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를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각오가 방대하다. 이번에도 나를 노려보는 수많은 책들을 다 읽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으나, 누워서 책장 넘기는 것도 귀찮았던 관계로 책은 많이 보지 못했고 대신 눈만 또록 또록 굴리면 되는 드라마 하나를 드디어 끝냈다. 질질 오래 끌던 꽃보다 아름다워를 보며 난 참 질질 오래 짰다. 드라마를 보면서 난 정신적으로 거의 미수(한고은)였다. 미수가 알면 기분나빠 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인철이 미수에게 "너로 인해 내 인생 전부를 위로받는 느낌이었어' 라고 이야기할 때, 또 얼마나 울었는지. 둘이 헤어질 때, 엄마로 인해 속상해할 때, 근데 그런 엄마가 더 자유롭고 행복해 보일 때, 나는 계속 계속 울었다. 새벽 6시까지. 구질구질 궁상스럽지만 참 어쩔 수가 없더라.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울면서 본 드라마는 또 없지 싶은데, 이건 드라마가 워낙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그간 내 마음이 많이 말랑말랑해지고 공감의 폭이 더 넓어졌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 살면서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면서 우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노희경 드라마의 특징은 모든 캐릭터가 다 사랑스럽다는 것. 무조건적인 악역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명 한 명에 모두 애정이 담겨 있어서, 자신의 드라마를 봐 주는 시청자들이 누구든 미워하는 게 싫은가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따뜻해지는 인철(김명민)과 그의 엄마의 관계도 인상적이었다. 이해할 수 없던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아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엄마의 모습은 미수/미옥네 가족과는 또 다른 느낌의 감동을 준다. 자식들을 다 버리고 간 아빠도, 그리고 그 아빠를 꿰차고 들어선 여자도, 모두 나쁘지 않다.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가 노희경 드라마 캐릭터의 전형으로 자리 잡는 느낌이랄까.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 가면서 자꾸만 드라마가 다루지 않는 것들에 마음이 가는데, 아빠가 새 여자와 결혼해 낳은, 그래서 짐짓 더 성숙해 보이지만 자꾸만 위축되 가는 것 같은 재건이의 미래가 암담해 자꾸만 눈물이 나고, 민이가 엄마에게 버림받은 순간, 그 순간의 상실감이 그 아이의 삶에 미칠 영향이 걱정이 된다. 내가 갈게, 한 마디를 오래도록 붙들고 어쩌면 오지 않을 지도 모를 미수를 평생 기다릴 인철의 삶도 염려되고,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에게 보내는 아픈 일을 겪고도 진심으로 두 사람의 사이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재인에게도 마음이 간다. 아무래도 점점 오지랖만 넓어지는 기분.

고두심도 고두심이지만, 아, 배종옥은 정말 연기를 잘한다. 이건 연기를 넘어선 것이다. 눈물을 삼키며 엄마, 를 부르는 그 연기를 배종옥처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리고 박상면, 아아, 분명 내 이상형이 가오잡는 사람이라고 깐따삐야님께 이야기했었는데, 가오 한번 잡지 않는 박상면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이상형의 혼란을 겪으며, 결론적으로는 난 저런 사람이 좋구나, 라고 도장 쾅쾅 찍는다. 지적 성숙을 이성과 감성의 성숙으로 잘 연결시킨, 게다가 모든 사람들을 놀랍도록 배려하고 이해하는 저 마음에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이라니. 다른 드라마는 당분간 보지 않을테니 꽤 오래동안 박상면이 내 이상형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같다. 그러고보니 거침없이 하이킥을 볼 땐 최민용이 이상형, 고맙습니다를 볼 때는 장혁이 이상형이었구나. -_- (아 그런데 저 둘도 지금 생각해도 이상형 맞긴 맞는데, 이상형이 공존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진 여러명이어도 되는건가?)

요즘 들어 부쩍 엄마가 놀아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신다. 엄마랑 놀자. 놀자는 말이 어쩐지 너무 유치하게 느껴지고, 아니 엄마가 왜 저렇게 나에게 놀아달라고 떼를 쓰나,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꽃보다 아름다워는 바로 그 놀아준다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엄마 심심해, 엄마랑 놀자, 라고 계속 이야기하는 엄마. 그리고 사는 일에 바빠 엄마와 놀아주는 일은 늘 2순위인 자식들. 엄마가 밖으로 나도는 게 싫었으면서, 이제는 왜 엄마는 헬쓰, 수영 같은 취미도 하나 못만들었을까, 라고 생각하는 자식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오버랩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릴 적에는 우리가 어떻게든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보려고, 어떻게든 엄마가 나와 더 놀아줬으면 좋겠다며 형제들끼리 경쟁을 했지만, 이제는 놀아달라는 엄마에게 큰 선심이나 쓰는 양 그럼 1시간만 논다~ 라고 놀아주고는 갖은 생색을 내는 나도 참 불효녀다. 효도라는 건 참 별 게 아니면서도 힘든 일이다. 시간과 마음을 내어 부모님과 놀아주는 일.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은 늘어나고 할 일은 줄어드는 부모님이 그 시간을 외롭고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이제라도 이 드라마를 본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그래서 나는 한국 드라마가 좋다고. ^_^ 내 마음에 오래 남을 드라마 목록에 하나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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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8-02-0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박상면이 이상형? 극중 성격은 맘에 들지만 그래도 외모는 아니던걸요. 헤헤~~
어제 친정갔을때 엄마가 KTX타고 부산가자고 하셨을때 우물쭈물하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에휴...사는게 왜이리 바쁜지요.

