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 박홍규 / 문예출판사 / 320쪽
(2016. 3. 3.)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대표작을 21세기 한국에서 삶을 버티어 내고 있는 우리들이 꼭 읽어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로 역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밀의《자유론》은 또한 소수 독재자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기보다도, 다수의 대중 지배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에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대중의 민심이라는 것이 지배하는 것에 대응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책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중민주주의나 포퓰리즘 등의 논의에 도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이다."(p.19)
또한 이 글을 쓴 밀의 이야기 중에서도 또 다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사회가 강제와 통제라는 방법으로 개인을 대하는 태도를 절대적으로 규제하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 사용 수단이 법적 형벌이라는 형태의 물질적 힘이거나 여론이라는 도덕적 강제여도 무방하다. 그 원리란 인류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으로 어떤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보장받는 유일한 근거는 자기보호Self-protection라는 것이다. 문명 사회의 어느 구성원에 대해, 그의 의사에 반해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란, 타인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는 경우 뿐이다.
(P.42)"
  현재 한국에 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가 무엇인지, 나 자신이 자유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책을 읽으며 나라탓, 정치탓, 남탓 보다는 우선 자기 자신을 먼저 돌이켜 볼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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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고전’이라고 하는 게 사실 읽히지 않을 정도로 재미 없는 것도 사실이고, 특히 지금 우리에게 그런 게 왜‘고전’으로 읽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책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런‘고전’중에서도 이 책《자유론》만큼은, 비록 소설처럼 재미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자유’를 체제와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삼아온 20~21세기 대한민국에서‘고전’으로서의 가치,‘ 원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남북한 대립을 비롯해 수많은 대립적인 의견이 상충하는 우리 현실에 그 모든 의견의 평화공존을 위한 최소 조건의 틀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미 수많은 자유국가에서는 그런 틀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라는 것이다.
(P.8)


  무엇이 참된 사상이냐, 무엇이 참된 진리냐 하는 물음에 밀은 확실하게 답하지 않는다. 아니 당연히 답이 있을 수 없다. 사실 그런 답을 자신 있게 주장한 사람들치고 엉터리 예언가에 그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참된 사상이나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자 수단이 완벽하게 자유여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자유가 있어야 독창적인 사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상이란 그것이 자유롭게 펼쳐져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정신 풍토는 아직도 근대 이전 사문난적의 시대이고 지적 노예 상태다. 밀은 모든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상의 자유가 없는 우리에게 다른 자유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돈의 자유뿐이다. 아니 돈의 노예뿐이다. 반공과 자본의 획일적인 노예뿐이다. 그 밖에 다른 자유는 없다. 지적 노예상태에서는 사상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이 책의 내용 전부다.
(P.12)


​  이 책에서 전개되는 모든 논의가 직접 지향하는 숭고한 기본 원리는,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 빌헬름 폰 훔볼트
《국가의 영역과 의무Sphere and Duties of Government》

  이 책 첫머리에 인용된 훔볼트의 말은《자유론》을 지배하는 원리인 인간의 다양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사상
의 자유가《자유론》의 주제다.《 자유론》은 5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 ‘서론’첫 문단에서 그가 말하는 자유란‘시민적·사회적 자유’이고,
그 책의 주제란“사회가 합법적으로 개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이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고 민주주의가 수립된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자유 문제는 민주주의라는‘다수의 폭정’하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이어받은 주장이다.
(P.26)



  1장에서 밀은 자유를 세 가지로 나누고 그 첫 번째를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고 했다. 이를 중심으로 다루는 2장에서 밀은 철학자답게 진리를 찾으려면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P.54)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의 특별한 해악은, 전 인류의 권리를 강탈한다는 것과 같다. 즉 현존 세대와 마찬가지로 미래 세대, 또 그러한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강탈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고 하면, 인류는 오류를 진리와 바꿀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반대로 그 의견이 그르다고 해도 인류는 마찬가지의 엄청난 이익, 즉 진리가 오류와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진리에 대한 더욱 명확한 이해와 더욱 생생한 인상을 상실하게 된다.
(P.59)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 고칠 수 있다. 단순히 경험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경험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를 밝히려면 반드시 토론이 필요하다. 잘못된 의견과 관행은 점차 사실과 논의에 복종하게 되지만, 사실과 논증이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려면 먼저 그것이 인간 정신 앞에 제시되어 판단되어야 한다.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낼 평가 없이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는 사실이란 거의 없다.
(P.65)

 

  진리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주장에 맹종할뿐인 사람들의 진실한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오로지, 또는 주로, 위대한 사상가들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한 높은 지적 수준에 이르게 하기 위해, 위대한 사상가를 만드는 경우와 같은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다.
(P.87)

  어떤 사실을 자기 관점에서만 보려는 사람은 그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고, 누구나 그에게 반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반대쪽에서 주장하는 이유를 논박할 수 없다면, 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느 의견을 택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 경우 합리적인 관점이란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고, 스스로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권위가 지도하는 바에 따르거나, 보통 사람들처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쪽에 기울게 된다.
(P.92)

