가 서서히 발라죽고 공리주의적 현세가 나타난 이후의 일이다.
(P.156)



  거의 모든 종파의 금욕주의 문헌 전체는 생활을 위해 노동 이외의 기회를 갖지 못한 자들이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노동에 충실한 것이 신을 매우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적 금욕 자체는 아무런 새로운 점이 없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은 이러한 관점을 매우 강력하게 심화시켰을 뿐아니라 그 규범이 통용되기 위해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을 만들어냈다. 즉 이 노동을 직업(소명)으로,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가장 좋은 그리고 궁즉적으로 유일하기도 한 수단으로 파악함으로써 심리적 동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금욕은 다른 면에서 기업가의화폐 취득도 '소명'이라 해석하여, 위와 같은 특별히 노동 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분명한 것은 직업으로서의 노동 의무의 이행을 통한 신의 나라에 대한 배타적 추구와 교회 규율이 당연히 무산계급에 강제했던 엄격한 금욕은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 '생산성'을 강력히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P.159)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근대적 문화에 구성적 요소 중 하나인 직업 사상에 입각한 합리적 생활방식은 - 이것이 이책이 증명하려는 점인데 -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의 초두에 인용된 플랭클린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면, '자본주의 정신'이라 표현한 사고방식의 본질적 요소가 방금 전에 청교도적 직업 금욕의 내용으로 말한 것이며 단지 플랭클린의 경우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종교적 정초를 제외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근대적 직업 노동이 일종의 금욕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P.161)

 

<함께 들으면 좋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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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한다는 것
오항녕 / 너머학교 / 132쪽
(2016. 2. 10.)

 

  무언가를 적어서 기억하는 방식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이전의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하고, '역사를 남기기 시작한 시대'라는 뜻에서 역사시대라고 하여, 인간이 살았던 시대를 나누는 관점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P.37) 

 

   사관들이 생각했던 역사란 무엇이었는지 살펴볼까요? <맹자>에는 공자가 <춘추>를 편찬했던 의도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세상살이의 질서와 원칙이 쇠퇴하면서, 거짓된 말과 몹쓸 행동이 생겨났다. 신하가 임금을,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자가 걱정되어 <춘추>를 지었는데....., <춘추>가 완성되자 난신,적자들이 벌벌 떨었다.'
  당장 눈길을 끄는 것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한다는 말, 즉 역사를 남기는 목적에 대한 맹자의 주장입니다. 왜 맹자는 역사를 통해 두려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고대 중국인들은 죽음 이후가 따로 있다거나 그것을 평가할 신이 있다고 믿지 않았지요. 대신 인간의 삶이 자식과 손자로 이어진다. 즉 내가 죽어도 내 핏줄이 이어진다. 내가 한 일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삶은 이렇게 이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에 대한 기록이 남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지요.
(P.50)

 

 

  사람의 삶은 시간이 가면서 변합니다. 그것을 역사는 기록으로 남기고, 정리하고, 알려 줍니다. 역사의 변화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변화와 같은 큰 구조의 변화일 수도 있고, 왕정에서 민주정으로의 변화와 같은 체제의 변화일 수도 있고, 왕정에서 민주정으로의 변화와 같은 체제의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늘 구체적인 우리들의 삶, 발걸음 하나하나에서 나타나고 또 발견됩니다. 하찮게 보이는 편지 한 장, 주민등록증 하나가 그 삶을 전해 줍니다. 아니, 어쩌면 그 어떤 역사의 변화도 한 인간의 삶에서 증거를 남기지 않고 서술될 수도 없다면, 그 변화나 격동은 한갓 허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P.119)

 

 

  역사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여러분의 삶이 흐르는 길, 하루하루가 만들어지는 리듬이 곧 역사이며, 그것은 기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잘못된 일을 성찰하게 하여 삶을 깊이 있게 해주고, 잘한 일은 흐뭇하게 떠 올리게하여 삶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합니다.
  성찰이든 희망이든, 우리를 저 깊은 속에서부터 뿌듯하게 해 주는 무엇이 아니던가요?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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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귀스타브 플로베르 / 김화영 / 민음사 / 557쪽
(2016. 2. 9.)

