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초였나보다. 뮤지컬 노틀담의 꼽추를 보고, 살짝 아쉬움을 느끼며, 몇달 후면 온다는 노트르담 드 파리 오리지널 캐스트 공연을 무지 보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당시 백수였던 나는 너무 비싼 티켓 값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저 손가락만 쪽쪽 빨 뿐이었다 ㅜㅜ
옆자리 소중한 사원 혜진씨가 노트르담드파리의 공연이 설 연휴 때 할인된다며 예매하는 걸 보고 나도 알았다. 같이 볼 사람을 물색하다가 메신저에 들어온 B에게 살짝 의향을 떠봤더니 흔쾌히 오케이. 10만원짜리 좌석인 S석을 5만원에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라며 기쁜 마음으로 예매를 했다. 사실 5만원에 싸게 본다고 해도 덥썩 예매할 정도로 여유로운 건 아니지만, 작년에 못쓴 휴가비 돌려 받은 걸로 나에게 선물한 셈 치자며 눈 딱 감고 예매버튼. 당연히 기대는 컸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는데, 어라, 어라, 세곡째 듣던 순간, 나는 B에게 속삭인다. "왜이렇게 노래를 못해?" B의 표정은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매우 중요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음유시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음량은 풍성한데, 자꾸만 반음씩 음이 떨어진다던가, 살짝 음역이 어긋난다던가 하는 게 자꾸만 귀에 거슬린다. 문제는 중요한 노래는 그 배우가 많이 부르다는 거지. 상대가 받쳐줄 때는 풍부한 성량으로 잘 부르는데, 독창을 할 때는 여지없이 음정이 불안하다. 아놔.
에스메랄다 역할을 맡은 배우의 음색은 에스메랄다의 다른 캐스트인 바다와 비슷했는데, 내가 개인적으로는 바다의 음색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의 캐스트가 바다가 아니라며 좋아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괜히 좋아한 게 되버렸다. 노래를 못하는 건 아니었는데, 기대했던 음색이 아닌지라 나는 꽤나 실망. 여리고 예쁜 음성보다는 안정적이고 풍성한 음성을 기대했었다. 심지어 콰지모도 역할을 맡은 배우까지, 2부에서는 음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한다. 워낙 방대하고 스케일이 큰 곡들이어서 소화하는 데 다들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실은 지금 오리지널 캐스트 음반을 듣고 있는데, 매우 심히 차이가 많이 나는군.
세종문화회관이 공연장으로 그리 훌륭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었는데, 오늘 가보니 그 이유를 대충은 알겠더라는. 음악회를 사랑하는 E씨는 1층 가운데 라인 정도에만 앉아도 피아노 독주가 잘 안들린다며 웬만하면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피한다고 했는데, 오늘은 너무 음량을 키워놔서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오래된 건물이라 시스템이 그렇게 훌륭하지는 않은 듯. 게다가 원곡을 번역해서 가사의 분절이 부자연스러운 관계로 가사의 전달도 어려운 상황에서 음향까지 엉망이니 가사의 30% 정도는 추론을 해야만 했다. 차라리 오리지널 캐스트 원어로 연기하고 자막을 보는 편이 전달은 훨씬 잘됐겠다, 싶을 정도. (또 오리지널 캐스트는 자막 보느라 장면 몰입이 어렵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치만 무대 연출은 참 괜찮았다. 연출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봐야겠다 싶을 정도로, 조명과 막, 그림자, 댄스 등의 적절한 활용 덕에 몇 장면들은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특히 에스메랄다가 춤추며 올라가던 장면은 너무 아름다워서 살짝 전율이 느껴질 정도. 그치만 연습이 부족했는지 어긋나는 몇몇 동작들과 맞지 않는 줄, 이런 게 거슬린다. 저 가운데 아저씨는 왜 왼쪽으로 치우쳐서 선 걸까, 왜 저 앞줄 두번째 댄서는 동작에 힘이 없어 보일까, 막 이런 거 -_- 그러면 안돼 얘야, 비싼 돈을 내고 왔으니 즐겁게 봐야지,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으나, 거슬리기 시작한 건 어쩔 수 없다. 우리의 B는 심지어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물론 작품 자체가 주는 생각할 점들도 분명 있지만, 그리고 그런 것들도 좋았지만, 그거야 원작 문학을 읽어도 충분히 아니 오히려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고, 뮤지컬을 보는 건 텍스트 이외의 요소들의 풍성함을 통해 감동을 배가하기 위함이었는데 여러 가지가 눈에 거슬리다 보니, 10만원을 다 주고 봤으면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공연이 돼버렸다. 나는 5만원 어치는 된다며 스스로를 위로해버렸다. 하지만 우리 B는 그 5만원도 영 아까운 모양이다. 미안하다 친구야. 다음에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자. 2개 ㅋㅋ
저녁에는 연극을 전공한 친구 (지난 번 대학로에서 마주쳤던) K를 만났다. 내가 이 얘기를 하니 안그래도 원곡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했었다는 말을 전한다. 괜히 또 내가 유난히 까칠한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 흐흐흐. 뭐 나쁘지는 않았지만, 큰맘 먹고 나한테 준 선물 치고는 실망이야. 그래서 나는 선물을 받지 않고 반품하기로 했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른 선물을 준비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