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중독
하지현, 엄기호 / 위고 / 196쪽
(2016. 4. 10.)



열정페이말로라는 현혹스러운 단어로 인턴이라는 대중적인 단어로 아직은 준비 중이라는 거짓말 아래 쉽게 청년들은 임금을 착취하는 현상들과

아직까지 준비중이라는 계속 공부중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현재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부중독에 대한 사회문제를 풀어헤쳐 보고 있다.
사회에서 원하는 한 몫 즉 1인분이 되기 위한 아직도 계속 공부 중인 대학 5학년 청년들의 문제에 대해서

사회에 도전해서 깨지기를 무서워하는 사회 현상인가, 아니면 자존감을 죽여버리는 사회의 해악인가를 생각해보게 해준다.




  강의실에 들어서면 나는 한 마리의 '똑똑한 원숭이'가 된 느낌이다. 내가 펼치는 '화려한 언변'과 풍부한 사례'에 학생들이 감탄한다. 그런데 그 감탄하는 눈동자들 속에서 배움과 성장을 찾기가 힘들다. 짝짝짝. 서커스 보고 박수치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관객이 떠나고 난 다음 빈 서커스장에서 목에 족쇄를 차고 앉아 있는 원숭이가 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가르치는 내가 이런데 배우는 학생들의 입장은 어떨까?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그들 역시 원숭이가 된 느낌이라고 한다. 배우긴 배우는데 뭘 배우는지 모르겠고, 배웠기는 배웠는데 할 줄 아는 건 없다. 배워서 알면 그 아는 것을 익혀서 할 줄 아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으로 만드는 익힘의 과정은 공부에서 실종된 지 오래다.
  이런 공부의 과정은 삶의 무능력자들만 체계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똑똑하되 명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하나를 배워 다른 하나에 적용할 줄 아는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내가 배운 하나와 다르면 멘붕하고 열폭한다. 그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럴수록 사람들은 더 '공부'한다. 공부만 한 것이 문제의 근원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격이다. 자기 자식과 문제가 생기면 자식과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거나,혹은 서로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떨어져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하는데 반대로 상담을 공부하러 간다. 상담을 공부해서 자식을 대하는 기술이 늘어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P.6)


  공부의 기쁨은 보편성의 발견이다. 내가 처한 현실이나 난처함이 나만의 것이아니라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 공부의 과정이다. 동시대성을 발견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시대의 암흑이라는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해가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인이 형성된다. 이 동시대인을 형성해가는 것, 그것이 공부가 무능력한 개체들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P.9)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를 구겨 넣는 방법, 맞추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이 두 개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면서 우리는 적응을 해나가는 거계죠. 그런데 일부 친구들의 자아 중심성의 세게에서는 나를 구겨 넣을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환경을 바꾸고 싶지도 않아요. 환경이 알아서 바뀌어줬으면 좋겠는 거죠. 이게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여긴 왜 이래?" 이런 말을 많이 해요. 할아버지들이 태국 여행 가면 많이 하는 얘기 있잖하요. "여긴 왜 이래?"
(P.63)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토론식 수헙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견을 만든다는 것은 다른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보고 그 속에서 자기 생각을 만들어나가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누구나 의견을 말할 수 잇다고 생각하지 않고 정답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보니까, '아니, 당신은 교수니까 알고 있잖아, 정답을 애기해주면 되지 왜 자꾸 귀찮게 우리더러 토론하라고 하면서 민망하게 만드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죠.
(P.66)



  교육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칠 수 없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쳐야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미분과 적분은 가르치치 않으면 배울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학교가 필요한 것이고 교과과정이 필요하죠. 반면 인성은 가르칠 수는 없ㄱ고 삶의 과정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걸 지금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것이죠. 가르칠 수 없는 걸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 저는 이게 정확하게 삶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P.120)


 

  재미있는 현상이 있어요. 틀 밖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성공을 하고 나면 그것으로 죽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것이 다른 사람들한테 훨씬 더 영감을 주거든요. 그런데 꼭 책을 씁니다. 꼭 학원을 해요. 결국 자신의 성공 방식을 매뉴얼화하는 거에요. 본인이 그러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죠. 결국 한국에서 블루오션은 공부밖에 없어요. 출판계도 레드오션이잖아요. 그런데 출판학교는 잘되고 있어요. 출판계는 망해가고 있는데 말에요. 이런 식으로 지금 공부 산업만 블루오션이 된 거죠.
(P.129)


 

  저는 "너 하고 싶은 뭐니?" 끝없이 물어봐요.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역산하거든요. "그걸 위해서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제가 상담하는 것이 주로 그런 거죠. "저는 애니메이션이 좋아요" 그러면 "그걸 위해서 뭘 할까?" 의논을 해요.
(P.164)


  지능의 영역이란 낯선 상황에 잘 적응하기 위해 지금 이곳이 굴러가는 보이지 않는 이치를 깨달아가는 과정이거든요. 그 이치를 깨달아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쌓는 것이 핵심이죠. 공부라는 것은 그 지능이 실제 내 삶에서 실행 능력을 높여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백데이터들을 모이는 것이고요. 그리고 그덧들이 모여서 인포메이션이라는 정보체가 만들어지면 그걸 지식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런 지식을 통해서 여러 영역에서 비슷한 맥락들을 공부하다 보면 여러 군데에 다 통용되는 하나의 정수를 찾아내게 돼요. 그럼 우리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고 하죠.
(P.167)


  학생들이 "이걸 공부한다고 제가 뭔가가 될 수 있나요?"라고 하는 말을 단지 실용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 말을 직업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혹은 살아가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를 묻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이걸 공부하는 것이 자신을 무엇으로 어떻게 성장시키는가'에 대한 질문이죠.
  이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사람의 성장에 대해 '성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공부를 통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수긍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공부를 하는 자가 아니라 공부를 시키는 자가 공부 말고는 시킬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그저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키는 자의 '공부 중독'이에요.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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