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닉 수재니스 / 배충효 / 책새성 / 208쪽
(2016. 12. 04.)



  인간이라는 창조물은 자신의 신체 비율로 우주를 가늠하려 했고, 소우주인 자신의 신체를 통해 더 웅장한 천체들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간은 스스로 제한된 틀을 만들어, 좁디좁은 비눗방울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 단일한 차원에 줄 세워진 '생각'과 '행동' 정확하게 같은 발걸음으로 열을 맞춰 줄지어 걷다가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P.22)




  뿌리 깊은 패턴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구가 정사각형에게 했던 것처럼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야 한다. 어떤 파열을 경험하면 그로 인해 기존의 경계가 훤히 드러나고 그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수단도 나타난다. 동시에 우리가 생기 없는 존재가 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력으로 일어서서...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롭게 눈을 뜬다.
(P.33)




  쿠바 출신의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성이 위협받는 것 같을 때마다 나는 늘 신화 속 페르세우스처럼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이성적 세계나 꿈속으로 도망치자는 말이 아니라 접근 방식을 달리하자는 뜻이다. 과거와 다른 시각, 다른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과 검증에 나서는 것이다."
  색다른 관점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히고 이는 보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사유에서부터 시작한다.
(P.34)




  인류가 만들어온 다양한 렌즈 덕분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이해는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렌즈는 시야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고, 우리는 렌즈를 통해 나타난 관점을 실재(reality)라고 착각한다. 단일한 관점에 의지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할 수 없다. 고정된 관념, 즉 천편일률적인 사고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찾고자 하는 것만 보는 함정. 다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존의 통념이 뒤집히고 유일하게 '옳은 관점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P.44)




  우리는 어떤 괌점과 언어적 표현 방식을 선택할지 고민한다. 방대한 감각 경험을 증류해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추출해내기 위해서다. 언어는 선을 따라 이동한다. 한 걸음 한걸음 차례로. 미국의 철학자 수잔 랭거(Susanne Langer)가 말했듯 일련의 개별 단어는 "묵주 구슬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꿴다." 반면 시각은 그 모습을 단번에 드러낸다. 동시에 곳곳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한 장의 그림은 수천 마디의 언어만큼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가능하다. 그림과 언어가 지닌 서로 다른 이질적인 특성 때문에 이 둘 사이에는 직접적 연관성은 없다.
  이미지에 대한 설명은 이미지 자체를 실제로 나타내지 못한다. 마이클 박산달(Michael Baxandall)이 지적했듯, 그런 설명은 한 폭의 그림을 본 경험에 '대한' 사고의 표현이다. 이러한 설명은 이미 우리의 언어로 형성되어 있다. 이미지는 '존재 자체'를 테스트는 '어떤 견해'를 표현한다.
(P.66)




  고정된 시각은 관계 속 역동적인 관찰을 방해한다. 지각은 불필요한 과정이 아니다. 장식이나 잡생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지각은 사유와 불가분의 관계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서로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다. 사유와 관찬을 재통합하는 일려의 과정에서 우리는 사유와 그 정의에 관한 개념을 확장한다.
(P.89)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깨달음. 사실, 우리가 있어 왔고 심지어 접근할 수 있는 곳 그 너머의 공간을 유추할 수 있는 관점의 무한한 가능성,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제한된 기존의 관점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시각이나 접근 불가능한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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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 임홍배 / 민음사 / 494쪽
(2016. 11. 27.)



