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 대해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쓰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말했다.

(p.18)

미국의 영화평론가 기리쉬 샴부는 낡은 시네필리아는 보수적이고 향수적인 구석이 있다고, 시네필적 경험(특히 어린시절이나 청년 시절의 경험)은 소중히 간직되면서 신성시되고, 한 사람의 생애를 걸쳐 고정된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 극장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어둠 속에서 밝아지는 몇 초간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빛 마니아죠, 라고 한국의 영화평론가 유운성은 박솔뫼에게 말했다.

(p.24)

왜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매번 내가 요약하는 줄거리는 요약하려는 대상을 닮았지만 끔찍하게 뒤틀리고 축소된 일종의 캐리커처, 악의적인 농담처럼 보인다. 남이 요약한 줄거리를 보는 일은 흥미롭다. 하지만 여전히 요약하고 있는 책이나 영화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텍스트로 느껴질 뿐이다.

(p.56)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 한때 나는 바르트의 저 말(정확히 말하면 바르트가 인용하는 기욤 도랑주 나소 1세의 말)을 이마에 문신으로 새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거울울 볼 때마다 상기할 수 있도록.

(p.147)


금정연 작가님의 『아무튼, 택시』를 잘 읽었던지라 기대감에 읽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책은 그 책이고 이 책은 이 책이었다. 영화를 좋아는 하는데 잘 알지는 못해서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이 아니면 언제 읽나 싶어서 끝까지 읽어봄.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왕가위 감독의 다른 영화를 좀 더 챙겨봐야지, 저번에 특별전으로 재개봉 했을 때 챙겨봤으면 이 책을 좀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을까 뭐 그런 생각들이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인가 싶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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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씨는 얼결에 시험에 붙어서 배우가 되었고, 얼결에 주연을 맡았고, 운명적으로 불길 속에서 살아나 무대에 건강하게 서고 계시잖아요. 이런 일들을 쭉 겪으면서 왜 예술이 하나 씨의 인생에서 중요해졌는지도 말씀해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생명력을 유지해주거든요. 늘 이야기하는 건데, 예술이라는 건 생명력 그 자체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아주 많은 요소들이 필요하잖아요. 의식주, 인간관계 등 참 많은 삶의 요소들이 있는데, 저는 무대에서 또 다른 삶의 이유를 찾아요. 관객으로서도 그렇고, 배우로서도 그렇고 극장에 갔을 때 서로 공유하는 생명력이라는 게 분명 있단 말이에요. '내가 살아서 이걸 보다니!', '내가 살아서 이걸 듣다니!, 내가 살아서 이걸 하고 있다니!' 이런 감탄을 하면서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거죠. 무척 단순한 건데도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특히나 제가 관객의 입장에서 좋은 공연을 보면 극장에서 나올 때 '나 정말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겠다. 어떻게 이걸 봤지?'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돼요. 이게 극장, 공연 예술, 나아가서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생명력인 것 같아요.

-박희아 인터뷰집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 열정과 통찰』 p.43

배우 나하나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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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 자신이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견디기 힘든 날이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가식적이라고 비난해서 모멸감을 느낀 날이 있는가? 괜찮다. 정말 괜찮다. 아직은 내가 부족해서 눈 밝은 내 자아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내 '가식의 상태'를 들키고 말았지만, 나는 지금 가식의 상태를 통과하며 선한 곳을 향해 잘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보다 최선을 다해 가식을 부리는 사람이 그곳에 닿을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척'한다는 것에는 어쩔 수 없이 떳떳하지 못하고 다소 찜찜한 구석도 있지만, 그런 척들이 척척 모여 결국 원하는대로의 내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가식은 가장 속된 방식으로 품어보는 선한 꿈인 것 같다.

(p.64)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p.75)


가부장제가 흩뿌리는 유해한 메시지들은 이렇게 명절을 통해 강화된다. 교육의 장으로서도 최악이다. 어린이들에게 절할 자격은 남자에게만 있고 일할 의무는 여자에게만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지? 남자들은 편히 놀고 여자들은 뒤치다꺼리하는 모습은? 나에게 만약 아이가 있다면 지금과 똑같은 방식의 제사를 지내는 집에는 절대 발 들이지 못하게 하고 싶을 지경이다. (그들이 그런 일에 나설 리도 없지만) 정부가 '제사효율화오개년계획'이나 '제사혁신TF팀'을 만들어 앞으로 5년간 제사의 모든 것을 남자들만 준비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면 어떻게 될까. 여자네 집안 제사 음식까지 남자가 다 준비해야 하는 강력한 규정으로. 그러면 3년도 못 가 어지간한 제사는 다 사라질 것이다.
(p.82)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조심한다. 상대방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지만 애인의 성별을 모른 채로 그 애인을 지칭해야 할 경우, 상대방이 여자라고 해서 "남자친구"라고 지레 말하지 않는다('애인'이라고 한다). 어떤 남성을 묘사하면서 "마치 사랑하는 여자에게 건넬 꽃이라도 고르듯이" 같은 표현도 서사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다('사랑하는 사람에게'라고 쓴다). 그것들은 그들이 어떤 성적 지향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러니까 당연히 이성애자일 거라고 은연중에 전제하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말. 전제가 지워버리는 존재.
(p.118)


그밖에도 더는 쓰지 않는 말이 많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부르듯 읊을 수 있을 것 같다. '결정 장애'처럼, 무언가를 잘 못 정하는 상황, 어떤 능력이 결여된 상태에 '장애'라는 단어를 빗댐으로써 장애를 비하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질병을 희화화하는 표현인 '발암 축구' '암 걸리겠다' 같은 말도 쓰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확찐자'라는 신조어가 정말 싫었다. 실제 코로나 감염 확진자들이 겪고 있는 커다란 고통과 공포를 생각하면, 그중 누군가는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쉽게 쓸 수 없는 말이다. '급식충' '설명충'처럼 사람을 곤충에 비교하며 사람과 곤충 모두에게 실례를 범하고 있는 '-충'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고아가 된 기분이다'와 비슷한 이유에서 '거지 같다'는 말도 쓰지 않는다. '유모차' 대신에 '유아차'를, '낙태' 대신에 임신 주체인 여성의 결정권을 우선한 표현인 '임신 중단' 혹은 '임신 중지'를 쓴다. 그 누구도 단어에 갇히고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p.123)


믿고 보는 김혼비 작가님의 『다정소감』을 읽었다. 토요일에 외출하는 길에 챙겨서 가는 길에 읽기 시작했는데, 어제 잠들기 전에 완독했다. 간만에 죽이 잘 맞는 친구와 밤새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다음 대화도 기다려지는 작가님의 책.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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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삶과 죽음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는 일에 나는 반대하고 있지만, 어떤 삶과 죽음은 분명 신호이자 메시지이고 그것을 신호이며 메시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삶은 늘 있다. 이때 발신자는 살거나 죽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속한 사회다. 오늘 발견된 죽음 근처에서 고립되어 취약한 상태에 있을 사람들이 이 밤과 낮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p.74)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 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p.76)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p.133-134)




'민요상 책꽂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포스트잇 플래그를 쓰지 않고, 화면으로 책을 보지 않는다는 글에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왜냐하면 이 책을 인덱스를 붙여가며 읽었고 최근엔 종이책만큼 전자책을 읽고 있으므로)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었다. 일기 읽기를 끝냈으니 사두고 읽지 않은 연년세세를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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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황정은, 일기 日記 p.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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