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vs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도서관에서 ‘정조의 비밀편지’라는 책을 꺼내든 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또한 몇 년 전 정조의 어찰첩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언급되었을 당시를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까지 정조의 정적으로 알려졌던 한 신하와 정조가 수시로 편지를 보낼 정도로 사실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어쩌고 저쩌고... 해서 정조의 독살설은 힘을 잃었다는 뉴스 보도 끝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살설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저자인 이덕일의 인터뷰가 보도됐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권에서는 꽤 여러 페이지를 정조독살설에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보도된 정조어찰첩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2009년 2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자 며칠간 대한민국은 이 문제로 떠들썩했다. 이 어찰을 공개한 학자들은 이를 정조독살설을 부인하는 사료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정조가 상스런 소리를 서슴지 않았다면서 정조의 격하를 즐기는 듯한 자세로 일관했다. ...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노론 벽파는 ‘국왕에게도 할 말은 하는 원칙주의자’로 격상되고, 정조독살설은 시골 사람들이나 주장한 촌스런 이야기로 전락하고, 도시스런 한양 사람들은 정조독살설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 된다. 과연 그럴까?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권 p37-38

 

‘정조의 비밀편지’의 저자인 안대회는 이 논란의 정조어찰첩을 발굴하고 언론에 보도한 당사자이다. 그는 이 어찰첩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비밀편지는 기왕에 밝혀진 사료와는 성격이 판이하다. 이 특별한 사료의 등장은 정조와 그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보도록 충동질한다. 마치 법원의 판결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사건에 판결을 뒤집거나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증거물이 등장한 것과도 같다. 그 때문에 많은 논란이 진행되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정조의 비밀편지 p6-7

 

여기서 말하는 기왕에 밝혀진 사료는 실록과 일성록 등 그간 정사로 알려진 자료들이며, 법원의 판결이 끝났다는 것은 아마도 노론과 정조의 적대적인 관계, 정조의 정치적 성향 등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판결을 뒤집거나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증거물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 어찰첩이 그간의 평가와는 달리 노론과 정조가 그다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정조는 인자한 성군이기 앞서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역사라고는 고등학교 때 배운 게 다이고, 이런 역사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밖에 읽어보질 못했기 때문에 정조독살설이라든지, 정조어찰첩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을 할 처지는 못 된다. 다만 같은 시대, 같은 자료를 가지고 판이한 주장을 하는 두 책을 접하면서 어느 쪽이 옳으냐 보다는 참 흥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정조의 ‘오회연교’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린 ‘이서구’라는 사람은 이덕일에 의해서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불린 실학사대가로, 안대회에 의해서는 노론 벽파의 핵심 막료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 이서구의 상소는 이덕일은 ‘남인재상을 등용하겠다는 정조의 뜻을 받든 것’이고, 안대회는 오히려 ‘오회연교는 벽파를 등용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표명한 글’이기 때문에 이서구가 맞장구를 친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서구를 인터넷 검색창에 쳐 봤더니 ‘시에 능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4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혀 ‘실학파 문인’으로 평가되고,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실학파라기보다는 ‘실학파 문인들과 사귀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정치적인 성향에서 어느 쪽으로 뚜렷이 분류되는 내용은 없다.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이덕일이나 안대회나 각기 자기 입장에 맞게 가져다 썼다는 느낌이다.

 

두 책은 그 외에도 몇 가지 면에서 상이한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은 당연 정조독살설이다. 정조독살설에 대한 각자 이견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에는 정조와 노론의 관계, 오회연교의 의미, 정조가 앓았던 병의 경중함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정조어찰첩 발견 당시 이 어찰첩이 정조독살설을 부인하는 근거로 제시됐던 이유는 무려 350여통에 달하는 정조어찰의 주인인 심환지가 바로 노론의 영수이기 때문이다.

 

우의정에 임명되고 노량진에 머물던 심환지는 거듭 사직상소를 올리고 정조와 비밀편지를 왕래하며 상소문의 내용과 정국을 상의했다. 10월 16일 저녁에 정조가 보낸 편지에는 “내일이나 모레 사이에 다시 사람을 보내 돈유할 것이니, 일단은 ‘아직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편지를 보냈다. ... 이 명령을 받고 심환지는 질병으로 명령을 받들지 못한다고 정조의 분부대로 답했다. - 정조의 비밀편지 p56-57

 

실록에는 비밀편지의 내용은 당연히 없고, 정조가 사관을 보내 빨리 벼슬하라고 명령했더니 심환지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찰에서 이러한 비밀편지는 심환지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하들과도 오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무하고나 편지를 왕래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측극들과 편지를 통해 여론을 청취하고 의견을 나누었을 것이다. 정사와 달리 노론과 정조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안대회는 정조와 노론 벽파를 ‘적대적 관계라기보다는 비판적 협력자로서 정치적 동반자 관계라고 보아야 할 만큼 최측근 신료’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가 어찰을 비밀리에 왕래했고 받아보고 즉시 없애라고 명령했음에도 심환지가 이렇게 잘 보관한 이유를 정치적 보험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어찰은 정조의 정치적 입장이 노론 벽파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동지적 관계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입증해줄 만한 좋은 증거물’이었으며, ‘이들 어찰은 심환지가 정조와 맺은 깊은 관계를, 그리고 심환지가 행한 정치적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이렇게 말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는 심환지가 정조의 독살설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정조의 의문사와 깊숙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료로 해석해야 마땅한 것이다. 서용보를 내의원 제조에서 체차시킨 정조가 심환지를 왜 내의원 제조로 그대로 두었는지를 말해주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권 p.43

 

같은 사료를 두고 서로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 외 정조의 병에 대해서도 안대회는 어찰에서 “나는 날마다 적빙 및 사발과 황련 몇 첩씩을 마시는데 그러고 나면 폐의 열과 답답한 속이 다소 상쾌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토로하는 등 정조가 오래 전부터 병에 시달렸으며 승하하기 며칠 전부터는 중병이었음을 강조한다. 반면 이덕일은 ‘정조의 진정한 병은 가슴의 화기’였으며, 그것은 ‘생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것을 목도한 아들 가슴속의 화기이자 부친을 죽인 정파와 20년 이상 함께 정사를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군주 가슴 속의 화기’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의 병은 그전부터 갖고 있던 화병과 종기였고 이것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고 대부분의 관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정조가 위독하게 되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인물은 정조의 정적 정순왕후’였으며, ‘정조는 정순왕후와 단둘이 있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고 정조 사망 당일 심환지는 영의정으로 승진한 것을 독살설의 증거로 제시한다.