 

 

  아침에 잠자리에서 그는 베개를 베고 나란히 누워 보닛 모자의 타원형 귀덮개에 반쯤 가린 그녀의 금빛 뺨 위에 솜털 사이로 햇살이 비쳐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그녀의 두 눈이 더 커보였다. 특히 잠에서 깨면서 몇 번씩이나 눈을 깜박일 때가 그랬다. 그늘진 부분은 까맣고 햇빛을 받은 부분은 푸른색인 그 눈은 연속적으로 겹쳐진 여러 층의 색깔들로 이루어진 것 같았는데 밑바탕은 검은 색이고 에나멜처럼 반드러운 표면으로 올라올수록 색이 옅여지는 것이었다. 샤를르 자신의 눈은 그 깊은 심연 속으로 온통 빨려들어서, 그는 머리에 쓴 수건과 앞가슴을 풀어헤친 셔츠의 윗부분과 더벌어 양 어깨에까지 자신의 모습이 축소되어 그 속에 비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가 떠나는 것을 보려고 창가에 나와 서는 것이었다.
(P.53)

 

 

  이런 비참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려는 것일까? 그녀는 거기서 끝내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그렇지만 그녀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여자들보다 못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보비에사르에서 공작 부인들을 보았지만, 그녀보다 몸매도 더 둔했고 태도도 더 천했다. 그래서 그녀는 하느님의 불공평함이 증오스러워 벽에 머리를 기대고 울었다. 그녀는 떠들썩한 생활, 가면 무도회의 밤들,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방자한 쾌락과 온갖 열광을 선망했다.
(P.100)

 


  그녀는 아들을 갖고 싶었다. 튼튼한 갈색 머리의 애였으며 했다. 이름은 조르주라고 지으리라. 이렇게 사내아이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치 과거의 모든 무력감에 대하여 희망으로 앙갚음하는 느낌이었다.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
(P.131)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방하다보면 우리는 늘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우상에는 손을 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칠해 놓은 금박이 손에 묻어나는 것이다.
(P.407)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고 한번도 행복했던 적도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런 아쉬움은 대체 어디서 오는것일까? 의지하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썩어 무너지고 마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러나 만일 어디엔가에 강하고 아름다운 한 존재가, 열정과 세련미가 가득 배어 있는 용감한 성품이, 하프의 낭랑한 현을 퉁기며 하늘을 향해 축혼의 엘레지를 탄주하는 천사의 모습을 한 시인 같은 마음이 존재한다면 그녀라고 운 좋게 그를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법이야 있겠는가? 아! 턱도 없는 일! 사실 애써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다 거짓이다! 미소마다 그 뒤에는 권태의 하품이, 환희마다 그 뒤에는 저주가, 쾌락마다 그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고 황홀한 키스가 끝나면 입술 위에는 오직 보다 큰 관능을 구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남을 뿐이다.
(P.410)

 

<함께 들으면 좋은 강의>

열린연단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김화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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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 푸른나무 / 400쪽
(2016. 2. 5.)

 

 


  이 책은 군사독재 정관과 양식 없는 보수주의자들이 교과서와 매스컴을 제멋대로 주물러 국민에게 주입한 맹목적 반공주의와 냉전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다. 그래서 여기 실은 글들이 "자본주의를 혐오하고 사회주의를 은근히 찬양하는 이념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나치즘을 벌거벗은 현대 자본주의의 얼굴이라 단죄하면서도 스탈린이 저지른 독재와 야만 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거나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인 양 끌어안고 있다"는 식의 비판도 다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P.4)

 

 

  서로 다른 사상과 견해를 자유롭게 토론함으로써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이는 민주주의를 가굴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진짜 민주주의 사회에 살게 된다면 얼치기 역사학도가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같은 책이 서점에 나와 앉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책이 아직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치권력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을 억압하는 그릇된 풍토가 사라져 아무도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
(P.6)

 

 

드레퓌스사건이 사회문제로 번진 것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가 결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공정한 절차를 따르지 않았고,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유죄를 선고했다는 데 있었다. 만약 절차가 공정했다면, 그리고 증거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면, 드레퓌스는 첫 번째 재판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의심이 간다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잡아 가두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고, 게다가 뚜렷한 증거도 없이 감옥에 보내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
(P.32)

 

 

