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 없이 마음만 바쁘고 각박하다보니, 책을 보고 영화를 봐도 리뷰 한편 남기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영화를 보면 한마디쯤은 더하고 싶다는 마음이 뭉글뭉글 올라오는데 역시나 생각을 정리하려니 머리가 아파와 -_-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버리기 전에, 좋은 영화 몇편 정도는 간단하게라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몇몇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써보려 합니다. 실은 오늘 좀 한가해서 이런 게 가능했다죠. 매일매일 한가하면 참 좋으련만 말입니다 ^_^
올해 들어서 본 영화는 꼭 5편입니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 팀버튼 감독의 스위니토드,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코르넬리우포름보이우 감독의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 그리고 오늘 본 남선우 감독의 모두들 괜찮아요?. 영화는 전부 평균 이상의 점수를 주고 싶은 좋은 영화들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보니, 시간이 났을 때, 가능하면 좋은 영화들을 보려고 많이 고심하는 편이지요. 스위니토드와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은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을테고 여기저기서 많은 평들을 접했을테니 굳이 제 소개까지 더하지 않을 생각이구요, 나머지 3편의 영화에 작년 말 봤던 오기가와 나오코 감독의 안경까지 4편의 영화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안경 (오기가와나오코, 2006)
오기가와 나오코 감독의 전작 카모메 식당을 워낙 즐겁게 봤던 터라, 이 영화도 매우 큰 기대를 갖고 봤고, 또한 재밌게 봤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카모메 식당보다는 영화적 재미가 좀 덜했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또 왜 저 역시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이나, 그래도 저는 이 영화도 꽤나 재밌게 봤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기가와 나오코 감독의 유머가 저와 코드가 맞는 것 같아요.
영화는 슬로우라이프에 대한 동경 내지는 더 나아가 예찬, 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동경이나 예찬이 좀 많이 갔구나, 싶긴 하지만요 ^^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어 찾아간 한 마을의 민박집에서 '관광'할 만한 곳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여주인공은 그만 당황하고 맙니다. 여기는 관광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이죠. 그럼 여기에 여행온 사람들은 무엇을 하나요? 라는 여주인공의 물음에 민박집 주인은 다시 이렇게 말하지요. 음...사색?
카모메 식당을 보면서 저도, 하던 일 때려치고 핀란드에서 식당을 하면서 살았음 좋겠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하는 삶. 하지만 할 줄 아는 음식이라곤 계란후라이와 라면 밖에 없어서 참았지요. 이 영화를 보면서도 저 마을로 달려가 아침에는 함께 체조를 하고, 바다를 바라보며 팥빙수를 먹고, 신선한 음식들을 먹으면서 그렇게 살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답니다.
하지만 슬로우라이프에 대한 로망은 역시나 로망일 때 가장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걸 보니, 전 그 마을에 머무를 자격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카모메 식당을 보면서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감독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부분은 여지 없이 드러났습니다. "비법은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아, 우리 정말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니까요. 아무래도 감독은 관객의 이해도에 대한 신뢰가 좀 부족한가봐요. 그렇지만 전 오기가와 나오코 감독의 다른 영화가 나와도 또 보러 가게 될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스폰지하우스에서 아직 상영중이랍니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길어지다니, 다음 것부터는 짧게)
오래된 정원 (임상수, 2007)
소설 오래된 정원을 워낙 좋아했던터라, 이 영화는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기대하며 기다렸었지요. 그런데 예고편을 보는 순간 저는 약간 실망을 했었답니다. 염정아가 연기하는 한윤희가 어쩐지 책에서 제가 만났던 느낌과 달랐거든요- 그래서 실은, 실망할까봐 보지 않았었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종종 애용하는 곰티비 무료영화로 우연히 보게 됐지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참 뜨겁고도 촉촉해지는 자신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원작의 내용과 감수성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자신만의 변형을 가미하는 임상수 감독의 센스 역시 나쁘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염정아가 연기하던 한윤희의 모습 역시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음.. 저만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진희의 멋진 목소리도 영화의 감동을 더하지요 (편파적이다)
행복? 아닌 것 같아. 나만 행복하면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은 시대였거든. (대사는 확실치 않으나) 딸과 통화하던 장면에서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실은 그 전부터) 단언컨대, 지진희의 목소리가 한치만 울림이 덜했다면 주책맞게 울지는 않았을 거에요. (생각해보니 단언,까지는 어렵겠군요-)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 (코르넬리우 포름보이우, 2006)
그 때 거기 있었습니까? 는 루마니아 혁명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1989년 12월 19일 12시 8분에 있었던 루마니아 혁명 (영화를 보면 제가 왜 이렇게 날짜와 시간을 욀 수 밖에 없는 지를 아실 겁니다)이 과연 우리 마을에서도 있었는가, 를 조망해 본다는 한 지역 방송국 사장의 야심(?)에서 영화는 출발합니다. 그 순간 거기 있었던(혹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불러 놓고 진행한 토크쇼는 이내 엉망이 되고, 당신이 12시 8분 이전에 거기 있었다면 우리 마을엔 혁명이 있었던 것이고, 없었다면 혁명이 없었던 것이다, 라는 이상한 논리로 치닫다가 결국엔 방송사고로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그만 박장대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5명 밖에 없는 극장에서 친구와 깔깔대며 웃다가 이내 민망해지곤 했지요. 방송 중에 종이 찢는 소리가 북북 들리고 심지어 옆에서는 종이배를 접고 있다면 말 다했지요.