 

이덕일은 정조 사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독살설의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시대의 모든 개혁조치를 거꾸로 돌리는 과거사 청산작업이 시작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다름 아닌 심환지’였고, ‘다시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엄금되었고, 노론 일당 독재가 재연’되었으며 만약 심환지가 정조 독살과 무관하다면 ‘그는 최소한 정조 사후 정조가 견지했던 정치노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대회는 정조 사후 ‘개혁군주 정조의 독살과 그 이후 조선의 쇠퇴와 몰락의 구도는 드라마틱하면서도 논지가 정연해 보인다.’고 할 뿐 그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안대회의 독살설 부정은 ‘개혁을 추진한 정조는 선이고, 그에 반대한 노론 벽파가 악이라는 구도의 설정은 민족주의적 정서에 부합하기도 한다. 정조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은 뒤에 멸망하지 않았다는 논리도 같은 맥락이다’라며 정조독살설을 제기한 쪽에 대해 억울해?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사실인걸..이라는 투다. 반면 이덕일은 정조독살설과 이후 조선의 역사에 대한 논지를 분노하는 듯한 어조로 써내려가고 있다. 이덕일의 책이 학계에서는 역사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의 주장이 비주류임에도 대중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오며 작가로서 인지도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이런 성향이 대중과 잘 맞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찰첩에는 정치적인 면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매력 넘치는 정조가 고스란히 보인다. 또한 그의 고뇌에는 연민이 든다. 이도저도 아닌 채 몸을 사리는 자를 질책하고 신하에게 모서리를 드러내어 용기를 갖고 정국을 주도할 것을 주문하는 것에는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보다는 직언을 하는 신하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럴 수 있게 마음과 귀를 열어놓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을 사지로 몰지 않고 정적이든 내편이든 정사를 나누었으며, 잠을 자지 않고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소식이 갑자기 끊겼는데 경이 그동안 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아니면 어디로 갔었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인가? 나는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사람을 보내 모과를 보내니 아름다운 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겠는가? - 정조의 비밀편지 p.85

 

이처럼 다정다감하기도 했다. 정조는 독살되었는가 병사했는가? 노론(벽파)와 정조는 정적이었는가 정치적 동반자였는가? 심환지는 왜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어찰을 꼼꼼하게 남겨두었는가? 이 모든 의문에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우리가 위대한 군주를 너무 빨리 잃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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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데이지 2013-01-1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희들의 시대는 어떠한가?>와 함께 글 잘 읽었습니다! 얼음무지개님!
반갑습니다^^

얼음무지개 2013-01-17 15:44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습니다...^^ 어색하네요.. 제 글에 댓글이라니..ㅎㅎㅎ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vs D에게 보낸 편지

 

 

 

 

 

 

 

 

 

 

 

 

 

 

 

 

 

당신은 연인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은 ‘이메일과 핸드폰, 카카오톡이 있으니 편지에 대해 말 한다는 것이 매우 지루하다’는 것쯤은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너무도 자주 언급되었으니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린 오히려 이 스마트한 세상에서 정성스럽게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았을 때 더욱 감동을 받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편지지를 고르고 볼펜을 들어 어떤 내용을 써야 할 지 고민을 거듭하기까지 몇 시간 혹은 며칠, 몇 달 제법 긴 시간이 걸립니다. 엄지로 문자를 찍고 발신 버튼을 누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물론 한 마디의 문자를 보내는 순간에도 수없이 망설이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드디어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어 서툰 솜씨로 글씨를 써 내려가고, 편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기까지 우린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편지를 받을 상대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긴 편지를 받는다는 것은, 우체국이 없어서 편지를 전달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던 예나 버튼 하나로 문자를 주고받는 지금이나 참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만약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내게 전해 준 편지 한 통이 연인에게서 온 것이라면 기분이 어떨까요?

 

여기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한 권은 서로 사랑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연인이 주고받은 편지이고, 또 한 권의 책은 이제 인생의 황혼에서 평생 동안 자신의 곁에 있어 준 아내에게 쓴 편지입니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는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합니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그 어느 것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아니 소속될 수 없었던 불안한 정체성이 공통점이었기 때문일까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떠나버린 상태에서 대부 아래서 자라 고아 아닌 고아였던 도린과, 세계2차 세계대전 당시 성(姓)과 종교까지 바꿔야만 했던 유대인이었던 고르는 1947년 첫 만남 후 서로에게 이끌리고, 1949년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저는 앙드레 고르라는 이름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에콜로지스트 선언’으로 소개 된 책으로 유명한 일종의 생태사회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는 많은 저작을 발표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사실 고르는 도린을 만났을 때만 해도 가난뱅이 학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춥고 배고팠던 기간은 결혼을 하고서도 꽤 오래 갑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발표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기까지 도린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묵묵히 고르의 곁을 지킵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 D에게 보낸 편지

 

 

1983년 아내 도린은 불치병 진단을 받습니다. 허리디스크로 전신 마취 수술을 받기 위해 몸에 주입된 물질의 일부가 두개골로 올라갔고 도린은 이후 24년 동안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삶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고르는 자신의 첫 저작(배반자)에서 아내를 그릇되게 표현한 것과 평생 자신에게 헌신했던 아내에 대해 그동안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됩니다. 사랑과 감사의 고백을 담은, 오직 아내에게 헌사하는 편지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 D에게 보낸 편지

 

 

60년을 함께 했던 도린과 고르는 함께 생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앞에 둔 한 남자는 죽음의 두려움보다 아내가 없는 삶이 더 두려웠습니다. 물론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동반자였고, 서로가 없는 삶 이상의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도린이 없었다면, 그녀의 사랑이 없었다면 자신의 사상과 저작은 물론, 자신조차 존재할 수 없었노라고 고백하는 편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됩니다.

