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 박홍규 / 문예출판사 / 320쪽
(2016. 3. 3.)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대표작을 21세기 한국에서 삶을 버티어 내고 있는 우리들이 꼭 읽어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로 역자는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밀의《자유론》은 또한 소수 독재자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기보다도, 다수의 대중 지배에 대한 자유를 주장하기 때문에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이른바 대중의 민심이라는 것이 지배하는 것에 대응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책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중민주주의나 포퓰리즘 등의 논의에 도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이다."(p.19)
또한 이 글을 쓴 밀의 이야기 중에서도 또 다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에세이의 목적은 사회가 강제와 통제라는 방법으로 개인을 대하는 태도를 절대적으로 규제하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 사용 수단이 법적 형벌이라는 형태의 물질적 힘이거나 여론이라는 도덕적 강제여도 무방하다. 그 원리란 인류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으로 어떤 사람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보장받는 유일한 근거는 자기보호Self-protection라는 것이다. 문명 사회의 어느 구성원에 대해, 그의 의사에 반해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이란, 타인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는 경우 뿐이다.
(P.42)"
현재 한국에 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가 무엇인지, 나 자신이 자유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책을 읽으며 나라탓, 정치탓, 남탓 보다는 우선 자기 자신을 먼저 돌이켜 볼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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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전’이라고 하는 게 사실 읽히지 않을 정도로 재미 없는 것도 사실이고, 특히 지금 우리에게 그런 게 왜‘고전’으로 읽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책도 많다. 그러나 나는 그런‘고전’중에서도 이 책《자유론》만큼은, 비록 소설처럼 재미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자유’를 체제와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삼아온 20~21세기 대한민국에서‘고전’으로서의 가치,‘ 원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남북한 대립을 비롯해 수많은 대립적인 의견이 상충하는 우리 현실에 그 모든 의견의 평화공존을 위한 최소 조건의 틀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미 수많은 자유국가에서는 그런 틀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유라는 것이다.
(P.8)
무엇이 참된 사상이냐, 무엇이 참된 진리냐 하는 물음에 밀은 확실하게 답하지 않는다. 아니 당연히 답이 있을 수 없다. 사실 그런 답을 자신 있게 주장한 사람들치고 엉터리 예언가에 그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밀에게 중요한 것은 그 참된 사상이나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자 수단이 완벽하게 자유여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자유가 있어야 독창적인 사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상이란 그것이 자유롭게 펼쳐져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의 정신 풍토는 아직도 근대 이전 사문난적의 시대이고 지적 노예 상태다. 밀은 모든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상의 자유가 없는 우리에게 다른 자유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돈의 자유뿐이다. 아니 돈의 노예뿐이다. 반공과 자본의 획일적인 노예뿐이다. 그 밖에 다른 자유는 없다. 지적 노예상태에서는 사상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이 책의 내용 전부다.
(P.12)
이 책에서 전개되는 모든 논의가 직접 지향하는 숭고한 기본 원리는,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 빌헬름 폰 훔볼트
《국가의 영역과 의무Sphere and Duties of Government》
이 책 첫머리에 인용된 훔볼트의 말은《자유론》을 지배하는 원리인 인간의 다양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한 사상
의 자유가《자유론》의 주제다.《 자유론》은 5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 ‘서론’첫 문단에서 그가 말하는 자유란‘시민적·사회적 자유’이고,
그 책의 주제란“사회가 합법적으로 개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를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이 정치적 자유가 확보되고 민주주의가 수립된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자유 문제는 민주주의라는‘다수의 폭정’하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이어받은 주장이다.
(P.26)
1장에서 밀은 자유를 세 가지로 나누고 그 첫 번째를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고 했다. 이를 중심으로 다루는 2장에서 밀은 철학자답게 진리를 찾으려면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P.54)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한 모든 인류가 동일한 의견이고, 그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는다고 해도, 인류에게는 그 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는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전 인류를 침묵하게 할 권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의 특별한 해악은, 전 인류의 권리를 강탈한다는 것과 같다. 즉 현존 세대와 마찬가지로 미래 세대, 또 그러한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강탈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고 하면, 인류는 오류를 진리와 바꿀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반대로 그 의견이 그르다고 해도 인류는 마찬가지의 엄청난 이익, 즉 진리가 오류와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진리에 대한 더욱 명확한 이해와 더욱 생생한 인상을 상실하게 된다.
