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3
조지 오웰 지음, 김병익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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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 인간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할 때 그는 절대적인 자유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직 사회들이 존재하는 한 어느 정도의 검열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며, 어떻게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것처럼 ‘이웃 사람을 위한 자유’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볼테르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에도 들어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바를 증오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네가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겠다.’]   p. 13


고전이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예전에 쓰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인터넷 국어사전에서는 정의하고 있지만, ‘종이책 읽기를 권함’의 저자는 ‘중학교 때 읽기 시작해서 아직도 다 못 읽은 책’, ‘아직 읽지 않았으면서도 남에게는 읽었다고 하는 책’,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숙제와 같은 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고전의 정의는 ‘일단 한 번 읽어보면 알게 되는 책’입니다. 왜 고전인가. 왜 사람들은 고전을 읽으라고 하며, 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또 읽히는가. 그건 일단 읽어보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천한 저의 경험상 그러합니다.


1945년에 출간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그의 또 다른 소설 ‘1984년’과 함께 현대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풍자한 걸작으로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두 소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과연 읽어 봤는가에 이른다면 아마도 이 소설을 알고 있다는 사람의 반도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 지난 이제야 ‘동물농장’을 읽었지만, 과연 이래서 고전이로구나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10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 짧은 우화는 수천페이지에 달하는 그 어떤 철학서, 인문학서보다 통렬하게 전체주의와 권력의 타락을 비판하며 풍자하고 있습니다.

 

‘동물농장’은 존즈 씨가 운영하는 매너 농장의 밤에서 시작됩니다. 농장 동물들에게 존경받는 수퇘지 메이저 영감은 전날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합니다. 그 꿈은 인간이 사라지고 난 뒤 있을 세상에 관한 꿈입니다. 메이저 영감은 생산은 않으면서 소비하는 생물인 인간의 폭정에 의해 비참한 노예와도 같은 생애를 사는 동물들의 삶을 이야기하며, 인간을 몰아낼 것을 주장합니다. 사흘 뒤 메이저 영감은 숨을 거두게 되고, 메이저 영감이 주장한 봉기를 '동물주의‘라는 사상으로 추진하며 은밀히 준비했던 동물들은 어느 날 이를 실행에 옮기고 성공적으로 수행됩니다.

 

 [우리는 ‘동물농장’의 등장인물과 주요 사건들을 그대로 마르크시즘 이후의 소련사에 대입시킬 수 있다. 가령 동물농장의 예언자인 메이저 영감은 마르크스이며, 음험한 현실주의 독재자 나폴레온은 어김없는 스탈린이고, 스탈린에게 축출당한 트로츠키는 이 소설에서 이상주의자 스노볼로 등장한다. 그들의 봉기는 당연히 1917년의 대혁명이고, 이 혁명에서 영원히 멸망한 차르 정권은 매너 농장의 게으른 주인 ‘존즈’씨에 해당된다.]  p. 140

 