 

 

“네가 없는 집이 얼마나 적막한지 모르겠어. 네가 떠난 순간 너무 맥이 빠져버려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네가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까?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봤지만 그 답은 찾을 수 없어. 그냥 모든 것이 끔찍하게 느껴질 뿐이야. 생명력 없는 삶, 바로 그게 지금 나의 삶인 것 같아.” -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마르셀 세르당이 에디트 피아프에게 첫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마르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디트를 만났을 때 마르셀은 이미 세 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셀과 에디트의 사랑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고되는 것은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 때문일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마르셀 세르당.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견디고 사랑에 상처받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고, 각자의 일로 떨어져 있는 날이 많았던 그들은 만나지 못하는 동안 편지를 쓰게 됩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정상에 있었던 두 사람의 편지는 예상 외로 사춘기 소년․소녀가 썼을 법한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그런 탓에 문학적인 가치는 적을지라도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르셀 세르당이 죽은 뒤에 마르셀의 편지는 에디트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둘의 편지는 나중에 에디트 피아프 기념관 관장에게 물려주게 되고 세상에 공개됩니다.

 

 

“내 심장은 너만을 향해서 고동치고 있고, 너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너를 꼭 안고 싶어. 내가 마음껏 너를 사랑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이제 열이틀만 지나면 너를 만날 수 있겠지?” -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하루라도 빨리 연인이 보고 싶었던 에디트는 마르셀에게 예정했던 배 대신 비행기를 타고 자신에게 와 주기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에디트를 만나러 가는 도중 비행기는 어느 산꼭대기에 추락하게 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에디트는 마르셀이 없는 고통을 견딜 수 없었지만, 마르셀을 위해 1950년 ‘사랑의 찬가’라는 노래를 발표합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사랑의 찬가’는 마르셀을 위해 에디트가 쓴 또 한 통의 편지일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버려도, 땅이 꺼져버린다 해도 그대만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래도 괜찮아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조국을 버리겠어요. 친구도 버리겠어요. 사람들이 비웃는다 해도 당신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지 나는 해내겠어요.” - 사랑의 찬가

 

 

앙드레 고르에게 생의 마지막 편지는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무리였습니다. 서로를 너무도 그리워했던 에디트와 마르셀의 편지는 고스란히 사랑의 증거로 남아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이야기하는 것은 추억과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아날로그는 유효합니다. 소중한 마음을 전하고 받는 편지는 싸구려 아날로그가 아닌 진솔한 마음 그 자체일 것입니다.

당신은 연인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있습니까?

 

 

D에게 보낸 편지 ★★★★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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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인 여러분! 나의 이러한 평판은 내가 어떤 종류의 지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지혜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인간에 의해 확득될 수 있는 지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간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는 한도 내에서만, 나는 내가 현명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민중을 멸시했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귀족이 아닌 중산층 출신이면서 말이다. 민중을 경멸하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뒤에 그가 재판을 받게 되는 데 하나의 이유가 됐던 게 틀림없다.

민중 멸시는 당연히 민주주의 멸시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크레타와 스파르타의 제도를 최상의 정치형태라고 찬양하고, 그 다음이 과두정이며 제일 못한 것이 민주정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크세노폰의 <회상>에서는 아테테인들을 '낙후된 자들'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 이후 죽음을 피해 다른 도시국가로 망명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훌륭한 법질서를 갖춘 나라라고 칭찬해 마지않던 스파르타나 크레타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철학자를 환영하지 않았음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민주국가 아테네와 대조적이었던 독재국가 스파르타를 이상국가로 동경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다스리는 자의 직분은 해야 할 일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며, 피치자의 할 일은 이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그는 그리스인들이 민주주의의 조건으로 요구한 '피치자의 동의'를 외면하고 시민들에게 복종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또한 인간사회를 시민의 자치제가 아니라 목자나 왕을 필요로 하는 무리로 보았다. 반면 아테네인들은 인간이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고 있으며 폴리스에서 자치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시민이라고 믿었다.

 

나는 믿을 만한 증인의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 증인은 델포이의 신입니다. 이 신은 만일 나에게 지헤가 있다면 나의 지혜에 대해서,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지혜인가 하는 데 대해서 말해 줄 것입니다.....그는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신탁을 구했던 것입니다. 델포이의 무녀는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그가 가장 즐겨 사용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일 것이다.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뜻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누구나 혼을 가지며 그 혼이 각자에게 가장 귀한 것이니 저마다 자신의 혼이 훌륭하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혼'은 '정신'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훌륭한 정신을 갖도록 하라', 즉 '덕을 갖도록 하라'는 말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덕을 지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에서 덕이란 말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덕이란 말과 다를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덕이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있는 것이자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아테네의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긴 생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반대로 생각했다. 즉 참된 지식은 절대적인 정의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 지식은 소수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테네인들은 시민은 철학의 대가일 필요가 없으며 단지 이성을 가진 상식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덕과 지식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소피스테스는 스스로를 지식과 덕의 교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덕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없으므로 소피스테스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비난으로 인해 소피스테스는 두고두고 역사적으로 비난을 받게 됐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지식과 덕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의 반민주적 사고 때문이다. 만약 덕과 지식이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아는 자'가 통치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과 모순된다.

둘째, 절대적 확실성의 부정이라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셋째, 자신의 제자 중에 반민주적인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테스들을 비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고, 심지어 노예제도까지 부정했기 때문이다. 반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빈민을 멸시했고, 노예제도를 긍정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의 적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만일 내가 파멸한다면 이 때문에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멜레토스와 아니토스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은 이미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할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될 염려는 없습니다.

