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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박준 글.사진 / 넥서스BOOKS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은 환상이다. 여행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실상 짐을 꾸려 배낭을 메고 떠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에 여행은 환상이 된다. 여행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몽롱한 듯 아련한 눈빛을 띠기 마련이다. 그럴 땐 마치 어릴 적 동화책 속의 용감한 기사처럼 지금 당장 공주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말에 오르기도 전에 온갖 두려움이 엄습하며 주저하고 체념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누구도 감히 실현해 내지 못하는 것. 그래서 용기 없는 우리들은 하루 이틀, 혹은 꽉 짜진 일정에 맞춰 바삐 움직이는 패키지 관광이라도 나서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지친 일상을 탈출하는 거라면 관광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여행을 한다는 건, 낯선 땅에 홀로 선 나와 마주보는 것. [온더로드]에는 환상을 현실로 만든 사람들이 있다.
태국 방콕의 ‘카오산 로드’. 전 세계 여행자들의 첫 시작이자 마지막이라는 여행자 거리 카오산 로드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매일같이 모여들고 또 어디론가 떠난다. 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커다란 배낭을 메고, 레게머리를 한 채 지미 헨드릭스의 얼굴이 프린트된 셔츠를 입고서 카오산 로드를 오가는 사람들. 카오산에서 여행은 일상이 된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감다가 문득, 출근을 하기 위해 매일매일 머리를 감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여행을 계획했다는 임정희님은 남편과 함께 손을 잡고 시작한 세계여행이 벌써 1년 남짓이나 됐다. 어느 날 누워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고 있다가 짐을 싸야겠다는 생각에 인도로 떠난 게 여행의 시작이 된 윤지현님은 무려 2년 동안 4개국만을 여행했다. 여행을 했다기 보다는 각 나라로 이사를 다닌 격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시작한 여행. 여행은 그들에게 일상이 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된다.
교환학생으로 태국에 와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는 루시는 17살의 고등학생이다. 아직은 어리고 자신밖에 모를 것 같은 수다쟁이 미국인 소녀는, 미국 밖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하며, 문화적인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묻는 말마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대답하는 시니컬 커플 코베와 키티는 부유한 유럽의 팔자 좋은 여행자들이라 생각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캄보디아의 가난한 국민들을 보며 아파하고 힘들어한다. 또 라오스를 여행하면서는 어쩌면 서구보다 더 풍부한 문화를 가졌을 그들이 미국의 간섭이 없었다면 더 행복했을 지도 모른다고도 여긴다. 여행은 나를 돌아보게 됨과 동시에 너를 이해하게 된다.
갖고 싶었던 60만 원 짜리 시계를 사는 대신 그 돈으로 여행을 시작한 문윤경님은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여행의 긴장감을 즐긴다. 너무너무 재밌단다. 행복해질 수 있는 걸 찾고 싶어 훌쩍 떠나기로 결심한 안야씨는 언제가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그런 질문부터가 행복하다며 무척 즐거워한다. 그 외에도 카오산에는 부모 등에 떠밀려온 고등학생부터 마약에 취해 살다 탈출구로 여행을 택한 독일 청년, 가게를 정리하고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결혼 30주년을 맞이했다는 중년의 부부가 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인도에서 오로빌이라는 공동체에서 살았다던 17살 소녀도, 수행을 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스님도 카오산에 들린다. 여행은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다. 시작도 과정도 끝도. 물론 무엇을 느끼든, 해답을 찾든 못 찾든, 여행을 통해 얻는 모든 건 각자의 몫이다.
여행은 현실이다. 환상이었던 여행은 카오산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환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언어도 그 무엇도 떠나는 데 필요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그저 한걸음 내딛기만 하면 된다고. 하나같이 혼자 여행하는 건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다며 우리를 부추긴다. 나도 당장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여행이 더욱이 현실로 느껴지는 건, 그들은 행복해하면서도 불안해하고 걱정을 한다. 여행을 마친 후 미래에 대한 불안. 당장 내일을 알 수 없는 현재를 즐기면서도 홀로 사색에 잠길 때면 나름 자신에 대해 불만도 가진다. 그러면서도 여행을 시작한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후회하지 않는다. 「떠나는 건 일상을 버리는 게 아니라 다시 돌아와 더 잘 살기 위해서니까.」 여행은 참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온더로드]에서 여행은 현실이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꿈이다. 그리고 선택이다. 꿈으로 남으며 환상을 품고만 있을 것인가. 현실로 이룰 것인가.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