 ‘동물농장’은 누가 봐도 과거 사회주의 체제를 연상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멀리 볼 것도 없이 북한의 실상과 비교해 봐도 아주 정확히 일치합니다. 봉기는 성공적이었으며, 잠시나마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실현시키지만 동물들이 자신들이 거둔 성공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두뇌 노동자인 돼지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한 쪽은 축출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완벽한 독재체제가 형성된 동물농장은 봉기 이전보다 더 많은 배급량을 받고 있다는 통계 발표에도 불구하고 노동량은 해마다 늘어나지만 배급량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불만을 품은 동물들은 숙청되고, 특권층이 된 돼지들은 물리적인 공포와 대중 동원, 항의의 봉쇄, 관심의 왜곡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결국은 두 발로 선 채 채찍을 휘두르며 피지배층인 동물들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내용 덕에 ‘동물농장’은 군사적 동맹국을 공격하는 책을 발간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출간 당시 4개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합니다. 하지만 ‘동물농장’은 소련에게만 한정된 것도, 사회주의 체제만을 풍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언론의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서문이 보여주듯 ‘동물농장’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재에 대한 풍자이며,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때 지구상의 반을 차지했던 사회주의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고 무너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급부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권력의 타락과 인간을 동물처럼 지배하는 권력의 만행은 비단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영국의 동물들아, 아일랜드 동물들아 / 온 누리 모든 땅 위의 동물들아 / 귀 기울여 들으라 / 황금빛 미래 향한 내 즐거운 소식을 / 언젠가 그날이 올지니 / 전제자 인간은 추방되리라 / 풍요한 영국의 들판에는 / 오직 동물들만 활보하리라 / 코에서는 굴레가 사라지리라 / 등에서는 멍에가 벗겨지리라 / 재갈과 박차는 영원히 녹슬리라 / 잔인한 회초리는 더 이상 소리 없으리.]  p. 31-32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죽음까지 착취당하면서도 착취당하는 줄 모르는 대중들과 침묵하는 지식인. ‘동물농장’에서 묘사하는 사회와 인간군상은 어쩌면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와 빼닮았기에 암울하고 무섭기까지 합니다. 동물들이 불렀던 노래는 희망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만들었던 세상은 그렇지 못했듯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희망과 절망은 세대를 거슬러 공존합니다. 완벽한 유토피아란 존재할 수 없지만,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출발점은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약속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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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읽기를 권함 - 우리시대 어느 간서치가 들려주는 책을 읽는 이유
김무곤 지음 / 더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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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보다 더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 그게 있다면 나에게 가르쳐주면 좋겠다.」 p. 155


이 책을 읽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안타까운 연애소설도, 지금 당장 일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소리치는 자기계발서도 아닌, 책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담담하게 책 예찬론을 펼치고 있는 그런 책일 뿐인데 말입니다.


아주 어릴 적,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던 저자의 집에 어느 날 엄청난 양의 책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밥을 먹을 때 불쑥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그것, 너희들 것이다.” 아버지는 동네 책방에 들려 “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은 다 배달해 달라”고 말씀하시고 집 안에 작은 서점하나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자의 치열한 책 읽기가 시작됩니다.


나는 언제부터 책을 읽었을까 떠올려봅니다. 8살 때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처음 한글을 배웠으니 7살까지는 글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집에 딱 한 질 있던 전래동화 전집을 수십, 수백 번 읽었던 기억,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우리 집에 없는 책들이 탐나 친구와 놀기보다 책을 발견한 그 자리에 앉아 읽었던 기억, 어머니께서 어디선가 한 권, 두 권씩 빌려다 준 책을 다 읽고 돌려주고 또 다시 새로운 책을 빌려오시고는 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서점에서 문제집이 아닌 책을 용돈을 모아 샀던 기억, 친구들은 잘 쳐다보지도 않았던 학급 문고를 잘 골라 읽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느낀 감정은 공감과 부러움이었던가 봅니다. 인사동 고서점과 미국 뉴욕의 스트랜드 서점, 일본의 진보초. 수많은 책들과 작가들, 그리고 책에 미친 사람들. 목적을 두지도, 인내를 요하지도 않는, 그저 즐거움이자 생활일 뿐이라는 그의 끝없는 책 예찬에 공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나도 지금 당장 저들처럼 스트랜드 서점의 좁은 통로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수많은 서가를 뒤지고 싶은 작은 두근거림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동질감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미 당신은 책 바보일 확률이 높습니다.


고서점에 갔다가 책이 너무 탐이 난 나머지 통장에 있던 돈을 다 찾아들고 나간 사람, 돈이 없던 유학시절 옥스퍼드 영어사전 한 질을 너무 갖고 싶어 책 한 트럭을 내다판 사람, 인사동 고서점에서 혼자 책과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 한때는 책을 읽기 위해 기차를 탔던 사람, 책 읽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을 아직 찾아내지 못한 사람. 그 스스로 간서치(看書癡)임을 고백하는 글들은 목적 없는 독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권하는 저자에게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묘하게 설득적입니다. 여타의 주석과 뭔가 다른, 본문과 비슷한 양의 주석마저도 소중합니다.


