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 같습니다, -분명 희망이 늘 크지 않은-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언젠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요, 한 편 한 편의 시들도 이런 식으로 도중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주해 있는 겁니다. 무얼 마주해 있느냐고요? 열려 있는 것,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향해서,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서요.

-223쪽,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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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궁금했다. 재능은 누군가를 훨씬 앞선 곳에서 혹은 훨씬 높은 곳에서 출발하게 만드는 듯했다. 재능이 있다면 더 열심히 쓸 참이었다. 만약 없다면 글쓰기 말고 다른 일을 열심히 해볼까 싶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이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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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을 하면서 체중계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 숫자는 내가 운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 숫자는 나를 정의할 수 없고, 나의 아름다움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조금만 살이 쪄도 잘 맞는 여성복을 찾기 힘든 한국의 성차별적 의류 시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거워지는 것이 두렵지않다. 당장은 쉽지 않더라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미용 체중‘ 같은 헛소리를 시원하게 무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이 정한 ‘정상‘ 구간에 맞지 않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자. 개인의 ‘정신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몸이 위축되지 않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마야 엔젤루의 말처럼.

*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2016)에서 재인용. - P70

친구들이 운동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여성의 성장 서사다. 꼭 성실하고 꾸준하게 운동하는 얘기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근근이 운동을 하는 얘기도, 이런저런 운동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얘기도, 심지어 운동을 얼마 안 돼 그만둔 얘기조차도 훌륭한 서사다.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를 딛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시 도전하는 여성들의 얘기.
더 많은 여성이 스스로가 가장 즐거워하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에게 ‘요즘, 나 이런 운동 한다!‘고 자랑하고 떠들었으면 좋겠다. 운동을 주제로 수다만 떨어도 이렇게 재밌는데, 같이 운동하면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여성들이 더 많은 운동장을 점령했으면 좋겠다. 세상은 넓고 운동은 많다. 그리고 모든 운동은 여성들의 운동이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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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해."

"네?"

"열심히 하지 말고 그냥 하라고."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네."

"아침에 알람 몇 번 맞추고 일어나?"

"못 일어날까 봐 여러 번 맞춰 두고 몇 십 분이 지나서야 일어납니다."

"그래 다들 그러지. 그냥 일어나."

"네?"

"알람 울리면 그냥 한 번에 일어나라고. 울리면 일단 끄면서 생각을 하잖아. 일어나기 싫고, 출근하기 귀찮고 좀 더 자고 싶고, 이러다가 또 다시 눕고 그러잖아. 그냥 생각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아, 생각을 하지 말고……. 네."

"잘 하려고도 하지 말고 열심히 하려고도 하지마. 그러니까 힘들어지는 거야. 흐르는 대로 그냥 살어."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처음엔 잘 이해하지를 못했고 이해를 하고 난 뒤에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늘 되새기려 합니다.

- 정주윤, 나만 두려운 건 아니겠지? p.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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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바닥의 깊이가 중요하다. 좋을 때 에너지가 넘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이스 한 건 누구든 할 수 있다. 물론 그 영역도 개인차가 심하여 어떻게 저런 에너지가 나올까, 어쩜 저렇게 즐겁게 살까 싶은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런 사람들은 리스펙트한다.
SNS나 일터에서 보이는 개개인의 모습들은 맥주 거품기로 만든 맛있는 크림 거품과 같다. 나 또한 거품이 예쁜 편이다. 거품이 걷히면 맥주 본연의 맛이 나오듯이, 사람은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그 사람의 제대로 된 인격이 드러난다. 바닥에서의 모습은 평소 모습과 전혀 다르다. 바닥의 모습이 괴물 같은 사람들일수록 인격 세탁을 위해 힘들 때의 사람들을 멀리하는 법이다. - P73

올 시즌을 보내고 나니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 난 이제 프로야구에 완전히 관심이 없어졌다. 더 이상 매일 저녁 6시 30분부터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 달달 외우던 선수들의 스탯이 더 이상 의미 없는 숫자들이 되었고, 스포츠 뉴스로 경기 하이라이트도 보지 않는다. 야구는 마치 세팍타크로, 노르딕 복합 경기만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목이 되어버렸다. 야구는 나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 P116

사람마다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가족들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일만 하기 위함이거나, 타인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함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내가 태어난 이유 중 작은 하나는 일 년에 한 번 첫눈을 보기 위함일 것 같다.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만 해도 역대급 폭염이었는데, 아무리 힘든 시간을 보내도 시간은 흐르고 첫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 P201

좀 놀아보니 알겠더라. 할 일이 없을 때 자연스럽게 노는 것보다 할 일이 산처렇 쌓여 있을 때 째고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다. 더 재미있게 놀기 위하여, 이 사무 공간에 할 일이 좀 쌓여주길.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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