이성과 열정
학자와 예술가
양립되는 두 끝단의 방향에 서있는 인물들
우리는 왜 꼭 이들을 구분하고 분리해서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합친 내가 되고 싶은 이유는 당연한 걸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VS 카잔차키스와 조르바




  골드문트의 애정을 일깨운 또 다른 존재인 나르치스는 수도원장보다 더 날카롭게 관찰했고 더 많은 것을 예감하긴 했으나 워낙 속을 터놓지 않는 성격이었다. 나르치스는 마치 황금의 새처럼 너무나 멋진 소년이 자기한테로 날아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계일학처럼 외로운 존재였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가 모든 면에서 자기와 상반된 존재인 듯하면서 닮은데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나르치스가 어두운 성격에 깡마른 체격이었다면 골드문트는 눈부시게 화사한 존재였다. 또 나르치스가 사변가요 분석가였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로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의 그러한 대립적 측면보다는 공통점이 더 컸다. 둘은 훌륭한 인격자였고 두 사람이 보여주는 재능과 개성은 다른 생도들에 비해 두드러졌으며, 또 둘은 숙명적으로 그 어떤 특별한 경고를 받으며 태어난 존재였던 것이다.
(P.31)



  "골드문트. 난 너와 같은 부류가 아냐. 네가 생각하는 그런 부류가 아냐. 물론 나도 말로는 하지 않은 서약을 간직하고 있지. 그런 맞아 그렇지만 단연코 너와 같은 부류는 아냐. 오늘 너한테 해줄 말이 있는데, 언젠가는 이 말이 생각날 거야. 모름지기 우리의 우정에는 네가 얼마나 완벽하게 나와는 다른 존재인가를 너한테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목표도 의미도 없어.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야"
(P.56)




  나르치스가 말했다. "자, 보라구. 내가 너보다 나은 점이라곤 단 한 가지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나는 말짱하게 깨어 있는데 너는 반쯤은 졸고 있거나 때로는 완전히 잠을 자고 있단 말이야. 내가 깨어 있다고 일컫는 사람이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가장 내면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열이나 충동 혹은 약점까지도 인식하고 처리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지. 네가 나를 만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다면 바로 그런 태도를 배운다는 것이겠지. 골드문트 너한테는 정신과 본능, 의식과 꿈의 세계가 매우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 너는 어린 시절을 잊어버렸지만, 네 영혼의 깊은 바닥에는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갈망이 꿈틀대고 있지. 너는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영혼의 소리를 듣게 될 거야.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말했다시피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내가 너보다 더 강해. 그런 면에서는 너보다 우월하고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하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네가 나보다 더 우월해. 아니, 스스로 네 자신을 발견하기만
(P.72)



  나르치스가 말했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성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살마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된 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과일의 단물처럼 넘쳐흐르는 삶의 풍요로움, 사랑의 정원과 예술의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이 대지라면우리네의 고향은 이념이야. 너희들이 감각의 세계에 익사할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할 위험에 처해 있지.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셈이지. 나에겐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겐 달과 별이 비치고, 네가 소녀를 그리워한다면 나는 소년을 그리워해......"
(P.74)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지는 마. 그렇지는 않아. 나는 가야만 한다고 느끼기에, 그리고 오늘 너무나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에 기꺼이 떠나는 거야. 그렇지만 순전히 행복감과 만족감에 젖어 달려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 생각에는 힘든 길이 될 거야 그렇지만 멋진 길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P.128)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예술의 뿌리는, 또한 어쩌면 모든 정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덧없이 사라져가는 것 앞에서 몸서리를 치며,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면 슬픔에 빠지는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서도 우리 역시 덧없이 스러져갈 것이며 조만간 시들 것이라는 확신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술가로서 어떤 형상을 창조하거나 사상가로서 어떤 범칙을 탐구하고 생각을 정리할 때면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거대한 죽음의 무도로부터 구해 내려고 애쓴다. 우리 자신보다도 오래 지속될 무엇인가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P.245)



