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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결국은 전복(顚覆)이다. 다 뒤엎는다는 것이다. 유괴범은 모조리 다 몹쓸 놈들이라는 당연한 판단을 뒤엎고, 유괴를 당한 할머니가 오히려 유괴극을 진두지휘하게 된다는 기발한 착상은 여타의 발상 자체를 뒤엎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그들이 어찌됐든 해내고야 마는 것 또한 기가 막힐 노릇이고, 여하튼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식을 뒤엎는다.
감옥에서 만난 3인조 어리바리 유괴단이 할머니를 유괴했다. 물론 목적은 돈이다. 마지막으로 크게 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보통 할머니가 아니다. 엄청난 갑부인데다 하필 그 할머니를 타깃으로 정한 건 유괴단의 우두머리 격인 겐지의 어릴 적 기억 때문이었다. 고아원에 있었을 때 산타클로스처럼 많은 걸 주었던 인자한 할머니. 처음부터 해칠 계획은 없었던 거다. 그냥 잠깐 데리고 있다 돈만 받고 돌려보낼 계획이었다. 원하는 돈은 5천만엔. 그거면 된다. 그런데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나름 철저했던 계획은 할머니를 유괴하는 데까지는 어느 정도 먹혔다. 워낙 한적한 시골이라 동네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으려 노력도 했고, 도시에 유괴 후 할머니를 데리고 있을 방도 마련해 놨다.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 스케줄도 다 확인했다. 그래서 어찌하여 유괴까지는 성공. 그런데 웬걸,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이번 유괴에 생각지도 못한 허점이 많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할머니를 통해 알게 된다. 더군다나 몸값이 5천만엔이라는 말엔 불같이 화를 낸다. 할머니는 내가 어떤 사람인데 겨우 5천만엔이냐며 버럭 화를 내시더니 100억엔에서 한 푼도 못 뺀다고 호통을 치신다. 자- 이젠 어떻게 되는 걸까.
1970년 후반에 발표되었다고 하는 이 책은 2007년 현재 읽어도 거의 과거라는 시대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세련됐다기 보다는 오히려 기발한 발상과 달리 문체는 투박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전개를 펼쳐나감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 때문이리라.
유괴를 처음 계획할 당시에도 우두머리를 제외한 다른 두 명은 유괴를 반대한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절대 해치지 않을 거고, 어린아이가 아닌 할머니라는 말을 듣고서야 동참을 하는, 어떻게 보면 좀 바보 같고 다른 쪽으로 보자면 참 인간적인 유괴범이다. 할머니를 유괴할 때에도 당시 같이 있던 젊은 여인은 상관없으니 풀어달라는 설득에 그대로 넘어가 풀어주는데다 이후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동감하며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하는 유괴범들이니 이들이 유괴범이라는 자체가 상당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냥 할머니 말 잘 듣는 돈이 좀 필요한 젊은 청년들이라고나 할까.
「이 나라는 나에게 무엇이었던가? … 이 나라는 내게 뭘 했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왜 몸값을 100억엔으로 올리고, 유괴극을 앞장 서 지휘하면서까지 유괴범들에게 동참을 했을까? 할머니는 전쟁통에 아들을 둘이나 잃었다. 부자였으나 돈만 모으기 보다는 많은 자선사업과 본래 타고난 성품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할머니는 막상 나이가 여든둘이나 되고 보니 깊은 회한이 밀려들었다.「산촌 사람들에게 돌려준다면 납득할 수 있다. 적어도 이 나라 국민들을 위해서 쓰일 수 있다면 그동안 키워온 보람도 있다. 국가라는 허울을 쓴 권력자들에게 과연 그런 기특한 생각이 있을까?」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권순분여사납치사건」은 할머니의 유괴극 동참에 자식들의 불효라는 이유를 만들어 낸다.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이 책은 자식을 앗아가는 걸로도 모자라 자신이 죽은 후 평생 자신과 이웃들이 땀으로 일구어 낸 재산마저 세금이니 뭐니 하는 것들로 빼앗아 권력자들의 배나 채워줄 나라에 대한 불신과 원망에서 출발한다.
모든 상식의 전복에서 시작한 책은 오히려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것들을 담아낸다. 결국은 다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사실은 한 번도 뭔가가 뒤집어졌던 적은 없다. 힘없는 자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절대 변하지 않는다. 힘이 없어서, 항상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살아온 탓에 언제부턴가 범죄자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 이들이 오히려 누구보다 나약한 사람이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지개 동자. 할머니가 직접 이름을 지어준 유괴범들은 멋지고 씩씩한 할머니와 함께 폼나게 세상을 한 번 들었다 놨다. 정말 크게 한 건 터트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하루를 잘 살면 되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만큼의 돈만 필요한 평범한 사람들. 그렇다면 100억엔은 어떻게 됐을까?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진부하다 싶더라도 영화 「권순분여사납치사건」의 결말이 좀 더 그럴 듯 하지 않나 싶지만... 우리의 우상 할머니는 절대 한 푼도 허투루 쓸 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