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나니 꽤 늦은 시간. 지하철을 탔다. 오르기 전 지하철 안에 누군가 고개를 확 숙이고 있었고 주변에 아이들이 둘러 있었다. 누가 술에 취해서 토해내나보다 생각하며 지하철에 올랐다. 그 아이들은, 침묵의 공공칠빵을 하고있었다. 맞으려고 엎드린 아이를 둘러서 때리고 있었던 상황인 거지.  

하필, 아이팟을 안들고 온 날이었다. 주말에 집에서 음악좀 더 넣겠다고 회사에 있던 씨디들을 들고 집으로 왔는데 연결잭을 두고온 거다. 그래서 오늘 연결잭을 챙기며 뿌듯해했는데 버스에서 가방을 뒤져보니 아이팟이 없었다. 아이팟을 가지고 다닌 후로 나는 소음을 무시하는 법을 잊었는지 음악이 없으면 안절부절이 되버린 것 같다. 다다다다다 등을 때리는 소리. 웃음을 참으며 큭큭대는 소리가 극도로 거슬리기 시작한다. 아. 지하철에서 공공칠빵이라니.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젊음이란 이름으로, 뭔가 낭만이란 이름으로, 몇번 민폐를 끼쳤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하철은 아니다. 기차였다 -_- 음. 별로 다르지 않은가? ㅋ) 자기가 무리에서 웃고 있을 땐 그게 민폐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고, 설령 인지한다 하더라도 즐거움이 그 경계심을 넘어서, 결국 무시하게 되버린다. 저 아이들도, 뭔가 계속 눈치는 보지만 (나중에는 '우리 시끄러우니까 주먹으로 때리자' 라고 말하더라 -_-) 멈추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결국은 내가 참는 수밖에.  

그러니까, 실수가 많아진 이후부터,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탁월해진 나는, 내게 DMB가 있다는 사실을 께달았다. DMB에 음악 채널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는, DMB가 된 휴대폰을 산 지 5개월만에, 세번째로 DMB를 사용해봤다. (첫번째는 베토벤바이러스 볼 때 ㅋ 두번째는 언제였던가,지하철에서 너무 심심해서 미수다를 봤었다.) 아이들은 내가 탄 명동역에서 범계역까지 40분의 시간을 쉬지 않고 계속 게임을 했고, 나는 DMB 덕분에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2

그리고 내 옆에 아저씨. 스프링노트에 십자가를 그려놓고 그 안에 무언가를 글자로 막 채우고 계셨다. 그러니까, 우리 학생 때 애들이 하던, 빨간 볼펜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가득 채워 하트를 만들던 뭐 그런 것처럼, 한칸 한칸에 뭐라뭐라 집어넣으며 십자가를 완성하고 있었다. 가운데 붉은 십자가, 바깥쪽 중 안쪽에는 초록색 네모영역, 완전 바깥쪽은 검정색 네모영역. 고등학교 때 친구 양양이 K오빠에게 커다란 이니셜글자를 채워 선물하듯, 예수님께 십자가 깜지라도 선물할 작정인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잠시 후, 아저씨가 책을 덮는다. 할렐루야 기도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책의 표지에는 뭔가 정신수양을 위한 문구가 적혀져 있는 것 같았는데 거기에는 '성공할 수 있다'를 계속 외치라는 말도 함께 써있었다. 집에 와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니 이단 논쟁이 있는 곳 같은데, 긁는안수, 생수안수, 코안수, 쑥안수, 특별안수, 이런 것들을 통해 병을 치유하는 곳인 것 같고, 홈페이지에는 피부염부터 각종 암까지 간증이 실려 있는... 그러니까, 그것도 병을 고치는 하나의 과정인가. 아저씨 피부 조직이 좀 독특해보이긴 했는데, 피부염을 치료하시려 그곳에 다니시는 분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저씨의 그 어긋난 간절함에 괜히 속상해졌달까..

3

가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어떤 풍경으로 어우러져있을까가 궁금하다. 내가 지하철에서 만나는 가장 재밌는 풍경은 굉장히 무뚝뚝해보이는 남자가

웅 *^^* 울 자갸~ 그랫쪄용~

와 같은 문자를 아무 표정 없이 보내는 풍경이다. 그런 풍경을 마주할 때, 아 저 사람도 출근자, 통학자가 아닌,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으니  손가락으로 짓는 표정. 실은 그 둘의 경계가 명확할 수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 사실 난 요즘 그게 안되서, 웃긴 문자를 보내면 나도 같이 막 웃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 같은데, 메신저에서도, 나름 유머라고 시도하면서, 가끔 나 스스로가 너무 웃겨서 웃는데, 참, 이것도 못할 짓이긴 하다. 얼마나 얼빵해보이는지. ㅋㅋ

암튼, 내가 가장 많이 맡는 역할은, 쩔어있는 직장인 역할이지 뭐. 오늘은 까칠한 승객 역할, 호기심 많은 아가씨 역할도 함께했으니 1인 3역을 한 셈이군.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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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3-31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거 시리즈로 써주세요 ~ 재미있어요 ~

웽스북스 2009-04-05 21:08   좋아요 0 | URL
헤헤헷. 제가 요즘 다시 이어폰을 끼긴 하지만.
치니님 때문에라도 좀 더 주위집중을 해봐야겠어요.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3-3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번 생각만 해도 웃겨요..

웽스북스 2009-04-05 21:08   좋아요 0 | URL
그죠그죠그죠 ㅋㅋㅋㅋ

2009-03-31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05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꼬 2009-04-0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3역 중에선 까칠한 승객 역할이 제일 맘에 들어요. 내가 그랬더라면 참 못돼 보였을 텐데 웬디님은 새침하니 '아가씨' 느낌이 물씬. ㅎㅎ

웽스북스 2009-04-05 21:09   좋아요 0 | URL
말도안돼. 내가 네꼬님보다 새침하다고요? 허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