 

 

  밀은 3장에서 행동의 자유에 대해 설명한다. 즉 사상 활동만이 아니라 모든 정신 활동에서 개인은 그 의견에 따라 개인 자신의 방식으로 행동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경우 특히 개인은‘그가 무엇을 하는가’라는점에서만이아니라,‘ 그가어떤특징을갖는사람인가’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므로, 개인의 개성이 다양하게 발전되어야 한다. 즉 무조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의 존중을 주장한다.
(P.126)

  인간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색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내면에 있는 개성적인 모든 것을 파멸시켜 획일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있지 않고,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하여 설정되는 범위 안에서 개성을 양성해 그 힘을 발휘하게 하는 데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것을 하는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동일한 과정에 의해 인간생활도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며 활기를 띠게 된다. 나아가 그것은 고상한 사상과 숭고한 감정에 더 많은 자양분을 공급하고, 모든 개인이 인류에 속하는 것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무한히 생각하게 만들어 인류와 결합하는 유대관계를 강화한다.
(P.141)

 


  전체적 국가 교육은 오직 국민을 틀에 집어넣어 서로 너무나 흡사하게 만들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국가가 국민을 정형화하는 틀은, 결국 국가권력을 장악한 우월한 세력 — 군주건, 승려계급이건, 귀족계급이건, 현재 대중의 다수파이건 — 이 좋아하는 것이기때문에, 그 교육이 효과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국민 정신에 대한 압제가 확립되며, 그 압제는 자연적 추세로서 국민의 육체에 대한 압제를 유발한다.
(P.225)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개인의 정신적 발달과 향상이라는 이익을 뒤로 돌리고, 세부의 사소한 사무를 처리하는 행정 기능, 또는 경험에서 얻게 되는 사이비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원하는 국가, 또한 국민을 위축시켜 국가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 (비록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국가는 머지않아 다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국민이 위축되면 어떤 위대한 일도 실제로 성취할 수 없고, 또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전한 기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기구를 더욱 원활하게 운영하려고 한 나머지, 스스로 배제한 바로 그 구성원의 활력의 결여로 인해, 결국은 그러한 기구가 쓸모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241)

 

 

  연고와 물질의 사회에서 개인의 정신적 자유란 있을 수 있는가? 연고로 숨 막힐 듯이 철저히 짜이고, 오로지 물질 추구를 향해 역시 숨 막힐 듯이 치열하게 짜인 경쟁사회에서 개인의 자유, 그것도 의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이 문제가 될 여지나 있는가? 밀이《자유론》1~2장에서 묻는 그런개인의 정신적 자유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자유란 재산의 자유, 기업의 자유, 그리고 교육의 자유라는 이름과 하나처럼 주장되는 학교 경영의 자유 따위가 아닌가? 그게 우리가 언제나 말하는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자유 아닌가? 내 재산, 내 회사, 내 학교를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자유론》에 덧붙여 밖에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정당? 그것은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한 사적 족벌당이지 정강이나 정책의 조직이 아니다. 따라서 언제나 이합집산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회에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개성이고 다양성이다. 따라서 밀이《자유론》3장에서 말하는 정신적 자유의 기본인 개성과 다양성이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이고, 오로지 인간성의 획일화, 평준화, 기계화만이 존재한다. 아니다. 물질의 경우는 다르다. 적어도 지위와 재산과 학력의 우열화가 있다. 어쩌면 용모도 다르다. 얼짱과 몸짱의 우열화가 있다. 억대 스타와 몇십만 원대 엑스트라의 우열화가 있다. 사회 전반의 양극화가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으로는 유사하다. 모두 연고와 물질의 노예라는 점에 다르지 않다.
(P.255)

 

 

  밀이《자유론》첫 부분에 인용한“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훔볼트의 말은《자유론》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다. 훔볼트는 19세기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유기적이고 인간적인 언어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목표를 인간의 개성에 따른 다양한 발전으로 보았다.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면 흔히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훔볼트는 그것을 국가와 정치의 목표로 주장한 것이다. 사실 훔볼트나 밀에게는 교육과 정치가 일치한다.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P.283)

 

 

  밀《자유론》의 핵심 원리는‘다양성’이다. 획일이나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배격한다. 문제는 그 다양성이 대립하는 경우의 조정 원리인데, 이를 밀은‘타자 피해의 원리’로 설명한다. 즉 어떤 개인의 행동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관련되는 경우 그것은 절대적인 자유여야 하고, 그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만 제한될 수 있다는 원리다. 타인에게 손해를 가하지 않는 한 누구나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게 자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이 아무리 위험한 사상을 가져도 자유고, 어떤 악취미를 가져도 자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도, 동성애자도 자유다. 그것이 설령 개인에게 정신적·육체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그 개인이 성인이고 그 자신에게만 고통을 준다면 자유라는 것이다. 가령 그것이 음주라든가, 끽연과 같은 기호인 경우는 물론이고 동성애나 변태애라고 해도 그것을 법이나 여론으로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타인의 이익이나 행복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경우에는 당연히 사회의 권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권력의 근원인 다수자의 의지가 소수자의 이익이나 행복을 억압할 수도 있다. 특히 여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다수자의 폭정은 인간의 마음을 노예화하는 것이므로 단연코 배격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상과 언론의 완전한 자유가 특히 요구된다. 밀의 주장은 바로 그러한 사상의 자유를 완벽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P.284)

