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여인들 - 實錄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
손경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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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나온 시간들을 뚝뚝 잘라 그 당시를 대표적인 단어 몇 개로 이 시대를 평가하고는 한다. 그래서 서양의 중세는 암흑의 시대라고 불린다. 암흑의 터널을 지나 문예가 크게 부흥했던 때를 르네상스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또 근대의 어느 시기는 발명과 발견의 시대라고도 한다.

우리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교를 숭상한 성리학의 시대였고, 왕이 다스렸지만 선비, 즉 사대부가 지배했던 시대였다고 일컬어지곤 한다. 하지만 이 책 ‘조선이 버린 여인들’을 보자면 조선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시대이다. 여성에게만 가혹했고, 하층민일수록 가혹함은 더 했다. 법은 있으되 소용이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긴 뭐.. 이것이 조선시대만의 일도 아니니, 21세기인 현재도 먼 훗날 어찌 기록될 지 그것은 역사만이 알 일이다. 

‘조선이 버린 여인들’은 자신들에게 가혹했던 조선을 몸으로 견뎌내다 사라진 여인들의 이야기이다. 여성이었고, 노비, 기생, 첩이었기에 그녀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귀결되었다. 더욱이 조선이 얼마나 이 여인들에게 가혹하고 잔인했나 하는 것은 그녀들의 삶을 비극으로 종결시킨 그 사건들이란 것이 오늘날에는 가십거리 정도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 그칠 간통이나 연분의 죄였고, 더욱 의아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강간 등 오히려 여성이 피해자임에도 피해자가 제일 먼저 추국 당했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제목 그대로 조선은 그녀들을 버렸다. 그리고 그 버림은 당사자는 억울하고 원통했으나 시대는 아무렇지 않게 용인했고, 그것이 당연하다 인정했다.

왜 시대는 그것을 용인하고, 당연하다 하는가. 남녀 간에 연분이 나고 간통이니 강간이니 하는 것은 분명 피해자가 있고 가해자가 있으며 때로는 쌍방이 합의하에 일어난 일이거늘 어째서 한쪽만 유달리 억울했는가. 남성들은 조사조차 받지 않거나, 장 몇 대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시 얼마든지 관직에도 나가도 불편 없이 살았거늘. 왜 여성에게만 잔인했으며 하층민일수록 그 가혹함은 더했는가.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단지 신분제 사회였으며 성리학에 입각한 유교사회였다는 것만으로는 완전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이 책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원문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스러져간 하층 여성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저자에 의해 탄생한 책은, 그 33가지의 이야기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두 조선 전기에 벌어진 일이며, 특히 성종과 세종 때의 일이 주를 이룬다. 특히 성종 때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왜일까?

실록이라는 것이 워낙에 방대하여 아직 연산군 이후는 작가의 손길이 못 미쳤을 수도 있고, 유독 성종과 세종 때에 특이할 만한 연분사건 발생률이 높았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시대 통 털어 가장 태평했다는 성종과 성군 중의 성군이라는 세종 때에 연분사건이 많이 발생했다는 것이 참 재밌는 일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간에 조선 중기를 넘어가지 못하고 조선 전기에 몰린 이야기는 유달리 하층 여성들에게 가혹했던 것에 그 원인을 더했을 지도 모른다.

작가가 지적하고 있듯 이런 남녀추문 사건은 단순히 그 사건에만 국한시켜 해석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조선 전기.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조선은 나라를 안정시켜야 했고, 백성들을 하나로 모아야 했다. 조정은 유교로 그 일을 수행하려 했고, 단순히 풍기를 단속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라를 지배하기 위한 권력에 의해 재편되고, 필요에 의해 가혹했다. 수직적 사회를 지향한 조선은 개국공신을 비롯한 각종 공신을 위해야 했으며, 고려의 귀족이 아닌 새로이 등장한 사대부 양반의 권위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책에 수록된 이야기가 모두 조선 전기에 벌어진 일이며, 노비, 첩, 기생, 비구니였던 여성과 양반 남성이라는 대결 구도는 필연적으로 여성에게만 잔인했던 결과가 나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대는 남성에게는 눈을 감았고, 여성에게만 눈을 부릅뜨고 무서운 잣대를 들이댔다. 상위계층에게는 그럭저럭 반듯하게 적용되던 법도 하층에게로 오면 그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졌다. 실상 조선시대가 이미 불평등한 사회였고, 법 자체가 그런 불평등함을 바탕으로 규정되어 있으니 법문을 올곧게 들이댄다 해도 이미 게임은 끝이었다. 그리고 그 잣대는 후대로 갈수록 더욱 강해져 수많은 열녀가 탄생했고, 그 그늘 밑에서 여성은 숨이 막히고 하염없이 눈물지었다.

