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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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10여년 전쯤이었을 거다. 신문의 사회면 한 귀퉁이에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그맣게 난 그 기사를 본 것이. 틀림없다. 90년대 중반이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아닌. 한 대학생이 소설 '태백산맥'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적용됐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잠시 멍-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교양과목 수강 중 교수님과 함께 태백산맥, 아리랑을 읽고 토론수업을 했었다. 영화로도 만들어 지고, 버젓이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한 명의 젊은이가 감옥에 갈 처지라니. 내가 꿈을 꾸었던 걸까? 싶지만 어렴풋함 속에 틀림없이 자리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현재의 우리보다 딱 한 세대 앞선 시기는 온갖 금기의 시대였다. 지금은 TV에서 웃기는 소재로 종종 쓰이기도 하지만, 그땐 작은 속삭임조차 조심스러웠던 하지 말라는 것, 듣지 말라는 것 투성이인 금지의 시대였다. 자연스럽게 터부시 되는 것들이 아닌 인위적인 금기는 인간을 메말라가게 함과 동시에 작은 것에도 탐닉하고 목마르게 한다. 우물이 바로 앞에 있을 때는 한 바가지는 마셔야 겨우 가시던 목마름은, 사막 한 가운데서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오아시스만으로도 인간은 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 '뤄'는 부모님이 의사인데다 중학교를 마친 학력을 이유로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지목 돼 재교육을 받으러 산골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인분을 나르고, 광산에서 벌거벗은 채 일하는 고된 나날들을 버텨낸다. 갑자기 뚝 떨어진 모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조금 큰 도시로 나가 영화를 보고 시골 사람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줄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 재봉사의 아름다운 딸, 비록 천 명 중 세 명의 가능성일지언정 말 잘 듣고 있으면 언젠가는 나갈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 그리고 발자크의 소설이었다.

암울한 시기, 가슴이 답답할 만치 불행한 시절을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의 분위기는 밝다. "간단히 말해서 뤄와 나의 삶은 끝장난 셈이었다."는 문장에서조차 절박함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끝까지 익살스럽다. 이에 대해 작가는 몹시 서글프고, 힘든 시기였지만 가혹한 사회체제에도 불구하고 삶의 기쁨을 느긋하게 즐길 줄 아는 품성만큼 뿌리 뽑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마오 주석에 관한 책이거나 순수학술서가 아니면 모두 불에 태워졌던 때, 부모가 모두 소설가에 시인이어서 옆 마을에 재교육을 받으러 끌여온 '안경잡이'에 의해 얻게 된 발자크의 소설 한 권으로 둘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책을 읽은 후에는 그 전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경험하지 못한 감정과 욕망이 꿈틀거린다. 인간의 본성과 감성, 사랑을 다룬 발자크를 비롯한 위고, 스탕달, 뒤마, 롤랑, 루소 등등의 소설이 전하는 것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뤄는 여자 친구인 재봉틀 소녀에게 발자크와 서양문학의 소설을 읊어주고, 소녀는 감탄과 함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이 드러나며 서서히 사고를 깨치게 된다.

어쩌면 이런 책을 금서로 정한 마오 주석의 판단은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새롭게 접한 경이로움, 열린 감정과 사고는, 곱게 기다랗게 딴 머리를 단발로 자르게 하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바느질만을 하던 순박한 시골 처녀를 도시로 떠나게 한다.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아버지든, 남자 친구든 모든 걸 버리고. 결국 마오가 두려워한 것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전 세대가 겪었던 금기, 멀리는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중세의 금서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악착같이 막으려 했던 것들. 책은 위험하다. 책을 읽는 사람은 더 위험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자극하는 언어와 내가 인간임을 알게 하는 책은 독재를 휘두르는 통치자일수록 위험을 넘어 위협으로 다가온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둑질을 해서까지 책을 얻으려 했던 뤄 역시 책을 불태우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멀리 도시로 가 버린 뒤다.

