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데카르트 방법서설
박철호(지은이) / 이대종(그림) / 주니어김영사 / 237쪽




  <방법서설>은 진리를 찾아내는 방법에 관한 책이야. 그리고 진리를 찾아내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 방법을 사용하는 진리를 찾아내고, 그 진리를 바탕으로 해서 또 다른 진리를 찾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는 책이야. <방법서설>은 그런 방법을 보여주는 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이 채에는 방법은 물론이고, 그의 철학 거의 모두 압축되어 담겨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데카르트의 철학을 가볍게 배우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을 폭넓게 연구하려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반드시 필요해.
(P.15)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합리론의 창시자'라는 찬사를 받고 있어. 그는 어떻게 해서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데카르트가 세계를 구성하는 두 가지 실재는 정신과 물질이라고 했다는 건 앞에서 말한 적이 있지? 그럼 정신과 물질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근본적인 실재일까? 물질의 실재는 의심할 수 있어도 정신의 실재는 의심할 수 없거든. 데카르트는 인간의 본질을 정신, 즉 이성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이 이성은 어디서 왔을까? 인간은 어떻게 진리를 알게 될까? 데카르트는 경험이 아니라 이성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성을 통해 신이나 영혼에 대한 진리를 물론이고, 세계나 물질에 대한 진리로 모두 다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데카르트가 가진 이런 생각들이 합리론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합리론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거야.
(P.48)



  우리는 어떻게 무언가를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지식은 선생님이 가르쳐 주기 때문에 아는 거라고? 그러면 너희들 스스로 무엇을 알 때도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아마도 내 안에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합리론자야.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경험했기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험론자지 합리론은 이성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 경험론은 지식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야. 데카르트가 오직 이성의 등불만으로 진리를 찾겠다고 말한 것은 그가 합리론자라는 것을 잘 보여줘. 물론 진리를 찾는 수단으로 이성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데카르트가 처음은 아니야.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서양철학의 기나긴 전통이지.
(P.50)



  합리론에 의하면 경험이 없이도 지식을 얻을 수 있어. 참된 지식을 얻으려고 할 때는 오히려 경험이 방해가 되지 '완전한 신', '물질의 본질은 크기', '정신의 본질은 사유'와 같은 관념들은 경험과 관계없이 이성의 힘만으로 알아낸 지식들이야. 이성은 경험하지도 않고 어떻게 저런 지식을 알 수 있을까? 합리론자는 저런 관념들이 본래부터 우리의 정신안에 들어 있었기 땜눈이라고 말해. 본래부터 정신 안에 들어 있는 그런 관념을 '본유관념'이라고 해. 본래부터 정신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성을 잘 사용하기만 하면 충분하지. 이성은 합리적 추론을 통해 지식을 점점 늘려나가. 데카르트를 보면 그것이 어떤 방법인지 알 수 있을 거야.
(P.51)



  경험론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비롯돼. 경험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영국의 로크야. 경험론자는 본유관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해. 로크에 따르면 마음(정신)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와 같아. 처음에는 마음속에 아무런 관념도 들어 있지 않은데, 백지에 연필로 글씨를 쓰듯이 마음에 경험으로 관념이 써진다는 거지. 경험에는 두 종류가 있어. 눈, 귀, 코와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한 것과 믿고, 생각하고, 의심하고, 추론하는 것과 같은 마음의 작용을 통해 경험한 것이 바로 그거야. 첫번째 경험을 감각이라고 하고 두 번째 경험을 반성이라고 해. 관념은 모두 이 두 가지 경험으로부터 비롯돼. 그러면 경험론에서는 어떻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할까? 관념들 간의 연결과 일치, 또는 불일치와 모순을 의식함으로써 지식을 얻을 수 있어. 예를 들면, '희다'는 관념과 '검다'는 관념이일치하지 않는다는 데서 '흰 것은 검은 것이 아니다'라는 지식을 얻게 되지.
(P.52)