 

  앞에서 지적했듯이 밀의《자유론》에는 문제도 많다. 우선 각 장의‘해설’에서 지적한 것들을 다시 요약해보자. 밀은 개인만이 관련된 행동에 대해서는 권력이나 사회가 어떤 간섭도 할 수 없고, 그런 간섭은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순수하게 개인만 관련된 행동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과연 그렇게 확연히 구분되는 행동이 있을 수 있는가? 나아가 그런 구분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인가? 타인에게 끼치는 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고 그런 해가 생기는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는 경우에 자유의 범위는 대단히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특히 밀이 그런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 미성숙자나 미개사회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밀이 미개사회라고 한 당대의 식민지에서는 자유가 아니라 전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한 것은 제국주의자로서 식민지의 전제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었다.
(P.292)

 

 

  밀은 흔히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낭만주의)를 결합시켰고, 그런 점에서 선배인 훔볼트나 괴테와 같이 풍부하고 자발적이며 다면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합리적인 자율적 인간을 추구했다. 그리고 사상과 의견의 자유에서 관용, 다양성, 인간성이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한 밀《자유론》의 핵심은 20세기에도 살아남았고, 21세기에도 살아남으리라.
(P.299)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대두된 자유주의의 변태와는 관계없이 자유 자체는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문제다. 밀이《자유론》에서 언급한 사상의 자유를 비롯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자유가 문제다. 특히 사상의 자유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의해 제한되고 있고, 언론의 자유도 독점적인 대언론사의 경영 자유로 오해되고 있고, 그런 언론에 의해 밀이 가장 우려한 자유의 적대적 상태인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또한 다양성을 민주국가의 원리로 삼아야 하거늘 우리의 현실, 특히 교육 현실은 다양성을 죽이는 획일성으로 치닫는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모두 개성과 다양성을 잃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밀의《자유론》에서 배워야 할 논점이 확실해졌다.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밀이 말하는 자유의 길이다.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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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막스 베버 / 최장집, 박상훈 / 후마니타스 / 236쪽
(2016. 2. 27.)

 

 

 

<소명의로서의 정치> 

 

  국가는 오늘날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다. 근대에 와서, 국가 이외의 다른 모든 조직체나 개인은 오로지 국가가 정하는 범위 내에서만 물리적 폭력/강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국가만이 폭력/강권력을 사용할 '권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P.110)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정치를 '위해'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해'[혹은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이 결코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를 위해 사는 정치가는 '어떤 대의'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내적 균형과 자긍심을 함양한다. 정치에 의존해 사는 정치가는 정치를 지속적 소득원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가 정치 지망생이나 지도층 혹은 그의 추종자들을 비금권적인 방식으로 충원하고자 한다면 당연한 전제 조건은 이 지망생들이 정치 활동을 통해 정기적으로 확실한 수입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명예직으로' 수행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정치는 흔히 말하듯 '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사람들, 자산가나 특히 금리생활자에 의해 수행된다. 그러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정치적 지도층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한다면 이들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P.125)

 

 

  정치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열정, 책임감, 그리고 균형적 판단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 및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가리킨다.
  단지 열정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 - 그것이 제 아무리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 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대의'에 대해 헌신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끄는 결정적인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적 판단이다. 정치가가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심리적 자질로서 균형적 판단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P.196)

 

 

  윤리적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적인 두 원칙을 따른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다르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다.
  신념 윤리는 무책임과, 책임 윤리는 무신념과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신념 윤리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가 -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독교는 올바른 행동을 할 뿐,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는 식 - 아니면 책인 윤리의 원칙에 따라 - 우리는 우리 행동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 행동하는가 사이에는 심연과 같은 깊은 차이가 있다.
(P.210)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 특히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정치가 가진 윤리적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치가는 모든 폭력/강권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P.224)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말하고 있듯이] '악마, 그는 늙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연령, 즉 인생의 나이가 아니며 따라서 '악마를 이해하려면 나이를 먹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토론할 때 출생증명서의 날짜를 이유로 남의 의견을 압도하려는 것을 나는 한 번도 참아 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스무 살이고 나는 오십 살이 넘었다고 해서, 단지 그 사실만으로 뭔가 성취했다고 할 수 없으며 그보다 앞서서 뭔가를 배웠다고 할 수도 없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현실을 견뎌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것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
(P.227)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고 모든 역사적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도자이면서 또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영웅일 수밖에 없다. 지도자나 영웅은 아니라 해도, 모든 희망이 깨져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지금에라도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오늘날 아직 남아 있는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해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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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정치가는 누구인가 (최장집)>

