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단단한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타인의 아침이 막연하고 낯설 만큼, 각자의 일상이란 견고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작은 균열 하나에 쉽게 무너지는 것이기도 하다. 별 다른 일 없이 반복되는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너무나 단단해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일상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일은 그래서 필사적이고 절박한 일이다. 일단 쳇바퀴에 올라 탄 이상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하고 그것이 쳇바퀴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일 뿐이다.

“절망은 허망이다. 희망이 그런 것처럼.” 루쉰은 말했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이건 어딘가 조금 잔인한 농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희망이 없는 대신 절망도 없다면 그러한 세계의 허망한 정도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달래듯이 말해본다. 어떻게든 시간은 또 흘러갈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과 그럼에도 별로 나아질 건 없으리라는 비판 사이에서 그럭저럭 대충 살고 싶다고 말하는 한편으로 무언가에 전력을 다하는 삶.

일상에서 벗어나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아름다움. 현실 세계를 초월해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숭고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라고 한다. 내가 가진 미의식이 남다를 리 없겠지만 나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그것의 허망함을 알면서도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에게서 숭고함을 느낀다. 나 혹은 누군가의 일상을 지켜낸다는 것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고, 약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는 것은 아무래도 크고 위대한 일이다. 언제나 각자의 숭고함이 안녕하기를.

밤이 늦었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김민영, 농담과 그림자 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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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물을 주고 볕을 준 데에 보상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글쓰기를 배울 때에도 그렇게 배웠다. 해피 엔딩 새드 엔딩이 중요한 게 아니고, 다만 항상 진전시켜야 한다고. 전통적인 내러티브를 파괴하는 작품을 다루는 수업을 들을 때에도 내러티브가 아닌 무언가, 그게 형식이건 감정이건 간에, 무언가는 반드시 진전되어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전 페이지가 이 페이지와 정확히 똑같은 내용일지라도 그 반복은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데에서 기인한 전진을 일으킨다. 어디로든 가기는 가야 한다.

(p.108)

미소는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하고 담배를 문다. 스카치 위스키가 튤립 모양에 스템이 있는 유리잔(꼬냑 잔이 보통 이렇게 생겼다) 벽에 금빛 물방울 자국을 남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에선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 내내 미소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이느라 고단했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안도했다. 주인공의 인생이 피곤하기는 해도 살아지기는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들도 나처럼 포기할 수 없는 작고 비싼 것을 하나씩 간직하고 살고 있다는 점에서.

(p.14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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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일을 쓰는 것은 싫은 일이다. 싫은 일을 읽는 것도 싫을 것이다. 하지만 사는 일은 싫은 일 없이 살아지지 않는다. 싫은 일은 흔하고 좋은 일은 드물다. 하지만 사는 일은 좋은 일 없이 살아진다.
(p.60)

사랑이라는 감정은 좋은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에 관해 말하든 법에 관해 말하든 분노나 용서에 관해 말하든 사랑을 빠뜨린 적이 없다. 사랑이 결여된 인간은 정치도 법도 분노도 용서도 올바르게 행할 수 없다. 사랑으로 그것을 다룰 때 인간은 이 세계에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정치와 법을 세우고 분노와 용서가 인간을 장악하지 않을 수 있도록 계도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마사 누스바움의 주장이다(사실상 호소에 가깝다). 나는 그 사랑 때문에 마사 누스바움의 모든 저작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이 결여된 채로 이 세계를 건설하고 통치한다. 사랑 말고 다른 많은 것이 이 세계를 장악하는 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p.63)

내가 살아온 날들에 하루도 같은 것이 없다면 나와 날씨일 것이다. 나와 날씨가 하루 아니 한 순간도 같은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 멀리서 하얗게 엎어진 파도가 넓은 품으로 밀려와 내 발끝을 적시는 것 같다. 기억하자. 일생을 다해. 나와 날씨는 한순간도 같은 적이 없다는 것을.
(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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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장수양 시인의 글이 그랬던 것처럼 유진목 시인의 글도 시보다 산문을 먼저 읽었다. 시와 산책 이후로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어서 작가님의 또 다른 산문을 읽고 싶기도 하고, 시는 어떻게 쓰실지 궁금해서 시를 읽고 싶기도 했다.

연초에 부산에 갔을 때 손목서가에서 둘러 본 서가의 인상이 생각나기도 했다. 단단하고 우직한 느낌의 서가였다. 나는 그날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구매했는데,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책걸이 옆에 놓인 환상의 빛의 구절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야 한다. 그때는 엄마와 같이 살자."

힘들 때 찾아간 것은 아니었으나, 시간이 흘러 힘든 순간이 오면 다시금 찾아가 서가에서 주는 기운을 받고 바다를 보며 커피 한 잔 하고 와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서점이었다.

