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그런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뭐든 물어봐.
-넌…인간과 뭐가 다른 거야?
-난…너처럼 따뜻한 피나 부드러운 살갗 같은 것이 없어.
너처럼 깊은 파란 눈동자 같은 것도 없고. 헝겊 원숭이처럼…
네가 느끼는 것만 인간 같을 뿐 사실 속이 텅 빈 인형이야.
-그런 거라면…가장 별 것 아닌 것이 다른 거구나. 따뜻한 피. 부드러운 살갗…
…같은 것들이 한 번도 나를 안아준 적은 없었어.
하지만… 너의 말, 너의 사고. 모든 것 속에서 나는…
에녹……날 사랑하니?
-……B, 사랑이라는 건 일종의 호르몬 작용이야. 옥시토신, 세로토닌, 코리트솔 같은 호르몬들이… 

애착을 만들고, 행복을 주고… 때론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를 느끼게 해…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애착. 그게 사랑이라면 나는 어렵겠지.
하지만 사랑을 생물학적 관점이 아니라 학습이나 감각과 사고 확장의 관점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확실한 게 있다면…나는 너로 인해…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경험하고, 기다림과 그리움을 학습해. 

그렇다면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거겠지.
-…나도 …에녹 너를 사랑해.

(p.284-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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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있으면… 좀 더 나은 내가 돼.
그와 함께 있으면, 좀 더 용기가 생기고
현실을 똑바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좀 더 나은 내가 돼.

누군가는 나에게 이 사랑이 의미 없다고, 혹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저 집착일 뿐이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사실 아무도 내게 그런 말 할 수 없다는 건 내가 잘 알아요.
무의미하지 않아요.
그와의 연애는 현실을 마주 보게 해줘요. 모든 걸 극복하게 하는 것.
과거를 끊고 미래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
나를 똑바로 쳐다볼 힘을 주는 것.
세상 어느 것이 그것보다 유의미하고 위대할 수 있나요?

그건 예쁘다, 사랑한다고 말해주며 키워주는 자존감과는
비교할 수 없게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예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요.
사랑보다 위대한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라고 생각하겠어요.

(p.21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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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간판, 빛 바랜 광고…
빛 바랜 자판기, 빛 바랜 현수막…
회색으로 바랜 도시.

가끔씩 궁금하다. 해는 그렇게 모든 색을 다 가져가서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그러다가도…
해가 피워낸 형형색색의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p.93)



칼이란, 날이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무딜 때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거야.
부지런히 갈아둬야 다치지 않는다.
(p.139)



참고로 우리 집은 더 이상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시작하게 되면서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가족 회의가 있었고…

"흐음."
"뭐 어쩔 수 없지."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 할 만큼 했으니 우리도 이제 그만해도 될 거야."

남자들의 차례가 되면 세상은 바뀐다.
(p.180)



누군간 레코드를 녹음하고, 누군간 글을 게시하고,
누군간 기록을 재고, 누군간 출마를 하고…
또 누군간 자식을 낳기로 결심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각자의 방식으로 크레딧을
남기고 싶어하는 게 틀림없다고.
누구든 사는 동안엔 목격자를 필요로 한다고.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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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뒤에도 우리는 몇 번이고 태어나는 마음으로 산다. 제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커다란 운동장에 처음 들어설 때, 낯선 동네로 이사갈 때,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사랑이 올 때, 사랑이 떠날 때, 크고 작은 도전과 모험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시를 쓰지 않는 어리석음보다 시를 쓰는 어리석음을 더 좋아'(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하는 시인의 마음으로 용기를 낸다. '연습 없이 태어나서 /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 인생이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 낙제란 없는 법'이니(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기꺼이 매 순간 태어나는 쪽을 선택한다.

- 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p.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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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어느 시간에서든, 어느 공간에서든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잘 간직해야지. 다듬지 않아도 그건 내겐 보석이니까."