 

  정치철학은 시대의 격변을 배경으로 출현했다. 그런 시대적 변화의 의미는, 철학자들이 어떤 상상력과 비전을 가지고 당시의 인간 현실을 바라보았고, 그런 현실을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어떻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 점에 있어 정치철학은 경험적 지식을 추구하고 이를 축적하는 과학으로서의 학문, 즉 '사회과학'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일찍이 칸트는 그의 철학 강의에서 철학이란 "철학 그 자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철학도 마찬가지다.
(P.9)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비교적 짧은 텍스트이지만, 그 내용은 더없이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해석의 다양함을 허용하는 고전은 읽는 사람을 미로에 빠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할 가능성 또한 크다. 이 점에서 베버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 열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베버의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이분법적 구조라고 할 수 있을 석이다. '신념 윤리'대 '책임윤리', '카리스마적 지도자' 대 국가 및 정당의 관료화, 의회 민주주의 대 지도자 민주주의, 정치인 대 관료, 카리스마적 개인 대 조직의 '일상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개념의 쌍들은 모두 '이율배반'적 구조를 갖는다. 한마디로 말해 두 명제 사시에 어떤 것을 양자택일적으로 선택하는 정태적 차원의 문제로 베버의 중심 사상을 이해하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이들 대쌍적 개념이 현실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나아가 인간 행위와 사회 변화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를 분석하려 했다는 데 있다.
(P.17)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독일어 원래 제목 "Politik als Benuf"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이 Beruf라는 말은 소명과 직업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사전적 말뜻만 그런 것이 아니라, 베버가 이 책에서 의미했던 바도 그러하다. 그래서 한 대표적인 영어 번역판은 두 의미를 동시에 사용해서 "정치라는 직업과 소명"이라고 풀어쓰기도 한다. 그러나 두 의미 가운데 제목으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것도 무방하지만 소명이라는 말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 정치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 의식을 가진 직업 정치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P.36)

 

 

  그의 유명한 젓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일상의 경제생활에서 이윤을 축적하는 상업 행위를 신의 부름으로 생가하고, 그러므로 헌신적으로 그에 복무했던 칼뱅주의자들이, 가장 금욕적인 그들의 교리와는 달리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냈음을 테마로 한다. 마찬가지 논리로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는 한 사람의 정치인/지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프로테스탄트적 윤리에 상응하는 정치적 소명 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소명 의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 의식을 동시에 말한다.
  하나는 내면적 신념 혹은 '내면적 신념 윤리'의 원천으로서의 소명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신념을 현실 속에서 이행해야 할 책무, 즉 텍스트에서 말하는 '책임 윤리'의 도덕적 원천으로서 소명 의식이다.
(P.37)

 


  베버는 정치의 중심이 되는 영역을 국가라고 정의한다. 정치 이론의 고전으로서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더불어 이 국가에 관한 정의다. 그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국가란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라고 정의힌다.
  이어서 정치에 대해서는 "국가들 사이에서든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관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 또는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이라고 말한다.
(P.43)

 

 

  정치의 본질을 갈등이라는 베버 정치론의 중심 테마로 볼때, 갈등에 휘말리지 않는 합리적 행정을 구현하는 관료가 정치적 리더가 되는 것에 반대해 왔다. 관료와는 정반대로, 정치적 지도자는 어떤 대가를 치르던 간에 완강한 자세로 목표를 달성하려고 투쟁하고 헌신한다. 정치에 복무하는 그들의 의무는 단순히 기존의 조건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다. 그리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도적인 지도자들은 그들의 데마고그적 기술을 활용함과 아울러, 그들 스스로 지지자를 창출하고 동원하지 안으면 안 된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들은, 투표자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제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P.71)

 

 

  정치 영역에서 유효한 정치의 에토스, 정치의 도덕적 성격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베버는 '내면적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하고, 이 두 개념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신념과 책임의 두 모순적 도덕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이율배반의 한 유형인 '자유와 필연'에 대비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신념 윤리는 각 개인이 행위할 때,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그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그가 옿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도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도덕적 근본주의의 태도를 동반한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행위는 종교나 도덕의 영역 밖의 세속적인 현실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예기치 않은 문제에 이내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것과는 달리, 책임 윤리는 사건의 전체 구조, 내지는 맥락에서 행위자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고, 그가 원래 바라는 목표와 관련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판단력, 사려 깊음을 뜻한다. 따라서 책임 윤리는 목적과 수단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에 영향을 미친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동일한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P.86)

 

 

  민주화 이후 한국의 사회구조는 다원화되고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계층화되었다. 경제 역시 세계경제의선진국으로 부상하면서 크게 변화했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수준에서 일어난 빠르고 커다란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이념은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고, 정치에 대한 이해는 부정적이고 경직적이어서 민주주의의 가치와 작동 원리에 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베버의 정치사상을 집약한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읽는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커다란 지적 자원과 만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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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금욕과 탐욕 속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
막스 베버 / 김상희 / 풀빛 / 252쪽
(2016. 2. 22.)