「종이책 읽기를 권합니다. 오늘날같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종이책을 읽는 일만큼 느리게 해야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갑갑함으로 인해 책을 멀리 하려는 충동을 느끼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이책에서 얻는 깨달음과 감동은 한번 얻으면 다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즐거움을 당신에게 드릴 것입니다.」 p. 5


공부로서가 아닌 책 읽기를 권합니다. 효용이 없는 책 읽기를 권합니다. 부모에게, 선생님에게, 또는 아내에게 핀잔 받는 책 읽기를 권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를 권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야 말로 정말 쓸모가 있는 책 읽기라는 것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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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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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상투적인 설정이었다. 새로운 학년이 되었고, 같은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이미 제목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친구와 어릴 적 같은 유치원에 다녔었다는 것, 뭔가 둘 사이에 중대한 사건이 있다는 것, 몇 년 동안 소식이 없다가 뽕 나타난 남자친구와 사회적인 명성과는 괴리감을 나타내는 남자친구의 어머니 등등. 그리고 비록 성적은 하위권이지만 발랄한 성격에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는 한 친구와, 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행복하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학교에서도 외톨이인 또 다른 친구. 결정적으로 바다로 떠나는 마지막 기차여행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상투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 ‘유진과 유진’을 상투적인 설정과 교과서와 같은 진부함을 풍겨대며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 같은 표어를 읊어대는 소설로 생각한다면 정말 좋은 책을 무심히 손에서 흘려보내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유진과 유진. 책을 읽는 동안 어느새 나, 내 친구, 동생, 언니, 누나 또는 내 딸이 되어 있을 이 이름은 책을 덮고 나면 꼭 안아주고 싶은 아이들이 되어 있을 테니까. 

 키가 큰 것 말고는 그 어느 것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유진은 새 학년이 되어서도 단짝친구 소라와 같은 반이 된 것이 기뻤다. 번호를 정하기 위해 복도에 나와 키를 재는 동안에도 소라와 나란히 번호가 되기 위해 키를 낮춘 노력 끝에 앞뒤 번호가 된 것에 흐뭇해하고 있을 때 뜻밖의 사건이 벌어진다. 유진이라는 이름이 아무리 평범하기로서니 성까지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던 것. 더군다나 그 친구는 어릴 때 같은 유치원을 다녔다가 중간에 이사를 간 친구였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는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 사건. 그런데 그 친구는 무안하게도 전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자꾸 나를 안다고 하는 이상한 애 정도로만 생각했던 유진은 시간이 갈수록 내가 중요한 일을 잊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필요한 건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이 다 해 주시는 부모님이시지만 따뜻한 대화 한 번 한 적 없는 엄마, 아빠를 새엄마 새아빠로 상상하고 그 분들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하고 공부를 잘 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어온 유진은 자꾸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어릴 적 엄마가 내 살갗이 벗겨지도록 타월로 밀고 밀면서 자꾸만 잊으라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함성과 함께 들려왔다. 나는 그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세상을 향해 두리번거려 본 적이 없었다. 정해진 길을 가는 데는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p. 167 