"가버렸구나"
"응, 대도시로 가겠대. 그 애가 발자크 얘기를 했어."
"뭐라고 했는데?"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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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코 2008-02-1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놀란 책이었는데 읽고나니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느낀것도 많고 읽는 내내 유쾌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는것을 못하니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리뷰 너무 잘읽었고 제마음또한 이렇다는 것..^^

얼음무지개 2008-02-18 22:30   좋아요 0 | URL
저도 좋은 책일 것 같아서 사기는 했는데 사실 재미는 기대하지 않았었답니다. 그런데 좋은 책임과 동시에 아주 재밌기도 했지요.^^ 저는 리뷰는 쓰고 싶은데 잘 안써질 땐 잠시 다른 책 읽으면서 뭘 느꼈는지 생각해 보거나..다른 분들의 리뷰를 본답니다. 꼭 리뷰를 쓰려고 하는 책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잘 쓴 리뷰를 보다보면 아..맞아 나도 이렇게 느끼고.나도 이런 생각했었어..이런 표현도 좋구나..등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죠. 그럼 그 느낌으로 리뷰를 씁니다. 잘 쓰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꼭 좋은 글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어느 리뷰든 좋은 것 같아요..^^ 물론 잘 쓰시는 분들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요.
 
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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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완벽히 넘어버린 나이라서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나라는 사람이 상당히 무감각해졌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웬만한 것에는 감동도, 찡함도, 가슴 벅참도 느끼지 못하고, 대신 실망하고, 그럴 줄 알았지 내지는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하는 시니컬한 문장 밖에 내뱉지 못하는 나를 볼 때면 참 나도 이렇게 메마른 사람이 되어가는 건가 하는 썩 기분 좋지 않은 한숨이 종종 나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엄청나게 팔렸다고 하는 이 책 '구해줘'를 읽을 때도 내내 그랬다. '이것 참 뭐가 이래''사랑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주인공은 어디로 간 거야?''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지?' 등등을 중얼거렸을 뿐 좋은 감정으로 글자를 읽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나름 장점이 아주 없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우가 되기 위해 3년 전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왔던 줄리에트는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보다 나아진 거 하나 없이, 오히려  꿈조차 의미 없어진 현실 앞에서 그 꿈을 접고 프랑스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 떠나기 이틀 전 룸메이트 콜린이 남자친구와 여행을 떠난 사이 충동적으로 친구의 비싼 옷을 입어본 줄리에트는 그대로 거리로 향하고, 타임스퀘어에서 우연히 자동차 사고로 의사 샘을 만난다.

할렘가에서 살다 그곳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의사가 된 샘은 자살로 아내를 잃은 후 아무런 삶의 의욕이 없다. 폭설이 내린 뉴욕의 거리는 번잡했고, 잠시 생각에 잠긴 순간 자신의 차 앞에 있던 젊은 여자를 발견하고 핸들을 돌리지만 가벼운 사고가 나고, 그 일로 인해 줄리에트를 만나게 된다. 물론 그 둘은 그 날 밤 사랑에 빠진다.

어떤 식이었든 삶을 지속할 이유를 잃었던 두 남녀는 사랑에 빠졌고, 순간적으로 빠져든 감정에 확신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동안 줄리에트는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러브스토리였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라는 결말에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는.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예기치 않은 전환을 한다. 비행기 추락사고가 난 것. 샘이 줄리에트를 붙잡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또 다시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을 자책하는 사이, 줄리에트는 비행기가 이륙하기 몇분 전 난동을 부려 비행기에서 내렸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 추락사고에 관한 심문을 받는다. 더군다나 갑자기 샘 앞에 나타난 그레이스라는 여인은 샘에게 줄리에트는 살아있으나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샘은 그레이스라는 여자에 대해 알아보고 그녀는 10년 전 죽은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점차 알 수 없어짐과 동시에 이 소설의 정체성에도 의문이 생긴다.

