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 10여년 전쯤이었을 거다. 신문의 사회면 한 귀퉁이에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조그맣게 난 그 기사를 본 것이. 틀림없다. 90년대 중반이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아닌. 한 대학생이 소설 '태백산맥'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적용됐다는 기사를 보고 나는 잠시 멍-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교양과목 수강 중 교수님과 함께 태백산맥, 아리랑을 읽고 토론수업을 했었다. 영화로도 만들어 지고, 버젓이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한 명의 젊은이가 감옥에 갈 처지라니. 내가 꿈을 꾸었던 걸까? 싶지만 어렴풋함 속에 틀림없이 자리하고 있는 기억이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현재의 우리보다 딱 한 세대 앞선 시기는 온갖 금기의 시대였다. 지금은 TV에서 웃기는 소재로 종종 쓰이기도 하지만, 그땐 작은 속삭임조차 조심스러웠던 하지 말라는 것, 듣지 말라는 것 투성이인 금지의 시대였다. 자연스럽게 터부시 되는 것들이 아닌 인위적인 금기는 인간을 메말라가게 함과 동시에 작은 것에도 탐닉하고 목마르게 한다. 우물이 바로 앞에 있을 때는 한 바가지는 마셔야 겨우 가시던 목마름은, 사막 한 가운데서는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오아시스만으로도 인간은 살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주인공과 주인공의 친구 '뤄'는 부모님이 의사인데다 중학교를 마친 학력을 이유로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지목 돼 재교육을 받으러 산골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인분을 나르고, 광산에서 벌거벗은 채 일하는 고된 나날들을 버텨낸다. 갑자기 뚝 떨어진 모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건 조금 큰 도시로 나가 영화를 보고 시골 사람들에게 구전으로 전해 줄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 재봉사의 아름다운 딸, 비록 천 명 중 세 명의 가능성일지언정 말 잘 듣고 있으면 언젠가는 나갈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 그리고 발자크의 소설이었다.

암울한 시기, 가슴이 답답할 만치 불행한 시절을 다루고 있음에도 소설의 분위기는 밝다. "간단히 말해서 뤄와 나의 삶은 끝장난 셈이었다."는 문장에서조차 절박함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끝까지 익살스럽다. 이에 대해 작가는 몹시 서글프고, 힘든 시기였지만 가혹한 사회체제에도 불구하고 삶의 기쁨을 느긋하게 즐길 줄 아는 품성만큼 뿌리 뽑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마오 주석에 관한 책이거나 순수학술서가 아니면 모두 불에 태워졌던 때, 부모가 모두 소설가에 시인이어서 옆 마을에 재교육을 받으러 끌여온 '안경잡이'에 의해 얻게 된 발자크의 소설 한 권으로 둘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책을 읽은 후에는 그 전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고, 경험하지 못한 감정과 욕망이 꿈틀거린다. 인간의 본성과 감성, 사랑을 다룬 발자크를 비롯한 위고, 스탕달, 뒤마, 롤랑, 루소 등등의 소설이 전하는 것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뤄는 여자 친구인 재봉틀 소녀에게 발자크와 서양문학의 소설을 읊어주고, 소녀는 감탄과 함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이 드러나며 서서히 사고를 깨치게 된다.

어쩌면 이런 책을 금서로 정한 마오 주석의 판단은 옳았는지도 모르겠다. 새롭게 접한 경이로움, 열린 감정과 사고는, 곱게 기다랗게 딴 머리를 단발로 자르게 하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바느질만을 하던 순박한 시골 처녀를 도시로 떠나게 한다.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아버지든, 남자 친구든 모든 걸 버리고. 결국 마오가 두려워한 것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전 세대가 겪었던 금기, 멀리는 진시황제의 분서갱유, 중세의 금서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고 악착같이 막으려 했던 것들. 책은 위험하다. 책을 읽는 사람은 더 위험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자극하는 언어와 내가 인간임을 알게 하는 책은 독재를 휘두르는 통치자일수록 위험을 넘어 위협으로 다가온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둑질을 해서까지 책을 얻으려 했던 뤄 역시 책을 불태우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멀리 도시로 가 버린 뒤다.

"가버렸구나"
"응, 대도시로 가겠대. 그 애가 발자크 얘기를 했어."
"뭐라고 했는데?"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치코 2008-02-1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놀란 책이었는데 읽고나니 리뷰를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느낀것도 많고 읽는 내내 유쾌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는것을 못하니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리뷰 너무 잘읽었고 제마음또한 이렇다는 것..^^

얼음무지개 2008-02-18 22:30   좋아요 0 | URL
저도 좋은 책일 것 같아서 사기는 했는데 사실 재미는 기대하지 않았었답니다. 그런데 좋은 책임과 동시에 아주 재밌기도 했지요.^^ 저는 리뷰는 쓰고 싶은데 잘 안써질 땐 잠시 다른 책 읽으면서 뭘 느꼈는지 생각해 보거나..다른 분들의 리뷰를 본답니다. 꼭 리뷰를 쓰려고 하는 책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잘 쓴 리뷰를 보다보면 아..맞아 나도 이렇게 느끼고.나도 이런 생각했었어..이런 표현도 좋구나..등등 이런저런 생각이 들죠. 그럼 그 느낌으로 리뷰를 씁니다. 잘 쓰지는 못해도 좋은 책은 꼭 좋은 글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어느 리뷰든 좋은 것 같아요..^^ 물론 잘 쓰시는 분들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