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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ㅣ 비룡소 클래식 16
루이스 캐롤 지음, 존 테니엘 그림, 김경미 옮김 / 비룡소 / 2005년 5월
평점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내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러니까 아주 어릴 때 TV에서 노란 머리색을 가진 한 여자아이가 말하는 토끼를 따라간다거나, 동물들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등의 몇 가지 장면들로만 기억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거 어떤 여자애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서 이상한 모험을 하는 그런 거 아니야? 물론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이제서야 읽게 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이상했다. 사실 동화라는 것을 접할 때는 어떤 편견이라고 해야 할까, 고정관념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머리 속에서 그려지는 게 있다. 서양 동화는 대체적으로 공주와 왕자가 나온다. 주로 시작은 아주아주 먼 옛날에...이다. 공주는 어떤 저주로 성에 갇히게 되거나 어떤 못생긴 동물로 변하거나 아니면 얼음처럼 차가워서 여러 남자들의 구혼을 거절하거나.. 등등. 물론 멋진 왕자님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주와 왕자는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산다. 동양 동화.. 그러니까 우리나의 전래동화는 주로 권선징악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은 착한 사람을 구박하지만 나중에는 착한 사람이 하늘의 도움으로 잘 살게 되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어쨌든 동화라는 것은 교훈을 주기 마련이다. 착하게 살자 라든지, 여자는 예뻐야 한다 라든지, 외모가 아닌 마음을 봐야 한다 라든지..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였을까. 오.. 앨리스.. 너는 정말 정말 이상했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괴테나 세익스피어의 저작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릴 때 읽는 동화야말로 고전 중의 고전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실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없는. 그럼에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리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시공간을 초월해 읽히고 또 읽히는. 또 하나를 덧붙이자면 누구나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하나로만 해석되고 결론지어지지 않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이상한 동화는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동화를 읽어보자고 누군가 제안했을 때 내가 떠올렸던 책은 '오즈의 마법사'였다. 사실 오즈의 마법사 역시 어릴 때 읽었나 안 읽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한 건 그 유명한 '오버더레인보우'를 멋지게 부른 주디 갈란드 주연의 영화 '오즈의 마법사'는 틀림없이 봤다는 것이다. 내 머릿 속에서 오즈의 마법사는 영화로 각인되었지만, 그 멋진 이야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비로운 동화로 남아있다. 그런데 내 입이 미처 열리기 전에 누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말했다. 그 분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영화로 봤고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지만, 그 순간 뭔가 번쩍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너무 늦은 나이에 읽게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이상한 이야기만큼이나 내게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오.. 앨리스, 너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니?
세 살때 엄마가 읽어주는 신데렐라, 초등학교 때 내가 직접 읽는 신데렐라, 그리고 어른이 되어 읽는 신데렐라. 느낌이 어떨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는 동안 나는 왜 어릴 때 이 책을 읽지 못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건 자꾸만 등장 인물 하나 하나, 대사 한 줄 한 줄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못된 버릇(?) 때문이었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된 건 우연히 발견한 토끼때문이었다. 주머니가 달린 조끼를 입은 토끼를 따라 굴 속에 빠지게 되는 앨리스는 한참을 떨어지다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들에 나는 어느샌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앨리스가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건 어린이의 정신적 성장을 의미하는 걸까? 쥐에게 자꾸 고양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뭘까? 동물들은 왜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는 걸까? 울기만 하던 아이가 돼지로 변한 이유는 뭐지? 여왕은 왜 자꾸 소리를 지르고 목을 자르라고 하는 걸까? 가짜 거북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 이야기가 계속되고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나는 새로운 의미찾기를 하고 또 하고 있었다. 그러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앨리스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주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동물들이 말을 하는게 이상하지만 대화를 주고 받고,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게 이상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져서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상황에 알맞는 크기로 만든다. 어떤 상황이 와도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동화니까. 어떤 편견도 고정된 지식도 강박관념도 없는 그저 신나는 모험과 상상의 세계일 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앨리스와 같은 순수한 아이의 시선에 맞춘 환상적인 이야기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찾기는 머리 아픈 걸 좋아하는 어른들이 만들어 낸 골치아픈 물음일 뿐이다.
황금빛 오후 내내 / 한가로이 물 위를 흘러가네. / 어설프나 어린 어깨는 / 부지런히 노를 젓고 / 어린 손들이 부질없이 / 길을 안내하느라 애쓰네
아, 잔인한 세 사람이여! / 이렇듯 꿈결같이 몽롱한 시간에 / 조그마한 깃털 하나도 날려 보낼 수 없을 만큼 / 나지막한 숨결로 이야기를 해달라니! / 그러나 가엾은 목소리 하나가 / 어찌 세 혀를 이기리오.
오만한 맏이가 먼저 나서서 / "시작하세요!" 명령하고 / 둘째는 상냥하게 / "재미있는 걸로요!" 부탁하고 / 셋째는 일 분마다 이야기에 끼어드네. p. 7~8
오! 앨리스... 너는 순수한 어린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귀여운 아이. 환상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그런 작고 어여쁜 아이. 토끼를 따라 끝없는 동굴에 빠진 앨리스가 어떻게 될 지, 누구를 만날지 몹시 궁금한 호기심에 가득찬 아이. 오... 앨리스..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야!
그러다 갑자기 모두들 입을 다물고 / 환상 속으로 빠져드네. / 저 땅 속 낯설고 신비로운 이상한 나라에서 / 새와 짐승과 다정하게 재잘거리며 / 헤매고 다니는 꿈의 아이를 쫓아 / 그것이 정말 사실인 듯.
이제 상상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 이야기도 다 말라 버리고 / 이야기꾼은 지친 목소리로 / "나머지는 다음에"하면 / "지금 해주세요, 지금요." / 행복에 겨운 소리가 메아리치네. p. 8~9
자! 동화를 읽을 때는 동화를 읽어야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듯이 읽어서야 되겠는가. 의미찾기와 교훈 발견하기를 중단하고 이야기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3살 때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 글을 깨우치고 난 후 내가 스스로 읽는 동화, 어른이 되어서 읽는 동화가 같은 내용임에도 그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경험과 연륜, 사회를 보는 눈과 깊이가 쌓이고, 당시의 주변 상황 때문이기도 혹은 번역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몸이 커가고 머리가 굵어질수록 동화를 동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리하여 이상한 나라가 생겨났네. / 이렇게 서서히 하나씩 하나씩 /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 이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네 / 우리의 즐거운 뱃사공들은 노를 저어 / 저물어 가는 노을 속에 집으로 돌아가네.
앨리스! 너의 부드러운 손으로 / 동심이 가득한 이 이야기를 가져가 / 추억의 신비로운 가닥 속에 놓아 두어라. / 어린 시절의 꿈들이 엮이어 있는 그곳에. / 멀고먼 나라에서 꺾어 온 / 순례자의 시든 꽃다발처럼 p. 9
오! 앨리스.....이제야 너를 알겠구나.
너는 그저 작고 귀여운 어린 아이일뿐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