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화실을 나섰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진짜 혼자가 되는 시간이다. 일과를 끝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인 셈이다. 마침 일과를 끝낸 동네 친구를 만나 맥주 한잔으로 내일을 외면하기도 하고, 아끼는 수면 양말을 신고서 잠들기 전까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본다. 좋아하는 시를 연필로 적어보기도 하고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돌던 노래의 가사를 찾아 흥얼거리기도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보라고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만 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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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별이 사라지거나 진다면
나는 배워야 하리, 텅 빈 하늘을 바라보는 법을
그 암흑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법을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분명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슬퍼하는 많은 이들은 이 암흑의 시간에도 내면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있다고 전했다. 그건 바로 잊지 않은 한 그 사람은 당신의 사람이라는 깊은 감사의 마음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우주라는 책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 실리고, 그 사람이 당신의 사람(당신의 부모, 당신의 자식, 당신의 형제, 당신의 연인, 당신의 유쾌한 친구)이었다고 적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당신에게 소중했듯 당신도 그 사람에게 소중했다. 부디, 때가 되면 이런 의미를 마음에 새겨 슬픔을 이겨내길 바란다. 지금은 무리한 주문처럼 들리겠지만 이렇게 자문해보라. 당신이 느끼는 모든 슬픔을 잊어버릴 방법이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 인생에 존재했던 기억마저 삭제해야 한다. 자, 이 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에게 이 질문을 했다. 하지만 그러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을 떠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과거에도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도 의미가 있다는 이 깨달음, 어쩌면 이것이 당신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p.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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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다.
직장에서 있었던 좋고 나쁜 일의 기억 보따리를 안고 가긴 하지만 걸음의 속도를 줄이니 그것도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하루 중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없다. 직장과 가정은 모두 공동체 생활이다. 퇴근길만큼 혼자임을 만끽할 시간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급함도 사라졌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은 일상처럼 하라고 했던가.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그 사이사이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여행지의 어딘가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감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주변이 어떠하든 결국 잠시 눈을 감는 것은 나다. 애써 푸른 바다를 연상하지 않는다. 그냥 나 자신을 느끼고, 심호흡을 크게 해본다.
오늘이라는 여행을 잘 마쳤다.
잘 해냈다.
그것으로 족하다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천천히 걸어간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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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전 남편 레너드 울프에게 남긴 유서에서 발췌한 이 구절을 보면, 따뜻한 보호자로 칭송받다가 어느 순간 억압적인 간수라고 비방당하기를 반복한 남자와 그녀가 공유한 둘만의 깊은 교감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아내의 천부적인 재능을 만개시키기 위해 레너드가 성인聖人 수준으로 헌신하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더라면, 블룸즈버리 그룹의 대사제로 불린 버지니아 울프는 이 정도로 오래 버티며 후대에 길이 남을 모더니즘적인 작품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면, 그건 당신이었을 거예요...... 우리 둘은 세상 어느 커플보다 더 행복했던 것 같아요." 남편에게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서 버지니아 울프는 옷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채워넣고 우즈강으로 휘적휘적 걸어들어갔다. 30년 가까이 이어온 결혼생활에서 레너드는 셀 수 없이 여러 번 신경발작을 일으킨 아내를 매번 극진히 보살펴 회복시켰고, 그중 몇 번은 상태가 너무 심각해 간호사를 네 명이나 고용해야 했다. 그러나 레너드의 그 끝없이 인내하는 사랑과 지칠 줄 모르는 보살핌도 버지니아의 자기파괴적 충동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략)
악화되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행복의 극치를 느낀 순간도 간간이 있었고, 레너드와 런던에 가서 행복한 하루를 보낸 뒤에는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누며 나란히 광장을 산책했다―25년이 지났는데도 서로 떨어져 있기가 힘들다. 누군가가 원하는 존재,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는 건 이토록 기쁜 일이구나. 우리의 결혼생활은 이보다 온전할 수 없다." 그러나 남편과 나눈 깊은 사랑―그녀에게는 마지막 방어선과 같았던 그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버지니아는 계속 싸워나갈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1941년 3월의 차가운 어느 날, 버지니아는 레너드에게 편지를 써놓고 혼자 집을 나섰다.

내가 다시 미쳐가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 끔찍한 시간이 또 한번 닥치면 우리는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아요. 나는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할 거예요.

이렇게 끼적인 편지를 남기고 얼마 후, 그녀의 산책용 지팡이가 우즈강 강둑에서 발견되었다. 돌덩이의 무게로 가라앉은 그녀의 사체는 3주 후에나 떠올랐다. 그런 크나큰 비극이 닥칠 줄은 전혀 예상 못하고 있다가 크게 충격을 받은 레너드는, 아내가 영영 가버린 것을 깨닫고 슬픔에 잠겨 이렇게 썼다. "V가 오두막 저편에서 나타나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일은 없으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그쪽만 바라본다. 그녀가 물에 빠져 죽은 걸 알면서도, 언제든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귀를 쫑긋 기울인다. 이것이 마지막 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다음 장으로 넘기려고 한다."



*


나는 버지니아와 레너드, 두 사람의 이야기에 마음이 쓰여 다음 장으로 넘기는데 한참이 걸렸다. 

버지니아에게 레너드는 삶을 붙드는 유일한 닻이었지만, 영원히 붙들지는 못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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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를 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요하는 일일까. 오랜 시간 무심한 표정으로, 하지만 애정만큼은 꾹꾹 눌러 담아 한 땀 한 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고 기성 제품처럼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애초에 효율이나 세련과는 거리가 먼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수 만들어서 주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일 테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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