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신체 - 우리 몸이 들려주는 기이하고 비밀스러운 이야기
량얼핑 지음, 김민정 옮김 / 미래의창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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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물질주의 시대이다. TV 등 각종 매체에서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고 지속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다는 추세이다. 아름다운 얼굴을 갖기 위해 수술대에 눕는다. 턱을 깎고, 코를 높이고, 눈을 찢는다. 입술과 가슴을 부풀린다. 배의 지방을 녹인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돈을 쓰고, 획득한 아름다움을 이용해 돈을 번다. 성형과 화장, 다양한 미용술은 이제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 못지 않게 남성들도 아름다움의 대열에 합류한 지 오래이다. 웨이브 진 긴머리에 화장을 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은 남성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몇 년 전 아나운서 이금희 씨가 확 달라진 모습으로 TV 광고에 나타났다. 어머니 같고 누나 같은 포근한 이미지를 벗은 그녀는 몰라보게 아름다웠다. 저렇게 예뻤나. 사람들은 그녀를 다시 봤다. 뾰족한 턱선과 동그란 눈, 붉은 입술, 늘씬한 몸매. 그 즈음 이금희 씨가 한 인터뷰에서, 외모를 꾸미는 것보다 정신을 수양하고 지성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왔다고 했다. 그 말의 저변에서 나는 외모를 꾸미는 행위는 속물적이고 천박한 것이라는 굳어진 생각과, 훌륭한 인격과 지성으로 충만한 정신을 숭배하는 한 여성을 보았다. 이금희 씨는 얼마 뒤에 다시 푸근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확실히 그녀는 물질주의 시대에 역행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 자신의 믿음 대로 아름다웠다.

 

 

   그러면 시대를 역행해서, 1세기,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금희 씨와 같은 신념이 통상적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능력만 있으면 인정받는다. 이러한 신념은 실제로 사회에서 통하는 것이었다. 취업하기 전에 성형외과부터 찾는 요즘 세태와 비교할 때, 아마 그 시절을 '정신의 시대'로 이름붙여도 될 것 같다. 정신의 시대, 그 무형(無形) 숭배 시대에는 외양을 가꾸는 행위 자체를 천박하게 여기는 경향이 컸다. 그런데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어느 시대에나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외모를 가꾸어 왔다. 유물론, 유심론. 거창하게 들먹일 것도 없이,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고 인간 존재를 논할 수 없다. 정신만 있고 신체가 없다거나, 신체만 있고 정신이 깃들지 않은 인간 존재를 생각할 수나 있겠는가. 그것은 신체 아니라 시체가 아닌가.

 


   인간의 육신은 영혼을 감싸고 있고 영혼은 육신을 지배한다. 영혼과 육신, 이 둘이 함께하여야 진정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육체를 아끼고 보호하면서 우리네 영혼도 보호해야 한다. (279~280)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는 거대하다. 그 거대한 세계의 작은 귀퉁이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매혹의 신체. 매혹적인 제목이다. 그러나 매혹적인 신체라는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문제이다. 앞서 말했듯,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이고,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각의 믿음과 취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 여성들이 전족 속에 발을 가두어 작은 발로 기우뚱거리며 남성을 매혹했다면, 서양에서는 매끈하게 뻗은 다리와 발을 부각시키는 하이힐이 대세였다. 부르카를 베일처럼 덮어쓴 일부 아랍권 여성들의 검은눈에서 신비스러운 미(美)를 발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지하철 통풍구 바람이 펼쳐놓은 마릴린 먼로의 붉은 치맛단 사이로 드러난 쭉 뻗은 하얀 다리에서 관능미를 느끼는 이도 있다. 작고 가로로 찢어진 아시아 여성의 눈, 이를 테면 <화양연화>의 장만옥의 눈, 도발적인 고양의 눈매를 닮은 오드리 헵번의 눈은 각각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보는 이를 매혹한다.

 

 