 

반민주주의자 소크라테스는 민주국가 아테네에서 평생 자유를 누렸다. 그곳에서 일흔이 될 때까지 반민주주의를 마음껏 설교하며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시민이면 누구나 그를 고발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앞서 설명했듯이 민주주의는 세 번 전복된 적이 있다. 이 세번의 반민주 책동에 소크라테스의 젊은 제자들이 주모자로 가담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선동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기록된 내용에는 그가 30인 정권의 폭정에 반대했음을 보여준다. 30인정권의 독재자들은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5명을 집행부로 불러들여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권은 독재를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후 살해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폭정을 부당하다고 여겨 명령에 불복종하고 다른 4명이 레온을 체포하러 살라미스로 갈 때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살해를 면한 이유는 30인 정권의 수령인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옛제자였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말하자면 권력의 비호를 받은 것이다. 30인 정권은 크리티아스가 전사함에 따라 8개월만에 끝났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데 앞장섰던 아니토스는 30인 정권의 독재자들을 타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망명자들의 모임에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토스는 30인 정권에 의해 망명을 했다가 고된 내전을 거쳐 민주정을 회복시킨 자였다. 그런 그에게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의 적으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민주정이 회복되기 전에 이미 내전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대사면 협약이 체결됐기 때문에 민주정 측은 크리티아스와 관련해 소크라테스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반민주적 과두파나 친스파르타주의자로 처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죄목이 애매한 '불경죄'였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통상의 불경죄로 처벌하기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귀신과 소통한다는 이유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가 더했졌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민주정이 회복된 뒤 2년 뒤, 그러니까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 30인 정권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져 공무원 자격심사에 의한 부적격 공직자의 추방이 강조된 시기에 열렸다는 점은 그의 실제 혐의가 30인 정권과의 관련성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아테네 인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이 여러분에게 보내준 선물인 나를 처벌함으로써 여러분이 신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여러분을 위해서 변명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재판에 대해 살펴보자.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일흔의 나이에 재판에 회부됐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발자는 아니토스, 멜레토스, 리콘 세 사람이다. 아니토스는 장인과 정치인을, 멜레토스는 시인을, 리콘을 변론가를 각각 대표했다. 사건은 10개의 배심법원 중 하나에 배정됐고, 배심원은 선출된 501명이었다.

 

고발자의 목소리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에 의해 후세에 각각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신봉하지 않고,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를 지었다. 또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도 지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음으로써 죄를 범했다.

 

이는 물론 실제 고발장의 내용이 아니라 후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쓴 저술을 통해 전해진 혐의일 뿐이다. 여기서 '국가가 인정하는 신' 또는 '나라가 믿는 신'이란 폴리스의 신을 뜻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란 외국의 다른 신격을 수입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격을 믿었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가 무신론이라고 했으나, 무신론은 실제 고발 이유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실제 이유는 그가 폴리스의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신을 믿는다'는 말은 폴리스의 '노모스(nomos)를 따르고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모스란 관습과 법률을 뜻한다. 노모스를 따르고 존중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의 상식이었고, 소크라테스도 이 점을 인정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는 그가 아테네의 노모스를 위반한 데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반한 것인지는 명시돼 있지 않다. (저자는 플라톤도 크세노폰도 그것을 명시하지 않은 이유로 만약 그것을 명시할 경우 소크라테스의 죄상이 드러나게 되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들의 변호가 약화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여러분은 내가 신 또는 정령의 신탁이나 신호를 듣는다고 여러 차례 여기저기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멜레토스가 소장에서 조소한 신도 바로 이 신입니다. 이 신호를 일종의 목소리로서 내가 어릴 때에 처음으로 들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는 어떠한가?  이 점에 대해 크세노폰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또 점을 친 것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신령이 나에게 신탁을 내린다"고 말한 사실은 널리 훤전되고 있다. 생각하건데 새로운 신격을 수입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

 

이 현상에 대해 플라톤은 소리 형태의 신적이며 영적인 무언가가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심리현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크세노폰은 이 현상을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점을 본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그건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신령의 신탁에 따라서 여러 제자들에게, 혹은 그렇게 하라든가, 또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충고에 따른 자는 덕을 보고, 따르지 않았던 자는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을 일종의 신비적인 종교집단으로 보았을 수도 있었겠단 얘기다.

그러나 이런 '불경죄'는 명목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고발한 자가 장작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정식 제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 나의 말을 들으려고 찾아온다면, 청년이든 노인이든 간에 이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나는 보수를 받아야만 대화한 것이 아니어서, 부자든 빈민이든 간에 누구든지 나에게 묻고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악한 사람이 되든 선한 사람이 되든 그 결과는 나의 탓이 아님은 당연한 일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혐의는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를 둘러싼 변론에 대해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서술은 다르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타락시킨 젊은이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쳤다고 기록해 놓았다. 멜레토스가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부친보다 자신을 따르라고 가르쳤다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교육적인 면에서 그랬다고 답하고, 자신은 교육에서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는데 그것이 사형당할 이유냐고 반문한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에 대해 크세노폰의 <회상>에는 네 가지를 지적한다. 이는 소크라테스 처형 이후 반대파가 내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첫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관리를 추첨으로 정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청년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기존의 국법을 멸시하는 압제자가 되게 했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설득과 압제의 차이를 밝히면서 소크라테스는 설득은 했지만 압제를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반론하고 있으나, 소크라테스가 평등주의적 추첨제와 민주주의를 멸시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변론하지 않는다.