고교 시절에 오가던 소란한 감정이 휘발되고 흐릿한 색채로 남는 과정을 장장 18권에 걸쳐 그린 만화 『다정다감』(박은아) 마지막 페이지에 새겨진 문장이다.

p.27

마침 1990년대 초중반은 초등학생 여자애들이 만화를 맘껏 사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시절이었다. 열 살 즈음 된 소녀들을 위한 두툼한 만화잡지들이 창간을 알렸고, TV를 켜면 <꽃의 천사 루루>, <요술소녀>, <베르사이유의 장미>, <뾰로롱 꼬마마녀>, <웨딩 피치>등이 나오는 호시절이었다.

p.41

말할 때마다 슬퍼지지만 한국 순정만화 시장의 몰락은 급격하게 이뤄졌다. 그리고 제대로 평가 받을 기회를 놓치면서 그 중요한 시기를 함께 견인한 대다수 독자들에게조차 만화는 현재진행형의 취미가 아니라 추억으로 남게 됐다. 좋아하는 마음은 어떤 면에서 잔인하다. 대가 없는 애정을 쏟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특별한 이유나 계기도 없이 느닷없이 그 마음을 철회해버리니까. 세상이 순정만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동안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순정만화라는 장르가 가진 근사한 부분과 장점들은 축소되고 폄하되고 사라졌다. 왜 설정이 과하거나 필요한 서사를 생략해 유치해진 작품을 가리킬 때 '순정만화 같다'는 비유가 쓰여야 할까? 순정만화가 정말 그런가? 뻔하고 조악한 드라마나 영화는 또 얼마나 많은데.

p.53

최근 많은 여성 소비자가 여자들의 이야기에 환호하는 심리는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가 꼴보기 싫다'는 것보다는 '여자 캐릭터의 고유성을 존중하지 않는 남자들 이야기를 더 보고 싶지 않다'에 가까울 것이다.

p.100

"첫사랑의 사람과 처음으로 사귀고, 교내에서도 이름 난 커플. 그 사람하고만 섹스도 하고 평생을 살아간다. 사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게 가장 행복하겠지. 하지만 이젠 이런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고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이 사람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금 누군가 사랑과 연애의 '효용'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해피 마니아』(안노 모요코)의 주인공 시게타의 이 대사를 고를 것 같다.

p.103

믿음직한 동행을 찾았다면 운이 좋은 것. 하지만 나를 완전하게 채워줄 누군가가 등장하길 바라며 평생을 결핍감 속에 사는 것보다는 혼자, 성큼성큼 나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때로는 푹푹 발목까지 빠지는 모래밭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가 되더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알려준 감정들이 나를 자라게 했으니.

p.149

한자를 잘 모른다. 유치원 때부터 한자 카드와 시험지까지 직접 만들어주며 한문 조기교육을 시키려고 애쓴 엄마에게 미안할 정도다. 뻔한 간판이나 기사 제목조차 제대로 읽지 못할 때는 좀 무식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십이지 동물들의 한자는 대강 안다. 1995년 방영된 애니메이션 <꾸러기 수비대>의 마법 같은 주제가 덕분이다.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진사오미, 몽치 키키 강다리 찡찡이 신유술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이 경쾌한 리듬! 한국의 20대 30대 중 상당수가 십이지 순서를 완벽하게 외운다면 거기엔 이 주제가가 백 퍼센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p.160

그나저나 최근에 만화책들을 다시 보며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순정만화가들은 일찌감치 고양이의 매력을 깨달은 종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시절에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이 있었다면 제일 처음 자기 집 고양이 사진을 올려 RT를 타는 사람들은 분명 이 사람들이었겠다는 확신이 든다.

p.164

창작욕, 책임감, 성실함이란 말로 포장된 험난한 여정을 반복하는 일이 얼마나 커다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지,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 하잖아'라는 말이 얼마나 무용한지, 지금은 감히 안다. 끝없는 불평과 수시로 솟구치는 퇴사 욕구로 가득한 직장인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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