  나는 여러 학문을 공부했고 오랜 여행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어. 이제는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의견을 검사해 명백한 점을 찾아낼 차례야. 하지만 어떤 것이 명백한 참인지 어떻게 판단하지? 정신 속에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어 분명하게 나타나 아무런 의심도 할 수 없는 것이지. 그러면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명백한 참이 아니겠구나! 그래서 난 조금이라도 의심 하는 것은 몯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버리기로 했어. 그렇게 의심스러운 것들을 모두 제거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이 방법을 '방법적 회의'라고 한단다. 여기서 '회의'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토의한다는 그런 '회의'가 아니야. 그냥 '의심을 품는다.'라는 말을 어렵게 쓴 거지.
(P.120)



  물질의 본질은 뭘까? 바로 연장(延長)이야. 공간을 차지한다는 뜻이지. 물질은 반드시 공간 속에 존재하지. 그런데 정신은 크기를 갖지 않지. 따라서 정신은 물질이 아니야. 이렇게 정신과 물체는 서로 완전히 달라.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내 형이상학을 이원론이라고 불러. 다시 말해.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살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라는 거지.
(P.141)


  전혀 다른 본질을 가진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의 문제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가진 아픈 약점이야. 아무리 대단한 철학자라도 너무 자신의 이론에만 몰입하면 가끔씩 실수한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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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수님이 알려주는 공부법
2004년 / 나이절 워버턴 / 박수철 / 지와사랑 / 144쪽
(2016. 6. 30.)


막연하게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공부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훌륭한 안내서
이 책을 읽고 내용이 너무 좋고 눈에 쏙쏙 들어와서
나이절 워버턴의 저서들을 모두 찾아보고 그 중
<철학의 근본문제에 관한 10가지 성찰>과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고전 27>을 구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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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에 갓 입문한 학생들은 철학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작은 책 속에 모든 해답이 담겨 있다. 내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원칙들을 충실히 실천하면 학습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 장차 훌륭한 사상가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P.9)



  철학을 공부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철학이 관람용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들이 철학의 개념들을 다룰 때는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기자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접근해야 한다. 철학공부를 한다는 건 철학적 사고를 배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모든 철학 논술은 그 자체로 철학의 일부다. 논술에서는 어떤 주장을 펼쳐야 한다. 굳이 깜짝 놀랄 만한 독창적인 주장일 필요는 없다. 다만 적절한 논증이 요구된다. 논술을 할 때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찰헉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듯이, 우리도 자신의 견해를 주장해야 한다. 즉 위대한 철학자들이 그들의 위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논술쓰는 학생은 자신의 위치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을 설명하고 해석하며 비판하고 제시해야 한다.
(P.10)



  대부분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기본적 수단들을 배우고 그것들을 적용하면 더 쉬워진다. 한 사람의 정체된(진부한) 사상가가 되기는 쉽다. 그런 사상가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진정으로 사고하기를 외면한 채 타인의 말과 글을 단지 암기하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소극적 방식에 안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독창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터득하면 그것을 삶의 여러 영역에 응용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철학이 다른 모든 학문에 비해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의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이끌어내고, 검토하며, 검증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치밀하게 사고한다. 결론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매추 추상적이고 난해한 주제를 다룰 때조차도 그들의 글에는 진정한 힘이 실려 있다. 이처럼 적극적인 철학 공부는 보답과 보람이 뒤따르는 경험이 된다.
(P.15)



  독서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글이나 책을 읽을 때는 저자의 견해를 단순히 흡수하지 말고 텍스트 내용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텍스트 내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그것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고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
(P.17)



  적극적으로 읽기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첫 번째 방법은 읽으면서 메모를 하는 것이다. 이때 메모는 나중에 참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요점을 놓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우선 특히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거나 중요한 구절을 고르고 나서 거기에 대한 궁금증이나 반론을 논문이나 책의 여백에 간단히 적어두면 된다. 텍스트를 읽다가 잠시 멈추고 방금 읽은 내용을 생각하라. 이처럼 적극적으로 철학 읽기는 소설이나 신문을 읽는 것보다 훨씬 천천히 진행된다. 이렇게 해서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 철학 텍스트를 대충 훑어보거나 골자를 파악해도 무방한 대상으로 여긴다면, 그 주제를 진정으로 파악할 수 없다.
(P.21)