두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과두정치 시대의 탐욕, 압제, 잔인의 거두인 크리티아스와 평민정치 시대의 황음, 오만, 압제의 화신인 알키비아데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그들이 소크라테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런 압제자가 되기 전으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던 시절의 그들은 사려깊은 사람들이었고 소크라테스가 30인 정권 시절에는 폭정을 엄중히 비판했으며 이 때문에 사이가 헙악해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훌륭한 대화상대로 등장해 그 어느 대화에서도 그를 비난하지 않으며,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동성연애 분위기에서 인기있었던 자로 소크라테스의 연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세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에게 부친이나 근친자들을 모독하게 했고, 친구들에게 친절은 무용하다고 가르쳤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이치를 모르는 자는 존경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네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시를 곡해하여 사람들에게 악행을 행하게 하고 독재자로 만들었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변론에서 자주 인용한 호메로스의 시에 독재자를 옹호하는 부분이 여러 곳 나오는 것으로 보아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해서 문제가 됐을 수도 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불경죄보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에 대한 변론부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론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청년들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하는 멜레토스에게 "누가 그들을 더 훌륭하게 만드나요?"라고 물어 그를 궁지에 빠트렸다. 이에 대해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모든 아테네인들이 청년들을 더욱 선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청년들을 선하게 했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청년들에게 복된 일이지 해악이 되는 일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청년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후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청년들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악한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종국에는 자신도 해를 입게 될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고의로 청년들에게 해를 끼칠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변론에서 고발자인 멜레토스가 고발 원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능하여 신용할 수 없음을 네 차례에 걸쳐 명백하고 밝히고 있다. 즉, 고발자와 고발의 신용과 신빙성을 부정함으로써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를 부정한 것이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상대로 직접 반론을 펴자 그를 무신론자로 공격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불경죄는 죄목이 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며 멜레토스는 고발장의 내용과 모순되는 답변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기소할 만한 죄목을 찾기 어려워지자 엉터리 불경죄를 뒤집에씌운 것임을 폭로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이어 그는 자신이 세 차례 전투에 참여했음을 말하며, 죽음을 두려워해 신이 부여한 자신의 철학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무지라고 말한다. 나아가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철학활동을 포기하겠다는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자랑스럽게 자기를 아테네의 양심에 비유하며 자기를 죽이는 것은 아테네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말한다. 즉, 자신을 비판적 언론인이라고 자부한 것이다.

 

여러분한테든 또는 어떤 대중한테든 진정으로 맞서서 많은 올바르지 못한 일들이나 법에 어긋나는 일들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으로 들고서도 무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올바른 것을 위해 정말로 싸우려는 사람은, 그러고도 그가 잠깐이나마 살아남으려면, 그는 반드시 사인으로 지내되 공인으로 지내질 않아야 되니까요.

 

즉,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기 위해 공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비판적 언론인인 자신을 죽이는 일이 아테네에 엄청난 손실을 입히는 행위라는 말과 모순된다. 게다가 올바르지 못한 일들과 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일삼는 아테네와 아테네인들에게 맞섰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말은 아테네와 아테네인들에게 엄청난 모독이다.

나아가 이 말은 그리스 민주주의 기본정신에 대한 도전이자 모독이기도 하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올바른 것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동의해 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또 여기서 말하는 '누구'에는 고발자들이 말하는 자신의 나쁜 제자들도 포함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지만 저는 누구의 선생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수많은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에게 진실을 가르쳐왔다고 자부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선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유죄의 투표에 대해 내가 비탄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나는 이러한 결과는 예상했고, 다만 찬반 투표 수가 거의 같다는 데에 놀랐을 뿐입니다. 나는 나에게 불리한 투표가 훨씬 많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차 투표에서 소크라테스는 유죄 281표(또는 280표), 무죄 220표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만약 유죄 표 가운데 30표만 무죄 표로 옮아갔더라면, 가부동수일 때는 피고에게 유리하게 판결한다는 원칙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무죄가 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놀라워했다.

 

양형의 순간에 고발자는 사형을 신청했다. 소크라테스는 형량에 대해 변론할 기회가 주어지자 자신은 형벌 대신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또 다시 배심원들을 자극했다. 그가 말한 상이란 '영빈관에서의 식사 대접'이었는데 영빈관은 당시 아테네의 민회 건물로 관례에 따라 가장 영예로운 민주시민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어쨋든 이 행동은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배심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확정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아테네인 여러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와 같은 나이에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돌아다니며 항상 추방지를 변경하고, 또 항상 쫓겨나야 하는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내가 어디를 가든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청년들이 나의 곁으로 몰려오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청년들을 쫓아낸다면 청년들의 요구로 연장자들은 나를 쫓아낼 것입니다.

 

배심원들이 자신에게 추방형을 내리려 한다고 짐작한 소크라테스는 다른 나라 사람들 역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결국 방랑하게 될 것이므로 자신에게 추방형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의 권유를 핑계삼아 벌금형을 제안했다.처음에는 은화 1므나를 제시했으나 뒤에 플라톤 등의 제의에 따라 벌금액을 30므나로 높여 제안했다. 이는 무척 거액으로 처음부터 30므나를 제안했으면 배심원들이 어느 정도 납득했을지 모르나 나중에 말을 바꾸었고, 배심원들은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을 비웃는 행동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만일 재판이 하루 만에 끝나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졌더라면 배심원들이 그의 무죄를 확신했으리라고 말함으로써 재판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2차 투표의 결과는 사형이었다.  표결은 360대 140으로 1차 투표 때보타 소크라테스에게 더욱 가혹했다. 결국 오만하고 뻔뻔하게 이를 데 없는 발언으로 배심원들의 분노를 삼으로써 사형을 자초한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각기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좋은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뿐입니다.

 

<크리톤>에서 감옥에 갇여 있는 동안 소크라테스는 많은 이들에게 탈옥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탈옥 권유를 뿌리치며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고, '훌륭하게'는 '아름답게' 및 '올바르게'와 동일"하다는 논증을 편다. 그리고 탈옥은 훌륭하게 사는 것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탈옥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크리톤과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는데 요약하면 정의의 3원칙은 올바른 일을 해야 하고,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며, 올바른 합의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원칙들을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켜 탈옥 거부의사를 더욱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올바른 일이 아니기에 탈옥을 할 수 없고, 잘못된 판결로 사형에 처해졌다 해도 그것에 불복해 탈옥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에 잘못된 행위로 대응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으며, 합의된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탈옥하는 것은 합의를 기만하는 행동이므로 역시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불의에 대한 저항도 옳지 못한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은 국가와 동등할 수 없으며 어떤 안에 대해 국가를 납득시킬 수 없다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하지도 않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소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말은 한동안 우리의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저자는 과거 우리의 군사정권이 한 철학자의 힘을 빌어 악법을 합법화하는 길을 터주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빚을 갚아주겠나?"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은 민주주의가 가진 여러 한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노예제를 인정했고 민중을 멸시한 반민주주의자였으며 전제주의자였고 반인권주의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아테네인들에게 유죄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아테네의 민주적 전통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들어 자신을 변호했다면 그는 당연히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경멸한 아테네 민주주의에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죄여야했다. 민주주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용납되어야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아테네를 지지하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주의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보호돼야 했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민주주의 역사의 커다란 오점이라고 지적한다.