 

 

 

  우리는 베버의 학문적 열정이 낳은 이 책을 보면서 자본가라고 해서 물질적인 것만 추구한 것은 아니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라고 하면 생각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그런데 이 미국을 강한 나라로 만든 정신을 흔히들‘프랭클린 정신’이라고 한다. 베버는 이 책에서 시간이 곧 돈이며 정직이 신용이라고 주장한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면서 바로 초기 자본주의 정신의 순수한 원형인 프랭클린 정신이 정직과 절약, 그리고 일에 대한 의무였음을 밝혀낸다.
  물론 베버가 밝힌 초기 자본주의 정신의 건강성과 경건성이 완벽하게 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베버는《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일반화된 하나의 논리로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철저하게 입증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학 저서라고 할 수 있으며, 학문의 객관성을 구체적으로 밝힌 고전으로 그 빛을 잃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P.8)

 

 

<프로테스탄트>
16세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장 칼뱅(Jean Calvin) 등이 주도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해 성립된 기독교의 분파를 말한다. 가톨릭이 구교라고 불리는 데 반해 프로테스탄트는 신교 혹은 개신교로 불린다.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와 더불어 기독교의 3대 교파를이룬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저항하다, 항거하다’의 뜻을 가진 영어
‘프로테스트(protest)’에서 왔다. 이 말은 1529년 2월 21일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 국회에서 루터를 지지하던 제후와 도시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카를 5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저항한 데서 기원했다.
(P.10)

  막스 베버(Max Weber)는 근대 자본주의를 주목했다. 직업을 통해 이윤을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근대 자본주의를 베버는‘합리적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합리적 자본주의는 정규적인 시장과 연관되어 이루어지는경제 행위의 한 형태로서, 정확한 계산을 위한 장부 정리와 합법적 수단에 의한 체계적인 이윤 추구를 특징으로 한다. 베버는 합리적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합리적 정신이라는 규범적인 조건과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라는 제도적 요소가 필요하다고 구분했다. 이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합리적 자본주의는 성립될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 합리적 정신의 뿌리인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를 찾아가는 추론 과정을 살펴볼 수있을 것이다.
(P.15)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년과 1905년, 두 번에 걸쳐 발표된 논문을 묶은 책으로 먼저 발표된 것을 1부로, 나중에 발표된 것을 2부로 구성했다. 제1부는‘문제 제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베버가 앞으로 말하려는 주제에 대해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1부는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장에서 베버는 어떤 신앙과 그 신앙을 가진 사람의 사회적 계층이 서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제2장에서는 베버가 탐구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순수한 이념 형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제3장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근원이 된 루터의 직업 사상에 대해 살펴본다. 이렇게 베버는 제1부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어떻게 초기 자본주의 정신의 밑바탕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고, 제2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와 내용을 제시한다.
(P.30)

  베버가 어떤 지역의 종교와 직업에 관한 통계를 통해 주목한 것은 “자본가와 기업가들, 특히 근대 기업의 숙련된 상급 노동자와 관리자 계급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었다. 즉, 베버는 신앙과 계층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주목한 것이다. 16세기 초 초기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중심지들 중 일부가 프로테스탄트를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중심지들에서는 종교 개혁을 통해 낡은 전통의 껍질을 벗도록 했으며, 특히 경제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을 통해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다. 사실상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감독은 느슨한 것이었다. 오히려 프로테스탄트로 개종을 하면서 가톨릭이 요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한 행동의 규제를 받았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 신자들보다도 휴식이나 향락, 오락 등에 대해 더 단호하고 엄격한 태도를 취해야 했다. 이 점은 특히 칼뱅교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그렇기 때문에 베버는 만일 우리가 프로테스탄트와 경제적 발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면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지닌 특유한 성격을 살펴보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P.31)

  프로테스탄트가 의무와 미덕으로서‘직업의 소명’을 신에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본 점은 프로테스탄트 특유의 종교적 가치에 뿌리를 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자연스런 향락을 엄격하게 억제하면서 더욱더 많은 돈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순수한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개인의 행복이나 효용을 초월하는 매우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윤을 획득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물질적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렇게 경제적 활동을 통한 부의 획득이 금욕적인 성격으로 바뀌면서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초기 자본의 축적을 이끌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주도 원리로 작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베버는 초기 자본주의 정신의 탄생 원인으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제시한다.
(P.47)

