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승자의 기록임과 동시에 무척 이기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패자(敗者)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악(惡)이 되고, 승자는 당당히 기록에 남아 선(善)이 된다. 역사를 기록할 권리를 갖게 된 승자에 의해 남겨진 역사는 철저히 승자의 시각을 대변하게 된다. 한쪽 눈을 감고, 한쪽 팔로 쓰면서 자신의 승리가 옳음을 강변하는 역사는 그래서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그런 기록을 토대로 과거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 고증이라는 것은 또 그렇게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영조 38년 윤 5월 13일. 나라의 국본인 세자가 뒤주 속에 갇혔다.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살려달라고 빌면서 아버지이기도 한 왕의 명에 의해 뒤주 속으로 들어간 세자는, 한 여름 무더운 땡볕 속에서 무려 8일 동안 갇혀 있다 끝내는 세상과 연을 끊었다. 손이 귀한 왕조에 하나밖에 없는 왕자로 태어나, 온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 속에 성장해, 이제는 장차 조선의 왕이 되었어야 할 세자였음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주는 이 없는 완벽한 고립 속에 죽어간 것이다.

어찌하여 한 나라의 왕자가 그토록 철저한 외면 속에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정말로 사람들이 말하듯 정신을 놓았단 말인가. 그래서 혈연의 정보다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한 왕은 천륜마저 버리고 자식의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단 말인가. 죽은 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이기도 한 [영조실록]에는 어쩌면 그것이 다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것이 저자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에 귀 기울이게 된 이유이다.

역사의 패자였던 사도세자.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책은 보기 드문 패자의 기록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상한 건 오히려 승자의 기록에서 패자인 사도세자가 성군의 자질을 지녔을 지도 모를, 지금까지의 상식과는 다른 면모가 보인 것이다.

이덕일은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왕독살사건]을 비롯한 그가 그간 내놓은 역사책에는 조선은 겉으로는 왕의 나라이나 왕은 무소불휘의 권력을 휘두르던 절대자가 아니었으며, 신하들에 의해 움직이던 나라였고 신하들은 왕을 모시기보다는 학문적 뜻을 같이 하는 당론을 따르던 당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반정을 일으키기고 하고, 때로는 독살을 하면서까지 택군(擇君)을 감행했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신하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왕이었다.

영조는 당시 집권당인 노론에 의해 선택받은 왕이었고, 형이기도 한 선왕 경종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비록 유약하긴 했으나 젊은 왕이었던 경종의 급서에 독살됐을 지도 모른다는 항간의 소문 한가운데 영조가 있었고, 영조는 그 업보를 씻는데 평생의 공을 들인다. 영조는 자신의 대에서 그 업보가 깨끗하게 마무리되길 바랐고, 아들인 세자에 의해 완성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세자의 뜻은 달랐다.

세자는 노론과 가까이 하지 않았다. 영조는 겉으로는 탕평책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은 노론을 중심에 두고 소론을 중용하는 노론중심의 정책을 폈다. 그것이 영조의 태생적 한계였다. 영조는 노론에 의해 택군이 된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했던 세자는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았으며 오히려 뒤에 물러나 있던 소론과 뜻이 맞았다. 이는 아버지 영조와 크게 어긋난 것이었다. 더군다나 부인인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노론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보다는 집안을 따른 노론의 여인이었고, 장인은 노론의 영수였다. 이것이 사도세자가 뒤주 속으로 들어간 날, 죽음을 감지하고도 가족이라 할 수 있는 부인이나 친지보다는 이런 날을 예견해 미리 약속을 해 둔 조재호를 부른 까닭이고, 그를 죽음으로 이끈 가장 큰 비극이었다. 그는 외로웠다. 아무도 곁에 없었고, 심지어 부인마저도 적이었던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당시 10살이었던 죽은 세자의 아들인 세손에 의해 과거 연산군의 일이 되풀이 될 것을 우려한 노론은 세손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지만, 이는 실패하고 만다. 마침내 영조가 죽고 인고의 세월 끝에 왕에 오른 세손은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며 이렇게 선포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가슴 속에 품어 온 피 맺힌 한 마디를 내뱉고야 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을 치죄하고, 그 중심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 일가가 있었다. 이것이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남긴 이유이다. "[한중록]을 쓸 당시 혜경궁은 사랑하는 남편의 비참한 죽음에 오열하는 20대의 청상과부가 아니었다. 당시 혜경궁은 궁중 깊숙한 곳에서 영조, 정조, 순조 세 임금의 치세 6,70여 년을 지켜본 70대의 노회한 정객이었다." [한중록]은 승자의 기록이었다.

한 쪽 눈만을 가진 역사의 기록은 억울하게 죽어간 한 남자를 정신병자로 몰았다. 그의 고백을 다 듣고 있노라면 240년 전의 일이 마치 오늘의 일인 것처럼 마음 한 켠이 스산해져 온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크나 큰 오욕이며, 조선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신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세자는 죽임을 당했고, 그 다음 왕인 정조 역시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조선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정조의 시대가 지나고, 조선은 세도정치로 얼룩지다 끝내는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천륜마저도 버릴 만큼 권력을 향해 치달았던 비정한 정치 생리와, 백성을 사랑했던 두 군주(사도세자와 정조)의 죽음을 목도하고 땅을 치던 백성의 울부짖음 끝에 사도세자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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