 

 

......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의 저자는 보통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분리하는 것과 달리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테스의 이야기를 그대로 소크라테스의 생각으로 보고 논의했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에 관한 책이다. 지난 수천년동안 현명한 철학자를 죽인 중우정치라고 매도되어 온, 소크라테스의 프로페셔널리즘에 의해 부정되어 온 아마추어리즘인 '민주주의'에 대한 명예회복 선언인 셈이다. 

이 책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꽤나 많은 자료들을 실례로 들고 있다.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써져 있어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어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2005년 12월 즈음에 작성했던 글..

네이버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이곳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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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나를 고발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가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가를 잊을 정도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한마디도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2,400백년 전 70세의 한 노인이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이름 소크라테스. 오늘날 위대한 철학자, 인류의 성인으로 떠받들려지고 있는 그는 왜 사형을 선고 받았을까?

대중의 무지를 지적하고 '너 자신을 알라'며 진리를 설파한 그를 우매한 대중이 죽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은 법정은 스파르타의 법정이 아니다. 최초의 민주주의. 온 인류가 추앙해마지 않는 바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민주법정'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아테네 민주주의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배운다. 특히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로 비록 여자와 노예, 외국인에게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시민권이 있는 모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이상적인 민주주의였으며, 아테네 시민들이 직접 판결했던 민주법정 또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지만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주의만은 우매한 민주주의이다. '아테네 민주법정'과 '소크라테스'. 어느 쪽이 옳은가? 소크라테스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선 나는 보다 오래된 고발과 최초의 고발자들에 대해 답변하고, 다음에 그후의 고발과 고발자들에 대해서 답변하겠습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고발자들이 나를 여러분에게 거짓 죄목으로 수년에 걸쳐 고발해 왔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판결에 앞서 우리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소크라테스 재판을 이야기할 때 민주주와는 별개로 논의를 해왔으나, 모든 인물이나 사상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의 사회사와 연관지어 하나의 고리에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한 사회에 속해 있던 사람으로서 당시 아테네 민주주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몇가지만 알아보도록 하자.   

 

기원전 8세기에 미케네 시대의 왕정이 무너지고 그리스는 귀족이 지배하기에 편리한 언덕(아크로폴리스)에 모여 살면서 폴리스가 성립됐다. 기원전 683년부터 임기 1년의 아르콘 9명이 정권을 잡은 이후 아테네에서 귀족의 지배권이 확립되었고, 기원전 594년에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의 금권정치가 이어진다. 기원전 561년에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참주정이 들어서고 참주정이 종식된 뒤 기원전 508년에는 솔론계의 평민파였던 클라이스테네스가 집권해 민주정의 기초를 세웠다.

클라이스테네스는 귀족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종래의 혈연중심적 부족 구획을 지역적인 10개 구로 나누고 각 구에서 50명의 대표를 추첨으로 뽑아 500인 평의회를 구성했다. 이어 명문 가문의 정치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참주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제를 도입하여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 질서를 구축했다. 그리고 기원전 469년에 소크라테스가 태어난다.

 

이어 등장한 페리클레스의 15년 계획의 시대에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의 참된 중심이 된다. 그러나 기원전 431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고 기원전 411년에 적국 스파르타와 공모한 불만세력이 민주정을 전복시키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을 '400인 과두정'이라 하는데 이 공포정치는 4개월만에 끝났으나, 아테네가 패전을 하게 되는 기원전 404년에 '30인 독재정'이 수립되어 8개월이나 지속되고 그 정도도 너무도 끔찍했다고 한다. 

기원전 403년에 민주정은 다시 회복되었으나 기원전 401년에도 민주정 전복을 기도한 세력이 있었고, 이 세 번의 반민주 책동에 소크라테스의 젊은 제자들이 주모자로 가담했다. 그리고 기원전 399년에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받는다.

 

자, 그러면 나는 변명을 시작해야 하며, 짧은 시간 내에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비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성공이 나나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라면 내가 성공할 수 있기를, 또는 나의 변명이 쓸모 있는 것이 되기를!

 

아테네의 최초 입법은 기원전 7세기 말에 드라콘이 만든 드라콘법이었지만 수십 년 뒤 솔론이 정치와 경제를 개혁할 때 드라콘법을 폐지하고 법제를 민주적으로 개혁했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론의 국제(國制)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특징을 갖는 것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채무자의 신체를 담보로 하는 대부의 금지다. 둘째는 피해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를 대신하여 손해배상 청구의 소를 제기할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인정한 점이다. 셋째는 민중재판에 호소할 수 있는 제도를 창설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세 번째가 바로 헬리아이아(Heliaia)라고 하는 민중법원이었다. 이것은 시민이 아무런 구별 없이 모두 재판관으로 행동하는 것이 허용된 최초의 법원이었다. 솔론이 창설한 법원이란 아테네의 민회를 말하며, 그 민회가 재판 목적으로 열린 경우 그것을 '헬리아이아'라고 했다. 이처럼 법원에 상소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재판을 하는 최종 권한이 민중에게 있었음을 뜻했다. 그리고 그 상소는 무료로 보장됐다.

'헬리아이아'는 작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의 다카스테스(배심원)에 의해 집행된 공개재판이었다. 공개재판의 형태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그 중 가장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헬리아이아'였다.