  베버는 한마디로 루터를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관한 한 주목할 인물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루터가 말하고 가르친 직업 개념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가장 고결한 표현은 수도원의 금욕주의나 은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주어진 의무를 실천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모든 사람은 신이 각자에게 적절하게 부여한 천직에 종사한다. 따라서 정치 권력에 복종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태도가 루터가 주장하는 신앙인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루터가 세속적인 행위와 종교적인 윤리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칼뱅과는 달리 루터의 직업 개념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면서 수동적이라 하겠다.
(P.84)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나타난 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이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 발생의 원인이 아니고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확정된 직업에 금욕적으로 충실하라는 요구는 근대의 전문화된 노동 분업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이윤 행위를 하느님의 섭리로 해석함으로써 사업가의 활동 또한 정당화했다. 사치와 방종은 금기 대상이 되었던 반면 스스로 부를 이룩한 중산층은 최고의 윤리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는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합리화 과정을 확대시키는 데 공헌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 베버는 다음과 같은 말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압축해서 표현했다.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일 뿐만 아니라 근대 문화를 구성하는 직업 사상에 기초한 합리적인 생활 태도는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주의 정신에서 태어난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이 책에서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P.164)

  청교도들은 직업인이 되기를 바랐다. 반면 지금의 우리들은 직업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금욕주의는 수도원의 닫힌 벽을 걸어 나와
일상생활의 직업으로 옮겨 왔고 현세의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금욕주의는 기계제 생산의 기술적·경제적 전제 조건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강력한 우주를 형성하는 데 그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이 근대적 경제 질서는 엄청난 힘을 갖
고 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개인의 생활양식을 강제로 규제하고 있다. 이 질서는 영리 추구 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포
함하며 마지막 석탄이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그 규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백스터는“외적인 재화에 대한 염려는 마치‘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얇은 망토처럼’신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어야만 한
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운명은 이 망토를 강철 같은 우리로 만들었다. 금욕주의가 세상을 새롭게 형성하고 세속에 영향을 미
치기 시작하자 이 세상의 외적인 재화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고 급기야 인간은
결코 이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종교적인 금욕주의 정신은 이 우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영원히 사라진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라는 기초 위에 서 있으므로 더 이상 정신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신의 유쾌한 후계자인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완전히 빛이 바랜듯하고,‘ 직업의무’사상은 지나간 종교 신앙의 유령이 되어 우리 삶의 주변을 떠돌고 있다.
(P.197)

  베버 사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회 과학이 가치 판단을 하기 전에 사실로서 사고해야 한다는 몰가치성과 가치 중립성을 추구해
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학문적 판단은 역사적 사실이나 사회적 현상의 구체적인 실상을 연구하고 파악한 다음에 내려진다는 사
회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성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P.219)

  베버는 사회 과학의 주된 목표가 현실 세계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 즉 특정의 역사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무한히 복잡하고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경험 세계를 추상화할 필요가 있다. 이때 사회 과학자는 관심을 끄는
어떤 종류의 문제들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며, 어떻게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부딪치게 된다.
  베버는 이에 대해 생각 속의 실험을 구성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거나 실제와 다른 방식으로 발생했다
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실험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주제를 선택하더라도 사용하는 모든 개념들을 현실로부터 직접 도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의 역사적 현상에 대한 이해 및 설명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개념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념형이라고 베버는 말한다. 이는 현실 안에서 나타나는 것을 추상화시켜 명료하게 일반화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P.221)

 

  베버는 세계 역사의 진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될 어떤 목표를 설정한 마르크스의 역사 철학을 거부했던 것이다. 베버는 사회 과학자가 각 시기를 이전 시기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것이 아니라 각 시기를 특유하게 만드는 특징들을 파악하고, 이 특징들이 어떻게 각 문명에 독창성을 부여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베버는 서구 문명의 특수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어떻게 해서 서구 문명에서만 보편적 의의와 가치를 지닌 이러한 사회·문화 현상이 나타났는가?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추구한 것이 바로 이《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P.224)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의의
  이 책에서 종교 개혁과 근대 자본주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힌 것은 베버만의 성과가 아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베버 이
전의 많은 학자들도 이미 제기했다. 먼저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윤리란 자본주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경
제적 변동이 정신에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주장은 문명에 속하는 모든 사건들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요소, 즉 생산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이러한 가치 판단이 담긴 관점이 사회 과학의 진실 규명 방법론으로는 부적절하다고 보면서 새로운 가설, 즉 이념형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념형이란 어떤 사회 현상에 대해서 특정한 보편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즉 경제 활동의 합리화가
급격히 진행된 역사의 과정은 프로테스탄트, 그중에서도 칼뱅주의의 도덕적·종교적 원동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베버는 명백히 입증할 수 있는 현상에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당대를 지배하던 유물론적 주장에 맞서, 예외적이고 변
칙적인 현상에 대해 파악하고 그 의미를 해석한 점은《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독창성이 드러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P.238)

  사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조건 돈을 거부하거나 멀리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확
립되지 않는다면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돈을 모으는 과정은 물론 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합리적이며 공리적인 윤리와 정신이 요구된다. 베버가 지적한 자본주의 정신의 합리화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옳은 선은 아닐지라도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깊이 되새겨야 할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가 돈과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직업 자체에 대한 성실함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던 청교도의 직업관은 직업이 의무자 피할 수 없는 생존 조건이 된 오늘날에는 공허한 메아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에 관해 근본적으로 성찰한다면 검약과 절제의 미덕을 바탕으로 했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도리어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일까?
  우리가 베버의《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다시 읽는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질과 외형적 치장에서 행복을 찾
는 우리 시대의 가난한 정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들이나 행복한 삶의 가치를 찾기 시작한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객관성을
가진 학문적인 방법론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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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강성화 / 서울댓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29쪽
(2016. 2. 17.)