  소극적인 읽기를 피하는 두 번째 방법은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뿐 아니라 "저자의 주장은 옳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물론 답변하기 힘든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철학자로서 반드시 던져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철학자로서 반드시 던져야 하는 기본적인 질문이다. 다른 철학자들의글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그들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리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 옳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르다면 왜 그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한다.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은 타당한 논거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합리적인 논증이다.
(P.22)



  저자의 기본 전제를 검토하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라. 그런 다음 저자의 추론과정을 검토하라. 저자의 결론이 그가 제시한 논거와 부합하는가? 혹시 저자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반론과 반례가 있지는 않은가? 저자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단 하나의 사례를 근거로 주장을 전개하지는 않는가? 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는 이런 식의 질문을 계속 던저야 한다. 적극적인 읽기와 비판적인 읽기를 배우는 것은 철학 교육에서 중요하다.
(P.23)



  철학 텍스트에 어려 차례 등장하는 핵심어의 의미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핵심어들의 의미는 철학사전으로 해결하면 된다. 그렇다고 의미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모든 단어를 일일이 찾아볼 필요는 없다. 그렇게 사전을 들추다보면 독서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단어나 구절이 게속 등장하면 사전을 통해 의미를 확인해야 한다.
(P.33)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적 글쓰기를 통해 철학적 사고를 배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철학적 능력을 증명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철학적 능력을 다듬는 수단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에게 글쓰기는 단지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의 바탕을 이루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글쓰기는 일종의 사고과정이다. 글쓰기는 단지 자신이 터득한 지식을 자랑하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어떤 주제애 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흔히 학생들은 어떤 주제에 관해 글을 써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 깨닫게 된다.
(P.67)



  글의 개요를 작성하면 더욱더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있다. 논술도 마찬가지다. 설령 글을 쓰는 도중에 바꾸더라도 논술의 전체적인 개요를 미리 설계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단락의 주제를 중심으로 개략적인 윤곽을 마련하라. 이때 개요를 직접 종이에 적어놓고 논술을 쓰기 시작해야 효과적으로 작성할 수 있고, 나중에 많은 분량을 삭제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논술의 개요를 작성하는 과정 자체가 논술을 설계하는 과정이다. 개요라는 것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단순히 종이에 옮겨 적는 것이 아니다. 작성자가 스스로 개요를 작성하기 시작해야 개요가 생기는 것이다.
(P.74)



  이 책은 의도적으로 짧게 만들었다. 철학적 기술을 다듬는 최선의 방법은 그 기술을 연마하는 방법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연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만만찮은 학문일 수 있지만, 적절한 방식으로 적근하면 공부가 굉장히 즐거울 것이다. 글쓰기와 명확한 사고력 같은 전용성 기술은 교욱이 나눌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기술 가운데 하나다.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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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 조현욱 / 김영사 / 636쪽
(2016. 6. 14.)



우리인류도 다른 종과 같이 같은 종간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이라는 내용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아주 보편 타당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우월감에 사로잡혀서 그런 생각을 간과하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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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
(P.19)



  호모 사피엔스도 하나의 과에 속한다. 이 엄연한 사실은 역사에서 가장 은밀히 숨겨진 비밀이었다. 오랫동안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다른 동물과 동떨어진 존재로, 속학 과(科)가 없는 동물인 것처럼, 형제자매도 사촌도 없고 가장 중요하게는 부모도 없는 동물인 것처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좋은 싫든, 우리는 거대 영장류라는 크고 유달리 시끄러운 과의 한 일원이다. 현생종들 중 우리와 가까운 친척으로는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이 있고, 가장 가까운 것은 침팬지다. 불과 6백만 년 전 단 한 마리의 암컷 유인원(꼬리 없는 원숭이)이 딸 둘을 낳았다. 이 중 한 마리는 모든 침팬지의 조상이, 다른 한 마리는 우리 종의 할머니가 되었다.
(P.22)