소설 속에서 '구해줘'라는 간절한 단어는 의외의 인물에게서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등장인물들은 다들 구해달라는 외침을 가슴에 품고 있을 만큼 커다른 상처를 안고 있다. 줄리에트는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고 초라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샘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 의사였으나 정작 부인은 임신을 한 상황에서도 너무 많은 상처로 인해 자살을 했고 샘은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레이스는 갑작스런 사고로 죽었고, 자신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었는지 의문을 갖은 채 부여받은 임무대로 줄리에트의 목숨을 가지러 지상에 왔다. 그레이스의 오랜 동료인 루텔리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레이스를 떠나보냈다는 슬픔에 알콜중독자가 되어 버렸고, 그레이스의 딸 조디는 엄마가 죽은 후 마약에 찌들어 살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을 겪으며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을 확인한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주인공들의 과거와 맞물려 진행되는 사건들은 지나친 우연의 반복과 빤히 들여다보이는 설정으로 강한 감정의 파편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예정된 수순을 밟아간다. 쉬운 대중 소설로서 별다른 걸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영화로 치자면 극장가서 보기는 조금 돈 아깝지만 내심 궁금하기는 해서 비디오 기다려서 봐야지 하고 마음 먹게 되는 정도의, 큰 매력까지는 가지지 못한 적당한 재미의 킬링타임용 소설쯤으로 보면 되겠다.

'진정 사랑한다면 당신 앞을 막아설 운명은 없습니다' 소설의 카피는 그렇지만 소설은 그와 반대로 운명이 있다고 말한다. 샘과 줄리에트의 만남은 단 1초의 어긋남이라도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운명이었고, 그레이스가 하필 줄리에트의 목숨을 가져가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 또한 운명이었다. 얽히고설킨 운명과 결국은 다 풀어내야 할 과거의 상처들. 그리고 용서. 좀 더 멋진 이야기가 됐을 뻔 했는데 작가의 내공이 아직은 부족한 듯.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이라고는 못하겠다. 그다지 두드러진 개성이 돋보이지도 않고. 술술 책장은 잘 넘어가는 그럭저럭 읽을만한 프랑스산 대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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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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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국은 전복(顚覆)이다. 다 뒤엎는다는 것이다. 유괴범은 모조리 다 몹쓸 놈들이라는 당연한 판단을 뒤엎고, 유괴를 당한 할머니가 오히려 유괴극을 진두지휘하게 된다는 기발한 착상은 여타의 발상 자체를 뒤엎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그들이 어찌됐든 해내고야 마는 것 또한 기가 막힐 노릇이고, 여하튼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식을 뒤엎는다.  

감옥에서 만난 3인조 어리바리 유괴단이 할머니를 유괴했다. 물론 목적은 돈이다. 마지막으로 크게 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보통 할머니가 아니다. 엄청난 갑부인데다 하필 그 할머니를 타깃으로 정한 건 유괴단의 우두머리 격인 겐지의 어릴 적 기억 때문이었다. 고아원에 있었을 때 산타클로스처럼 많은 걸 주었던 인자한 할머니. 처음부터 해칠 계획은 없었던 거다. 그냥 잠깐 데리고 있다 돈만 받고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원하는 돈은 5천만엔. 그거면 된다. 그런데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나름 철저했던 계획은 할머니를 유괴하는 데까지는 어느 정도 먹혔다. 워낙 한적한 시골이라 동네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으려 노력도 했고, 도시에 유괴 후 할머니를 데리고 있을 방도 마련해 놨다.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 스케줄도 다 확인했다. 그래서 어찌하여 유괴까지는 성공. 그런데 웬걸,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이번 유괴에 생각지도 못한 허점이 많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할머니를 통해 알게 된다. 더군다나 몸값이 5천만엔이라는 말엔 불같이 화를 낸다. 할머니는 내가 어떤 사람인데 겨우 5천만엔이냐며 버럭 화를 내시더니 100억엔에서 한 푼도 못 뺀다고 호통을 치신다. 자- 이젠 어떻게 되는 걸까.