책으로 돌아오자면 일단 이 책은 아주 잘 써진 역사책은 아니다. 진중한 논의보다는 과연 조선시대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싶을 만큼 흥미 있는 이야기를 뽑아 구성된 가볍게 읽을 만한 책에 더 가깝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구성도 그다지 촘촘하지 못하고, 편집자가 보기 좋게 다듬었을 것임에도 서툴고 엉성한 면도 있다. 물론 그것은 조선왕조실록이 이런 연분사건을 깊이 다뤘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하층 여성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지 못했을 터이니 그것이 이 책의 큰 흠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어찌됐든 이런 책이 출간된다는 건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태정태세문단세로 대표되는 역사교육을 벗어나 한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조선의 역사는 위의 역사이건 아래의 역사이건 왜 이리 피로 물들었는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다음에는 조선을 좀 더 밝게 볼 수 있는 책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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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한빛문고 6
박완서 글, 한병호 그림 / 다림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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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착한 아이가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그 아이는 청계천 뒷골목 전기용품 도매상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어찌나 부지런하고 일을 잘 해내는지 주인 아저씨와 동네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던 아이는 어느 바람이 세게 불던 날 세찬 바람때문에 하필 자동차로 넘어진 자전거로 인해 평생 해 본 적 없는 고민에 빠진다. 자동차 수리비 오천원을 가져오면 자전거를 돌려주겠다는 자동차 아저씨가 없는 틈에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마저 일자 아이는 자전거를 들고 냅다 도망을 친 것이다. 그것 만으로도 착한 아이는 도둑질을 한 것 마냥 마음이 편치 않은데 전기용품 주인 아저씨는 그런 아이에게 돈도 안 물어주고 자전거도 가져왔다며 칭찬을 한다. 아이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그날 밤 시골로 내려 갈 짐을 싼다.

자전거 도둑 아닌 자전거 도둑이 그날 밤 짐을 싼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만은 아니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어느 날엔가는 진짜 도둑이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이었다. 그리고 필시 자신의 아버지였다면 혼을 냈을 진정한 어른을 그리워했기 때문이고, 또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이런 몹쓸 일이 생기는 도시 대신 우아하게 바람을 타는 보리밭이 있을 고향이 보고팠기 때문이다.

이런 동화를 읽을 때면 두 가지의 생각이 교차하곤 한다. 하나는 순수하고 맑은 심성을 가진 아이와 우리의 자연을 말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흐믓한 미소를 짓게 되는 한편, 이런 이야기들이 과연 얼마나 의미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박완서님의 단편 동화집인 '자전거 도둑'은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시인의 꿈' 등 총 6편의 잘 써진 동화가 담겨있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순박하고 착한 아이와 따뜻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등장하고 어른들은 대부분 물질 문명에 찌들어 있다. 도시와 문명의 편리함에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들의 소중함과 민들레 한송이마저도 소홀히 지나치지 않는 소박하고 뜨뜻한 시선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적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지만 그것들은 결코 우리들이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뻔하기도 하고, 짐짓 식상하기까지 한 이런 이야기들은 어떻게 보면 달달 외워서 시험만 볼 뿐 실생활에서 그다지 적용되지 않는 도덕교과서와 같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가 그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뻔함마저 다시금 일깨울만큼 동화에서 묘시하고 있는 것들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이며, 동화를 읽을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런 진정함이 가장 필요한 교육일 테니까 말이다. 보편적인 주제와 단선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는 진정함이야말로 동화가 가진 가장 큰 힘일 것이다. 