  지난 1만 년간 우리 종은 지구상의 유일한 인간 종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유일한 인류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인간humam'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는 '호모 속에 속하는 동물'이고, 호모 속에는 사피엔스 외에도 여타의 종이 많이 존재했다.
  더구나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사피엔스가 아닌 인류와 다시 한 번 경쟁해야 할지도 모른다.
(P.22)



  사피엔스의 탓이든 아니든, 사피엔스가 새로운 지역에 도착하자 마자 그곳의 토착 인류가 멸종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피엔스의 성공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생태적으로 전혀 다른 오지의 서식지에 그처럼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다른 인간 종들을 망각 속으로 밀어넣었을까? 튼튼하고 머리가 좋으며 추위에 잘 견뎠던 네안데르탈인은 어째서 우리의 맹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을까? 논쟁은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그럴싸한 해답은 바로 이런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언어다. 호모 사피엔스가 세상을 정복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한 언어 덕분이었다.
(P.41)



  인지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했을까? 우리는 잘 모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아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P.44)


 
  학자들은 농헙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두뇌의 힘을 연료로 하는 진보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진화는 점점 더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마자 지겹고 위험하고 종종 스파르타처럼 가혹했던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거이 포기하고 농부의 즐겁고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더욱 총명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수렵채집인들은 농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자연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농헙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농업혁명 덕분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이 확대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다.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P.70)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세상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상상의 질서 원리들을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한다.
(P.169)



  특정 사회의 구성원과 재산의 양이 특정 임계치를 넘어서면, 대량의 수학적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할 필요가 생겼다. 인간의 뇌는 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스템은 무너졌다. 농업혁명 이래 수천 년간 인간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상대적으로 작고 단순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문제를 처음 극복한 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살던 고대 수메르인이었다. 기원전 3500~3000년 어느 시기에, 익명의 수메르 천재들이 뇌 바깥에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시스템을 발명했다. 대량의 수학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맞춤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수메리인들은 인간의 뇌에서 비롯되는 사회질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시, 왕국, 제국의 출현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수메르인이 발명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쓰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P.182)



  농업혁명 이래 인간사회는 점점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해졌다. 그동안 그런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상상의 건축물 역시 더욱 정교해졌다. 신화와 허구는 사람들을 거의출생 직후부터 길들여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특정한 기준에 맞게 처신하며, 특정한 것을 원하고, 특정한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수백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공적 본능을 창조했다. 이런 인공적 본능의 네트워크가 바로 '문화'다
(P.234)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재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재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
(P.246)



  오늘날에도 주화와 지폐는 화폐의 유형으로서는 드문 것이다. 전체의 화폐 총량은 약 60조 달러이지만 주화와 지폐의 총액은 6조 달러 미만이다. 돈의 90퍼센트 이상, 우리 계좌에 나타나는 50조 달러 이상의 액수는 컴퓨터 서버에만 존재한다. 그에 따라 대부분의 상거래는 하나의 컴퓨터 파일에 들어 있는 전자 데이터를 다른 파일로 옮기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실제로 돈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가령 집을 살 때 가방에 가득 찬 지례로 지불하는 것은 범죄자밖에 없다.
(P.255)



  지난 3백 년은 흔히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가 점차 중요성을 잃어가며 세속화가 진행된 시기로 묘사된다. 유신론적 종교에 대해서라면 대체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자연법칙 종교를 고려한다면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근대는 강력한 종교적 열정의 시대, 전대미문의 포교 노력과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시대였다. 수많은 자연법칙 종교가 근대에 새로이 등장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가 그런 예다. 이들은 종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라고 칭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용어상의 문제일 뿐이다. 만일 종교를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치로 한 이간의 규범과 가치 시스템이라고 정의한다면, 공산주의는 이슬람교에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종교다.
(P.323)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이 인류문화는 진보를 믿지 않았다. 황금시대는 과거에 있었고, 세상은 퇴화하지는 않더라도 정체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지혜를 엄격히 추종한다면 좋았던 옛 시절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고 인간의 창의성으로 일상생활의 이런저런 측면을 개선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지식으로 세상의 근본 문제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근대 문화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그런 무지의 인정이, 과학적 발견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자, 사람들은 결국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이 풀기 힘들었던 문제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자, 인류는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P.374)