1970년 후반에 발표되었다고 하는 이 책은 2007년 현재 읽어도 거의 과거라는 시대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세련됐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발한 발상과 달리 문체는 투박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전개를 펼쳐나감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 때문이리라.

유괴를 처음 계획할 당시에도 우두머리를 제외한 다른 두 명은 유괴를 반대한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절대 해치지 않을 거고, 어린아이가 아닌 할머니라는 말을 듣고서야 동참을 하는, 어떻게 보면 좀 바보 같고 다른 쪽으로 보자면 참 인간적인 유괴범이다. 할머니를 유괴할 때에도 당시 같이 있던 젊은 여인은 상관없으니 풀어달라는 설득에 그대로 넘어가 풀어주는데다 이후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동감하며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하는 유괴범들이니 이들이 유괴범이라는 자체가 상당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냥 할머니 말 잘 듣는 돈이 좀 필요한 젊은 청년들이라고나 할까.

「이 나라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 이 나라는 내게 뭘 했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왜 몸값을 100억엔으로 올리고, 유괴극을 앞장 서 지휘하면서까지 유괴범들에게 동참을 했을까? 할머니는 전쟁통에 아들을 둘이나 잃었다. 부자였으나 돈만 모으기 보다는 많은 자선사업과 본래 타고난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할머니는 막상 나이가 여든둘이나 되고 보니 깊은 회한이 밀려들었다.「산촌 사람들에게 돌려준다면 납득할 수 있다. 적어도 이 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쓰일 수 있다면 그동안 키워온 보람도 있다. 국가라는 허울을 쓴 권력자들에게 과연 그런 기특한 생각이 있을까?」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권순분여사납치사건」은 할머니의 유괴극 동참에 자식들의 불효라는 이유를 만들어 낸다.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자식을 앗아가는 걸로도 모자라 자신이 죽은 후 평생 자신과 이웃들이 땀으로 일구어 낸 재산마저 세금이니 뭐니 하는 것들로 빼앗아 권력자들의 배나 채워줄 나라에 대한 불신과 원망에서 출발한다. 

모든 상식의 전복에서 시작한 책은 오히려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을 담아낸다. 결국은 다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사실은 한 번도 뭔가가 뒤집어졌던 적은 없다. 힘없는 자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절대 변하지 않는다. 힘이 없어서, 항상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살아온 탓에 언제부턴가 범죄자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이들이 오히려 누구보다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지개 동자. 할머니가 직접 이름을 지어준 유괴범들은 멋지고 씩씩한 할머니와 함께 폼나게 세상을 한 번 들었다 놨다. 정말 크게 한 건 터트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하루를 잘 살면 되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만큼의 돈만 필요한 평범한 사람들. 그렇다면 100억엔은 어떻게 됐을까?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진부하다 싶더라도 영화 「권순분여사납치사건」의 결말이 좀 더 그럴 듯 하지 않나 싶지만... 우리의 우상 할머니는 절대 한 푼도 허투루 쓸 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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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마치 1 - 진옥섭의 예인명인
진옥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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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한 분이 손자 소풍을 따라갔다 … 그날따라 맥주가 달아 몇 잔 연거푸 들어갔고 하필 학부모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젊은 축들이 너나없이 나서서 “할머니도 한 곡 하세요.” 하며 톡톡 쳤다 … 그렇게 톡톡 건드리는 통에, 잔의 바닥에 거품이 되려 솟아오르는 기포처럼, 혈구(血球)의 앙금 밑에 쉬던 흥이 뽀글거리며 올라섰던가 보더라. 슬슬 ‘배운 가락’이 스며 나오기 시작해 그만 마이크를 잡고 말았다. 모두들 소란을 멈췄다 … “기생이다!” … 손자는 울면서 걸었고, 며느리는 여기 와서도 이럴 거냐며 타박을 했고, 아들은 호적에서 파자 했다. “호적이 무슨 우물이냐”던 할매는 그 밤 한 잔 가득 음독을 하였다.」