 

아테네에서 소송은 공법상의 소송과 사법상의 소송으로 나뉘었다. 공법상 송사는 국가 공동의 이해관계가 문제되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고, 사법상 소송은 소송당사자간의 사적인 이해관계가 문제되는 사건을 다루는 것이다. 재판관, 검찰, 변호사가 따로 있지 않았고 시민이면 누구나 그 모든 역할을 담당하는 아마추어리즘이 철저했다.

배심원의 자격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모두 갖춘 30세 이상인 자로 그 임기는 1년이었으나, 기원전 4세기에 이르면 시민이라면 누구나 희망하기만 하면 종신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 매년 6천 명의 배심원이 추첨에 의해 선발됐고(위협이나 수뢰를 방지하기 위해), 10개의 법원에 각각 5백 명씩 배치됐으며, 나머지 1천 명은 예비였다.

 

재판은 피고나 피고인의 증인 앞에 구두로 소환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현재와 같은 검찰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고소를 할 수 있었다. 원고나 고발자는 공익에 관한 소송일 경우에는 그 고발 이유, 사익에 관한 소송일 경우에는 그 청구 원인을 법적 기초와 함께 서면으로 작성해 5일 이내에 담당 아르콘에게 보내야 했다. 소환된 피고 또는 피고인은 자신의 주장을 제출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법적 쟁점을 담당 아르콘 앞에서 명확하게 밝히는 구두변론이 공판 전의 예심절차로 행해졌다. 여기서 공판 준비로서 아르콘이 소송당사자를 심문하고 증명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도왔다. 소크라테스 재판의 경우에는 바실레우스라는 아르콘이 예심절차를 담당했다.

예비심문 절차가 종료되면 아르콘이 구두변론과 공판의 기일을 지정해 10개의 배심법원 가운데 하나의 법원에 그 사건을 회부하고 공판 심리를 주재했으나, 그 자신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구두변론과 공판을 하는 날에 소송당사자는 증인과 지지자를 데리고 사건을 담당하는 공무원의 법원에 출두한다. 공중이 방청을 의해 둘러싸고 그 중간에 법정이 형성됐다. 법정의 정리가 공개절차의 개시를 고시하면, 법원의 서기가 당사자의 소장 및 반소(反訴)를 낭독했다.

그 후 양 당사자는 높은 대 위에 서서 자기주장을 전개했다. 이때 시간제한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 재판처럼 공법상 소송인 경우에는 사법상 소송의 경우보다 변론시간이 길게 주어졌다.

당사자의 변론이 끝나면 배심원이 사실문제, 법률문제, 형평문제에 관해 투표로 평결을 했다. 평결은 투표의 과반수로 결정되고, 동수로 표가 나뉠 경우에는 피고의 승소 또는 무죄가 됐다. 배상액이나 양형이 법률상 정해지지 않은 사건이면 양 당사자가 주장하는 배상액이나 양형 중 하나를 배심원이 투표로 선택했다.

 

대규모의 배심원단은 개인의 책임감을 떨어뜨리거나, 데마고그(자파의 이익을 위해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가)의 선동에 의해 정치적인 도구로 악용되거나, 법정변론에 의해 정치적 편견이나 감정의 호소에 치우치게 되는 등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배심원은 사건에 대한 주관적인 1회적 결론만을 내렸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지속적인 법적 추론이 발달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법은 '이론을 결여한 법'으로 불렸다. 또한 사법의 작용이 여러 국가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소송비용이 무료인 데 따르는 소송남용이 비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재판은 강력한 범죄자를 교정하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기관으로 기능했다. 배심원은 추첨으로 선발됐기 때문에 소송당한 사람은 사전에 배심원의 구성을 전혀 알 수 없었으며, 배심원 또한 자신이 맡은 사건을 미리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투표의 비밀이 보장됐기 때문에 권력자가 배심원을 협박하거나 수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 사적인 분쟁은 반드시 중재를 거쳐 재판에 회부됐던 점도 민중재판의 발달된 모습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상의 장단점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근본적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정치이론에서는 사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면 적극적인 시민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배심에 의해 실현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배심재판의 결점은 시민의 양식에 의해 보완돼야 하는 것에 불과했다.

 

들은 나를 고발한 자들이므로 나는 소장(訴狀)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악행을 하는 자이며 괴상한 사람이다. 그는 지하의 일이나 천상의 일을 탐구하고 나쁜 일을 좋은 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와 같은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친다.' 이것이 고발의 내용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재판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불경죄와 청년타락죄로 고발당했다. 그러나 당시 고대 그리스는 '죄형법정주의'에 의해 반드시 명확한 법률적 근거에 의해서만 기소나 고발이 가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죄목으로 언급된 혐의들은 그 내용이 분명하지 못하고 애매하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불문법에 의한 지극히 예외적인 재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재판은 문제시 되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명확히 항변하지 않는다.

또한 신을 믿지 않았다는 불경죄는 당시 무신론이 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으므로 고발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발당했고 재판을 받았다. 더군다나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도 아니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다 결국에는 상대방의 무지를 일깨운다는 소위 '산파술',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라고 불리는 이런 대화방식은 많은 적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특히 당대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 소피스테스들에게...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싫다고해도 그를 욕할 수는 있어도 그런 이유로 고소를 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그는 불특정 다수의 배심원들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 몇사람에게 미움을 샀다고 해서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마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민주주의는 중우정치이고, 무지한 대중은 이 위대한 철학자를 이해하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그는 왜 이 말도 안되는 결과를 받아들였을까? 그리고 평생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무지를 일깨웠던 그는 어찌하여 정작 재판에서는 자신을 변론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는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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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팩션이라는 건 아이디어다. 팩션의 승부처는 기막힌 아이디어와 역사와 절묘하게 얽히며 풀어나가는 스토리, 누구나 무릎을 칠 만한 역사적 재해석에 있다 하겠다. 어떤 영화, 어떤 소설, 어떤 드라마는 본래의 장르와 아이디어 등이 맞아 떨어져 하나의 사회현상으로까지 퍼져가기도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필수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야기라는 건 작가의 내공을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필수적 요소이자, 작품의 승패는 그 지점에서 갈려 나갈 수밖에 없다. 

