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엄마가 치마를 마당에 벗어놓고 사라진 날
나는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이상한 나라의 미소를 알아본다

처음으로 엄마가 남의 집 대문을
몰래 따고 있을 때
그 집엔 당신 말고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는 엄마를 백일째 기다리다가
싱크대 밑으로 들어가
녹아버린 눈 같아요

엄마가 눈 위에 오줌을 눈다
얘야 날 왜 지붕 위로 데려왔니?
여긴 엄마의 흰 머리칼이
하늘로 다 날아갈 때까지 바람이 부니까요

눈이 내리면 나는 노트 위에 물을 그려요
누구의 일부라도 될 수 있는 물을

그런 말 마라 네 몸엔 분명
내 몸의 일부만 흐르고 있다

오랜만에 한 베개에 나란히 누우니 좋다
그런데 얘야 네 흰 머리칼 냄새 때문에
도무지 잠을 못 자겠구나
슬픔이 조금 모자라도 나는 길게 이어진다

당신의 치마 속으로 들어간
수십만 그루의 촛불들이 술렁인다
흰 구름의 일부처럼 당신은 인파 속에 잠들어 있다
대문을 열어두고
나는 당신을 찾으러 간다

당신이 더 이상 나를 못 알아보는 날부터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알아보는 나는

 

- 김경주 시집, 고래와 수증기 중에서 <아무도 모른다> 전문

 

 

*

지난 번 읽었던 박광수 작가님의 에세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중 3부가 아른거렸다. 박광수 작가님의 일러스트 속에 징검다리를 건너려고 서 있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이 소녀는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가 되었고

마침내 저쪽으로 건넌 엄마의 곁엔 제법 자란 소년이 서 있다.

다음 장에는 아이를 남겨두고 건너온 징검다리를

되돌아 건너 가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엄마는 뒤돌아보지 않고 건너가며 늙어가고,

뚝방에 서서 그런 엄마를 지켜보던 소년은 성인으로 성장해 이렇게 말한다.

 

"치매란 자신이 젊은 시절 애쓰며 건너온 징검다리를 되돌아 건너 가는 것.

되돌아가면서, 자신이 건너온 징검다리를 하나씩 치우는 일.

그때 옆에 있는 당신은 답답하다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들. 그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뚝방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는 일.

밝게 웃어주며 날 천천히 잊어달라고 비는 일.

안단테, 안단테..."

 

이 페이지를 읽고 한참을 먹먹해했는데, 찾아읽은 시집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이야기를 쉬이 지나치지 못한다. 엄마의 이야기 앞에서는. 더 이상 글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노래 한 곡이 떠오른다. 강백수의 타임머신.

 

'어느 날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1999년으로 날아가
아직 건강하던 삼십 대의 우리 엄마를 만나 이 말만은 전할거야
엄마 우리 걱정만 하고 살지 말고 엄마도 몸 좀 챙기면서 살아요
병원도 좀 자주 가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이 말만은 전할거야
2004년도에 엄마를 떠나 보낸 우리들은 엄마가 너무 그리워요
엄마가 좋아하던 오뎅이나 쫄면을 먹을 때마다 내 가슴은 무너져요'

엄마 이야기를 하려고 들면 왜 목부터 메는지. 출간된 당시에 구매해두고

아직도 다 읽지 못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이제라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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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여전히 광수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작가 박광수의 에세이. 서점에 갔을 때 읽고 싶다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도서관 북트럭에 올려져 있길래 빌려와 읽었다. 감상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앞으로 작가 박광수하면 이 책이 떠오를 것이라는 확신. 물론 최근 책이어서 그런 것도 있고, 광수생각은 워낙 어릴때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참 서툰 사람들>에서 였다. '세상의 그 어떤 꽃도 흔들림 없이 피는 꽃은 없다. 지금 흔들리는 것, 다 괜찮다.'라는 구절. 도종환 시인의 시보다 이 구절을 먼저 접했기 때문에 참 와닿았던 것 같다. 후에 수필론 발표 수업 당시 내가 쓴 수필에 '지금 흔들리는 것, 다 괜찮다.'라는 제목을 붙일 정도였으니까. 지금 흔들리고 있는 거에 비하면 그땐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싶지만. 몇년 후, 나이를 좀 더 먹고 만난 박광수 작가의 에세이는 밑줄칠 구절이 넘쳤다. 내 책이 아니어서 밑줄은 못쳤고, 대신 독서기록장에 메모해 둔 구절들을 소개해본다.

 

 

 

 

*


아무에게도 조언하지 마라. 하지만 타인에게 조언하듯이 내 삶을 살아라. (p.50)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지점을 목표로 삼고 뛰지 마라. 그럼 쉽게 지치는 법이다. 그저 다음 한 발만 생각하며 성실히 내딛어라. 그렇게 성실히 가다 보면, 내 앞에 네가 처음 바라보았던 그곳이 있을 것이다. (p.54)

아픈 것은 아프다고 말하자. 무서운 것은 무섭다고 말하자. 힘든 것은 힘들다고 말하자. 세상 사람들은 속일지라도 내 자신에게만은 솔직하자. (p.56)

세상이 불이고 내가 칼이라면, 내가 지면 나는 녹아서 없어질 것이고 내가 이겨낸다면 나는 더 강한 칼이 될 거야. (p.58)

