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황정은, 일기 日記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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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에 제 얼굴을 준다. 관련된 두 단어를 연결하는 퀴즈처럼 나의 존재는 이름과 일대일로 매칭된다. 이름이라는 명사가 '무엇이라고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이르다'에서 파생된 것을 생각해 보면, 명칭만으로도 부르는 사람이 대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가늠할 수 있다. 결국 이름을 듣고 당사자를 떠올리는 일이란 그의 유일함을 되새기는 것과 같다.

(p.91)

그리고 <런 온>을 봤을 때 짜릿하고 통쾌해서 정수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젠 "공부를 좀 하라고. 젠더 감수성."이라는 말을 가볍게 던지는 인물(서단아)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재야에 숨은 여성 축구 코치, 대기업의 유능한 여성 실장, 엄마 몰래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여자 고등학생, 세계 랭킹 1위 여성 골퍼 사이에서 시대착오적인 농담과 장치는 살아남을 턱이 없었다. 모든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를 사수하고, 의지대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세계가 바로 <런 온>에 존재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여성 서사가 양적 개선을 뛰어넘어 질적 개선으로까지 성장을 이룬 것이다. 더 놀라운 건 OTT 플랫폼에서 자막을 켜고 <런 온>을 시청할 때였다.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라'. 노라가 누구지? 등장인물 리스트에도 없는 이름이었다. 궁금하던 찰나, 실체를 알게 됐다. 바로 등장인물들이 자주 가는 카페 여성 사장의 이름이었다.

같은 방송국에서, 같은 해에 방영되었던 <부부의 세계>는 여우회 회원으로 등장했던 조연들의 이름을 이렇게 명시했다. '최회장 아내', '공지철 아내', '차도철 아내'. 조연이었지만 비중이 아주 적진 않았다. 오히려 최회장과 차도철의 얼굴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극이 끝날 때까지 시청자는 이들의 이름을 영영 알 수 없었다. <런 온> 또한 조연들을 역할의 기능으로서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라'가 아닌, '카페 사장'이라고 기재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런 온>은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이름을 새겨 넣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않아도 이건 <런 온>의 규칙이었다.

(p.131-132)

📚어제 그거 봤어?, 이자연, 상상출판, 2021

원에게 추천을 받아 읽게 된 책. '네가 좋아하는 신입사관 구해령과 런 온에 대한 글이 있더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에 예약을 걸었는데, 이전 대출자가 빠르게 반납해준 덕분에 금방 빌려볼 수 있었다.

비단 TV 뿐만 아니라 나는 영화나 공연을 볼 때도 여자의 이야기를 유심히 본다. 영화는 그래도 독립영화 쪽에서 여성의 이야기가 많은 편인데, 공연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애써 젠더 프리로 길을 열어놔도 다음 시즌엔 다시 문이 닫힌다. 그래서 레드북이나 아가사처럼 온전히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세상에서, 나를 말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줄 안나와 남들이 제 아무리 최고의 '여류 작가'라 불러도 자신을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라고 칭하는 아가사. 이렇게 단단하고 유일한 여자들을 만날 수 있어서 즐거운 2021년이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드라마만 언급했지만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글도 많다. 총 29편 중에 8편만 보았고, 21편에 대한 글은 그냥 읽었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며 드라마 '블랙독'과 '스토브리그'를 더 늦기 전에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연말엔 나의 인생드라마 '런 온'을 블루레이로 정주행 해야지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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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 : 그 모든 것이 선생님이 미래의 작가가 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요?

뒤라스 : 난 나를 짓누르는 침묵을 말하게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열두 살 때인가, 오직 글쓰기만이 방법인 것 같았죠.

(P.24)

토레 : 글쓰기와 현실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나요?

뒤라스 : 모든 작가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기 자신에 관해 써요. 그들 인생의 핵심 사건인 그들에 대해. 마찬가지로 작가가 언뜻 그에게 낯선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건 늘 그의 자아, 그의 강박과 연관돼 있죠. 마찬가지로 꿈도―프로이트가 말했듯―우리의 에고이즘만을 드러낼 뿐이고요.

작가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어요. 하나는 하루하루 그를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표면적인 자아의 삶, 다른 하나는 늘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휴식을 주지 않는 진정한 자아.

(p.95)


요즘 뮤지컬 '아가사'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 위 구절이 눈에 들었다. 낯선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건 늘 그의 자아-강박과 연관되어있다는 이야기.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휴식을 주지 않는 진정한 자아 이야기.