드문 좋은 일이었던 그날의 부산이 그리우면 이제는 유진목 작가님의 책을 펼쳐야지 싶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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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지는 채로 인생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인생에는 나아지는 순간이 있지만 그 순간이 짧다는 게 문제다. 각성과 반성이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 후에도 인생의 실패는 여전하다.
깨닫고 자책하고 새 삶이 열리기를 기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순간만 그렇다. 삶은 부메랑처럼 언제나 돌아간다. 자기만 알고 상처를 주고 망쳐버리는 데 익숙한 바로 그 순간으로.

-『술과 농담』 p.28
편혜영, 몰(沒) 9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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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는 슬픔이나 우울 같은 감정은 잘 감췄지만 기쁜 마음은 감추지 못하는 편에 속했다. 아마도 마음에 드는 잔을 발견하곤 들뜬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슬픔을 다루는 방식엔 나름 일가견이 있지만 기쁠 때 어쩔 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그건 그동안 기쁜 일이 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경험 부족. 말하자면 기쁨 부족. 나는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기쁜 거랑 행복한 게 다르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몰라"라던 보라의 말을 곱씹곤 했다. 이어지던 보라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도.

-『술과 농담』 p.141-142
이주란, 서울의 저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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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흔하고 당연한 일이며 영화라는 매체의 전형적인 속성에 불과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놀라웠다. 배우라는 인간의 동일성이 시간의 흐름(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의 변천과 연결된 의미에서)과 배역에 따라 현재에 재편성되어 도래한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이런 즐거움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 배우가 그 배우야, 그 배우가 그 배우였어, 라는 식의 대화를 멈출 수 없고 그것이 영화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p.14)

나보코프는 정말로 진지한 소설에서는 진정한 갈등이 여러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벌어진다고 말했다.

(p.2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을 생각할 때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작품은 늘 전체와 함께하며 또한 이것이 단순히 삶의 특정 사건과 작품을 연결시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작품을 쓸 때 우리는 삶을 쓰는 것이며 그 삶은 다시 작품을 쓰고 작품은 다시 삶을 쓰며 삶은 다시 작품을…….

(p.26)

미식은 즐거운 일이지만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미식은 행복의 척도다. 그들의 선택은 존중한다. 다만 미식을 즐기는 사람들은 너무 거만하거나 오지랖이 넓은 경우가 많다. 미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는 양 취급한다. 이건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여행을 싫어한다구요? 오, 어쩜…… 저런……. 나는 여행에도 미식에도 취미가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예술뿐이다…….

(p.60)

출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긴 강연 시간으로 유명하다. 한번은 부산의 백화점 문화센터에 강연을 갔다. 영화의 전당도 생기기 전, 영화를 사랑하지만 기회가 많지 않았던 반백 명 내외의 시네필들은 강연을 듣기 위해 문화센터에 모였다. 이른 저녁에 시작된 강연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됐고 백화점 건물 전체의 마감 시간인 11시가 되었다. 경비원이 말했다. 이제 셔터 문을 내려야 한다고, 지금 문을 내리면 내일 아침 6시까지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고. 정성일은 말했다. 저는 아직 영화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저와 함께할 동지가 하나라도 있다면 강연을 계속 하겠습니다. 우정의 이름으로. 한 명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경비원은 셔터 문을 내렸고 강연은 계속 됐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청중 한 명은 후에 그 사건을 이렇게 회고한다. 새벽 4시쯤 되었을까요, 사람들 대부분 곯아떨어졌고 저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네요. 동이 텄고 문화센터의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겨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습니다. 모든 사람이 잠든 방 안에서 오직 한 사람, 정성일만이 강연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 위로 아침 해가 만든 후광이 빛났습니다…….

(p.75)

최근에는 바디 럽이라는 베개 회사에서 상금 1000만 원이 걸린 잠 안 자고 오래 버티기 대회를 열었다. 주최 측은 대회가 시작되고 10시간 뒤 버티는 참가자들을 보내버리기 위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상영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 대회장에서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고. 망할 롱테이크!

(p.77)


미식과 여행 이야기 완~전 공감하며 읽었다. 살면서 거긴 꼭 가봐야 한다느니 그건 꼭 먹어야 한다느니... 그들에게 나는 여러모로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 회도 안 먹어서 횟집으로 회식 갈 때도 오, 어쩜...저런...을 회식 끝날 때까지 듣는 사람이 나야 나(›´-`‹ )💦

누군가에게 이 책을 안 읽었다고, 이 연극을 보지 않았다고 오, 어쩜... 저런 이런 갓소설을 이런 갓극을 왜 보지 않았냐고 타박하진 않잖아요... 그거랑 이게 같냐고요? 다르다고 하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정성일 평론가님 얘기는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재밌었다. 무비 올나잇으로 새벽 내내 영화 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강연을 동이 틀 때까지 하다니... 무슨 영화였을까 궁금하다.ㅎㅎ

시와 산책으로 시작해서 말들의 흐름 시리즈를 4편 달렸다. 덕분에 즐거운 6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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