  사랑의 환희가 더없이 행복한 긴장의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에 확실해졌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사멸할 수밖에 없듯이, 너무나 내밀한 고독과 슬픔에 잠겨 있는 순간도 다시금 인생의 밝은 측면에 새로이 몰입하고픈 욕구에 의해 느닷없이 삼켜지고 마는 것이다. 죽음과 쾌락은 하나였다. 사랑과 욕망을 인생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다면 무덤과 사멸 또한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골드문트의 어머니는 이브였다. 그녀는 행복의 원천인 동시에 죽음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녀는 영원히 낳고 또 영원히 죽이는 존재인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과 공포는 하나였다. 그녀를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뭔가를 말해 주는 비유가 되었고 신성한 상징이 되었다.
(P.265)




  "좋은 예술 작품의 원형은 실제로 살아 있는 형체는 아니지. 몰론 예술 작품의 단서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야. 예술 작품의 원형은 피와 살이 아니라 정신적인 어떤 것인지. 그것은 예술가의 영혼 속에 깃들여 있는 형상이라 할 수 잇지. 나르치스, 나의 영혼에도 그런 형상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네. 언젠가는 그런 형상들을 표현해서 자네한테 보여줄걸세.
  "바로 그거야! 이제 자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철학의 영역에 들어와 있고, 철학의 비밀 가운데 하나를 이야기한 셈일세"
(P.414)




  사상가는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의 도구인 논리가 불완전한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네. 마치 제혜로운 예술가가 자기의 붓이나 조각칼로 천사나 성인의 빛나는 본질을 결코 완벽하게 표ㅕ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듯이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든 예술가든 모드 나름의 방식대로 그런 시도를 하지. 양쪽 다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일세.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의 선물로 받은 자신의 재능을 실현하려고 애씀으로써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을 행하는 셈이지.
(P.427)


  "자아 실현이란 대체 뭘 말하는가?"
  "그것은 철학적인 개념이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 우리처럼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배운 사람들 한테는 모든 개념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완벽한 존재>라는 것일세. 완벽한 존재는 곧 신이지. 그 밖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미완의 것이고, 부분적이고, 변화하고, 여러 가지가 섞여 있고, 가능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그렇지만 신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게 아니라 단일한 존재이고, 가능성이 아니라 순전한 현실성 그 자체지. 하지만 우리 인간은 사라질 존재이고, 변화하는 존재이고, 가능성의 존재지. 우리 인간에게는 완전함도 완벽한 존재도 있을 수 없어. 그렇지만 잠재적인 것이 실현되고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뀔 때 우리 인간은 참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네. 완전한 것. 신적인 것에 한 단계 더 가까워지는 셈이지. 그것이 곧 자아 실현이라 할 수 있겠지."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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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
이재복 / 문학동네 / 220쪽
(2016. 11. 25.)



  사람의 본질은 마음속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마음 밭에 어떤 이야기 씨앗을 심느냐가 아마도 앞으로 점점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났으니 그만큼 정신의 문제가 중요한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P.5)



  어머니들하고 아동문학 얘기를 할 때마다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많은 어머니들이 묻습니다. "우리 애는 너무 책을 안 읽어요. 어떻게 하면 책을 좀 읽힐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을 하십니까?
  나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이들이 책을 즐겨 읽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듣는 문학 시기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이렇게 답을 합니다.
(P.10)



  아이들은 마음 밖과 마음속 공간에 벽이 없어 그냥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하면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늘 하나로 산다는 거지요. 몸 따로 마음 따로 될 때 사람은 괴로운 거지요. 물론 몸 따로 마음 따로 있으면서 과학적으로 세상을 분석하는 이성의 힘은 강해져서 근대 문명을 만들어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그냥 그렇게 서로 떨어져 살게 되면서 정신적으로는 힘든 생활을 하게 되기도 한 겁니다.
(P.38)



  우리 아동문학도 어른이 아이들을 앞에 놓고 훈화하고 교육하는 언어로 씌어진 작품은 이제는 읽히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을 보는 눈일 달라진 것입니다.  옛이야기는 아이들이 즐기는 모든 글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입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엣이야기 안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문제를 투사하여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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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는 어른
김지은 / 문학동네 / 242쪽
(2016. 11. 23.)