 최근 이슈가 되었던 몇몇 사건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성폭력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삶을 결코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피폐하게 만들고야 만다. 그 후유증은 성폭력을 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고통으로 몰아넣으며 평생을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성년이 돼 가해자를 살해했던 사건 등 몇몇 대표적인 성과 관련된 폭력이나 학대 사건을 뉴스로 접하면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세상의 많은 유진과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절대로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점과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분노와 좌절로 변해 아이들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같은 사건을 겪었음에도 한 유진은 연예인에 열광하고 부모님께 최신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고,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에게 이런 시를 쓰지 않게끔 당장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고 싶은 심정을 단짝친구와 나누는 평범한 여중생으로 자라게 된 반면, 또 다른 유진은 사랑받으려면 내가 잘해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할 만큼 하루하루를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일탈을 해 버리고 마는 행복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두 유진이 겪었던 그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이 벌어진 뒤 그 사건을 받아들인 가족의 반응과 두 아이를 대한 부모님의 태도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일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해 주었던 부모님과 살갗이 벗겨질 만큼 피부를 문질러대면서 너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고 소리치며 기억을 잊게 한 부모님.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부모님과 딸에게는 기억을 잊게 했으나 정작 당신들은 잊지 못하며 깨진 그릇이 어떻게 될 지 늘 염려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각각 다르게 성장한 유진과 유진은 결국 어떤 사건을 겪은 한 사람이 어느 길을 가느냐에 따라서 나머지 삶이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폭력을 주제로 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일상과 감성을 세심하게 들여다 본 소설은 같은 나이의 청소년들에게 이건 내 이야기잖아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20-30대들에겐 막 빠져나온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미소 짓게 할 것이고, 자녀를 키우는 기성세대에겐 아.. 내 자녀가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저마다 나름의 무게를 지고 살아갈 유진과 유진에게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다. 두 눈을 맞추고 많은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꺼내놓을 만큼.

「엄마는 그 동안 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줬다. 어떤 것은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챙겨 주기도 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엄마와의 대화였다.」   p.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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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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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싫어..”

내 기억 어딘가에 박혀 있는 말. 목소리조차 또렷하다. 혼자 그네를 탔고,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이면 두 줄서기임에도 내 옆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다급하게 체육복이나 책을 빌리러 오지 않는 이상 해가 지나고 반이 바뀌면 나를 보러 놀러 오는 친구는 없었다. 난 그런 아이였다.

「에바는 몸을 웅크리고 왼쪽 운동화의 매듭을 풀어서 끈을 뽑아냈다가 새로 꿰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가 이름을 불렀다. ... 에바는 끈을 꿰는 속도를 더욱 늦췄다.」

선생님이 칠판 앞으로 불러내어 문제를 풀 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에바는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지우개를 찾는다. 체육 시간에 팀을 짜기 위해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를 때 에바는 운동화의 매듭을 풀어서 끈을 다시 꿰기 시작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에바는 혼자 청어 조각이 든 샐러드를 먹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도록 산사나무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땅바닥에 앉아서.

에바는 뚱뚱하다. 뚱뚱한 에바는 친구가 없고, 늘 사람들의 관심에서 빗겨나 있다. “어머! 에바가 있었구나.” 잘 살피지 않으면 뚱뚱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에바가 있었는지 모를 만큼 자신의 존재를 작게 만드는 아이. 우리 곁에는 늘 에바가 있었다.

‘씁쓸한 초콜릿’은 그랬던 에바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점점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아주 우연하게 만난 남자친구 미헬로부터 시작된다. 미헬은 우리나라로 치면 상업학교를 다니는 친구였다. 물론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학교를 마치면 돈을 벌기 위해 떠날 계획을 이야기한다. 에바는 남자친구 미헬이 왜 뚱뚱한 자신을 좋아하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미헬에게 에바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똑똑한 아이였고, 그것이 자랑이었다. 에바에게 미헬이 가난과 학교가 아무렇지 않았던 멋진 남자친구였던 것처럼, 미헬에게 에바는 뚱뚱한 체격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똑똑한 여자친구였다.

「에바는 침대 옆에 있는 탁자의 서랍을 열었다. 역시나 초콜릿 한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 부드럽고도 쓴 맛이 났다! 다정한 손길처럼 부드러웠고 슬픈 흐느낌처럼 씁쓸했다.」

에바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마다 엄마는 초콜릿을 줬다. 그것은 부드럽고 쓴 맛이 난다. 초콜릿을 먹으면 뚱뚱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에바는 초콜릿을 먹었다. 초콜릿에게 위로를 받으면서도 다 먹고 나면 먹기 전보다 에바는 더욱 비참해진다.