 

  ‘이데아의 동굴’은 무척 흥미 있는 책이었다. 마치 암포라에 새겨진 그림을 연상시키는 표지와 더불어 제목인 ‘이데아의 동굴’부터 강하게 고대그리스의 향기를 내뿜고 있는 이 책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쳤을 때 시작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아카데메이아 학생이었던 한 아름다운 젊은이가 죽었다. 사인은 늑대의 습격.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의심을 품은 철학자와 그에 동감하는 해독자는 직접 사건을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지닌 이 이야기는 기원전 5세기에 써진 「이데아의 동굴」이라는 소설과, 이 소설을 번역하는 번역자의 이야기가 겉을 두르고 있는 액자소설이다. 첫 번째 장을 넘어갈 때까지 중심이야기가 되는 「이데아의 동굴」과 주석처럼 띠를 두르고 있는 번역자의 이야기 둘을 동시에 소화해야 했고, 짧은 장이었음에도 이야기는 다소 복잡했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에이데시스’라고 하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개념을 이해해야 했고.

 
연쇄살인범을 쫓는 추리소설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목시킨 그 발상자체만으로도 ‘살인의 해석’은 여느 독자들의 관심의 대상으로 단번에 치솟을 만했다. 발상은 획기적이었고 소설의 내용은 궁금하기 이를 데가 없다. 와우.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대단하다. 프로이트가 미국 땅을 밟았던 1909년. 당시의 미국을 그대로 재현한 소설은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융과 그 외 실존인물들을 소설에 그대로 등장시켜 시작부터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다빈치코드’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의 팩션 블록버스터 소설. 그 기대는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조금씩 삐걱댄다.

‘이데아의 동굴’과 ‘살인의 해석’은 추리소설의 형식만을 빌렸을 뿐 각각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담고자 했고, 프로이트 학설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데아의 동굴’은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으나, ‘살인의 해석’은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첫 번째 장의 난해함과 낯설음을 가뿐히 넘기고 두 번째 장으로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데아의 동굴’은 점차 독자들에게 한 가지씩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세 번째 장. 네 번째 장. 다섯 번째 장… 장을 넘길수록 이해해야 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은 많아지지만 그만큼 책에 몰입하게 되고 빠져들게 되는 속도도 빨라진다. 마지막 최종 열쇠는 정말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도대체 뭐지? 무엇이 진실일까? 하는 사이에 반전은 거듭되고, 최종 열쇠가 밝혀지는 순간 설마설마 하다 머릿속이 멍- 해지고, 어느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이데아의 동굴’은 영화로 비견하자면 숨겨진 걸작독립영화와 같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구석구석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꼭꼭 채워진 완벽한 영화.

반면 ‘살인의 해석’은 규모는 블록버스터 급이지만, 너무 거대한 나머지 그 모양새조차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끝난 영화 ‘고질라’처럼 한껏 크게 가졌던 기대는 중반부로 갈수록 그 기대치를 점점 낮추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엥? 하다 끝나 버린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실존 인물들의 역할은 실질적으로 사건의 해결에 있어서는 등장하나마나에 머물다 말고, 오히려 추접스런 그들의 사생활만을 밝히다 쏙 이야기의 뒤로 사라진다. 프로이트가 던진 몇몇 조언들을 제외하면 굳이 그네들이 거기에 있지 않아도 사건의 해결이나 진행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의 학설을 근거로 추리소설을 만들고자 했다고 해서 굳이 프로이트가 미국을 방문할 당시를 시점으로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저 프로이트 이후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학설은 그의 저서만으로도 충분하다. 55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에서 프로이트의 미국 방문과 제자 융과의 갈등 등 같이 등장하는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빼더라도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살인 사건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융이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한때 떠오르기는 하지만, ‘살인의 해석’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용의자로서의 가능성을 두는 방식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이데아의 동굴’은 칭찬만 가득 써놓고, ‘살인의 해석’은 부족한 점만 부각시킨 것 같다. ‘이데아의 동굴’은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칭찬만 해도 모자랄 만큼 훌륭한 책임은 틀림없지만 ‘살인의 해석’의 경우 장점이 없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점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결국은 처음에 언급하고 있듯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다. 아이디어로만 본다면 ‘이데아의 동굴’이나 ‘살인의 해석’ 둘 다 끝내주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 그 중에서도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롯한 그의 학설을 함축하면서 동시에 입증하고 있는 ‘이데아의 동굴’은 사건의 진행방식이나 반전, 결말에 이르기까지 그저 완벽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야기가 충실한 것이다. 잘 짜진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지마저 넘기면서도 손에서 쉽게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이성과 본능의 충돌, 논리와 감성의 뒤섞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사고를 해나가게 만드는 지적인 글쓰기는 책읽기를 마친 순간, 더없는 만족감을 준다.

기막힌 발상과 프로이트 등장,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방식인 주변의 어느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혐의두기 방식을 통해 초반에는 뭔가 대단한 이야기가 될 것임을 예감하게 하지만 ‘살인의 해석’은 서서히 틈을 보인다. 아이디어와 작가가 가진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의 세계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에 반해 이야기는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끝으로 향할수록 빈약한 이야기는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결론마저 이르면 쩝 하고 입맛을 다시게 되는 아쉬움이 든다.

흥행으로 보자면 ‘살인의 해석’은 대박을 터트렸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몇 달간을 머물렀고, 여전히 서점에 가면 잘 보이는 위치에 진열되어 있다. ‘이데아의 동굴’은 글쎄.. 몇 만부나 팔렸을까. 그나마 2005년에 출간된 이 책이 아직까지 절판되지 않고 여전히 서점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하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승패를 따진다면 단연 ‘이데아의 동굴’을 꼽는데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겠다. 뭐, 스포츠도 아닌데 이기고 지고를 굳이 따질 것도 없겠지만 그저 좋은 작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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