  아동 문학은 어른이 없는 사이의 어린이를 다룬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의 보호가 없으면 어린이는 생존하지 못한다. 어린이를 잘 먹이고 재우고 위험으로부터 돌봐야 하는 것은 어른의 몫이다. 그러나 어른이 항상 지켜보고 잇으면 어린이는 꿈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한다. 어른의 마리오네트로 살아갈 뿐이다. 어린이에게 좋은 세계는 어른이 얼마쯤 눈길과 손길을 거두어도 편안하게 놀 수 있고 이것저것 마음껏 해 볼 수 있는 세계다. 좋은 아동문학에는 어른 문지기가 없다. 어린이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가득하다.
(P.4)



  좋은 동화는 감쪽같은 거짓말이다. 어른이 만들었지만 어른이 만들지 않았다고 느껴지는, 어른이 지켜주고 있지만 어른이 간섭하지는 않는 태평한 섹다. 어린이들은 이런 동화를 읽으면서 비로소 어른 없는 미래를 용감하게 준비하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P.7)



  사람들은 어떤 불편하고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불운하기 때문이라고 여겨버리는 경우가 많다.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서 무작정 행운을 기다린다. 그러나 사전에 나오는 뜻으로만 봐도 행복과 행운은 뚜렷이 다르다. 행복은 '몸과 마음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하는 데 비해 행운은 '좋은 운수'를 뜻한다. 운수는 '이미 정해져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삶을 대하는 방식에서 '행복'은 점점 더 '행운'에 의존하는 것 같다. 어른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로또에 당첨되면 좋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아이는 '운이 없어서' 시험을 못 보았기 때문에 죽을 만큼 '불행하다'고 말한다.
(P.35)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정리했다. 행복은 '성취'를 '욕망'으로 나눈 값이라는 것이다. 성취(분자)를 키우거나 욕망(분모)을 줄이면 행복의 값은 커진다. 자본주의사회는 쉼 없는 경쟁을 권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리든 돈을 많이 벌어 물질적 성취를 늘리든 성취를 키움으로써 행복을 키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늘리기 위한 또다른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욕망을 줄이면 당연히 행복의 값은 늘어난다. 우리는 왜 더 많은 욕망과 성취를 위해 달려야 하는가. 누구를 위한 욕망과 성취인가. 약분하면 같아질 그 값을 위해 오늘 내 앞에 놓인 웃음도 챙길 여유를 없애는 것이 더 나은 삶인가.
(P.40)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고 다짐한다. 잘 가르치겠다면서,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다. 묻지 않는 어른 앞에서 어린이는 입을 잃어버린다. 이 경우 입은 오직 대답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데, 훈련된 대답은 말이 아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입은 몸에서 사라진 기관이나 다름없다.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다는 부모의 욕심은 아이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진행된다. 소통을 무시할 때면 아무리 현명한 주장도 본건적인 통제와 다름없는 폭력이 된다.
(P.91)



  변신 이야기는 읽는 사람이 변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의 마음에 위력을 발휘한다. 겉모습의 변화를 매개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읽는 사람의 정신적 변화와 성장을 끌어내고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 변신 이야기는 주인공의 변신 전후의 삶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독자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는 안전한 탈바꿈 체험이기도 하다. 변신 이야기는 우리가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바꾸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해준다.  미래가 아직 불확실한 어린 시절에 읽는 변신 이야기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P.98)



  추리 이야기, 탐정물이 어린이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논리적 사고는 해방적이다. 추리는 오직 자신의 논리력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에 내 생각을 구속시키지 않을 수 있다. 주어진 단서를 가지고 누가 범인일까 파고드는 순간만큼은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또한 추리에는 권력이나 권위가 개입하지 못한다. 타당한 추리와 부당한 추리가 있을 뿐이다. 직접 보거나 들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여겨진다. 어린이는 어른 못지않은 관찰의 눈을 지녔다. 힘센 어른에게 꿀릴 여유가 없으니 추리의 과정에 재미있다.
(P.109)