 

노름마치. 그것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가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이다. 그가 나와 한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하는,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잘 닦여진 포장도로가 아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눈물의 길이고, 울퉁불퉁하기는 딱 자갈밭인데다, 먼지 폴폴 날리는 흙길 중의 흙길이다. 그래도 그 길을 가겠다고 터벅터벅 걷다 보면 때로는 신명도 나고, 웃음도 난다. 눈물과 웃음 사이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다 보니 어느새 세월은 저만치 흘러 얼굴엔 주름만 늘었고, 한판 질펀하게 놀던 동무들은 떠나고 없다. 누구 말마따나 이젠 저승이 볼만한 판인 것이다.

유앵이 할매. 통영바닥의 모든 예술을 한 몸에 휘감았던 최고의 여류는, 기생이란 소리를 피해 피난한 동해바다 어느 소도시에서, 어느 초등학교 소풍날, 한 잔 술로 이승의 소풍을 마감했다. 예기(藝妓). 회초리 맞아가며 배우고 익힌 소리와 춤은 식구들을 먹여 살렸지만, 되려 식구들은 손가락질 받는 당신이 싫다 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나는 모르오. 하며 숨어 지냈고, 가슴에 깊이 묻어두었던 한이 되살아 날 적 음독으로 세상과 이별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생판 모르는 이가 와서 예술이네 뭐네 하며 한 판 벌려준다 해도 왜 과거를 들쑤시느냐며 화통을 내놓는 것이다.

[노름마치]의 저자 진옥섭은 이런 분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무대에 올리는 연출자이다. 짜하던 명성은 옛이야기이고, 오늘은 잊혀진 사람이 되어, 세상에 대한 관심마저 끊고 말문을 걸어 잠근 그들의 부서질 듯한 손을 잡고, 약속을 받아낸다. 무대에 오르겠다 하긴 했으나 건강이 부실하고,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분들이니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또 오랜 상처가 돋아 어느 순간 마음 돌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약조를 받아내고 무대에 세우는 건 일단 오르기만 하면 여태 없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이름 속에서 순간순간 새것이 돋아난다. 이런 순간을 맛보면 중독이 되고 만다. 결국 또 들여다보고픈 것이다.

예기(藝妓). 남무(男舞). 득음(得音). 유량(流浪). 강신(降神). 풍류(風流). 얼핏 보면 예술인가 싶기도 하고, TV에서 보던 고리타분한 무엇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 자세히 들여다보자니 늘 보고 듣던 것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렇게 어렵고 멀기만 하다. 예기와 남무, 득음의 길을 걸으신 분들은 기녀, 광대, 무당 등으로 순탄치 못한 삶을 사신 분들이시다. “모릉께, 하도 몰라중께, 그 천대에 다 죽고 다 작파혀서, 볼라면 지금 급허지요.” 씻김굿을 약속했으나 날짜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자신이 씻김굿의 망자가 돼 버린 이의 한탄은 그분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와 마음속에 품은 경계를 짐작케 한다. 또 이제는 지나간 시간과 남겨진 시간이 아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리 어렵게 어렵게 그분들을 찾아내고 약조를 받아도 아무도 보러오는 이가 없다면 그건 말짱 도루묵이다. 하여 알려야 하고 그래서 진옥섭은 신문에 올릴 보도자료를 밤새 고쳐 쓰고 만들었다. 이 책은 그 보도자료를 수선한 것이다. 손가락질에, 가시밭길에 숨어 버린 분들인지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옛 기억을 물어물어 이력을 작성해 봐도 해외 어디에서 상 받았노라 하는 휘황찬란한 이들에게 가려지기 마련이다. 신문 한켠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살아온 그대로의 모습을 전달해 예술의 전모를 깨닫게 하는 방법 밖에 없으니, 이 책에 적힌 글들은 바로 그분들의 상처를 긁어내 얻은 파란만장한 삶을 보도자료니, 팜플렛이니 하는 그 조그만 됫박에 담지 못한 면모를 밝혀 새로 엮은 것이다.