혁명에 대한 터치는 가볍지만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그리 가볍지 않습니다. 혁명의 순간, 많은 것들이 바뀔 것이라 기대하고 생각했겠지만, 혁명은 그야말로 순간이었고, 그들의 삶은 그다지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로등이 켜지면 하루가 시작되고, 가로등이 꺼지면 하루가 끝나는, 반복적 삶을 살고 있지요. 혁명, 그리고 변화라는 건 한 순간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는 뼈있는 이야기를 제법 잘 담아놓은 감독의 내공을 느끼게 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30대 중반의 젊은 루마니아 감독에게, 칸의 신인감독 상인 황금 촬영상을 안겨줬다고 합니다.
영화 마지막 즈음, 혁명을 통해 아들을 잃었다는 한 여자의 전화가 결국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나타냅니다. "저는 혁명으로 아들을 잃었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고 전화를 건 건 아니구요, 밖에 눈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어요. 지금 나가서 즐기세요, 어차피 내일이면 진창이 될 테니"
꼭 가서 보실 것을 권해드리고 싶지만 상영관은 아쉽게도 필름포럼 한군데입니다.
모두들 괜찮아요? (남선우, 2006)
김호정이라는 배우는 참 눈이 가는 배우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김호정씨의 굵직하게 보이면서도 선이 고운, 강단 있는 외모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 살짝 중성적이면서도 여성스러운 목소리까지요. (이게 도통 무슨 말인지 ㅋㅋ) 그래서 자꾸만 그녀에게 이런 역할이 주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른 바 한량 남편 뒷바라지 하는 강한 여성 역할이죠.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에서 보여줬던 생활력 강한, 차가워보이면서 따뜻한 이미지의 여성 역할에 저 역시 어느 덧 그녀보다 더 잘 어울릴만한 누군가를 선뜻 떠올려내기가 힘듭니다.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 에서도 역시 그녀는 7년째 감독 데뷔를 준비하는 남편을 위해 무용을 그만두고 학원을 차려 뒷바라지를 하는 생활력 강한 여성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영화 한편 못찍은 영화 감독인 셈이지요. 영화 한편 못찍은 감독이 무슨 감독이냐는 반문에는 그의 아들이 대신 항변해 줍니다. "그럼 수박 장수가 수박 한통 못팔면 수박 장수가 아니냐?" 아들 하나는 정말 똑부러지게 키워놓았지요? ^^
남편 하나도 버거운데, 치매 걸린 친정 아버지는 막내딸이 제일 좋다며, 막내딸인 그녀 집에 얹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 사고뭉치들을 데리고 사는 그녀의 마음에는 바람 잘 날 없지요. 특별한 스토리도, 이렇다 할 에피소드도 없는 잔잔한 이 영화가 좋았던 건, 영화 내에서의 갈등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걸 없앰으로써 해결하는 방법이 아닌,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끌어안음으로써 해결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 결혼은 나의 문제로부터 도망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있는 나의 문제들에 더해진 또 한사람의 문제들의 결합,이라는 이야기를 제게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일이긴 하지만, 저도 언젠가 그런 세상에 몸을 담그는 날이 오겠지요. 그 날이 오면 나 역시 끌어안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실은 자기 앞가림 잘하고 생활력 강한 사람보다는 영화 속 김유석 같은, 젊은 시절에 한껏 가오 잡았을 것 같은 저런 한량이 이상형에 더 가까운지라 앞으로의 저의 삶이 매우 걱정입니다, 하하) 2월 21일까지, 곰티비 무료 영화로 보실 수 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