웽스북스 2008-02-09 14:12   좋아요 0 | URL
그죠, 저도 이렇게 썼지만, 또 하지 못하는 것들이 분명 더 많을 걸 알고 있지요- 그래서 더 부끄럽구, 죄송하구 그래요 ㅜㅜ 박상면은, 정말 저런 사람 만나면 행복하겠다, 싶을 정도로 맘에 쏙 드는 캐릭터였어요- 나중엔 막 얼굴도 잘생겨보이구 그랬어요- (드라마를 보면서 콩깍지가 씌일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ㅋㅋㅋ)

깐따삐야 2008-02-0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웬디양님 어머니는 참 귀여우세요. 우리 엄마는 가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_-

웽스북스 2008-02-09 22:30   좋아요 0 | URL
우리 엄마두, 속으로 꾹꾹 삼키는 편이에요- 그래도 좀 귀엽긴 해요- 오늘 꽃보다 아름다워 실천편으로 효도놀이좀 했는데 무지 좋아하시더라구요 ㅋㅋ

깐따삐야 2008-02-09 22:54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어머니는 일단 본인이 예쁘시다는 걸 아시고 인정받고 싶어하신다는 게 넘흐 귀여우세요. 항상 소녀 같은 면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죠.^^
난 효도놀이로 시작해도 엄마의 지청구놀이로 변질되어 버려요. 흑!

웽스북스 2008-02-10 02:00   좋아요 0 | URL
아 지금까지 효도놀이 하느라 완전 빡세요 아무래도 이제 그만해야될 것 같아요 (뭐든 결심하면 과하게 해놓구 지치는 스타일 ㅜㅜ)

다락방 2008-02-09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드라마에서 박상면은 정말이지 최고의 남자였어요!!

웽스북스 2008-02-10 02:01   좋아요 0 | URL
으흑 역시 다락방님이 알아주시는군요 ㅜ_ㅜ 주변에 혹시 이런사람 보이거들랑 신고해주세요 흐흐흐

하루(春) 2008-02-10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드라마에 원래 류승범이 캐스팅되려 했는데(화려한 시절에 출연했었죠) 스케줄이 안 맞아서 김흥수가 출연하게 됐다더라구요. 류승범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면서 봤는데...

제가 전에도 댓글에 썼듯이 절대 잊을 수 없는 또 한편의 드라마였어요. 얼마나 엉엉 울었던지...

웽스북스 2008-02-10 14:31   좋아요 0 | URL
류승범도 잘 했겠지만 김흥수의 여리여리하면서도 귀엽고도 강한, 장남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압박을 가지고 있는 유약한 막내 이미지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김흥수가 소화한 재수를 류승범이 하는 걸 상상할 수 없듯, 류승범이 소화했을 재수라면 김흥수가 한 모습을 상상할 수는 없었겠죠- 암튼 김흥수는 꽤 호연을 보여줬어요 ^_^

정말이지 엉엉 울지 않을 수 없는 드라마에요- 말씀하신대로 빨간약 바르던 장면도 정말 가슴 아팠어요 ㅜ_ㅜ

순오기 2008-02-1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 난 이 드라마 무슨 상 줄때 나오는 자료화면만 봤지만, 그게 고두심이 가슴에 아까징끼 바르는 거랑 배종옥이 가슴치며 울던거였던가~ 그 화면만으로도 다 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봤으면 난 아마 눈물의 수도꼭지 틀어놨을거에요. 내가 안보길 잘했지~ㅠㅠ
엄마랑 놀아주는 딸이 있어 행복한 어머니 그룹에 나도 끼일 날이 멀지 않았다!ㅠㅠ

웽스북스 2008-02-10 14:4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사실은 꼭 보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순오기님 이거 보시면 정말 눈에 수도꼭지 틀어놓으실 것 같아서요 또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요

순오기님은 아마 양쪽의 입장에서 더 실감하시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실 것 같아요 이건 안봐도 비디오에요 정말 ㅜ_ㅜ

그나저나 빨간약을 아까징끼라고 하는 거 처음 알았어요 ;;;

순오기 2008-02-10 17:19   좋아요 0 | URL
ㅎㅎ '아까징끼'를 모르는구나~ 이런게 세대차이^^ 일본식이라고 나중에 '머큐롬'이라 했어요. 그 드라마에선 고두심이 '아까징끼'라고 하던 것 같던데... 아니 '빨간약'달라고 했던가? ㅎㅎ

웽스북스 2008-02-10 22:21   좋아요 0 | URL
아 순오기님 때문에 다시 봤어요 ㅋㅋㅋ 그냥 이름은 얘기 안하구 이거...라구만 얘기하네요 ^-^ 머큐롬까지는 알았는데 아까징끼는 진짜 처음 들었어요 그러고보니 빨간약 발라본지도 오래됐네요 어려서는 자주 발랐었는데

마노아 2008-02-11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꼭 볼래요. 저녁에 외출하게 되면 혼자 식사하게 될 엄마가 늘 밟혀요. 가급적 밥은 집에서 먹으려고 하지만 그게 맘처럼 안 될 때가 많잖아요. 엄훠, 내가 데이트 못하는 것은 효심 탓???ㅡ,.ㅡ;;;;

웽스북스 2008-02-10 22:22   좋아요 0 | URL
엄마가 마음에 밟히는 그 마음이 곧 효녀지요 ^^ 근데 올해는 데이트를 하는 게 효녀일지도 모르겠어요 ^-^ (어째 남얘기처럼 막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