학창시절을 이제는 추억하는 나이가 된 지금도 나에게 그때는 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 친구들과 재잘재잘 떠들고 몰려다니며 추억을 쌓기 바빴던 그 때의 난, 추억을 쌓아가는 친구들을 지켜보는 아이였고, 체육시간에 팀을 짤 때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아이였다. 그래서 어디에서든 에바를 발견할 때면 난 온전히 가슴 안에서 상처가 덧나고야 만다.

하지만 에바는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초콜릿을 먹던 자신을 아프게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 미헬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할 줄 알게 된 에바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점차 자신의 가치를 빛내기 시작한다. 뚱뚱하고 그늘에 있는 에바가 아닌, 수학을 잘 하는 에바, 친구들과 함께 의논하고 의견을 제시할 줄 아는 에바가 되어 간다. 체형을 가려줄 짙은 색깔의 원피스 대신 밝은 색의 티셔츠를 입을 줄 에바, 거짓말을 하고 음식을 버리다가 밤에 몰래 허겁지겁 먹어대는 대신 자신에게 맞는 저칼로리 식단으로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엄마에게 얘기할 줄 아는 에바.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다. 단점을 상쇄하고도 충분할 만큼의 장점. 그리고 어쩌면 단점은 애초부터 단점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아하는데 자신만이 어쩔 줄 몰라하고 필사적으로 가리려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건 여린 감수성을 지닌 사춘기뿐만이 아닌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씁쓸한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물고 있는 나에게 에바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렇게 묻는다. “그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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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 얼굴 없는 가면
루서 링크 지음, 김병화 옮김 / 심산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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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극도의 혼란이 뒤섞인 존재이다. 사탄은 신학이 만들어낸 존재이며, 실용적인 이데올로기와 정치학의 산물이며, 기묘하게 얽힌 회화적 전통의 산물이다. … 그는 어떤 인물이 아니라 추상적 존재에 지나지 않으므로 얼굴을 가질 수 없다.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인물”이라는 확신감을 주지 못한 그는 하나의 사악한 힘으로 신빙성 있게 등장할 수도 없다. 그는 가면 밖에 없는 인간이다.」

미술에 있어서 도상학은 어떤 정해진 형태이고 상징이면서 어떻게 보면 약속이기도 하다. 도상학으로 우리는 그림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림안의 무수히 엉켜있는 인물들 중 누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다. 종교화 특히 기독교 회화에 있어서 도상학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림이고 뭐고 관심도 없고, 도상학? 그거 뭐지? 하는 사람일지라도 의외로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깊이 들어와 있다.

어떤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선한 눈동자에 적당히 마른 몸, 수염을 기르고 있는 남자의 손바닥에 못 자국이 있다면 그건 누가 봐도 예수이며, 손에 열쇠를 쥐고 있는 노인은 십중팔구 천국의 문지기 베드로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주로 파란색 옷을 입고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의 긴 머리는 창녀의 허영심을 상징한다.(비록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하얀 옷에 날개를 달고 있는 백인이 천사라면, 까만 피부에 뿔을 달고 있는 험악한 인상을 한 인물은 악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악마 : 얼굴 없는 가면’은 악마는 얼굴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까만 피부, 험악한 인상, 뿔, 갈고리 혹은 삼지창, 가늘고 긴 꼬리 등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그동안 많았지만, 사실 그것은 악마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예수와 마리아 등은 시각적으로 하나의 약속된 모양새를 만들어왔지만, 악마만큼은 도무지 형태를 짐작할 수도, 표현할 길 없었던 인간들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임의로 차용한 것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난 수세기동안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악마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보다 무척 복잡한 문제이며, 과연 악마는 실재하는 존재인가? 하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악마의 기원은 어디인가? 흔히 악마는 루시퍼라 불리는 천사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시퍼는  신에 의해 천국에서 추방당해 악마가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루시퍼는 원래 ‘빛을 가져 오다’란 의미의 새벽별, 즉 금성을 뜻하는 단어였다는 것이다. 새벽별이 사탄이 된 것은 이사야서 14:12의 한 구절에서 시작된다. “그대는 어찌 하여 천국에서 추락했는가. 오 루시퍼, 아침의 아들이여!” 이 구절은 한 독재자 왕이 욕심을 부리다가 실패하고 지하세계로 떨어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로, 독재자 왕이 빛나는 별로 은유되어 루시퍼가 되고, 독재자 왕이 악마와 동일시된 후 루시퍼는 악마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악마의 기원을 논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악마 역시 세상을 창조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꽤나 골치 아픈 딜레마이다. 신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으니 악마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을 인정한다면 신은 악을 창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런 신학적 논쟁 사이에 원래는 적대자를 의미했던 사탄이란 단어는 악마와 동일어가 됐고, 원래 악이 아니었으나 악을 선택한 반란천사를 등장시켜 루시퍼와 악마, 사탄이 거의 같은 의미가 됐다.