   소말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패션모델 '와리스 디리'는 자신의 책 <사막의 꽃>에서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그녀가 겨우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고향의 풍습에 따라 음핵 절제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취제도 없이, 소독도 하지 않은 칼을 든 무속인이 거행하는 할례 풍습은 여성의 성욕이 죄악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여성의 중심 성감대라는 음순과 음핵을 제거함으로써 성욕을 감소시키면 죄업을 줄일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녀의 고백으로 세계는 경악했다. 나도 경악했다. 신체 일부를 훼손당하는 고통도 끔찍하겠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욕을 죄악이라고 여기는 믿음 또한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역으로, 그들 또한 우리의 문화, 나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분노와 경악이 조금 누그러졌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상할 때 가장 중요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매혹의 신체>는 확실히 매혹적인 책이다. 신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 존재의 다양한 문화와 그들만의 믿음, 아름다움의 기준 따위가 어지러운 향기를 뿜으며 읽는 이를 매혹한다. 각각의 문화, 아름다움의 조건에는 시대와 역사의 영향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매혹의 신체,라고 해서 신체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충족하는 신체와 그에 어울리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진정 아름다운 존재일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어올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무엇인가요.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했다. 당신이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지금 당신 자신에게서, 신체와 정신 안에 깃들어 있는 그 아름다움부터 발견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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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닿기를 소망한다 - 따귀 맞은 영혼들을 위한 관계의 심리학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박규호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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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리학 관련 서적은 매력적이다. 읽고 있으면 이건 바로 내 이야기인데, 내가 이런데,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 때때로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너에게 닿기를 소망한다>는 뜻밖에(?) 이전에 정말 감명 읽게 읽은, 그러면서도 상당히 울적한 감정에 휩싸였던 책 <따귀 맞은 영혼>의 글쓴이였다. 글쓴이 약력에 무심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혹 과거를 부정하고 싶은 얼렁뚱땅의 유형인가. 땍도 없는 소리를 주워섬긴다. <너에게 닿기를 소망한다>에서도 나는 공감과 당혹함을 금치 못한다. 끌리면서도 일면 멀리 하고 싶은, 손이 가다가 멈추는 책이 내게는 '심리학 서적'이다. 너에게 닿기를 나는 소망할까?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나르시스를 '읽으면' 나는 마치 내 이야기인 듯 몰입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고, 주위 반응도 썩 호감은 아닌 것을 보면 '나르시스'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인물인가 보다. 그래도 종종 나는 '나르시스'를 흉내낸다. 자아도취가 없다면, 물론 자존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당연하지만 그러한 자기 최면이라도 있어야 몰인정한 관계에서 버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가져 본다. 특정 상황에서 뿌리까지 휘청이는 '자신'을 경험할 때 멀리서 메아리가 울리는(이명일 뿐이지만) 듯, 뒤돌아본다. 메아리를 경험할 때마다 고개를 뒤로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를 기대하는 심리일지도, 그러나 허망하다. 누구도 부르지 않은 나이면서, 동시에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바라는 것은, 그렇다. 그냥 욕심일 뿐이다.

 

2.

 

  <너에게 닿기를 소망한다>는 '눈치'에 대해서 피력하고 있는 듯하다. 고래로 사람은 사람이 있든 없든 늘 한결같은 행동, 몸가짐이 중요하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데, 굳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그럴 필요야 있을까. 없는 곳에서는 그 공간에 마땅한 행동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즉 <너에게 닿기를 소망한다>는 관계 심리를 다루고 있는데, 눈치를 얼마나 많이 보고 있고, 어떤 행태로 인정받기를 원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안정적인 자존감을 지진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잘 알고 관심과 인정을 긍정적으로 이용할 줄 알며 또 이를 즐긴다. 반면에 자존감이 약하거나 불안정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감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타인의 관심과 애정을 필요로 한다.(8/ 머리글)

 

  이 책은 나르시시즘의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열등하고 의기소침한 방식이나 허세적인 방식'으로 구분하는데 '열등적인 나르시시즘'과 '허세적인 나르시시즘'이다. 극과 극은 상통하는가. 그러나 상극과 대면할 때 반응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유형에 내가 포함될 때에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당혹감을 경험하게 된다. 관계 속에서 '나르시시즘'이 어떤 형태를 띄는지에 대해서 <너에게 닿기를 소망한다>는 자세히 보여주고 있고, 그래서 쉽게 몰입된다.

 

3.

 

 늘 꿈을 꾼다. 누군가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저변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나'일지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과연 있을까.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실로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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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꿈을 주는 현대인물선 6
박선민 지음, 박준우 그림 / 리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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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에 물 건너 남의 나라에는 관심이 없는 터라 나는 그 유명한 오프라 윈프리도 최근에, 그가 진행하던 쇼가 막을 내리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를 통해서 그의 한 생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흑인이고 1950년대 출생한 여성 방송인,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수준의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불운한 유년을 거침없이 방송에서 이야기하던 순간, 나는 그 방송을 본 적이 없다. 그가 사회 각개의 일상적(?)인 범죄에 대해서 쇼를 진행할 때도 나는 그와는 전혀 별개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를 읽게 되었다.