  역사는 언제나 우연한 사건으로 뒤죽박죽이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런 우연한 사건들 가운데서도 뚜렷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라예보사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온 제국주의전쟁은 현대문명이 지닌 추악한 속살을 발가벗겨 보였다.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운 인간이 과학기술로 무장하고 벌인 현대전쟁은 칼과 창을 들고 하던 옛날 전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참혹한 재앙을 불러들였다. 그 전쟁은 '인간을 말살하는 공장'이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보다 더한 전쟁을 또 한번 벌였고,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조국을 위혀'라느니 어쩌니  하는 달콤한 말로 민중을 현혹하여 싸움터로 내몰려는 집단이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에는 진보가 정말 없는 것일까?
(P.79)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사회의 생산능력을 눈부시게 발전시켜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대공황과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경기변동은 인간이 이 제도를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대공황은 사람들이 인간을 위해 상품을 생산한다는 명백한 진리를 망각하고, 마치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양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때 세계를 덮쳤다. 만약 인간이 자기가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는 제도를 아무 비판 없이 예찬하고 무작정 섬기는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또다시 대공황과 같은 재앙을 불러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P.144)

 

 

  나치 정부가 광적인 침략전쟁에 열을 올리면서, 친위대와 관료기구 꼭대기는 인종이론 광신자로 가득 차 드디어 유태인 절멸정책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1천 백만 유럽 거주 유태인은 나치가 거의 온 유럽을 점령함에 따라 무두 사형된 운명에 놓였다. 노인과 환자, 부녀자와 어린이들은 동유럽 각지의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살해되었다. 건강한 사람들은 노동력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강제노동을 한 다음 가스실로 끌려갔다. 옷과 소지품을 모두 빼앗긴 뒤 살해된 벌거벗은 시체들은 재빨리 금니가 뽑힌 다음 소각실에서 태워졌다.
  독일 국민은 이같은 참상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치 만행에 찬성한 적도 만대한 적도 없었다. 연합국 정부조차 실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런 소문을 믿지 않을 정도였다. 이 끔찍한 대학살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범죄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현대문명과 원시적 광기가 결합하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초래하는가를 인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전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은 이에 치를 떨면서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인의 나라를 세우려는 시오니즘운동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 결과 유태인을 박해해 본 일이 없는 아랍 민족이 이유 없는 박해를 당하는 역사의 악순환을 낳았다.
(P.216)

 

 

  말콤 X는 할렘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흑인의자주와 자존, 인간성이 꽃피는 빛나는 미래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흑앤 대중과 말콤 사이의 유대와 결합은 아직도 너무 취약하여 그의 날개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내쏘는 증오와 비난의 열기를 견뎌 내지 못했다. 백인들은 말콤의 생애와 사상을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 버렸다. 3천만에 가까운 그의 동족들 역시 아직도 미국 문명의 뒤안길에서 그때나 다름없는 가난과 절망, 타락 한가운데 방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지금도 수십 수백만의 '디트로이트 레드' 말콤이 자라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세계경찰을 자임하면서 다른 나라에게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장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옿은 말이다. 하지만 정말 떳떳하게 그런 말을 하려면 먼저 '제 눈의 대들보'부터 뽑아 내야 할 것이다.
(P.328)

 

 

  우리가 대비해야 할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어 일본이 군사대국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경우다. 이런 경우 거꾸로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가장 먼저 피 흘릴 나라는 바로 우리나라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우되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일본제국주의 찌꺼기, 다시 말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관료주의, 일제경찰의 유산인 고문과 인권유린, 친일 친미 사대주의, 분별 없는 왜색문화 모방과 일본에 의존하는 경제구조 등을 깨끗이 씻어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민족의 생존과 독립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날 외무부 당국자들은 "과거 역사문제가 앞으로는 외교현안이 되지 않을 것"아라고 말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만약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외무부 당국자들의 '장님 행세'에 현혹된다면 또 한 번 '경술국치'를 불러들일 뿐이다.
(P.348)

 

 

  흔히들 현대를 북활실 성의 시대라고 한다. 문명 사회가 21세기에 어디로 나아갈지를 예측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경제제도와 정치체제에 관한 한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 시점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사회주의 이상을 결합한 경제체제다. 혼합경제, 복지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등 그 이름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시장기능을 무시하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물론이요.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 사회정의와 생활안정을 보장하지 않은 채 약육강식과 같은 자본주의 경쟁체제 역시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P.398)