'자전거 도둑'은 어른이 읽는 동화라기에는 '어린왕자'가 가진 순백의 아름다움이나 '연어'의 세련됨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아이들에게는 순수함과 교훈을 어른에게는 동심을 돌이켜보게 할 이야기이고, 박완서님의 손에서 뽑아져 나온 고운 우리말로 써진 예쁜 동화이다. 뻔함이고 진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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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 해전 - 세계의 역사를 바꾼 전쟁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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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쟁이라는 것은 전쟁 자체로 왈가왈부되지는 않는다. 그 어느 전쟁도 누가 누구와 싸워 이겼다더라 하는 단순한 논리로 재단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비록 그 이면은 추악할지언정 인류는 전쟁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꿔왔고,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그래왔듯 세계 4대 해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쟁과 그 승자들은 명성에 걸맞게 이후의 모든 역사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결국 역사라는 건 이긴 자의 기준에서 재편되기 마련이니 이제 와서 투덜댈 건 없겠다. 실제의 역사가 어떠했든 간에 그것이 진리다.

그래서 살라미스 해전의 진리는 동양의 야만으로부터 서양의 가치를 지킨 전쟁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과 물질의 충돌이었고, 정신의 승리였다. 살라미스 해전은 동양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와 서양으로 대표되는 아테네와의 전쟁이자, 당시 대제국으로서 여러 나라를 복종시키고 각기 다른 민족을 대동하는 물량공세를 펼쳤던 물질 대 이제 막 꽃피기 시작한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정신과의 전쟁으로 기록된다. 정신은 이겼고, 아테네는 자유를 지켰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헬레니즘은 역사의 무대에 좀 더 늦게 모습을 드러내는 헤브라이즘과 함께 서양을 지배한다. 문명은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스페인, 영국, 프랑스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되고, 세계의 역사는 서양, 즉 서유럽을 중심으로 엮어진다. 그리고 오늘날 미국에 이르기까지 살라미스의 유산은 그 승리의 맹위를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떨치고 있다.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아테네는 해전에서의 맹활약으로 그리스의 폴리스 중 단연 앞서 나가게 되고, 민주주의는 한 도시국가에 발생한 독특한 정치의 형태에서 인류의 이상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과연 살라미스는 현재를 이루고 있는 것들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세계가 잃을 뻔한 것은 그리스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의 교활함과 탐욕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아테네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난생 처음 맛보게 해주었다. 살라미스 덕에 아테네는 자유를 얻었고 그리스는 노예가 되었다. 민주주의가 살아남은 대신 아테네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오점에 대한 치열한 논쟁. 그 전통이야말로 살라미스의 진정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페르시아가 승리했다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의 문명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이 책 ‘살라미스 해전’ 저자의 주장이지만, 어찌됐든 승리했고, 문명은 지켜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벌어졌음에도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 ‘300’에서 컴퓨터 그래픽 없는 근육을 자랑하던 스파르타군과 괴물과도 같은 모습을 한 페르시아군의 모습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살라미스 해전을 그 시작부터 전쟁 후까지 다루고 있는 ‘살라미스 해전’은 역사서이면서도 하나의 이야기책처럼 당시를 재구성하여 역사의 한복판을 들여다보는 흥미에 읽는 맛까지 가미돼 있다.

어찌 알겠는가. 2400년 전의 진실을. 페르시아군의 원정. 짓밟힌 아크로폴리스. 살라미스로의 결전을 거부했던 그리스 동맹국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른 채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었던 노잡이들. 살라미스 최초의 전투. 페르시아의 퇴각. 저자는 이 모든 것을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기준으로 아이스킬로스의 희극과 플루타르코스 등 남겨진 조각들을 붙들고 가장 그럴 듯하게 이어 붙인다.

 

전쟁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 창조된 것보다 더욱 극적이고, 전쟁의 영향력 아래 놓인 우리들에게는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는 일부의 진실이자 일부의 허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파생된 것들은 결코 허구가 아니니 멀리 갈 것도 없이 교과서만 펼쳐 보라. 살라미스의 증거가 눈앞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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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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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문을 여는 중저음. 복도를 울리는 일렬종대의 발자국 소리. 멈추지 마! ‘13계단’은 어느 사형수의 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제발 내 앞에서 멈추지 말아달라던 한 사형수의 방을 아홉 발자국 지나쳐 불시에 끊긴 소리는 곧 죽음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 발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저승사자가 비켜간 그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영상에 한 줄기 희망을 걸고 편지를 쓴다.

