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인 여러분! 나의 이러한 평판은 내가 어떤 종류의 지헤를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지혜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인간에 의해 확득될 수 있는 지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간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는 한도 내에서만, 나는 내가 현명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민중을 멸시했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귀족이 아닌 중산층 출신이면서 말이다. 민중을 경멸하는 그의 이러한 태도는 뒤에 그가 재판을 받게 되는 데 하나의 이유가 됐던 게 틀림없다.
민중 멸시는 당연히 민주주의 멸시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크레타와 스파르타의 제도를 최상의 정치형태라고 찬양하고, 그 다음이 과두정이며 제일 못한 것이 민주정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크세노폰의 <회상>에서는 아테테인들을 '낙후된 자들'이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 이후 죽음을 피해 다른 도시국가로 망명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훌륭한 법질서를 갖춘 나라라고 칭찬해 마지않던 스파르타나 크레타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철학자를 환영하지 않았음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민주국가 아테네와 대조적이었던 독재국가 스파르타를 이상국가로 동경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다스리는 자의 직분은 해야 할 일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며, 피치자의 할 일은 이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그는 그리스인들이 민주주의의 조건으로 요구한 '피치자의 동의'를 외면하고 시민들에게 복종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또한 인간사회를 시민의 자치제가 아니라 목자나 왕을 필요로 하는 무리로 보았다. 반면 아테네인들은 인간이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갖고 있으며 폴리스에서 자치를 할 수 있는 정치적 시민이라고 믿었다.
나는 믿을 만한 증인의 말을 여러분에게 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 증인은 델포이의 신입니다. 이 신은 만일 나에게 지헤가 있다면 나의 지혜에 대해서, 그리고 어떠한 종류의 지혜인가 하는 데 대해서 말해 줄 것입니다.....그는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신탁을 구했던 것입니다. 델포이의 무녀는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그가 가장 즐겨 사용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일 것이다.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뜻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누구나 혼을 가지며 그 혼이 각자에게 가장 귀한 것이니 저마다 자신의 혼이 훌륭하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혼'은 '정신'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따라서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훌륭한 정신을 갖도록 하라', 즉 '덕을 갖도록 하라'는 말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덕을 지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고대 그리스에서 덕이란 말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덕이란 말과 다를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덕이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있는 것이자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아테네의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나 당연하다고 여긴 생각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반대로 생각했다. 즉 참된 지식은 절대적인 정의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 지식은 소수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테네인들은 시민은 철학의 대가일 필요가 없으며 단지 이성을 가진 상식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덕과 지식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소피스테스는 스스로를 지식과 덕의 교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덕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없으므로 소피스테스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비난으로 인해 소피스테스는 두고두고 역사적으로 비난을 받게 됐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지식과 덕은 가르쳐 습득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의 반민주적 사고 때문이다. 만약 덕과 지식이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아는 자'가 통치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과 모순된다.
둘째, 절대적 확실성의 부정이라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셋째, 자신의 제자 중에 반민주적인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테스들을 비난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고, 심지어 노예제도까지 부정했기 때문이다. 반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빈민을 멸시했고, 노예제도를 긍정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사람의 적의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만일 내가 파멸한다면 이 때문에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멜레토스와 아니토스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은 이미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할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될 염려는 없습니다.