 

 


  자본주의 정신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을 매개로 근대적 자본축적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로 16, 17세기의 종교개혁과 금
욕적인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를 베버는 지적한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운명은 태초로부터 정해진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직업노동과 부의 추구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P.10)


  베버는 서구의 합리적 자본주의의 특징적 현상으로 ‘형식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의 존재’ 등을 들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합리적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서구에서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낳은 것, 그리하여 합리적 자본주의를 가능케 한 것은 좀 더 근원적인 면에서 합리적 정신, 생활태도의 합리화, 그리고 합리적인 경제윤리 등, 한마디로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P.13)



  베버는 서구의 합리적 자본주의의 특징적 현상으로 ‘형식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의 존재’ 등을 들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합리적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서구에서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베버는 이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로서 칼뱅주의로 대표되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지적한다.
(P.29)



  베버가 최종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서구인의 “근대적 삶에서 가장 운명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또한 서구에만 특유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곧 ‘합리적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의 방법은 단순한 영리욕이나 탐욕의 추구가 아니라 도리어 그와 같은 불합리한 충동의 절제 즉 합리적 조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는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경영에 의한 이윤추구 그리고 영원히 ‘재생되는’ 이윤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 된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근대화란 합리화이며, 이 합리화는 서구 문화의 특수하고 독특한 현상이고, 서구의 근대적 자본주의 또한 이 합리화에 의해서 여타의 자본주의와 결정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를 다시 보면, 베버는
근대성 혹은 합리성을 자본주의의 상위개념으로 보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일차적으로 경제영역에서의 근대화 곧 합리화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버의 말을 빌리자면, “근대 경제의 기본 동기는 경제적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P.33)



  근대의 기업이 노동의 합리적 조직, 과학적 지식의 기술적 이용, 합리적 부기, 합리적 법과 행정 등을 통해 합리적, 지속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면서 합리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근대적 자본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 또는 합리성이 갖추어
져 있다고 하여 과연 근대적 자본주의가 형성되었을까? 베버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경제적 합리주의의 발달이 부분적으로는 합리적인 기술과 법률에 의존한다 해도 그와 동시에 그러한 발달은 일정한 유형의 실천적인 합리적 행위를 채택하는 인간들의 능력과 성향에 의해서도 결정되기 때문이다.”(p.16-7) 즉 베버는 근대적 자본주의를 낳은 것, 그리하여 이상의 모든 조건 또는 합리성의 측면들을 가능케 한 것은 좀 더 근원적인 면에서 합리적 정신, 생활태도의 합리화, 그리고 합리적인 경제윤리 등, 한마디로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베버는 생활태도, 경제 윤리에 프로테스탄티즘 또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어떠한 관련을 갖고 있는가를 검토하게 된다.
(P.40)



  베버가 경제 영역의 합리화의 기본적인 특징을 노동의 합리적 조직과 합리적 부기 방식 등에서 찾는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도가 가톨릭교도에 비해 자본주의의 전개에 보다 긴밀하게 관계하였다는 점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사이에는 어떤 내적인 친화성이 있는 것인가? 이것이 베버의 의문이었는데, 베버는 이것을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말, 또는 하나의 이념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을 전형적으로 표시한 것으로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양키의 신앙 고백”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는 프랭클린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베버는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사실은, 비록 그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 한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하더라도 누구나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인다.(p.36) 그러면서 그는 여기서는 ‘탐욕의 철학’이 아니라 독자적인 윤리 혹은 하나의 에토스(ethos)가 표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P.46)