  은행은 자신들이 가진 1달러당 10달러를 빌려주는 것이 허용된다. 그 말은 우리의 은행계좌에 있는 모든 예금의 90퍼센트는 이에 대응하는 실제 화폐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거대한 피라미드식 이자 사기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이것이 사기라면, 현대 경제 전체가 사기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놀라운 능력에게 바치는 헌사다. 은행 - 그리고 경제 전체 - 을 살아남게 하고 꽃피게 만드는 것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신뢰다. 오로지 이 신뢰가 세계의 돈 대부분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P.433)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생산량을 늘려야만 한다. 상거가 계속 헤엄치지 않으면 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누군가 제품을 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조업자와 투자자는 함께 파산할 것이다. 이런 파국을 막으면서 업계에서 생산하는 신제품이 무엇이든 사람들이 항상 구매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윤리가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소비지상주의다.
(P.490)



  이 책이 시작에서 나는 역사를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이어진 연속체의 다음 단계라고 말했다. 사피엔스 역시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는 물리적 힘, 화학반응, 자연선택 과정에 종속된다. 자연선택의 결과,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어떤 생명체도 누리지 못했던 거대한 운동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장에도 여전히 경계선이 있다. 그렇다면 사피엔스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룩한다고 할지라도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P.561)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불행히도 지구상에 지속되어온 사피엔스 체제가 이룩한 것 중에서 자랑스러운 업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주위 환경을 굴복시키고, 식량생산을 늘리고, 도시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고, 널리 퍼진 교역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의 역량은 크게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를 개선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동물에게는 큰 불행을 야기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P.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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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금지 에바로드
장강명 / 연합뉴스 / 306쪽
(2016. 6. 12.)



무수한 떡밥들을 던져놓곤 끝 없는 낚시들의 연속
이곳 저곳에서 감독의 의도는 어떻고 이에 대한 내 견해는 어떻고
새로운 해석을 덧 붙여서 나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놀이가 계속되고
결국은 대단한 명작의 전설이 시작된다.
에반게리온과 같이 바로 곡성에 대한 오덕질이 시작된 것이다.


곡성 감독판이 나오면 누가 옳았는지 확실히 알게 될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마 감독판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내용이 될 거라고 예상된다.

이 영화는 결코 명확한 해석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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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라에서는 젊은 세대가 오덕화(오타쿠화)하고 있다. 일자리는 없고, 취향은 다양해졌고, 인터넷은 싸니까, 누르면 모르핀이 나오는 버튼 곁을 떠나지 못하는 실험용 생쥐들처럼 젊은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되풀이해서 즐기고 또 즐기면서 파고들게 된다. 옛날 야구팬들이 경기 규칙과 스탯에 이렇게 해박했던가? 옛날 축구팬들이 전날 밤 있었던 유럽 리그의 경기 결과를 놓고 이렇게 치열한 토론을 벌였던가?
(P.8)



  대중은 이제 드라마 속 재벌 2세들의 재력을 그의 여러 가지 매력 중 하나(사실상 가장 큰 매력)로 받아들인다. 재력은 이제 인성과 분리되지 않는 덕성의 한 요소이고, 돈이 많다는 건 잘 생겼다거나 유능하다거나 다정하다거나 정직하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미덕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돈이 없다는 건 그런 미덕의 부재를, 가난은 곧장 말해 악덕을 의미했다. "집안 형편이 좀 어려웠나 보죠?"라는 질문은 이제 "어릴 때 거짓말쟁이였나 보죠?"라는 것고 비슷한 질문이 되어버렸다.
(P.38)



