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름마치 1 - 진옥섭의 예인명인
진옥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할매 한 분이 손자 소풍을 따라갔다 … 그날따라 맥주가 달아 몇 잔 연거푸 들어갔고 하필 학부모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젊은 축들이 너나없이 나서서 “할머니도 한 곡 하세요.” 하며 톡톡 쳤다 … 그렇게 톡톡 건드리는 통에, 잔의 바닥에 거품이 되려 솟아오르는 기포처럼, 혈구(血球)의 앙금 밑에 쉬던 흥이 뽀글거리며 올라섰던가 보더라. 슬슬 ‘배운 가락’이 스며 나오기 시작해 그만 마이크를 잡고 말았다. 모두들 소란을 멈췄다 … “기생이다!” … 손자는 울면서 걸었고, 며느리는 여기 와서도 이럴 거냐며 타박을 했고, 아들은 호적에서 파자 했다. “호적이 무슨 우물이냐”던 할매는 그 밤 한 잔 가득 음독을 하였다.」

 

노름마치. 그것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가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이다. 그가 나와 한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하는,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잘 닦여진 포장도로가 아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눈물의 길이고, 울퉁불퉁하기는 딱 자갈밭인데다, 먼지 폴폴 날리는 흙길 중의 흙길이다. 그래도 그 길을 가겠다고 터벅터벅 걷다 보면 때로는 신명도 나고, 웃음도 난다. 눈물과 웃음 사이에서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다 보니 어느새 세월은 저만치 흘러 얼굴엔 주름만 늘었고, 한판 질펀하게 놀던 동무들은 떠나고 없다. 누구 말마따나 이젠 저승이 볼만한 판인 것이다.

유앵이 할매. 통영바닥의 모든 예술을 한 몸에 휘감았던 최고의 여류는, 기생이란 소리를 피해 피난한 동해바다 어느 소도시에서, 어느 초등학교 소풍날, 한 잔 술로 이승의 소풍을 마감했다. 예기(藝妓). 회초리 맞아가며 배우고 익힌 소리와 춤은 식구들을 먹여 살렸지만, 되려 식구들은 손가락질 받는 당신이 싫다 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나는 모르오. 하며 숨어 지냈고, 가슴에 깊이 묻어두었던 한이 되살아 날 적 음독으로 세상과 이별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생판 모르는 이가 와서 예술이네 뭐네 하며 한 판 벌려준다 해도 왜 과거를 들쑤시느냐며 화통을 내놓는 것이다.

[노름마치]의 저자 진옥섭은 이런 분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무대에 올리는 연출자이다. 짜하던 명성은 옛이야기이고, 오늘은 잊혀진 사람이 되어, 세상에 대한 관심마저 끊고 말문을 걸어 잠근 그들의 부서질 듯한 손을 잡고, 약속을 받아낸다. 무대에 오르겠다 하긴 했으나 건강이 부실하고,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분들이니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또 오랜 상처가 돋아 어느 순간 마음 돌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약조를 받아내고 무대에 세우는 건 일단 오르기만 하면 여태 없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이름 속에서 순간순간 새것이 돋아난다. 이런 순간을 맛보면 중독이 되고 만다. 결국 또 들여다보고픈 것이다.

예기(藝妓). 남무(男舞). 득음(得音). 유량(流浪). 강신(降神). 풍류(風流). 얼핏 보면 예술인가 싶기도 하고, TV에서 보던 고리타분한 무엇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 자세히 들여다보자니 늘 보고 듣던 것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렇게 어렵고 멀기만 하다. 예기와 남무, 득음의 길을 걸으신 분들은 기녀, 광대, 무당 등으로 순탄치 못한 삶을 사신 분들이시다. “모릉께, 하도 몰라중께, 그 천대에 다 죽고 다 작파혀서, 볼라면 지금 급허지요.” 씻김굿을 약속했으나 날짜를 얼마 남기지 않고 자신이 씻김굿의 망자가 돼 버린 이의 한탄은 그분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와 마음속에 품은 경계를 짐작케 한다. 또 이제는 지나간 시간과 남겨진 시간이 아쉬워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리 어렵게 어렵게 그분들을 찾아내고 약조를 받아도 아무도 보러오는 이가 없다면 그건 말짱 도루묵이다. 하여 알려야 하고 그래서 진옥섭은 신문에 올릴 보도자료를 밤새 고쳐 쓰고 만들었다. 이 책은 그 보도자료를 수선한 것이다. 손가락질에, 가시밭길에 숨어 버린 분들인지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옛 기억을 물어물어 이력을 작성해 봐도 해외 어디에서 상 받았노라 하는 휘황찬란한 이들에게 가려지기 마련이다. 신문 한켠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살아온 그대로의 모습을 전달해 예술의 전모를 깨닫게 하는 방법 밖에 없으니, 이 책에 적힌 글들은 바로 그분들의 상처를 긁어내 얻은 파란만장한 삶을 보도자료니, 팜플렛이니 하는 그 조그만 됫박에 담지 못한 면모를 밝혀 새로 엮은 것이다.

“길이 놓여 있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먼저 그 길을 간 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 길은 애초에 가무악의 집안에 태어났거나, 쓰다달다 개념이 없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조련되어버린 것이다. 그 분들의 남다른 예술세계는 가무악일체(歌舞樂一體), 즉 소리와 춤, 악기 세 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것인데, 한 분야에 매진하더라도 다른 두 분야가 완벽하게 몸속에 차 있어야 예술이 나온다는 관념이다. 노름마치. 저자 진옥섭은 그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을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마중 가는 길이라 했다. 한 판 나서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져 판을 맺어야만 한다는 명인 중의 명인이었으나, 이젠 홀로 남아 노을처럼 삶의 마지막 기운을 내뿜는 이 시대 마지막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연을 고이고이 엮여 내, 읽고나면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해지고 그 기분이 쉬이 물러서지 않으니 이 책 역시 노름마치다. 생의 마지막 붉은 기운이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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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얼음무지개 2007-12-11 22: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얼떨떨하네요. 이렇게까지는 기대하지도 못했는데..

멜기세덱 2007-12-12 0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저도 막 얼떨떨해서...지금...이래요...ㅋㅋ

얼음무지개 2007-12-12 09:1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진짠가 싶기도 하고..ㅎㅎ 멜기세덱님 진짜 축하드려요..1등~~^^

다락방 2007-12-12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얼음무지개 2007-12-12 23: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축하를 받다니 참 신기해요.

환상의시기 2007-12-12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 ^

얼음무지개 2007-12-12 23:2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글에 비해 과분한 평가를 받았죠..^^;

순오기 2007-12-13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꼭 읽어봐야할 것 같은 맘이 팍팍~ 솟아나는 리뷰네요.
축하합니다~~~~

얼음무지개 2007-12-13 21:34   좋아요 0 | URL
책은 정말 좋아요..^^ 감사드리구요..ㅎㅎ

프레이야 2007-12-1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 축하드립니다. 반가워요. 즐찾하고 갑니다.^^

얼음무지개 2007-12-13 21:34   좋아요 0 | URL
제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라서... 글 하나 올라오는데 시간이 오래오래 걸리거에요..^^; 감사합니다.

마노아 2007-12-14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음무지개님 축하해요~ 닉네임도 너무 예쁘십니다. ^^

얼음무지개 2007-12-14 11:47   좋아요 0 | URL
닉네임은 노래제목에서 가져왔답니다. 시인과촌장의 노래이지요. 저도 단어가 예뻐서 쓰고 있답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miony 2007-12-14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축하드려요!^^

얼음무지개 2007-12-15 02: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참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겨서 참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에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