“길이 놓여 있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먼저 그 길을 간 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 길은 애초에 가무악의 집안에 태어났거나, 쓰다달다 개념이 없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조련되어버린 것이다. 그 분들의 남다른 예술세계는 가무악일체(歌舞樂一體), 즉 소리와 춤, 악기 세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것인데, 한 분야에 매진하더라도 다른 두 분야가 완벽하게 몸속에 차 있어야 예술이 나온다는 관념이다. 노름마치. 저자 진옥섭은 그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을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마중 가는 길이라 했다. 한 판 나서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져 판을 맺어야만 한다는 명인 중의 명인이었으나, 이젠 홀로 남아 노을처럼 삶의 마지막 기운을 내뿜는 이 시대 마지막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연을 고이고이 엮여 내, 읽고나면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지고 그 기분이 쉬이 물러서지 않으니 이 책 역시 노름마치다. 생의 마지막 붉은 기운이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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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얼음무지개 2007-12-11 22: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얼떨떨하네요. 이렇게까지는 기대하지도 못했는데..

멜기세덱 2007-12-12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저도 막 얼떨떨해서...지금...이래요...ㅋㅋ

얼음무지개 2007-12-12 09:1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진짠가 싶기도 하고..ㅎㅎ 멜기세덱님 진짜 축하드려요..1등~~^^

다락방 2007-12-1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얼음무지개 2007-12-12 23: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축하를 받다니 참 신기해요.

환상의시기 2007-12-12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 ^

얼음무지개 2007-12-12 23:2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글에 비해 과분한 평가를 받았죠..^^;

순오기 2007-12-13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꼭 읽어봐야할 것 같은 맘이 팍팍~ 솟아나는 리뷰네요.
축하합니다~~~~

얼음무지개 2007-12-13 21:34   좋아요 0 | URL
책은 정말 좋아요..^^ 감사드리구요..ㅎㅎ

프레이야 2007-12-1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 축하드립니다. 반가워요. 즐찾하고 갑니다.^^

얼음무지개 2007-12-13 21:34   좋아요 0 | URL
제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서... 글 하나 올라오는데 시간이 오래오래 걸리거에요..^^; 감사합니다.

마노아 2007-12-14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음무지개님 축하해요~ 닉네임도 너무 예쁘십니다. ^^

얼음무지개 2007-12-14 11:47   좋아요 0 | URL
닉네임은 노래제목에서 가져왔답니다. 시인과촌장의 노래이지요. 저도 단어가 예뻐서 쓰고 있답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miony 2007-12-1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축하드려요!^^

얼음무지개 2007-12-15 0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참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겨서 참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에요..ㅎㅎ
 
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승자의 기록임과 동시에 무척 이기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패자(敗者)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악(惡)이 되고, 승자는 당당히 기록에 남아 선(善)이 된다. 역사를 기록할 권리를 갖게 된 승자에 의해 남겨진 역사는 철저히 승자의 시각을 대변하게 된다. 한쪽 눈을 감고, 한쪽 팔로 쓰면서 자신의 승리가 옳음을 강변하는 역사는 그래서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그런 기록을 토대로 과거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 고증이라는 것은 또 그렇게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영조 38년 윤 5월 13일. 나라의 국본인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혔다.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살려달라고 빌면서 아버지이기도 한 왕의 명에 의해 뒤주 속으로 들어간 세자는, 한 여름 무더운 땡볕 속에서 무려 8일 동안 갇혀 있다 끝내는 세상과 연을 끊었다. 손이 귀한 왕조에 하나밖에 없는 왕자로 태어나, 온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 속에 성장해, 이제는 장차 조선의 왕이 되었어야 할 세자였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주는 이 없는 완벽한 고립 속에 죽어간 것이다.

