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토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 박성수 / 문예출판사 / 340쪽
(2016. 2. 16.)




  당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재산이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하지 마라. 신용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러한 착각에 빠졌다. 이런점에 주의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지출과 소득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일단 세부적인 것까지 주의하는 노력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즉 당신은 매우 사소한 지출이 모이면 엄청나게 불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고, 무엇을 저축할 수 있었고 또 앞으로 무엇을 저축할 수 있을지 알게 된다.
<벤저민 플랭클린>
(P.41)




  '자본주의적' 형태의 경제와 이 경제를 운용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적합적'관계이지만 '법칙적' 상호의존관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벤저민 플랭클린의 예에서 분명히 했던 방식으로 직업으로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에 대해 이 책에서 잠정적으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정신적 태도는 근대의 자본주의 기업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를 발견했고, 자본주의 기업은 그 정신에서 가장 적합한 정신적 추진력을 찾았기 때문이다.
(P.54)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적 구성 요소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러한 요소인 그 '직업' 사상과 - 앞서 말했듯이 순수한 행복주의적인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보면 그토록 불합리한- 직업 노동에 대한 헌신을 낳은 구체적인 '합리적' 사고와 삶의 형식이 어떤 종류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 우리의 관심대상은 모든 직업 개념에 내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특히 이 직업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비합리적 요소의 근원이다.
(P.66)




  '자본주의 정신'(물론 이 책에서 잠정적으로 사용된 의미에서)은 종교개혁의 일정한 영향에 따른 결과로만 발생할 수 있었다든다, 경제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는 종교개혁의 산물이라는 등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공론적 태제 역시 결코 옹호될 수는 없다. 이미 종교개혁 훨씬 이전에 몇 가지 중요한 자본주의적 영리기업의 형태가 있었다는 주지의 사실은 그러한 견해를 단적으로 부인한다. 오직 다음과 같은 것들만이 확인될 필요가 있다. 즉 그 '정신'의 질적 규정과 세계로의 양적 팽창에 있어 종교적 영향이 함께 작용했는지, 작용했다면 어느 정도인지 하는 점과, 자본주의적 토대에 입각하는 문화의 어떤 구체적 측면이 종교적 영향에로 소급되는지 하는 점이다.
(P.78)




  현세적인 프로테스탄트의 금욕은 전력을 다해 낭비적 향락에 반대해왔고 소비, 특히 사치재 소비를 봉쇄해버렸다. 반면에 이 금욕은 재화 획득을 전통주의적인 윤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심리적 결과를 낳았으며, 이익 추구를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직접 신의 뜻이라고 간주함으로써 이익 추구에 대한 질곡을 뚫고 나왔다. 육욕과 외적 재화의 집착에 대한 투쟁은, 청교도 외에도 퀘이커교의 위대한 호교론자인 바클리가 입증했듯이, 합리적 영리 활동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재산의 비합리적 사용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비합리적 사용은, 특히 신의 뜻에 따라 개인과 전체의 생활 목적을 위해 합리적이고 공리주의적으로 사용하는 대신에 피조물 신격화로 비난된 본겅적 감각에 맞는 과시적 형태의 사치를 높이 평가하는 데서 나타난다. 합리적 사용은 재산가에게 고행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재산을 필요하고 실천적으로 유용한 일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P.152)




  '나는 부가 증대될 때마다 종교의 내용은 그만큼 감소되었던 것을 염려한다. 따라서 나는 문제의 성격상 어떤 참된 신앙의 부흥이 오래 지속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종교는 필연적으로 근면과 절약을 낳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바로 부를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가 증대하면 자만과 열정과 세속적 애착이 그 모든 형태로 또한 증가한다. 순수한 종교의 이러한 점진적 타락을 방지할 수단은 없는가? 우리는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절약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도록 권고하고,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절약하도록 권해야만 한다.' <존 웨슬리>
  금욕주의적 교육 효과를 낳은 점에서 우선 경제발전에 중요했던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 운동이 위에서 웨슬리가 말한 것과 같은 경제적 결과를 뚜렷이 드러낸 것은, 대개 순수한 종교적 열광의 정점이 이미 지나간 뒤에 신이 왕국에 대한 추구의 투쟁이 점처 냉정한 직업적 덕으로 해소되기 시작하여 종교적 뿌리가 서서히 발라죽고 공리주의적 현세가 나타난 이후의 일이다.
(P.156)



  거의 모든 종파의 금욕주의 문헌 전체는 생활을 위해 노동 이외의 기회를 갖지 못한 자들이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노동에 충실한 것이 신을 매우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적 금욕 자체는 아무런 새로운 점이 없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은 이러한 관점을 매우 강력하게 심화시켰을 뿐아니라 그 규범이 통용되기 위해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을 만들어냈다. 즉 이 노동을 직업(소명)으로,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가장 좋은 그리고 궁즉적으로 유일하기도 한 수단으로 파악함으로써 심리적 동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금욕은 다른 면에서 기업가의화폐 취득도 '소명'이라 해석하여, 위와 같은 특별히 노동 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분명한 것은 직업으로서의 노동 의무의 이행을 통한 신의 나라에 대한 배타적 추구와 교회 규율이 당연히 무산계급에 강제했던 엄격한 금욕은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 '생산성'을 강력히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P.159)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근대적 문화에 구성적 요소 중 하나인 직업 사상에 입각한 합리적 생활방식은 - 이것이 이책이 증명하려는 점인데 -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의 초두에 인용된 플랭클린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면, '자본주의 정신'이라 표현한 사고방식의 본질적 요소가 방금 전에 청교도적 직업 금욕의 내용으로 말한 것이며 단지 플랭클린의 경우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종교적 정초를 제외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근대적 직업 노동이 일종의 금욕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P.161)

 

<함께 들으면 좋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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