 
  사경제적 부의 생산이라는 면에서는 금욕은 부정직함뿐만 아니라 순수한 본능적 소유욕과도 투쟁했다. 왜냐 하면, 이러한 소유욕은 ‘탐욕’, ‘배금주의’ 등으로 비난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부유해지는 것 자체를 궁극목적으로 삼는 부의 추구이기 때문이었다. 소유 그 자체는 유혹이다. 그러나 여기서 금욕은 “항상 선을 원하면서도 항상 악을 ― 소유와 그 유혹이라는 의미에서의 악 ― 낳는” 힘이었다. 왜냐 하면, 금욕주의는 구약 성서에 따라 그리고 ‘선행’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 똑
같이, 물론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를 비난받아야 할 가장 큰 악이라 배척하면서도 직업 노동의 열매인 부의 획득은 신의 축복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종교적 평가는 부단하고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 노동을 단적인 최고의 금욕적 수단이자 동시에 거듭난 자에 대한 또는 그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증명이라고 간주한다. 이러한 종교적 평가는 우리가 이 책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 부르는 생활관의 확장을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말한 소비의 봉쇄를 영리 추구의 이러한 해방과 관련시킨다면, 그 외적인 결론, 즉 금욕주의적 절약 강박을 통한 자본 형성은 쉽게 얻어질 수 있다. 벌어들인 것의 낭비는 막는 것이 투자 자본으로서의 생산적 사용을 야기 시킨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p.137/S.191-3, 일부수정)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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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 다락원 / 104쪽
(2016. 2. 17.)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금욕주의를 중시하는 개신교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출현이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연구한 저술이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는 예전과 달리 이윤추구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인정하고 더 나아가 미덕으로까지 칭송한다면서, 이런 사고방식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만족스런 해답을 찾기 위해 개신교로 눈을 돌린다. 개신교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 각자 종사하는 일에 다 신이 각자에게 맡긴 '직업'의 개념을 부여하는데, 직업의 의미에 대한 좋은 해석은 될 수 있어도 이윤추구의 동기를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으며, 칼뱅주의를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이윤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다. 예정설을 믿는 칼뱅파는 신으로부터 구원받는 자와 저주받는 자의 운명이 영원한 옛날부터 신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고 생각한다. 교세가 점점 퍼져감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이 틀림없이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했고, 세속적인 직업에서 거두는 성공을 구원의 증표로 여겼다. 이윤획득과 물질적인 성공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새로운 사고방식은 전통주의적인 경제체제를 허물어버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일단 자분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되자 개신교의 가치들은 불필요해졌고, 스스로의 생명을 얻게 된 자본주의 윤리는 근대의 경제적 활동에 아주 유용한 나머지 이제는 우리가 그 정신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P.10)



  벤저민 플랭클린의 글을 보면 고전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 정신이 포함되어 잇다. 시간은 돈이고, 신용도 돈이다. 신용을 잘 이용하면 큰 돈을 쌓을 수 있다. 돈은 생식력을 갖고 결실을 맺는 성질을 가진다. 돈이 돈을 낳는 것.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늘어나며, 효용은 더욱 급속하게 증가한다. 남에게 돈을 빌렸으면 제때 갚아라. 신용을 얻으면 언제든 돈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근면하고 검소하며 시간을 잘 지켜 남들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인상을 심어줘라. 적은 돈을 잃은 자는 단지 그 돈의 총액뿐만 아니라 그 돈으로 벌 수 있었을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이 '탐욕의 철학'은 자본 증식을 목표 자체로 여긴다. 이 글에서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 윤리에 따르면, 개인은 자본 증식의 의무를 가지며 이 윤리의 위반은 어리석음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의무 망각으로 취급되는데, 이것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다.
(P.26)



  많은 자본주의 비평가들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며 보편적 인류 사회의 변화 과정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단계를 나타낸다고 가정하거나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베버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성공을 거두는 자본주의적 활동에 필요한 '자본주의 정신'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다. 이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경제활동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정한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인간 본성분만 아니라 이 가치들이 자본주의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P.34)

 

 

  베버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급하는 사회학과 역사에 대한 접근법인 소위 '유물론'에 대해서도 명확히 답하고 있다. 유물론은 자본주의 정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상과 발전들을 경제적 상황의 반영이거나 상부구조로 간주한다. 경제적인 상호작용은 모든 사회제도의 토대다. 종교 자체도 그 상호작용의 산물이며, 역사의 원동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베버는 서양 문명이 봉건적 전통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향의 가치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가치들은 경제적 상황에서는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었다. 가치들의 형성이 경제적 상황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전적인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 이처럼 유물론적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사실들의 둣받침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적 진보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원인들의 다양성은 물론, 경제적 상황과 종교관의 인과관계가 쌍방향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P.35)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주된 요소 가운데 하나인 직업 사상에 근거한 합리적 생활방식은 기독교적 금욕주의 정신에서 '태어났다'. 결국,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적 금욕주의의 본질적인 내용은 같지만, 자본주의 정신에는 종교적 바탕이 결여되어 있다.
  "청교도들은 직업인이기를 원했던 반면, 우리는 직업인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금욕주의는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거대한 우주'의 건설에 일조했으며, 오늘날 태어나는 사람들의 삶은 이 거대한 체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외적인 재화에 대한 관심은 '철창'이 되어 버렸고, 그 재화는 전례 없이 인간에 대한 힘을 증대시켰다. 종교적 금욕주의는 '그 철창 안에서 벗어났으나', 자본주의는 더 이상 그것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직업의무의 관념은 죽어버린 신앙의 망령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직업의무를 정당화시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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