추리소설은 독자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사건이 진행됨에 있어 한 순간도 독자는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트릭. 단서. 혐의. 용의자. 반전. 그 모든 과정에 작가는 독자와 동행하는 척 하지만 실은 한 발 앞서간다. 추리소설의 쾌감은 동행 한다 생각했던 순간, 한 발 앞서 있던 작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순간 최고에 이른다. ‘13계단’은 추리소설이 갖춰야할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인간은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상해치사로 2년형을 받고 복역 중 가석방을 허락받아 보호 관찰을 받게 된 준이치와 교도관으로 평생을 근무하였으나 이제는 그곳을 벗어나려는 난고가 기억을 잃은 사형수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는 과정은, 그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으로 일단 이 일에 동행한 이상 절대로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진짜 범인이 누구든 어쨌든 범죄는 잔인했고, 범인인 이상 사형을 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작가는 단지 진짜 범인을 잡는 것에만 주력하지 않는다. 몸서리 처지는 사건의 한가운데, 작가는 묻는다. 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결과는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고와 준이치가 증거를 발견하고 범인을 추론하는 와중에 던져지는 물음은 인간의 오랜 물음과 일치한다. 살인과 사형. 신의 용서와 인간의 형벌. 뉘우침과 인과응보. 사형은 인간에 의해 또 다시 저질러지는 살인인가? 정당한 죄의 대가인가? 그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원초적인 끝도 없는 물음과 답의 반복일 뿐이다. 그 누가 알겠는가. 신이라 해도 답을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비록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또 한 사람을 사형대로 보내는 일이라 해도 난고와 준이치는 최소한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 건 원치 않았다.

사형 집행까지 남은 시간은 3개월. 이제 그 시간을 다 써버리고 남은 시간 3주. 기한은 점점 다가오고 있고, 범인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고 가능성을 가진 여러 용의자가 있을 뿐이다. 사형집행이 확정된 문서는 마지막 절차를 앞두고 있다. 하나하나 13명의 손을 거쳐야 하는 문서는 한 사람의 서명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귀찮고 꺼림직한 것을 이리저리 미루다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도망치듯 틀림없이 서명을 할 것이다. 이젠 누구도 멈출 수 없다.   

한마디로 훌륭하다. 모든 면에서. 일단 책을 펼쳤으면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야한다. 어떤 상황이든 묘사는 눈에 그대로 그려지고, 한 순간도 느슨한 구석이 없다. 게다가 그 와중에 작가는 묵직한 주제마저 던진다. 추리소설로서도, 주제의식을 가진 소설로서도 양쪽 다 완벽하게 해낸다. 13계단. 그것은 누군가를 죽이는 계단이기도 했고, 살리는 계단이기도 했다. 사형수에게는 집행까지 걸리는 단계이기도 하다. 또 소설의 종반. 가장 긴박한 장면을 연출해 내는 공간이 13계단이다.

새벽 1시경 잠이 들 때까지 조금만 읽자 했던 것이. 정확히 오전 7시 37분. 읽기를 마쳤다. 그제야 편안히 이불을 덮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아마도 온라인상의 누군가에게 추천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람의 추천은 옳았다. 하지만 소설의 결말과는 상관없이.. 아프다. 끊임없이 저질러지는 극한 범죄와 사형수들. 그것은 현재진행형이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반복될 것이 틀림없으니까. 또 저승사자의 발자국 소리에 발악을 하고, 살려 달라 빌어 댈 사형수. 또 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될 또 하나의 살인. 합법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교도관들. 그 고통이 끝날 날은 오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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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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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건물 수위 아줌마인 르네는 말을 거르지 않고 기탄없이 부자들의 오만함을 지탄합니다. 처음 편집자에게 보낸 원고에서 나는 이 여인을 약간의 저급하고 비속한 말을 상투적으로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풍자가 요구하는 수위들의 화법처럼 말이지요. 그러자 편집자이자 소설가인 장 마리 라클라브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소설가입니다. 당신의 수위 아줌마도 게르망트 공작부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오만함을 지탄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말을 거르지 않고 기탄없이 할 수도 있고, 완곡하게 돌려 말할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식은 내비치지 않는 것이다. 부자들의 오만함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거니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러니 굳이 내가 그런 진흙탕에 발을 딛고 나서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비록 그들의 오만함에 구역질이 나고, 걷잡을 수 없는 도도함과 예의 없음에 넌더리가 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럴 자격도, 갖춘 것도 없다며 나를 감추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나는 내 공간 안에서 행복하다.

