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유는 없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실감을 포기하지 않는 것. 숨가쁘게 달리면서도 문득 뭔가를 놓친 것처럼 뒤돌아보는 것. 깨진 돌의 모서리에서도 인간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이 숙고와 침묵, 거기 숨겨진 빛을 가진 캄캄한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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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목,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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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서

 

 

   나는 저 발자국이 몸으로부터 아주 끊어져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몸은 없는데 무게만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그러나 저 발자국마다 당신이 서 있다면나는 영원히 당신을 떠날 수 없겠지요그래서 어떤 비는 지워진 밤을 위해 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둥둥 떠내려가는 어둠이 상갓집 신발처럼 우리를 흩어놓는다고 느끼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취한 건 아닙니다.

 

   아아 정말,

 

   뭔가 밀실을 엿보는 기분이랄까마지막으로 관을 열었을 때반듯이 누운 아버지가 꼭 열쇠처럼 보였어요.

사람을 묻고,

   별들이 한바퀴를 돌면 세계의 단단한 지평선이 모두 열릴 것 같았어요.

 

   잘 들어갔다고,

   답했다.

 

   전철을 반대로 타고 여섯 정거장을 달렸지만 우리는 늘 전파의 거리를 줄이거나 늘이면서 잘못 든 길을 달리는 중이고,

   어디에 내려도

   거기가 도착지는 아니니까잘 들어갔다고 믿으며

   돌아간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잘 지낼 수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우리라서,

 

   아침이면 차창을 스쳐가는 나무들이 단 한번 죽음을 주인으로 모시고

   밤처럼 꼭 감은 눈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방울씩 받아주는 때가 온다.



- 신용목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중에서 시 <우리라서>전문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잘 지낼 수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우리라서,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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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것을 빨리 썼든 천천히 썼든, 무릎 위에 놓고 썼든 탁자 위에서 썼든지 간에, 넌 네 속에 있는 것만을 쓸 수 있었을 뿐이야. 그뿐이야. 네가 좀 더 생각을 했더라면 그런 말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넌 가면을 쓰지 않은 채 그 말을 쓴 거야. 그렇게 해서 적어도 우리는 네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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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 『농담』 3부 루드비크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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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쓴 말들을 읽을 때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하고 넘길 때도 있지만 더러는 상처받기도 한다.


반대로 내가 가면을 쓰지 않은 채 어떤 말을 쓰게 될까봐 마음졸일 때가 있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에 대해 격한 불호의 평을 눈앞에서 듣게 된 적이 있는데, 표현은 못했지만 굉장히 마음이 상했다. 물론 내가 그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표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었겠지 하고 위안했다. 표현했어도 그 애는 그렇게 말했을까. 오랜 일이지만 어제 경험한 일처럼 선명한 탓에, 불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백이면 백 망설이게 되었다.


망설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내 말에 상처받을 사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면을 쓰지 않은 나를 들키기 싫어서다. 그런 말을 쓰지 않을 수 있는 건 좀 더 생각을 했다는 것일테니 말이다. 생각이 짧은 나를 들키지 않으려고, 부족하고 얄팍한 내공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렇게 해서 적어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하나의 농담으로 시작되어진 한 남자의 모진 인생을 읽는데, 나를 돌아보게 되니 얼떨떨하다. 1948년 2월 혁명 후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의 체코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럴 수 있다는 것 역시 놀랍다. 세계문학의 재미에 이제야 발을 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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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농담』만큼 재밌는게 없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정말 그렇다.
루드비크에서 헬레나로 넘어오니 이런 재미가 있구나 싶고,

또 루드비크 시점으로 넘어가는 3장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흥미진진해하며 읽고 있다.

오늘의 필사는 2부 헬레나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담았다.


그러나 특히 그가 모라비아 출신이며 침발롬이 있는 민속 악단에서 연주한 적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나는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라이트모티프가 다시 들려왔다,
멀리서 나의 젊음이 내게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로 내가 무너져 가고 있었다.


- 2부 헬레나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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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면 종소리가 들린다'는 표현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싶어 감탄했다.
tvN 드라마 '도깨비' 방영 전에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을 시집에서 읽고 멍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가, 소설이 그저 활자에 그치지 않고 내게로 걸어오는 순간이 있다면 이런 때구나 싶었다.

이후에 도깨비에서 이 시가 나오는 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좋은 시를 알게 되어 다행이다 했다.

나는 그만큼의 영향력이 있지 않은 사람이라 이 구절을 널리 알릴 수 없겠지만,

농담에 이런 구절도 있다고 이 넓은 우주에 종이 비행기 하나쯤 날릴 수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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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읽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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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보다 이 책이 잘 맞는 건지,

민음북클럽 손끝으로 문장 읽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잘 읽고 있다.

첫번째 필사로는 이 구절을 소개한다.


(나는 코스트카의 이런 다른 점을 좋아했고, 그와 논쟁을 하면, 나는 정말 누구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 밀란 쿤데라 『농담』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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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이런 친구가 있어서 그런지 내 이야기 같았다.
영화부터 시사까지 그날의 대화 주제에 대해 담론을 펼치곤 하는데, 생각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릿 속에서 내 생각이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혼자 생각할 땐 그냥 찰흙 덩어리를 가져다둔 기분인데,

담론을 하다보면 그 찰흙 덩어리를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 모양을 내는 것 같달까.

친구가 지난 대화에서 "너랑하는 대화는 분야가 다양해서 재밌어" 했는데, 기분이 좋았다. 꾸

준히 읽고, 보고, 끝까지 쓰는 삶을 살며, 시간이 지나도 그런 친구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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