  내가 생각하는 자아실현은 멋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판의 가격 같은 건 보지도 않고 순전히 그날 내가 뭘 먹고 싶은가, 평소 못 먹어보던 음식이 뭐가 있나, 맛있어 보이는 게 어떤 건가 하는 것만 생각하며 요리를 주문하는 거야. 그리고 가족들이랑 친구들한테도 같은 식으로 메뉴를 고르게 하는 거야. 제일 싼 메뉴가 뭔지 몰래 살피는 일에는 아주 진력이 났다. 그런 고급 식당에서 고급 요리를 먹으면 아주 뿌듯한 성취감이 들거야. 그러기 위해서라면 낮에도 열심히 환자를 보고 진료를 할 힘이 날 거야. 이게 대통령이 되겠다는 소망보다 천박한 건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은, 자기가 왕이 되어서 남들을 지배하겠다는 말을 둘러 하는 것 아냐?
(P.153)



  그는 <열광금지, 에바로드>가 일종의 '자아 찾기 여행'으로 평가받는 일에 대해 무척 불편한 기분을 느꼈는데, 그 이유도 여행에 대해 평소 품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산티아고에서 순례자의 길을 걸었다거나, 인도를 무전여행하고 나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다는 유의 에세이들을 보면 '돈 낭비 참 여유롭게 하신다'는 생각만 들었다.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와 그런 여행은 어떤 점이 다른가요?"
  내가 물었다.
  "글쎄요, 큰 틀에서는 같습니다. 무의미하고, 시간 낭비라는 점에서요. 그래도 차이점이 있다면 일단 순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그게 자아 찾기라고 포장한다는 점이겠죠.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두번째 차이점은 결과물이죠. 저는 처음부터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마음을 먹고 가서 다큐멘터리를 찍고 왔어요. 워낙 손에 잡히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이라서요. 글쎄, 순례 여행을 떠난 사람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여행서 출간이 목적이었던 분도 계시지만 그러면 자아를 찾기 위해 떠났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죠."
(P.191)



  종현은 틈틈이 주변 사람들이 오덕 행위를 탐문하고, 흥미로운 덕질에 대해 인터뷰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누구나 오덕 취미 하나쯤은 있었으니까. 특히 싱글 남녀인 경우에는 예외가 없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갑자기 진지해지고 또 솔직해졌다. 대개 마무리는 "우리 회사 사람들은 이거 모르게 해줘"라는 부탁으로 끝났다.
  이게 보편적인 현상일까. 아니면 종현 주변의 젊은이들이 그저 그런 품팔이 개발자들이라 그런 걸까? 삶의 의미를 어떻게든 확인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직장에선 그럴 수가 없어서 덕질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사법연수원새이라거나 구글 직원, 또는 시민단체 종사자 중엔 오덕이 별로 없을까? 중년이나 노년들은 덕질을 할 줄 몰라서 등산이나 캠핑에 미친 듯 매달리는 걸까?
(P.214)



  '내가 왜 에반게리온에 빠졌던가'에 대해 종현은 다시 생각했다. 첫 감상에서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하다'는 위안을 받은 뒤로 이 시리즈에 자신이 헛된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장르 전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멸시에 저항 하면서 애정을 더 깊이 키워나갔고, 그러다 마침내는 상대에게 없는 장점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 아니었을까. 여러 소년만화 중 가장 심오해 보이는 에반게리온이 실제로도 심오한 의미를 품고 있기를, 그나 제작이나 너무 간절히 바랐고, 나중에는 그게 어떤 사이비 종교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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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장경명 / 은행나무 / 248쪽
(2016. 6. 8.)



소설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진실보다 더 진실같은 허구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숨기고 싶은 진실들을 부끄러워 한다.
댓글부대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대한민국 어디에선가 지금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이에게 소설을 읽는 이에게 주는 불편함을 견디기 힘들다.