반민주주의자 소크라테스는 민주국가 아테네에서 평생 자유를 누렸다. 그곳에서 일흔이 될 때까지 반민주주의를 마음껏 설교하며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시민이면 누구나 그를 고발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앞서 설명했듯이 민주주의는 세 번 전복된 적이 있다. 이 세번의 반민주 책동에 소크라테스의 젊은 제자들이 주모자로 가담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선동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기록된 내용에는 그가 30인 정권의 폭정에 반대했음을 보여준다. 30인정권의 독재자들은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5명을 집행부로 불러들여 살라미스 사람 레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정권은 독재를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후 살해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런 폭정을 부당하다고 여겨 명령에 불복종하고 다른 4명이 레온을 체포하러 살라미스로 갈 때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살해를 면한 이유는 30인 정권의 수령인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옛제자였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말하자면 권력의 비호를 받은 것이다. 30인 정권은 크리티아스가 전사함에 따라 8개월만에 끝났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데 앞장섰던 아니토스는 30인 정권의 독재자들을 타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런 망명자들의 모임에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토스는 30인 정권에 의해 망명을 했다가 고된 내전을 거쳐 민주정을 회복시킨 자였다. 그런 그에게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의 적으로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민주정이 회복되기 전에 이미 내전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대사면 협약이 체결됐기 때문에 민주정 측은 크리티아스와 관련해 소크라테스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반민주적 과두파나 친스파르타주의자로 처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죄목이 애매한 '불경죄'였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통상의 불경죄로 처벌하기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귀신과 소통한다는 이유와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가 더했졌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민주정이 회복된 뒤 2년 뒤, 그러니까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 30인 정권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져 공무원 자격심사에 의한 부적격 공직자의 추방이 강조된 시기에 열렸다는 점은 그의 실제 혐의가 30인 정권과의 관련성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아테네 인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이 여러분에게 보내준 선물인 나를 처벌함으로써 여러분이 신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여러분을 위해서 변명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재판에 대해 살펴보자.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일흔의 나이에 재판에 회부됐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발자는 아니토스, 멜레토스, 리콘 세 사람이다. 아니토스는 장인과 정치인을, 멜레토스는 시인을, 리콘을 변론가를 각각 대표했다. 사건은 10개의 배심법원 중 하나에 배정됐고, 배심원은 선출된 501명이었다.
고발자의 목소리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에 의해 후세에 각각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신봉하지 않고,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를 지었다. 또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도 지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영적인 것들을 믿음으로써 죄를 범했다.
이는 물론 실제 고발장의 내용이 아니라 후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쓴 저술을 통해 전해진 혐의일 뿐이다. 여기서 '국가가 인정하는 신' 또는 '나라가 믿는 신'이란 폴리스의 신을 뜻하는 것이고,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란 외국의 다른 신격을 수입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격을 믿었다는 뜻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가 무신론이라고 했으나, 무신론은 실제 고발 이유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실제 이유는 그가 폴리스의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신을 믿는다'는 말은 폴리스의 '노모스(nomos)를 따르고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모스란 관습과 법률을 뜻한다. 노모스를 따르고 존중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의 상식이었고, 소크라테스도 이 점을 인정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이유는 그가 아테네의 노모스를 위반한 데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반한 것인지는 명시돼 있지 않다. (저자는 플라톤도 크세노폰도 그것을 명시하지 않은 이유로 만약 그것을 명시할 경우 소크라테스의 죄상이 드러나게 되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들의 변호가 약화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여러분은 내가 신 또는 정령의 신탁이나 신호를 듣는다고 여러 차례 여기저기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멜레토스가 소장에서 조소한 신도 바로 이 신입니다. 이 신호를 일종의 목소리로서 내가 어릴 때에 처음으로 들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격을 수입한 죄'는 어떠한가? 이 점에 대해 크세노폰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또 점을 친 것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신령이 나에게 신탁을 내린다"고 말한 사실은 널리 훤전되고 있다. 생각하건데 새로운 신격을 수입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여기에 원인이 있다.
이 현상에 대해 플라톤은 소리 형태의 신적이며 영적인 무언가가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소크라테스 특유의 심리현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크세노폰은 이 현상을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점을 본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그건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신령의 신탁에 따라서 여러 제자들에게, 혹은 그렇게 하라든가, 또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충고에 따른 자는 덕을 보고, 따르지 않았던 자는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그의 동료들을 일종의 신비적인 종교집단으로 보았을 수도 있었겠단 얘기다.
그러나 이런 '불경죄'는 명목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고발한 자가 장작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정식 제자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 나의 말을 들으려고 찾아온다면, 청년이든 노인이든 간에 이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나는 보수를 받아야만 대화한 것이 아니어서, 부자든 빈민이든 간에 누구든지 나에게 묻고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악한 사람이 되든 선한 사람이 되든 그 결과는 나의 탓이 아님은 당연한 일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혐의는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를 둘러싼 변론에 대해 크세노폰과 플라톤의 서술은 다르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타락시킨 젊은이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쳤다고 기록해 놓았다. 멜레토스가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부친보다 자신을 따르라고 가르쳤다고 말하자, 소크라테스는 교육적인 면에서 그랬다고 답하고, 자신은 교육에서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는데 그것이 사형당할 이유냐고 반문한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에 대해 크세노폰의 <회상>에는 네 가지를 지적한다. 이는 소크라테스 처형 이후 반대파가 내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첫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관리를 추첨으로 정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청년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기존의 국법을 멸시하는 압제자가 되게 했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설득과 압제의 차이를 밝히면서 소크라테스는 설득은 했지만 압제를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반론하고 있으나, 소크라테스가 평등주의적 추첨제와 민주주의를 멸시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변론하지 않는다.