(P.59)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 고칠 수 있다. 단순히 경험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경험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를 밝히려면 반드시 토론이 필요하다. 잘못된 의견과 관행은 점차 사실과 논의에 복종하게 되지만, 사실과 논증이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려면 먼저 그것이 인간 정신 앞에 제시되어 판단되어야 한다.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낼 평가 없이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는 사실이란 거의 없다.
(P.65)
진리란, 스스로 사색하지 않고 오로지 타인의 주장에 맹종할뿐인 사람들의 진실한 의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에 의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오로지, 또는 주로, 위대한 사상가들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이 미치는 한 높은 지적 수준에 이르게 하기 위해, 위대한 사상가를 만드는 경우와 같은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다.
(P.87)
어떤 사실을 자기 관점에서만 보려는 사람은 그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고, 누구나 그에게 반박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반대쪽에서 주장하는 이유를 논박할 수 없다면, 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느 의견을 택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 경우 합리적인 관점이란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고, 스스로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권위가 지도하는 바에 따르거나, 보통 사람들처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쪽에 기울게 된다.
(P.92)
밀은 3장에서 행동의 자유에 대해 설명한다. 즉 사상 활동만이 아니라 모든 정신 활동에서 개인은 그 의견에 따라 개인 자신의 방식으로 행동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경우 특히 개인은‘그가 무엇을 하는가’라는점에서만이아니라,‘ 그가어떤특징을갖는사람인가’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므로, 개인의 개성이 다양하게 발전되어야 한다. 즉 무조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의 존중을 주장한다.
(P.126)
인간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색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내면에 있는 개성적인 모든 것을 파멸시켜 획일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있지 않고,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고려하여 설정되는 범위 안에서 개성을 양성해 그 힘을 발휘하게 하는 데 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것을 하는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동일한 과정에 의해 인간생활도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며 활기를 띠게 된다. 나아가 그것은 고상한 사상과 숭고한 감정에 더 많은 자양분을 공급하고, 모든 개인이 인류에 속하는 것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무한히 생각하게 만들어 인류와 결합하는 유대관계를 강화한다.
(P.141)
전체적 국가 교육은 오직 국민을 틀에 집어넣어 서로 너무나 흡사하게 만들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국가가 국민을 정형화하는 틀은, 결국 국가권력을 장악한 우월한 세력 — 군주건, 승려계급이건, 귀족계급이건, 현재 대중의 다수파이건 — 이 좋아하는 것이기때문에, 그 교육이 효과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국민 정신에 대한 압제가 확립되며, 그 압제는 자연적 추세로서 국민의 육체에 대한 압제를 유발한다.
(P.225)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개인의 정신적 발달과 향상이라는 이익을 뒤로 돌리고, 세부의 사소한 사무를 처리하는 행정 기능, 또는 경험에서 얻게 되는 사이비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원하는 국가, 또한 국민을 위축시켜 국가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 (비록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국가는 머지않아 다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국민이 위축되면 어떤 위대한 일도 실제로 성취할 수 없고, 또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전한 기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기구를 더욱 원활하게 운영하려고 한 나머지, 스스로 배제한 바로 그 구성원의 활력의 결여로 인해, 결국은 그러한 기구가 쓸모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241)
연고와 물질의 사회에서 개인의 정신적 자유란 있을 수 있는가? 연고로 숨 막힐 듯이 철저히 짜이고, 오로지 물질 추구를 향해 역시 숨 막힐 듯이 치열하게 짜인 경쟁사회에서 개인의 자유, 그것도 의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이 문제가 될 여지나 있는가? 밀이《자유론》1~2장에서 묻는 그런개인의 정신적 자유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중요한 자유란 재산의 자유, 기업의 자유, 그리고 교육의 자유라는 이름과 하나처럼 주장되는 학교 경영의 자유 따위가 아닌가? 그게 우리가 언제나 말하는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자유 아닌가? 내 재산, 내 회사, 내 학교를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자유론》에 덧붙여 밖에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정당? 그것은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한 사적 족벌당이지 정강이나 정책의 조직이 아니다. 따라서 언제나 이합집산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회에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개성이고 다양성이다. 따라서 밀이《자유론》3장에서 말하는 정신적 자유의 기본인 개성과 다양성이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이고, 오로지 인간성의 획일화, 평준화, 기계화만이 존재한다. 아니다. 물질의 경우는 다르다. 적어도 지위와 재산과 학력의 우열화가 있다. 어쩌면 용모도 다르다. 얼짱과 몸짱의 우열화가 있다. 억대 스타와 몇십만 원대 엑스트라의 우열화가 있다. 사회 전반의 양극화가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으로는 유사하다. 모두 연고와 물질의 노예라는 점에 다르지 않다.
