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어떻게 읽을까?
김경집 / (주)학교도서관저널 / 380쪽
(2016. 11. 20.)



  나는 고전을 "인간과 삶, 그리고 세상의 보편적 가치를 대가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고전은 텍스트로서의 답을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다채로운 시선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진짜 공부이고, 교육이다. 삶의 강을 건너는 데에 크고 멋진 배가 능사는 아니다. 그런데도 다들 그런 배만 선망한다. 힘들고 매운 삶과세상의 강을 건너는 나만의 배를 건조할 수 있어야 한다. 고전은 삶의 강을 건너는 나만의 배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P.7)



  고전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품이 쓰인 당시의 시간과 공간, 사회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지금 우리의 삶을 비교하면서 읽을 때에야 고전이 진정한 삶의 힘이 될 수 있기 대문이다.
(P.8)



  마크 트웨인은 고전에 대해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말했다. 이는 그저 웃어 넘길 농담이 아니다. 고전을 제대로 읽으면 지금, 그리고 미래 우리 삶의 좌표가 보이고 강을 건널 방도와 힘이 마련된다. 그게 진자 고전의 힘이고, 고전을 읽어야 하는 당위이다.
(P.10)



  <국부론>의 주제를 단순히 시장경제의 기능과 경제학의 요체만을 편의적으로 선별한 것을 그대로 배우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일부러 이 책을 우리가 함께 읽을 고전의 목록에 챙겼다.
  탐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국부론>이 인용되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은 최소한 이 책의 진정한 목적과 주제의식은 인식하길 바란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교과서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이 책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한다. 중요하 책이지만 정작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 본의와 목적을 왜곡해 선동하는 현실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올바른 눈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P.64)



  고전에 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나는 "대가의 시선으로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다룬 책"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그 대가가 반드시 유명한 문필가가 사상가일 까닭은 없다. 그렇게 한다면 수많은 신화와 전설을 어떻게 고전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는가. 구전문학이나 작자를 알 수 없는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에 고전의 의미는 "시대가 공감하고 대중이 동의하는 보편적 문제를 새로운 시각이나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생각의 전환을 이끌어낸 작품"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P.68) 

  고전이라 하면 오랜 시간을 거쳐온 것, 그리고 엄청난 두께의 책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기 쉽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에밀 졸라의 이 짧은 고전의 영토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고전은 시간이나 부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역사를 바꾸고 문명의 진보를 이끈 것이라면 마땅히 고전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 에밀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인류의 위대한 교훈을 남겼고, 세상을 바꾸었다. 그러니 불후의 고전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다.
(P.95)



  원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 문화와 예술에서 드러난 동양적 취미나 호기심을 의미했다. 그러나 서양이 동양을 침략하고 지배하면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이 품고 있는 동양에 대한 환상으로 변질되었고 그것을 다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서양의 우월성을 확인하거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의식구조로 자리 잡았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지리적 확장과 식민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와 자민족중심주의가 강하게 결합된 지배의 양식이다.
  이것을 학문적으로 밝혀낸 이가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사이드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을 고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성과 권력의 관계가 식민지적 지배구조에서 비록되었음을 밝혀냈다.
(P.114)



  1962년 <침묵의 봄>이 출간되었을 때, 제목과 달리 이 책이 세상에 던진 메시지와 여파는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당시 대중들에게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를 각성하게 한 각성제와 같았다. 무분별한 살충제의 남용으로 파괴되는 야생 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이 책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은 환경 문제에 대한 대중의 사고를 전화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P.121)



  <어린왕자>는 얼핏 읽으면 달콤한 이야기이지만 정말 중요하게 다루는 제는 바로 '관계'이다. 나와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너와 우리의 관계......, 이 이야기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떻게 자리 잡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든다.
  이 책을 읽을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린왕자가 '나이가 어린' 왕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우리는 어리다고 하면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지만 '르 쁘띠 프린스'의 '쁘띠'는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 아니라 '작다'는 뜻이고 바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작은 나'를 의미한다. 그래야 '어린' 왕자는 영우너히 내 안에 살아있고 또 늘 어린왕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기 각성으로 이어진다.
(P.182)



  사춘기는 '우주적 사건'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로운 나를 대면하는 시기, 성인의 몸으로 변화하지만 성인의 정신과 지식은 아직 갖추지 못한 까닭에 그것을 혼자 감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처음으로자신의 삶과 1 대 1로 대면하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읽어내기 시작하는 것을 충격 혹은 사건이라 하지 않으면 고연 뭐라 부를 것인가. 오늘의 청소년이 고민할 틈도 없이 박제된 사춘기를 겪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사춘기를 제대로 겪어내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과 맞닥뜨리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사춘기는 독립의 과정이다.
(P.212)


  풍자와 우화는 구체적으로 현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때론 인식의 긴장이 필요하고 상당한 에너지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 사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단순히 비겁의 방식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의 토대 위에서 문제의 핵심을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이다. 풍자로밖에 현실을 비판하지 못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러나 풍자를 상실한 사회 또한 불행하다. 그것은 시공간을 떠난 보편적인 시선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P.247)



  1970년대 대한민국은 독특한 모습을 띤다. 1960년대에 갑자기 불어닥친 산업화는 전통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저임금 노동착취를 토대로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권력층이 형성되었고, 사회는 자연스럽게 양극화되었다. 70년대는 그렇게 형성된 산업 사회가 기존의 생산체계와 경제구조를 대체하고 가진 자의 탐욕과 횡포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기였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그러한 한국 사회의 단면과 인간이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P.252) 



  단편소설은 밀도와 순간적 반전의 즐거움이 촘촘해서 읽는 맛이 잇고, 장편은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일관되게 이어지며 속살을 벗겨내는 즐거움이 있다면, 대하소설은 유장함 속에서 인간과 세상의 거대한 스펙트럼을 묵직하게 바라보는 행복을 선사한다. 그러나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은 큰 흐름 안에서 다양한 인간군상과 세상사를 다루는 장점이 잇는 반면 자칫하면 이야기가 늘어져서 밀도가 떨어지기 쉽다. 박경리의 <토지>는 밀도와 무게를 동시에 담은 걸작이다. 이에 버금가는 소설을 굳이 하나 꼽이라면 최명희의 <혼불>을 추천하고 싶다.
(P.272)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역사가의 사고와 태도 혹은 방법을 통해 선택, 수집, 정리되며 현재로 해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견해를 "역사는 현재오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로 서술했다. 카의 역사관의 중심은 바로 '현재'이다. 그에게 있어 역사는 과거에 갇힌 것이 아니다. 과거의 기록물을 평가하고 비판하며 역사가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카의 시각을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적 문제를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의미를 제시한 책이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다.
(P.320)


  루소가 <에밀>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철학의 핵심은 '교사는 어린이가 자연 그대로의 인간으로 발달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인데,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그는 어린이를 작은 어른으로 다루지 말 것이며, 어린이를 훈계하거나 훈련을 하여 어른의생각대로 틀이 잡하고 성장학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어른이 보살펴줌으로써 어린이가 자유와 경험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이라고 하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루소의 사상은 근대 인간교육의 중요한 이념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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