두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과두정치 시대의 탐욕, 압제, 잔인의 거두인 크리티아스와 평민정치 시대의 황음, 오만, 압제의 화신인 알키비아데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그들이 소크라테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런 압제자가 되기 전으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던 시절의 그들은 사려깊은 사람들이었고 소크라테스가 30인 정권 시절에는 폭정을 엄중히 비판했으며 이 때문에 사이가 헙악해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훌륭한 대화상대로 등장해 그 어느 대화에서도 그를 비난하지 않으며, 알키비아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동성연애 분위기에서 인기있었던 자로 소크라테스의 연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세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에게 부친이나 근친자들을 모독하게 했고, 친구들에게 친절은 무용하다고 가르쳤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이치를 모르는 자는 존경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네 번째 지적은 소크라테스가 시를 곡해하여 사람들에게 악행을 행하게 하고 독재자로 만들었다는 데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변론에서 자주 인용한 호메로스의 시에 독재자를 옹호하는 부분이 여러 곳 나오는 것으로 보아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해서 문제가 됐을 수도 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불경죄보다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에 대한 변론부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론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청년들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하는 멜레토스에게 "누가 그들을 더 훌륭하게 만드나요?"라고 물어 그를 궁지에 빠트렸다. 이에 대해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모든 아테네인들이 청년들을 더욱 선한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신만이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청년들을 선하게 했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청년들에게 복된 일이지 해악이 되는 일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청년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후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청년들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악한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종국에는 자신도 해를 입게 될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고의로 청년들에게 해를 끼칠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변론에서 고발자인 멜레토스가 고발 원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능하여 신용할 수 없음을 네 차례에 걸쳐 명백하고 밝히고 있다. 즉, 고발자와 고발의 신용과 신빙성을 부정함으로써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를 부정한 것이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상대로 직접 반론을 펴자 그를 무신론자로 공격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불경죄는 죄목이 될 수 있는지부터가 의문이며 멜레토스는 고발장의 내용과 모순되는 답변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기소할 만한 죄목을 찾기 어려워지자 엉터리 불경죄를 뒤집에씌운 것임을 폭로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이어 그는 자신이 세 차례 전투에 참여했음을 말하며, 죽음을 두려워해 신이 부여한 자신의 철학활동을 포기하는 것은 무지라고 말한다. 나아가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철학활동을 포기하겠다는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자랑스럽게 자기를 아테네의 양심에 비유하며 자기를 죽이는 것은 아테네에 엄청난 손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말한다. 즉, 자신을 비판적 언론인이라고 자부한 것이다.
여러분한테든 또는 어떤 대중한테든 진정으로 맞서서 많은 올바르지 못한 일들이나 법에 어긋나는 일들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으로 들고서도 무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올바른 것을 위해 정말로 싸우려는 사람은, 그러고도 그가 잠깐이나마 살아남으려면, 그는 반드시 사인으로 지내되 공인으로 지내질 않아야 되니까요.
즉,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기 위해 공적인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비판적 언론인인 자신을 죽이는 일이 아테네에 엄청난 손실을 입히는 행위라는 말과 모순된다. 게다가 올바르지 못한 일들과 법에 어긋나는 일들을 일삼는 아테네와 아테네인들에게 맞섰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말은 아테네와 아테네인들에게 엄청난 모독이다.
나아가 이 말은 그리스 민주주의 기본정신에 대한 도전이자 모독이기도 하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그 누구에게도 올바른 것에 어긋나는 것은 결코 동의해 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또 여기서 말하는 '누구'에는 고발자들이 말하는 자신의 나쁜 제자들도 포함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지만 저는 누구의 선생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수많은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에게 진실을 가르쳐왔다고 자부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선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 아테네 인 여러분, 유죄의 투표에 대해 내가 비탄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나는 이러한 결과는 예상했고, 다만 찬반 투표 수가 거의 같다는 데에 놀랐을 뿐입니다. 나는 나에게 불리한 투표가 훨씬 많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차 투표에서 소크라테스는 유죄 281표(또는 280표), 무죄 220표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만약 유죄 표 가운데 30표만 무죄 표로 옮아갔더라면, 가부동수일 때는 피고에게 유리하게 판결한다는 원칙에 의해 소크라테스는 무죄가 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놀라워했다.