뒤라스의 말과 아가사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감상이 좀 더 풍부해지는 느낌이 든다. 뒤라스의 말을 읽을 땐 아가사를 생각하고, 아가사를 볼 땐 뒤라스의 말을 생각하는 2021년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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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눈들은 꽃이 되겠지. 새하얀 꽃들이 늙은 나무를 뒤덮으면 마르고 갈라진 나무껍질은 보드라운 꽃잎에 가려 보이지도 않겠지. 벅차게 흐드러진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며 코끝에 매화 향이 날아오는 듯했다. 바람이 불면 새하얀 꽃잎들이 나비처럼 팔랑일 것이다. 그러다 못 이기고 한꺼번에 떨어져 함박눈처럼 흩날릴 것이다.

그때 하얀 눈송이 하나가 날아와 가지 끝에 앉았다. 꽃잎 같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송이들이 느리게 내려오고 있었다. 눈이 꼭 꽃 같네, 꽃잎 같네. 언니는 꽃이 지기 전에 오라고 자주 말했었다. 꽃이 피어 있을 때도, 꽃이 다 떨어진 후에도 그랬다.

이제 알겠다. 금주 언니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

(p.44-45)

좋아하는 시인의 시에서 인중에 대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천사들이 배 속 아기에게 세상의 모든 지혜를 가르쳐 준 후 다 잊고 태어나라고 아기의 입술 위에 쉿, 손가락을 얹는데 그때 인중이 생긴다는 이야기. 손을 들어 인중을 더듬어 보았다. 분명 다른 세계에 다녀왔지만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그 세계의 빛이 깃들었음을 안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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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네 번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네 개의 말투로 매일 다른 인사말을 건네는 게 아닐까요.

(p.18)

종이를 좋아하는 만큼 책을 좋아합니다. 종이를 좋아하는 이유 여럿을 곱한 만큼 책을 좋아해요. 책은 쌓기 좋고, 꽂기 좋고, 마주 보기도 좋지요. 책에 붙는 동사에는 읽다, 보다, 모으다, 사다, 놓다, 꽂다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어울리는 동사는 역시 '펼치다'입니다. 펼쳐야만 비로소 마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책은 매번 알려줍니다.

(p.84)

가을에는 온 동네가 노란색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노란 기운이 낮게 깔립니다. 푸른색으로 가득하던 나의 동네를 한 순간 노랗게 마주할 때, 색을 쓰는 건 이 세상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p.113)

주변에 소중하고 친한 사람 몇 명만 두어도, 1년간 선물을 고르며 지내게 됩니다. 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일렁이는 설렘을, 여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활기찬 기운을, 가을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잔잔한 마음을, 겨울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따뜻한 온도를 선사하고 싶어집니다. 가끔씩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는 생일과 다른 계절의 물건을 골라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음 해가 되면 결국 계절에 맞는 선물을 고르게 됩니다. 계절에 맞춰서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느지막이 듭니다. 일단 지금을 잘 보내자, 하루씩, 한 계절씩 잘 살자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p.140)

지금 좋다고 느끼는 것 앞에서 머뭇거리면, 다음에는 똑같은 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지금은 늘 가던 여행지에 갈 수 없고, 바다 건너의 친구를 만날 수도 없지요. 안타깝게 놓쳤던 다음들을 떠올리면 고개가 숙여지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에 버금가는, 어쩌면 지금 안에서 으뜸인 하루를 이제부터 찾아보려고 합니다. 어느 때를 살든 더 이상 머뭇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는 내일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같은 자리에서 만날지 모르니 매일 작은 간식을 챙겨 다닙니다. 다음에 주는 게 아니라 우연히 만난 오늘 줄 수 있도록요.

(p.153-154)

카페에서 낯선 잔들을 만납니다. 했던 걸 또 하길 좋아하고 한 가지만 고집하는 성향이다 보니 카페에서 남이 골라준 잔 덕분에 미처 몰랐던 취향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내가 주문한 건 음료지만, 그것이 담긴 잔까지가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좋구나 하면서, 좁디좁은 취향의 칸은 바깥에서도 충분히 넓어지고 있습니다.

(p.167)

저는 날씨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날씨 이야기를 매일 나누는 일이기도 해요. 매일의 이야깃거리를 차려주는 날씨가 고맙습니다.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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