  어린이들의 생활에서 슬픔의 자리를 '화'가 차지한 지는 꽤 되었다. 슬픔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감정이라면 화는 밖으로 표출되는 감정이다. '슬픈 사람은 약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슬픔을 권하는 사람은 드물다. 되든 말든 일단 화를 내고 나면 "그 녀석 똥배짱이다."라는 말이라도 듣지 않는가. 얼핏 눈물이라도 비쳐서 상대에게 만만해 보이는 것보다 똥배짱이 되는 것이 나은 세상이다. 흐느끼는 어런이는 별로 없고 떼쓰고 울부짖는 어린이들로 가득하다. 약육강식이 인간의 규칙이 되었기 때문이다.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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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어떻게 읽을까?
김경집 / (주)학교도서관저널 / 380쪽
(2016. 11. 20.)



  나는 고전을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대가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고전은 텍스트로서의 답을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다채로운 시선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진짜 공부이고, 교육이다. 삶의 강을 건너는 데에 크고 멋진 배가 능사는 아니다. 그런데도 다들 그런 배만 선망한다. 힘들고 매운 삶과세상의 강을 건너는 나만의 배를 건조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은 삶의 강을 건너는 나만의 배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P.7)



  고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품이 쓰인 당시의 시간과 공간, 사회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지금 우리의 삶을 비교하면서 읽을 때에야 고전이 진정한 삶의 힘이 될 수 있기 대문이다.
(P.8)



  마크 트웨인은 고전에 대해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저 웃어 넘길 농담이 아니다. 고전을 제대로 읽으면 지금, 그리고 미래 우리 삶의 좌표가 보이고 강을 건널 방도와 힘이 마련된다. 그게 진자 고전의 힘이고, 고전을 읽어야 하는 당위이다.
(P.10)



  <국부론>의 주제를 단순히 시장경제의 기능과 경제학의 요체만을 편의적으로 선별한 것을 그대로 배우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일부러 이 책을 우리가 함께 읽을 고전의 목록에 챙겼다.
  탐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국부론>이 인용되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은 최소한 이 책의 진정한 목적과 주제의식은 인식하길 바란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교과서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이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중요하 책이지만 정작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 본의와 목적을 왜곡해 선동하는 현실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올바른 눈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P.64)



  고전에 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나는 "대가의 시선으로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다룬 책"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그 대가가 반드시 유명한 문필가가 사상가일 까닭은 없다. 그렇게 한다면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어떻게 고전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는가. 구전문학이나 작자를 알 수 없는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에 고전의 의미는 "시대가 공감하고 대중이 동의하는 보편적 문제를 새로운 시각이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생각의 전환을 이끌어낸 작품"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P.68) 

  고전이라 하면 오랜 시간을 거쳐온 것, 그리고 엄청난 두께의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기 쉽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에밀 졸라의 이 짧은 고전의 영토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고전은 시간이나 부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역사를 바꾸고 문명의 진보를 이끈 것이라면 마땅히 고전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 에밀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인류의 위대한 교훈을 남겼고, 세상을 바꾸었다. 그러니 불후의 고전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다.
(P.95)



  원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 문화와 예술에서 드러난 동양적 취미나 호기심을 의미했다. 그러나 서양이 동양을 침략하고 지배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이 품고 있는 동양에 대한 환상으로 변질되었고 그것을 다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서양의 우월성을 확인하거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의식구조로 자리 잡았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지리적 확장과 식민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와 자민족중심주의가 강하게 결합된 지배의 양식이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밝혀낸 이가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사이드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을 고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성과 권력의 관계가 식민지적 지배구조에서 비록되었음을 밝혀냈다.
(P.114)



