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죽음에 말을 보탠다는 건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녀의 자살이 아름다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녀의 자살은 그녀의 삶의 한 방식으로 존중할 수 있지만, (오히려, 나는 자살은 죄악, 이라고 말하는 태도에 늘 반기를 드는 입장이다) 그녀의 자살이 시사하는 것까지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건 내가, 우리 사회에 과도하게 나도는 '행복 바이러스', '긍정적인 사고의 힘' 등에 대해 몸서리쳐질 정도로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여왔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녀가 행복을 전도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했기 때문일 것이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할 수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음을 함께할 정도로 사랑하는 남편, 좋아하는 일에서의 성공, 그에 따른 사회적 지위... 그런 것을 가진 행복한 사람이, 그런 것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행복하세요, 행복할 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돌이켜보면 얼마나 허망한가. 세상은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고, 긍정의 힘으로 온몸과 마음을 꽁꽁 싸매도, 좌절의 연속이다. 생각대로 T라는 모 통신사의 징글을 따라부르는 일은 쉽지만, 생각대로 하면 된다는 광고를 만드는 것은 쉽지만, 생각대로 하면 되는 삶을 실제로 살기란 심히 어려운 일. (SKT 회장 아니라 회장 할아버지라 해도 아마 생각대로 사는 삶은 살지 못하셨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로 인해 더한 좌절감과 상대적 박탈감에, 나는 왜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열등감마저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그녀 역시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죽음으로 증명했다. 특별히 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행복할 수 있었던 조건 하에서, 계속 행복하게 살아왔기에, 행복을 전도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었음을, 그랬기에, 교통사고처럼 갑자기 삶에 끼어든 불행을 견뎌내지는 못했음을.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의 삶에서 가장 솔직하고 인간적인 순간이라고 느껴진다.
그저 바라는 것은, 이제는 부디, 모든 사람을 열등생, 혹은 바보로 만드는 긍정의 힘, 행복의 최면 같은 것은 사라져주길. 긍정적으로 사고할 것을 강요하는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라, 나는 행복하다고 믿는 허망한 믿음이 아니라, 울며, 똑똑히 마주하며, 때론 인정하며, 또 때론 부정하며, 그렇게 삶을 견뎌내는 사람이 많아지길. 그녀의 죽음이 남긴 단 하나의 사회적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