악마의 생김새가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알려진 것은 그리스의 목신 판, 사티로스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 그나마 알려진 것이었지만,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악마는 결국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뿔과 무시무시한 생김새를 가진 악마는 그리스 신화의 목신과 유사하고, 삼지창은 포세이돈이 들었던 것과 같지만, 악마의 모습은 사실 어느 시기, 어느 때라도 정해진 모습은 없었다. 어느 그림에서는 이집트의 신과 닮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어느 조각상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어느 때는 천사와 별다를 바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하고, 어느 때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김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습과 상관없이 미술에서 표현된 악마의 역할이며, 그 역할이 결국 악마가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악마는 실재하는 가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 결론짓고 있다.

오늘날에는 악마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지만, 사실 악마는 기독교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기독교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확고하며, 기독교에서 악마의 역할은 창조주, 천사, 그리고 죄인과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가진다. 미술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하기 힘든 창조주 대신 천사 또는 그리스도가 악마의 상대자로 나선다. 이때 악마는 그리스도의 유혹자, 신의 적대자, 천사에게 패배해 지옥으로 쫓겨 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지옥으로 쫓겨난 악마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옥을 관장하며 타락한 죄인을 벌주고 고통을 준다. 여기서 악마는 신의 대리인과도 같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신 대신 죄인에게 벌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악마의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용, 뿔, 꼬리 등 어느 하나 현실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악마가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라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악마가 죄인을 다루는 장면이다. 그것은 과거 기독교에서 이단을 처벌하는 모습과 닮아 있다. 갈고리, 화형, 뼈를 으스러뜨리는 기계 등에 의해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은 이단을 고문하고 처형하던 모습 그대로이다. 지옥이라 묘사된 그림은 결국 현실에서 벌어진 실제 현장이었고, 생생하다. 교회는 이단자를 악마라 했으며, 서로 반목하던 세력들은 서로를 악마라 지칭했다. 악마는 누구인가? 악마는 뚜렷하게 지어진 형태가 없는 것처럼 그 존재 역시 때에 따라 달라지고 다르게 규정되었다.

커다란 종교화이든 개인 소장의 작은 그림에서든 악마는 늘 존재한다. 그림 속에서 악마는 뚜렷한 특징도 없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려지고, 어디에서도 그 존재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주변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는 악마는 자체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반대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존재, 그것을 규정할 권력을 지닌 사람에 의해 정체가 결정되는 특이한 존재라는 것의 반영이다.

「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악마도 실재하지 않는다. … 역사적으로 악마는 자기가 반대하는 누구에게나 악마라는 딱지를 붙이고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 올 수 있는 도구였다. 그것이 악마의 용도였다. … 항상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 얼굴 없는 존재, 오로지 가면으로만 이루어진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악마는 가장 순수한 타자(他者)였다. … 그것은 악마성이라기보다는 인간성 자체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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