(P.255)
밀이《자유론》첫 부분에 인용한“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훔볼트의 말은《자유론》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다. 훔볼트는 19세기 독일의 언어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유기적이고 인간적인 언어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목표를 인간의 개성에 따른 다양한 발전으로 보았다.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면 흔히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훔볼트는 그것을 국가와 정치의 목표로 주장한 것이다. 사실 훔볼트나 밀에게는 교육과 정치가 일치한다.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P.283)
밀《자유론》의 핵심 원리는‘다양성’이다. 획일이나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배격한다. 문제는 그 다양성이 대립하는 경우의 조정 원리인데, 이를 밀은‘타자 피해의 원리’로 설명한다. 즉 어떤 개인의 행동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관련되는 경우 그것은 절대적인 자유여야 하고, 그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만 제한될 수 있다는 원리다. 타인에게 손해를 가하지 않는 한 누구나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게 자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이 아무리 위험한 사상을 가져도 자유고, 어떤 악취미를 가져도 자유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도, 동성애자도 자유다. 그것이 설령 개인에게 정신적·육체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그 개인이 성인이고 그 자신에게만 고통을 준다면 자유라는 것이다. 가령 그것이 음주라든가, 끽연과 같은 기호인 경우는 물론이고 동성애나 변태애라고 해도 그것을 법이나 여론으로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타인의 이익이나 행복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경우에는 당연히 사회의 권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권력의 근원인 다수자의 의지가 소수자의 이익이나 행복을 억압할 수도 있다. 특히 여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다수자의 폭정은 인간의 마음을 노예화하는 것이므로 단연코 배격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상과 언론의 완전한 자유가 특히 요구된다. 밀의 주장은 바로 그러한 사상의 자유를 완벽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P.284)
앞에서 지적했듯이 밀의《자유론》에는 문제도 많다. 우선 각 장의‘해설’에서 지적한 것들을 다시 요약해보자. 밀은 개인만이 관련된 행동에 대해서는 권력이나 사회가 어떤 간섭도 할 수 없고, 그런 간섭은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순수하게 개인만 관련된 행동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과연 그렇게 확연히 구분되는 행동이 있을 수 있는가? 나아가 그런 구분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인가? 타인에게 끼치는 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고 그런 해가 생기는 때는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그런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는 경우에 자유의 범위는 대단히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특히 밀이 그런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력 미성숙자나 미개사회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밀이 미개사회라고 한 당대의 식민지에서는 자유가 아니라 전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한 것은 제국주의자로서 식민지의 전제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었다.
(P.292)
밀은 흔히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낭만주의)를 결합시켰고, 그런 점에서 선배인 훔볼트나 괴테와 같이 풍부하고 자발적이며 다면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합리적인 자율적 인간을 추구했다. 그리고 사상과 의견의 자유에서 관용, 다양성, 인간성이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한 밀《자유론》의 핵심은 20세기에도 살아남았고, 21세기에도 살아남으리라.
(P.299)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대두된 자유주의의 변태와는 관계없이 자유 자체는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문제다. 밀이《자유론》에서 언급한 사상의 자유를 비롯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모든 자유가 문제다. 특히 사상의 자유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의해 제한되고 있고, 언론의 자유도 독점적인 대언론사의 경영 자유로 오해되고 있고, 그런 언론에 의해 밀이 가장 우려한 자유의 적대적 상태인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또한 다양성을 민주국가의 원리로 삼아야 하거늘 우리의 현실, 특히 교육 현실은 다양성을 죽이는 획일성으로 치닫는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모두 개성과 다양성을 잃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밀의《자유론》에서 배워야 할 논점이 확실해졌다.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밀이 말하는 자유의 길이다.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