양형의 순간에 고발자는 사형을 신청했다. 소크라테스는 형량에 대해 변론할 기회가 주어지자 자신은 형벌 대신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또 다시 배심원들을 자극했다. 그가 말한 상이란 '영빈관에서의 식사 대접'이었는데 영빈관은 당시 아테네의 민회 건물로 관례에 따라 가장 영예로운 민주시민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어쨋든 이 행동은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배심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최종 판결에서 사형을 확정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아테네인 여러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와 같은 나이에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돌아다니며 항상 추방지를 변경하고, 또 항상 쫓겨나야 하는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내가 어디를 가든 여기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청년들이 나의 곁으로 몰려오리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청년들을 쫓아낸다면 청년들의 요구로 연장자들은 나를 쫓아낼 것입니다.
배심원들이 자신에게 추방형을 내리려 한다고 짐작한 소크라테스는 다른 나라 사람들 역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결국 방랑하게 될 것이므로 자신에게 추방형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친구들의 권유를 핑계삼아 벌금형을 제안했다.처음에는 은화 1므나를 제시했으나 뒤에 플라톤 등의 제의에 따라 벌금액을 30므나로 높여 제안했다. 이는 무척 거액으로 처음부터 30므나를 제안했으면 배심원들이 어느 정도 납득했을지 모르나 나중에 말을 바꾸었고, 배심원들은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을 비웃는 행동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만일 재판이 하루 만에 끝나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졌더라면 배심원들이 그의 무죄를 확신했으리라고 말함으로써 재판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2차 투표의 결과는 사형이었다. 표결은 360대 140으로 1차 투표 때보타 소크라테스에게 더욱 가혹했다. 결국 오만하고 뻔뻔하게 이를 데 없는 발언으로 배심원들의 분노를 삼으로써 사형을 자초한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각기 자기의 길을 갑시다. 나는 죽기 위해서,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어느 쪽이 좋은가 하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 뿐입니다.
<크리톤>에서 감옥에 갇여 있는 동안 소크라테스는 많은 이들에게 탈옥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탈옥 권유를 뿌리치며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고, '훌륭하게'는 '아름답게' 및 '올바르게'와 동일"하다는 논증을 편다. 그리고 탈옥은 훌륭하게 사는 것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탈옥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크리톤과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세 가지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는데 요약하면 정의의 3원칙은 올바른 일을 해야 하고,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며, 올바른 합의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원칙들을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켜 탈옥 거부의사를 더욱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올바른 일이 아니기에 탈옥을 할 수 없고, 잘못된 판결로 사형에 처해졌다 해도 그것에 불복해 탈옥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에 잘못된 행위로 대응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으며, 합의된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탈옥하는 것은 합의를 기만하는 행동이므로 역시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불의에 대한 저항도 옳지 못한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은 국가와 동등할 수 없으며 어떤 안에 대해 국가를 납득시킬 수 없다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하지도 않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소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말은 한동안 우리의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저자는 과거 우리의 군사정권이 한 철학자의 힘을 빌어 악법을 합법화하는 길을 터주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빚을 갚아주겠나?"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정리하면 이러하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민주주의를 비판한 것은 민주주의가 가진 여러 한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노예제를 인정했고 민중을 멸시한 반민주주의자였으며 전제주의자였고 반인권주의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아테네인들에게 유죄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아테네의 민주적 전통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들어 자신을 변호했다면 그는 당연히 무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경멸한 아테네 민주주의에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죄여야했다. 민주주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용납되어야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아테네를 지지하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주의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보호돼야 했다. 그래서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민주주의 역사의 커다란 오점이라고 지적한다.
......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의 저자는 보통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분리하는 것과 달리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테스의 이야기를 그대로 소크라테스의 생각으로 보고 논의했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민주주의'에 관한 책이다. 지난 수천년동안 현명한 철학자를 죽인 중우정치라고 매도되어 온, 소크라테스의 프로페셔널리즘에 의해 부정되어 온 아마추어리즘인 '민주주의'에 대한 명예회복 선언인 셈이다.
이 책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꽤나 많은 자료들을 실례로 들고 있다.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써져 있어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어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2005년 12월 즈음에 작성했던 글..
네이버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이곳에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