 

  표지 그림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면 어떤 의미를 지닐까. 박선민 씨가 쓴 이 책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이야기체로 구성된 전기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래서 한 자리에 앉아 금방 읽어낼 수 있는, 쉽게 씌어졌다. 곧곧에 삽화가 곁들여 져 서술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데, 그 그림체가 투박하면서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의 성공적인 일대기에 대하여,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된 독자층은 초등학생이거나 중학생 정도, 그리고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서 나처럼 전혀 문외한일 경우에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에 대해서 상당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다소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장기간 진행해온 쇼를 그만두고- 나는 이 사실에 제법 놀랐다. 더 오래 그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라는 예상에는 물론 근거가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앞으로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갈 지에 대해, 그의 행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존의 유통되는 정보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두었으면 한다. 반면에 나와 같은 사람, 즉 윈프리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정보를 얻어온 사람일 경우 그의 가족사, 학사 내역, 취업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윈프리는 흑인 해방 투쟁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이 말은 아마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와 일면 상통하기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기를 이기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써 세상을 구분하면서 능동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환경(과거)'에 원망하는 일이 어리석음을 설파하고 있다. 멋지다. 흑인으로서 미국사회에서 성공하기까지 겪었을 수많은 고초에 대해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무엇인지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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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 카렐 차페크 희곡 10대를 위한 책뽀 시리즈 4
카렐 차페크, 조현진 / 리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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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봇, 로봇 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로봇 얘기를 꺼내기 전에, 로봇(Robot)이라는 말의 본뜻부터 알고 넘어가야겠다. Robot - 로봇은 체코어로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라는 뜻이다. 이미 우리 생활 전반에는 다양한 로봇들이 인간의 고된 노동을 대신해주고 있다. 빨래는 물론 자동건조까지 해주는 세탁기부터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알아서 청소를 해주는 로봇 청소기도 널리 보급되었다. 로봇 청소기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꽤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신기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가구와 벽을 알아서 피하고, 먼지 있는 곳을 찾아 혼자 청소하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사람들은 무척 바쁘다. 돈 벌기도 바쁜데 잡일까지 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그래서 잡다한 일을 대신해주는 로봇의 등장은 참으로 편리하고 고맙기까지 하다. 그런데 과연 좋아하기만 해도 될까. 분명 우리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대신에 다양한 질환들이 생긴다. 의자에만 오래 눌러앉아 있어서 척추는 휘어지고, 성냥갑 같은 건물 속에 스스로를 가둔 창백한 인간들은 다양한 스트레스와 신경증, 두통을 호소한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땀 흘리는 참된 노동의 가치가 재조명되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제 인간은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 고통을 느낄 일도 없어요. 그저 즐기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오, 이건 저주 받은 낙원이에요!

 

                ㅡ <제1막> 알뀌스뜨의 대사

 


   체코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카렐 차페크는 이미 약 100년 전에 로봇이 인류에게 미칠 해악을 우려했던 것 같다. 1920년에 씌어진 그의 희곡《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R.U.R》은 로봇과 인간의 필연적 대립을 통해 노동의 참된 가치와 인간 생명의 귀중함을 환기시키고 있다.

 

 

   로숨 유니버설 로봇 회사의 사장 도민과 임원들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해주는 로봇들을 세계 각국에 보급시키는 한편, 전쟁을 위한 군인 로봇까지 개발하기에 이른다. 인권연맹의 대표자 헬레나는 로봇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로봇 회사에 대항하지만, 로봇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보고 있는 세계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만다. 로봇 회사와 헬레나의 열띤 토론으로 이루어진 제1막이 끝나고 2막에서는 로봇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로봇들은 세계의 주인이 되고 싶은 야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인간들의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로봇 무리를 선동한 라디우스의 대사는 충격적이다.

 


   만국의 로봇들이여! 많은 인간들이 쓰러졌다. 공장을 손에 넣은 지금, 우리는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인류의 시대는 끝났다. 로봇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

 

                           ㅡ <제2막> 라디우스의 대사


 

   그리고 제3막. 지상의 모든 인간들은 로봇에 의해 사라진다. 아니, 알뀌스뜨만 빼고. 로봇들은 번식과 영원한 삶의 비밀을 알기 위해 단 한 명의 인간 알뀌스뜨를 남겨둔다. 알뀌스뜨는 인간이 만든 로봇이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닮아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들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삶을 사랑하며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를 지키려는 고결한 마음, 즉 '사랑'을 품은 로봇들에게 그들만의 낙원을 찾아가라고 이르는 알뀌스뜨. 그의 독백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자연이여! 생명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오! 친구들, 헬레나 여사! 생명은 사라지지 않을 거요! 생명은 사랑과 함께 다시 시작될 거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되어 사막에 뿌리를 내리겠지! 그 생명들에게는 우리가 만들었던 모든 것, 마을과 공장, 예술, 철학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겠지. 하지만 생명의 불은 타오를 거요! 단지 우리들만 사라져 갈 뿐이지! 우리의 건물과 기계들은 낡아 망가질 테고, 우리가 만들었던 위대한 체계들도 낙엽처럼 떨어지겠지. 그러나 오직 사랑만은 이 폐허 속에서도 꽃을 피우리라! 그리하여 생명의 작은 씨앗을 바람에 실어 보내리라!