 

 

  부모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인생이 달라지고, 모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바로 그 출발점부터 '출발 기회의 불균등'에 편이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고, 자기 책임이 아닌 가난이나 장애 때문에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돈 많은 사람과 힘 없는 사람에게 법을 다르게적용하는 그런 사회는 오래 살아 남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면 올바른 의견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힘 있는 집단의 압력 때문에 그릇된 법과 제도를 고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몰락과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의 모습이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은 비효율적인 경제체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안팎에서 나오는 다양한 의견과 비판을 봉쇄하는 '닫힌 사회'였기 때문이다. 닫힌 사회는 그 사회의 밑둥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들기 전까지는 그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다.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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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한다는 것 (너머학교 열린교실 2)
남창훈 / 너머학교 / 132쪽
(2016. 01. 26.)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입니다. 사실 탐구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에 어떤 의문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고자 애쓸 까닭이 없겠지요.
  왜? 왜? 왜? 질문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 쉬지 않고 엄마에게 "왜?"라는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질문을 멈추게 되었을 테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많던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냈기 때문일까요?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앞서 제가 던진 질문들의 답을 알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아마도 그 답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질문하는 것을 멈추었을까요?
(P.17)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곳에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용기, 순발력, 뛰어난 두뇌...... 여러분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용기나 뛰어난 두뇌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논리는 당신을 A 다음 B로 가도록 해 준다. 하지만 상상력은 당신을 어떤 곳으로든 다 인도해 준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입니다.
(P.27)

 

 

  "아름다움이 곧 진리이다."
  영국의 시인 키츠가 쓴 시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산을 오르며 많은 꽃과 나무, 예쁜 새와 시냇물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거나 개척하고 험한 길을 오르는 과정에서 등산의 멋진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탐구는 진리를 추구하는 등산과 같습니다.
(P.42)

 

 

  탐구하기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자연과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원리와 법칙들을 이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모방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P.44)

 

 

  우리는 탐구하기를 통하여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탐구하는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나요?
  앞서 탐구하기는 질문하기라고 했습니다. 질문이 있어야 우리는 탐구하기라는 여행을 떠나는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차츰 호기심을 잃어 가고 있지 않난요? 아주 어릴 적 품었던 많은 질문은 이제 다 어디로 가 버린 걸까요? 왜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렸을까요?
(P.79)

 

 

  우리는 학교나 학원에서 참 많은 지식을 익히고 받아들입니다. 앞서 지식은 탐구의 지도와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지식이 없다면 아무리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 해도 '탐구하기'라는 여행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지식이 풍부할수록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새 길을 찾아갈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남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지식을 익힌다면 어떨까요?
  물론 적절한 경쟁을 통해 지식을 익힌다면 혼자서 지식을 익히는 것보다 더 쉽고 효과적으로 지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을 익히는 목적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얻는다 해도 죽은 지식이 되기 쉽습니다.
  지식은 탐구를 위한 지도와 같아서 어떤 지식을 익힐 때에는 그 지식을 통해 다른 지식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P.81)

 

 

  지식은 끊임없이 질문을 일으키는 길잡이로서 쓰일 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늘 변화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탐구를 할 때에만 이전 지식의 잘못된 점이나 부족한 점이 바로잡히고 더 정확하고 바르게 변화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것은 지식이 살아 있기 위해 호흡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질문은 지식의 이전 내용을 의심하고 부정하도록 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P.83)

  돈이 되는 연구만을 지원하여 탐구할 기회를 준다면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탐구로 얻은 지식이 어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소유가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과 주변 세계 사이의 관계릉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립하기 위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탐구한다는 점입니다.
(P.85)

 

 

  탐구하기는 놀이하듯 즐겁게 우리를 포함한 세상을 발견하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놀이는 친구들과 하는 것입니다. 주위의 온갖 사물들과 생명체들이 바로 그 놀이에서 여러분의 짝이 되는 친구들입니다.
  탐구하기란 이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애정을 가지고 마을 거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에게 있던 죽은 지식은 껍질을 벗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상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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