르네는 고급 아파트인 그르넬 가 건물의 수위 아줌마다. 늙고, 뚱뚱하고,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면서 하염없이 텔레비전을 보는 수위 아줌마라는 사회적인 믿음에 딱 들어맞는 외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 여느 수위 아줌마가 아니다. 르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베니스의 죽음’을 보면서 예술의 기적 앞에 황홀해한다. 네덜란드 정물화를 좋아하고, ‘오즈’의 영화에서 특별한 감흥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공작부인처럼 우아하고 품위 있게 말할 수 있는 수위 아줌마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는 중이다.

올해 열두 살인 팔로마는 열세 살이 되는 날 자살을 결심했다. 그르넬 가의 부자들이 사는 아파트에 살고 있고, 부모는 부자고, 집안은 부유하다. 문제는 너무 별나게 똑똑하다는 거다. 팔로마는 자신만큼 똑똑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도 삶은 이미 설계되어 있고, 결국 어항 속의 빨간 금붕어들처럼 끝을 맺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인이 되어도 삶의 부조리에 저항할 수 없는 이상 여기서 끝낼 것이다.    

[그녀는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가시로 뒤덮여 있어 진짜 철옹성 같지만, 그러나 속은 그녀 역시 고슴도치들처럼 꾸밈없는 세련됨을 지니고 있다고 난 직감했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 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

가시로 덮인 고슴도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감춘다. 철저하게 본 모습을 가리고 그들이 원하는 수위 아줌마가 된다. 하지만 온갖 위선으로 가득하고 우아함을 가장한 천박한 부자들이 떠나고 나면 그 뒤에서 고슴도치는 참 유난스럽고, 호들갑스럽다. 쉼표(,)의 사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시제라도 한 번 잘못 썼다간 멍청한 사람으로 그대로 낙인찍힌다. 타인들 앞에서는 모르는 척. 수위실 문을 꽝 닫으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세상의 온갖 사람들을 모두 속물적이고, 멍청하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보고, 비판을 서슴치 않는다. 일본의 모든 것을 동경한 나머지 6층의 음식평론가가 죽은 후 새로 이사 온 일본인에게 지대한 호감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그 일본인은 예상대로 무척 예의바르며, 그는 ‘안나 카레리나’를 비롯한 놀라울 만큼의 공통점으로 우정이 싹트고 있는 중. 그리고는 혹여 이런 자신이 들킬까 매사 노심초사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르네의 반응과 생각은 단지 부자이고 상류계층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은 못 배우고 가난한 수위 아줌마보다 나을 것도, 우월할 것도 없고 때로는 모자라는 것도 많다는 걸 강조하려는 것임을 알겠다. 소설은 르네와 팔로마의 사색을 통해 눈으로 보이는 것만 다가 아님을, 삶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황홀함을 가르친다.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려고 한다. 우아함이 우아함으로 머물지 않고 넘치고 흘러내리는 것이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보다 극단적으로 말해 작가의 개인적 취향의 집합체이다. 르네와 팔로마의 입을 통해 나오는 단어와 취향, 사색, 책 속의 모든 설정은 온통 작가가 동경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고, 작가는 그것들이 얼마나 좋은 지 또 당신들이 얼마나 무지한 지를 독자들에게 일일이 가르친다. 어떻게 보면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정도는 알아들어야 당신도 뭐 좀 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는 해야 당신도 똑똑하고 예의 바른 범주에 속한다. 이 정도는 향유할 줄 알아야 당신도 우아할 수 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동감할 줄 모르는 이상 당신도 실은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 겉으로만 요란한 저들과 다를 바 없이 똑같다.

작가가 적당한 선에서 정리할 줄 알았다면 끝간데없는 잘난 척에 나자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쉰네 살 수위 아줌마와 열두 살 천재소녀의 감동 어린 만남!’이라는 카피에도 불구하고 둘의 만남은 너무 늦는데다 아무런 감흥이 없다.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한 채 르네는 사고로 죽고, 팔로마는 자신의 자살 계획이 별문제 없는 사춘기 소녀의 사치이자, 관심을 끌기 원하는 부잣집 여자애의 합리화였음을 깨닫고 계획을 취소한다. 

고슴도치는 철옹성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오만한 부자들은 아무리 르네의 입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나와도, ‘오즈’ 영화의 경이로움을 찬탄해도 늙고 뚱뚱한 수위 아줌마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오늘 도착할 소포를 제대로 전달해 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세상의 아름다움과 내면의 우아함을 이야기하는데 잡다할 만큼의 유식한 문장과 유난스러울 정도의 비아냥까지 내세울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르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끼 위의 동백꽃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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