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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른을 완벽히 넘어버린 나이라서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나라는 사람이 상당히 무감각해졌다는 기분이 들곤 한다. 웬만한 것에는 감동도, 찡함도, 가슴 벅참도 느끼지 못하고, 대신 실망하고, 그럴 줄 알았지 내지는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하는 시니컬한 문장 밖에 내뱉지 못하는 나를 볼 때면 참 나도 이렇게 메마른 사람이 되어가는 건가 하는 썩 기분 좋지 않은 한숨이 종종 나오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엄청나게 팔렸다고 하는 이 책 '구해줘'를 읽을 때도 내내 그랬다. '이것 참 뭐가 이래''사랑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주인공은 어디로 간 거야?''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지?' 등등을 중얼거렸을 뿐 좋은 감정으로 글자를 읽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나름 장점이 아주 없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우가 되기 위해 3년 전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왔던 줄리에트는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보다 나아진 거 하나 없이, 오히려 꿈조차 의미 없어진 현실 앞에서 그 꿈을 접고 프랑스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 떠나기 이틀 전 룸메이트 콜린이 남자친구와 여행을 떠난 사이 충동적으로 친구의 비싼 옷을 입어본 줄리에트는 그대로 거리로 향하고, 타임스퀘어에서 우연히 자동차 사고로 의사 샘을 만난다.
할렘가에서 살다 그곳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의사가 된 샘은 자살로 아내를 잃은 후 아무런 삶의 의욕이 없다. 폭설이 내린 뉴욕의 거리는 번잡했고, 잠시 생각에 잠긴 순간 자신의 차 앞에 있던 젊은 여자를 발견하고 핸들을 돌리지만 가벼운 사고가 나고, 그 일로 인해 줄리에트를 만나게 된다. 물론 그 둘은 그 날 밤 사랑에 빠진다.
어떤 식이었든 삶을 지속할 이유를 잃었던 두 남녀는 사랑에 빠졌고, 순간적으로 빠져든 감정에 확신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동안 줄리에트는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러브스토리였다. 결국 둘은 서로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라는 결말에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는.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는 예기치 않은 전환을 한다. 비행기 추락사고가 난 것. 샘이 줄리에트를 붙잡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또 다시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을 자책하는 사이, 줄리에트는 비행기가 이륙하기 몇분 전 난동을 부려 비행기에서 내렸다는 이유로 경찰에 잡혀 추락사고에 관한 심문을 받는다. 더군다나 갑자기 샘 앞에 나타난 그레이스라는 여인은 샘에게 줄리에트는 살아있으나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한다. 그냥 넘길 수 없었던 샘은 그레이스라는 여자에 대해 알아보고 그녀는 10년 전 죽은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점차 알 수 없어짐과 동시에 이 소설의 정체성에도 의문이 생긴다.
소설 속에서 '구해줘'라는 간절한 단어는 의외의 인물에게서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등장인물들은 다들 구해달라는 외침을 가슴에 품고 있을 만큼 커다른 상처를 안고 있다. 줄리에트는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고 초라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샘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 의사였으나 정작 부인은 임신을 한 상황에서도 너무 많은 상처로 인해 자살을 했고 샘은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레이스는 갑작스런 사고로 죽었고, 자신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었는지 의문을 갖은 채 부여받은 임무대로 줄리에트의 목숨을 가지러 지상에 왔다. 그레이스의 오랜 동료인 루텔리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레이스를 떠나보냈다는 슬픔에 알콜중독자가 되어 버렸고, 그레이스의 딸 조디는 엄마가 죽은 후 마약에 찌들어 살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을 겪으며 상처를 치유하고, 사랑을 확인한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주인공들의 과거와 맞물려 진행되는 사건들은 지나친 우연의 반복과 빤히 들여다보이는 설정으로 강한 감정의 파편들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예정된 수순을 밟아간다. 쉬운 대중 소설로서 별다른 걸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영화로 치자면 극장가서 보기는 조금 돈 아깝지만 내심 궁금하기는 해서 비디오 기다려서 봐야지 하고 마음 먹게 되는 정도의, 큰 매력까지는 가지지 못한 적당한 재미의 킬링타임용 소설쯤으로 보면 되겠다.
'진정 사랑한다면 당신 앞을 막아설 운명은 없습니다' 소설의 카피는 그렇지만 소설은 그와 반대로 운명이 있다고 말한다. 샘과 줄리에트의 만남은 단 1초의 어긋남이라도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운명이었고, 그레이스가 하필 줄리에트의 목숨을 가져가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 또한 운명이었다. 얽히고설킨 운명과 결국은 다 풀어내야 할 과거의 상처들. 그리고 용서. 좀 더 멋진 이야기가 됐을 뻔 했는데 작가의 내공이 아직은 부족한 듯. 좋은 작가. 좋은 작품이라고는 못하겠다. 그다지 두드러진 개성이 돋보이지도 않고. 술술 책장은 잘 넘어가는 그럭저럭 읽을만한 프랑스산 대중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