  1962년 <침묵의 봄>이 출간되었을 때, 제목과 달리 이 책이 세상에 던진 메시지와 여파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당시 대중들에게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를 각성하게 한 각성제와 같았다. 무분별한 살충제의 남용으로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이 책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은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사고를 전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P.121)



  <어린왕자>는 얼핏 읽으면 달콤한 이야기이지만 정말 중요하게 다루는 제는 바로 '관계'이다. 나와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너와 우리의 관계......, 이 이야기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자리 잡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든다.
  이 책을 읽을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린왕자가 '나이가 어린' 왕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우리는 어리다고 하면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지만 '르 쁘띠 프린스'의 '쁘띠'는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 아니라 '작다'는 뜻이고 바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작은 나'를 의미한다. 그래야 '어린' 왕자는 영우너히 내 안에 살아있고 또 늘 어린왕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기 각성으로 이어진다.
(P.182)



  사춘기는 '우주적 사건'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로운 나를 대면하는 시기, 성인의 몸으로 변화하지만 성인의 정신과 지식은 아직 갖추지 못한 까닭에 그것을 혼자 감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처음으로자신의 삶과 1 대 1로 대면하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읽어내기 시작하는 것을 충격 혹은 사건이라 하지 않으면 고연 뭐라 부를 것인가. 오늘의 청소년이 고민할 틈도 없이 박제된 사춘기를 겪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사춘기를 제대로 겪어내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과 맞닥뜨리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사춘기는 독립의 과정이다.
(P.212)


  풍자와 우화는 구체적으로 현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때론 인식의 긴장이 필요하고 상당한 에너지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 사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단순히 비겁의 방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의 토대 위에서 문제의 핵심을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이다. 풍자로밖에 현실을 비판하지 못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러나 풍자를 상실한 사회 또한 불행하다. 그것은 시공간을 떠난 보편적인 시선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247)



  1970년대 대한민국은 독특한 모습을 띤다. 1960년대에 갑자기 불어닥친 산업화는 전통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저임금 노동착취를 토대로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권력층이 형성되었고, 사회는 자연스럽게 양극화되었다. 70년대는 그렇게 형성된 산업 사회가 기존의 생산체계와 경제구조를 대체하고 가진 자의 탐욕과 횡포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기였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그러한 한국 사회의 단면과 인간이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P.252) 



  단편소설은 밀도와 순간적 반전의 즐거움이 촘촘해서 읽는 맛이 잇고, 장편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일관되게 이어지며 속살을 벗겨내는 즐거움이 있다면, 대하소설은 유장함 속에서 인간과 세상의 거대한 스펙트럼을 묵직하게 바라보는 행복을 선사한다. 그러나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은 큰 흐름 안에서 다양한 인간군상과 세상사를 다루는 장점이 잇는 반면 자칫하면 이야기가 늘어져서 밀도가 떨어지기 쉽다. 박경리의 <토지>는 밀도와 무게를 동시에 담은 걸작이다. 이에 버금가는 소설을 굳이 하나 꼽이라면 최명희의 <혼불>을 추천하고 싶다.
(P.272)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역사가의 사고와 태도 혹은 방법을 통해 선택, 수집, 정리되며 현재로 해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견해를 "역사는 현재오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로 서술했다. 카의 역사관의 중심은 바로 '현재'이다. 그에게 있어 역사는 과거에 갇힌 것이 아니다. 과거의 기록물을 평가하고 비판하며 역사가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카의 시각을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적 문제를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의미를 제시한 책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다.
(P.320)


  루소가 <에밀>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철학의 핵심은 '교사는 어린이가 자연 그대로의 인간으로 발달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인데,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어린이를 작은 어른으로 다루지 말 것이며, 어린이를 훈계하거나 훈련을 하여 어른의생각대로 틀이 잡하고 성장학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어른이 보살펴줌으로써 어린이가 자유와 경험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이라고 하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루소의 사상은 근대 인간교육의 중요한 이념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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