수중에 돈이 있어서 좋은 이유는, 돈이 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서 좋다기보다는, 돈이 있음으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돈은 자유를 의미한다. (p.64)

자신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려고 하지 말 것. 오직 자신으로만 살 것.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알 것. (p.74)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불친절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다.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인 사람은 그 누구의 친구도 아닌 법이다. (p.98)

너무 안달복달 할 필요없어. 어차피 만나게 되는 사람은 꼭 만나게 되는 법이니까. (p.192)

고백하고 또 고백하라.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라고 넬슨 만델라가 말했다. 사랑도 비슷하다. 고백하고 또 고백하라. 거절이 두려워서 고백을 못하는 사람은 달리다 넘어질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도 서지 않은 육상선수나 다름없다. 육상선수의 가장 큰 영광은 메달이 아니다. 가장 큰 영광은 자신만이 아는 자신의 노력이다. (p.203)

한계란, 종교의 믿음 같은 것이다. 한계가 있다고 스스로 믿는 순간, 한계가 생기는 법이다. (p.237)

나는 희망을 좇고 있고, 절망은 나를 좇고 있다. 나는 더 열심히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p.259)

문학가.
만화를 그리고 책을 내며 내 책 속에 되도 않는 글로 간신히 백지의 면을 채운다. 글을 잘 썼으면 좋겠다는 간절함 속에서 우연히 존경하는 문학가를 만나 질문한다.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글은 머리나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야. 엉덩이로 쓰는 거지. 엉덩이가 짓물러질 때까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쓰고 또 쓰는 거야. 그렇게 오랜 시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네가 원하는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역시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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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만을 남겨두고 한참을 책장에 꽂아두었던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일부러 남겨둔 건 아니었다. 중반까지도 읽기 힘들어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내려놓은 이유가 된 것 같다. 그러던 중에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을 읽으려고 집어드니, 문득 끝을 내지 않은 이 소설이 떠올랐던 것이다. 또 지금이라도 읽지 않으면 내가 읽은 부분을 왜곡해서 기억한 상태로 이 책을 펼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다 읽은 소설은 역시나 온전하게 이해하긴 어려웠다. 이 책의 한국판 제목처럼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칫(-_-) 그렇지만 애초에 믿는 구석이었던 빨간책방을 두고 읽었던 책이라 완독하자마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편을 찾아 들었다. 1부에선 결말을 함구하며 떡밥을 날릴 때 함께 웃었고, 2부에선 예고했던대로 결말에 대한 거침없는 이야기를, 완독한 자만이 누리는 당당함을 즐기며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제목이겠지만, 다 읽은 사람에게는 의문을 넘어 다소 불편을 느끼게 하는 한국판 제목에 대해서는 나는 반반이다. 확실히 제목 덕분에 끌렸던 것도 있으니까. 의문이 들고 왜 불편한지는 읽으면 안다. 확실히 원제인 'The Sense Of An Ending'가 와닿기는 하지만, 원제로 내가 이 책을 읽으려고 들었을런지는 모르겠다.

인상 깊었던 구절은 세 구절.

 

*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p.12)

 

"모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p.15)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p.34)

 

*

시간 속에서 우리는 기억하며 산다. 다만 그 기억은 정확하지 않은데, 그런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서 확신을 이룰때 그것은 역사가 된다. 국가의 역사이건 개인의 역사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실된 말은 '뭔가 일어났다'일 뿐이다. 우리를 붙들고 형태를 부여하지만 정말로 잘 안다는 생각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것 역시 시간이므로.

세 구절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될까.
인상 깊었던 동진님과 중혁님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이 부족한 기록과 맥락 속에, 말하자면 문헌 속에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거죠. (김중혁)

결국 줄리언 반스의 필생의 테마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개인의 삶이든 역사이든 오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계속 교훈을 얻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고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과거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런 도저한 비관주의적인 생각이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거죠. (이동진)

이래서 다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편이 좋았다고 한 거였구나 하며 뒤늦게 공감했다. 방송 덕분에 즐겁게 책을 복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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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6개월을 시작할 2권의 책. 적임자-흑임자

이동진-김중혁 작가님의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과 밥장님의 떠나는 이유.

전자는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음성지원 되는 기분이라면,

후자는 맛깔나는 글 만큼이나 사진과 일러스트로 보는 맛도 쏠쏠하다.

지금은 읽어야 하는 책이 있어서 당장 시작하긴 어렵지만,

2월에 읽을 에세이가 곁에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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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30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자에 음성 지원 된다는 말씀 공감 백배예요ㅋ

해밀 2015-02-04 23:50   좋아요 0 | URL
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두 분의 농담은 많이 편집됐지만 행간 곳곳에서 두 분의 농담이 들려오는 기분도 들구요 :) 팟캐스트 듣듯이 책 읽으면서도 웃음짓게 되더라구요.ㅎㅎ
 

 

Let me in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너라는 이름이야

너를 처음 보았을 때
하얀 눈 위에
넌 잠들어 있었지
네 곁에 나는 가만히 누웠어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잠옷을 입고
널 따라갔어
네 잠옷 속에 들어가 웅크렸지

무서워도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무서워서 난 소리 내지 않고
사랑해

내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슬픈 이름은
네가 불러준 이름이야 

 

*

 

첫 장, 아니 두번째 장부터 취향저격*_*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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