  대체로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이 운영한 댓글부대를 1세대로 본다.
  1세대 댓글부대가 조악하고 원시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논리보다는 감정을 자극해야 한다는 점을 알랐고, 대형포털과 중소포털, SNS에 서로 달리 대응할 줄도 알았다. 이들이 주로 사용한 반복법, 강조법은 무식한 테크닉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도 가장 중요한 전략 전술이다.
(P.6)



 인터넷에서는요, 올라오는 글이나 그림, 영상의 99.9%는 그냥 묻힙니다. 돈을 들이든지, 팬들이 도와주든지, 그도 저도 아니면 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던지 해서 처음에 어느 정도 궤도까지 끌어올려야 합니다.
(P.32)



  처음에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내 또래들은 정말 엄청난 도구가 왔다. 이걸로 이제 혁명이 일어날 거다, 하고 생각했지. 모든 사람이 직위고하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으로 대안을 찾아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지. 인터넷이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권위를 타파해서 민주화를 이끌 거라고도 믿었어. 거대 언론이 외면하는 문제를 작은 인터넷신문들이 취재하고, 인터넷신문조차 미처 못 보고 넘어간 어두운 틈새를 전문 지식과 양식을 갖춘 블로거들이 파고들어갈 줄 알았어.
  독재 국가에서는 지금도 인터넷이 그런 고발자, 감시자 역할을 해.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런가? 인터넷신문이나 블로거들이 과연 그런 역할을 하냐고, 아니지. 그냥 거대 언론이 하던 나쁜 짓을 아마추어들도 소자본으로 하게 됐을 뿐이야. 거대 언론이 점잖게 기업에 겁을 주며 광고를 따냈다면 인터넷신문들은 대놓고 삥을 뜯지. 블로거들은 동네 식당을 상대로 협찬을 요구하고. 이것도 민주화라면 민주화지. 협작, 공갈, 갈취의 민주화. 누구나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되는 민주화. 그런 대신에 인터넷신문들과 블로거가 기존 언론이 쓰지 않던 무슨 좋은 기사를 내놓느냐 하면, 이런 거야. 누구누구 아찔한 뒤태, 남녀 생각 차이 열네 가지, 노래 따라 부르는 일본 강아지 화제......
(P.54)



  한때는 인터넷이 영원히 익명의 공간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 헛소문이나 추측, 잘못된 정보가 많이 나온다는 건 그때도 알았어. 그래도 좋은 정보가 많이 나오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자기 생각들을 고칠 줄 알았어. 자정작용이 일어날 줄 알았던 거지. 하지만 이제는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아. 인터넷에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자정작용이 일어날 수가 없어. 오히려 그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나지. 끼리끼리 뭉치는 거 말이야. 사람들이 어떻게 TV를 보는지 보라고, 채널 돌리는 것도 귀찮아서 광고를 그냥 참고 보잖아. 인터넷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절대로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고치려 들지 않아.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뭔가를 배우려 드는 대신, 애착이 가는 커뮤니티를 두세개 정해놓고 거기 새로운 글 올라오는 거 없나 수시로 확인하지. 그런데 그 커뮤니티들은 대개 어떤 식으로든 크게 편향돼 있어. 취향과 성향 중심으로 모인 공간이다보니 학교나 직장처럼 다양한 인간이 모이는 오프라인 공간보다 편향된 정도가 훨씬 더 심한 게 당연해.
(P.56)



  인터넷을 오래할수록 점점 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돼. 확증 편향이라는 거야. TV보다 훨씬 더 나쁘지. TV는 적어도 기계적인 균형이라도 갖추려 하지. 시청자도 보고 싶은 뉴스만 골라 볼순 없고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달라.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매체에, 어떤 신문이나 방송보다도 더 깊이 빠지게 돼.그런데 이 미디어는 어떤 신문 방송보다 더 왜곡된 세상을 보여주면서 아무런 심의를 받지도 않고 소송을 당하지도 않아. 커뮤니티 사이트들은 최악의 신문이나 방송사보다 더 민주주의를 해치지.
(P.57)



  저희가 386 씹는 문화를 십 대들 사이에 일으킬 겁니다. 그게 쿨해 보인다 싶으면 금방 유행이 될 거예요. 다른 세대로 퍼지는 것도 시간 문제예요. 애들이 몇 년 뒤면 이십 대가 될 거잖아요. 대중문화에서는 사십 대가 삼십 대 따라하고, 삼십 대는 이십 대 따라하거든요. 이십 대가 핵심이에요.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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