어찌하여 한 나라의 왕자가 그토록 철저한 외면 속에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듯 정신을 놓았단 말인가. 그래서 혈연의 정보다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한 왕은 천륜마저 버리고 자식의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단 말인가. 죽은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이기도 한 [영조실록]에는 어쩌면 그것이 다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이 저자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에 귀 기울이게 된 이유이다.

역사의 패자였던 사도세자.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책은 보기 드문 패자의 기록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상한 건 오히려 승자의 기록에서 패자인 사도세자가 성군의 자질을 지녔을 지도 모를, 지금까지의 상식과는 다른 면모가 보인 것이다.

이덕일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왕독살사건]을 비롯한 그가 그간 내놓은 역사책에는 조선은 겉으로는 왕의 나라이나 왕은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던 절대자가 아니었으며, 신하들에 의해 움직이던 나라였고 신하들은 왕을 모시기보다는 학문적 뜻을 같이 하는 당론을 따르던 당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반정을 일으키기고 하고, 때로는 독살을 하면서까지 택군(擇君)을 감행했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신하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왕이었다.

영조는 당시 집권당인 노론에 의해 선택받은 왕이었고, 형이기도 한 선왕 경종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비록 유약하긴 했으나 젊은 왕이었던 경종의 급서에 독살됐을 지도 모른다는 항간의 소문 한가운데 영조가 있었고, 영조는 그 업보를 씻는데 평생의 공을 들인다. 영조는 자신의 대에서 그 업보가 깨끗하게 마무리되길 바랐고, 아들인 세자에 의해 완성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세자의 뜻은 달랐다.

세자는 노론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영조는 겉으로는 탕평책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은 노론을 중심에 두고 소론을 중용하는 노론중심의 정책을 폈다. 그것이 영조의 태생적 한계였다. 영조는 노론에 의해 택군이 된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했던 세자는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았으며 오히려 뒤에 물러나 있던 소론과 뜻이 맞았다. 이는 아버지 영조와 크게 어긋난 것이었다. 더군다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노론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보다는 집안을 따른 노론의 여인이었고, 장인은 노론의 영수였다. 이것이 사도세자가 뒤주 속으로 들어간 날, 죽음을 감지하고도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부인이나 친지보다는 이런 날을 예견해 미리 약속을 해 둔 조재호를 부른 까닭이고, 그를 죽음으로 이끈 가장 큰 비극이었다. 그는 외로웠다. 아무도 곁에 없었고, 심지어 부인마저도 적이었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당시 10살이었던 죽은 세자의 아들인 세손에 의해 과거 연산군의 일이 되풀이 될 것을 우려한 노론은 세손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는 실패하고 만다. 마침내 영조가 죽고 인고의 세월 끝에 왕에 오른 세손은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며 이렇게 선포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가슴 속에 품어 온 피 맺힌 한 마디를 내뱉고야 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을 치죄하고, 그 중심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 일가가 있었다. 이것이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남긴 이유이다. "[한중록]을 쓸 당시 혜경궁은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의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당시 혜경궁은 궁중 깊숙한 곳에서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치세 6,70여 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한중록]은 승자의 기록이었다.

한 쪽 눈만을 가진 역사의 기록은 억울하게 죽어간 한 남자를 정신병자로 몰았다. 그의 고백을 다 듣고 있노라면 240년 전의 일이 마치 오늘의 일인 것처럼 마음 한 켠이 스산해져 온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크나 큰 오욕이며, 조선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신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세자는 죽임을 당했고, 그 다음 왕인 정조 역시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정조의 시대가 지나고, 조선은 세도정치로 얼룩지다 끝내는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천륜마저도 버릴 만큼 권력을 향해 치달았던 비정한 정치 생리와, 백성을 사랑했던 두 군주(사도세자와 정조)의 죽음을 목도하고 땅을 치던 백성의 울부짖음 끝에 사도세자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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