 

                                  ㅡ <제3막> 알뀌스뜨의 마지막 독백

 


   알뀌스뜨의 마지막 독백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만이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불행과 해악. 만물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는 인간의 아둔함과 위험한 욕망을 환기시킨다. 우리가 잊고 있던 귀중한 생의 가치들과 잃어버린 인간성을 돌아보게 해준다.

 

 

   아까 하다 만 로봇 얘기를 해야겠다. 로봇의 어원에 대한 얘기.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라는 뜻의 이 말은 카렐 차페크의 본 작품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로봇(Robot)'이란 말의 유래가 된 작품인 셈이다.《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은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진짜 인간을 닮은 로봇들이 구상되었고, 또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로봇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로봇과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볼 때인 것 같다.《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은 그 생각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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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여행책 - 휴가없이 떠나는 어느 완벽한 세계일주에 관하여
박준 지음 / 엘도라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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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면 좋겠지만

성공이 아니라면 실패라도 해야 한다.

미련이 없어야 다른 길도 찾는다.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인간은 조금씩 더 아름다워진다. (95쪽/책여행책)

 

  <책여행책>. 제목에서 언뜻 다른 책이 떠오른다. 그렇다. <책그림책>. 그러나 제목 이외에 다른 공통점이나 유사점은 발견하지 못한다. 아니다. 진한 감동을 받는다는 것. 그것도 책을 통해서 다양한 시각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비슷한 제목을 띄고 있는 두 책 사이의 공통점일 것이다.

 

  한 유명인사는 말한다. 개인사적 이야기는 좋지 못하다. 특히 개인적인 경험을 자신의 목소리로 하는 것은 더욱 좋지 못하다. 그의 발언은 교육적, 즉 정답을 찾는 질문지에 해당되는 소리이다. 사적 체험의 무의미를 언급할 때 나는 종종 불편함을 느낀다. 책 한 권 읽고 '감상문'을 적는 것이 어느덧 그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정답 형식으로 적어야 한다고 소리할 때 속간지러움에 견디기가 힘들다. <책여행책>에서, 나는 '감상문'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책의 깊이나 수준을 감히 평가하는 논객이 될 수 없다. 나는 <책여행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제목이 주는 분위기, 즉 여행을 자주 다녔던 길 위의 생활을 떠올렸고, 홀가분하게 떠나기가 멋쩍은 현실상황에서 여행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싶은 욕심이 발동하였다. 분명 <책여행책>은 여태 읽어온 여러 여행서와는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간간이 여행서적(강석경의 인도기행,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등)이 직접적으로 언급될 때에는 다른 여행서와는 차별되는 독특한 매력을 이 책은 발산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두 가지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책의 직접적 묘사부분을 감상하면서 나는 한때 그 책들을 읽어가던 그 분위기로 젖어들었고, 색다른 감성을 그 책들을 회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책여행책>은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글쓴이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글쓴이가 앞으로 할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이 책은 이야기책이다. 소설과 같은 가상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이 아닌, 담소형식의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다.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는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여행은 곧 노숙, 혹은 낯선 지역 찜질방 사우나에서 일박하는 정도로 그저 하나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번도 나는 여행 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행위'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로 반성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행위' 그 자체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무작성 (차로) 달리는 것, 그 순간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리고 관계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행위, 그것이 여행이었다.

 

  <책여행책>에서는 글쓴이가 생각하는 '여행'에 대해서, 그가 얼마나 숙고하고 있는지를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행위"로 정의한다. 시간적으로 여행으로 보내는 시간이, 일상 생활보다 더 적음에도 주를 여행으로 단정짓고 있는 셈이다. 글쓴이는 '나이'에 따라 여행을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을 언급하는데, 상당히 공감되었다. 마흔 줄에 이른 글쓴이는 서른을 호평가하고 있지만, 삼십 중반에 다다른 나는 좀 다르게 이 나이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나이'에 따라 여행 중 경험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십 대 여행에서 느꼈던 그 많은 감성이 삼십 대에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무심심한 풍광에 이십 대의 그 감성이 약간, 아주 약간 그리울 뿐이다. 그렇다고 그 풍랑 속으로 다시 나를 밀어넣고 싶지는 않다.

 

이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여행을 하는 데

나이는 상관 없지만

무엇을 느끼는가는

나이에 따라 다르다.

 

  세상을 한 권 책으로 명명한 '아우구스티누스'. 그를 머리말에 인용한 글쓴이의 선택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한 권의 책,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을 뿐'.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을 모른다. 대신 내가 한때 끄적였던 글귀가 있다.

 

세상은

거대한 책

읽기가 싫어 마냥 덮어 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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