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구꾸러기


숟가락 친구 C는 우리 집에서 2년 정도를 함께 살았었다. 그래서 우리 엄마, 우리 아빠와 우리집, 나, 모두를 잘 아는 친구다. 그녀가 내게 하는 말이 있다. 너는 횡단보도를 기점으로 애가 바뀌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지하철 역을 가기 위해 집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순간 집밖 모드로 애가 변화한다는 것이다. 표정부터 말투까지. 마법의 횡단보도다.

C의 말에 의하면 나의 '눈풀린 모드'가 있는데, 이는 주로 집안에서 늦은 밤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초점없는 눈동자로 못자게 괴롭힌다거나,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흐느적거리는 말투로 헤헤거리는 모드인데, 거의 긴장이 풀어진 상태로 집에서 지내다 보니, 집에서는 거의 이런 상태이다. 그런데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나의 딱딱 떨어지는 말투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거다.

집에서의 나는 한마디로, 방 꼬라지는 귀신 나올 것 같고, 화장도 안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며, 엄마가 뭐 시키면 까먹기 일쑤이고, 흘리고 다니고, 덤벙거리고, 하는 게 거의 전부이다. 어느 날, 이런 나를 보다 못한 엄마가 한 한마디는.

너, 회사에서 일은 제대로 하니? 였다. -_-

우리 회사 사람들은, 특히 후배들은 내가 집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며 산다는 얘기를 하면 적응을 못한다. 왜냐하면 회사를 가기 위해 난 마법의 횡단보도를 건넜으니까. 이런 본성들을 억눌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회사라는 곳이고,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꽤 잘 억누르고 있어, 그래도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연차가 늘다보니 가끔 회사가 집처럼 편하게 느껴져 헐렁헐렁한 모습을 회사사람들에게 보이는 빈도가 늘어나긴 하지만 다행히 가식적 이미지들이 기초를 워낙 튼튼하게 닦아놔서, 사람들은 나의 가끔 보이는 헐렁함이 일부인 줄 알고, 오히려 인간적이라며, 의외로 좋아한다. 실은 나는 헐렁으로 점철된 인간인데 말이다.

하지만 나와는 마법의 횡단보도 안쪽 세계에서만 사는 엄마는 이런 나를 믿지 못한다. 엄마와 함께 속한 집단인 교회는 불행히도 횡단보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사람들은 옛날에는 나한테 설거지도 안시켰다. 덜렁덜렁한다는 걸 다 알았기도 했거니와, 실은 엄마가 "얘는 이런 거 시키면 그릇 다 깨먹어" 라고 소문내고 다닌 탓이다. 나는 집에 와서는 늘 짜증을 내며, 엄마, 내가 그래도 밖에서는 잘 하거든? 이라고 말하지만, 엄마는 도무지 믿지 않는다. C가 우리 엄마에게 그래도 얘가 횡단보도 건너면 달라져요, 라고 이야기하며 어떻게 바뀌는지 대신 이야기를 해주기도 한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 반, 안도의 눈빛 반이다.

방이 엉망일 때마다 한숨을 쉬며, 내가 널 잘못 키웠나보다고 말하며 엄마가 방을 치워주고, 나는 앗싸~ 하며 철없이 좋아한다. 그럼 엄마는 저걸 도대체 누가 데려갈지, 남편이 참 불쌍하다고 응대하고, 나는 똑같은 사람 만나면 되지요- 라고 태연스레 말한다. 엄마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다시 한번 더 깊은 한숨을 쉰다. 방에 먼지 많아서 너무 한숨 많이 쉬면 몸 속으로 먼지 들어갈텐데 말이다. 흐흐흐. 신랑감 데려오면 큰절부터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엄마는 그냥 봐도봐도 내가 그저 불안불안한가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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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1-24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아무리봐도 웨디양님은 페이퍼의 봇물이 터졌다고 밖에는....
2.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빙글빙글 돌며 세일러문처럼 변신하는 웬디양인 겁니까..
3.그렇다면 변신주문은?

웽스북스 2008-01-24 01:53   좋아요 0 | URL
1. 저 태그패밀리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깐따삐야님의 명에 응답한 것이지요
2. 빙글빙글 돌면서 건너면 제시간에 못건넙니다
3. 샬랑얄랑 빰빠라밤빰~

Mephistopheles 2008-01-24 01:57   좋아요 0 | URL
오홈마니 베베움...짱꼴라가...아니였다니....

깐따삐야 2008-01-24 02:00   좋아요 0 | URL
요즘 읽은 나쓰메 소세키 소설 '그 후'에 짱꼴라가 나와서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

웽스북스 2008-01-24 09:58   좋아요 0 | URL
오홈마니베베움짱꼴라는
집으로 돌아오는 횡단보도를 건너며 헐렁모드로 다시 돌아올 때 외우는 주문이지요 ㅎㅎㅎ

휴일에 놀러갈 때는 야발라바히기야~

깐따삐야 2008-01-24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재밌어서 쿡쿡거리면서 읽었어요.^^
웬디양님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져서 갑자기 넘흐 보고파요. 흑!
난 집에선 예민했다, 멍했다를 무한반복하는데 밖에 나가면 웃겨줬다, 우스워졌다를 시간차로 반복해요. ㅋㅋ

웽스북스 2008-01-24 10:49   좋아요 0 | URL
흐흐흐 그래서 전 스스로를 모순덩어리라고 부른답니다 ㅋㅋㅋ

순오기 2008-01-2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마법의 횡단보도~~~~ 너무 멋져요!!
태그 패밀리의 의리에 강추!!

웽스북스 2008-01-24 18:54   좋아요 0 | URL
흐흐흐 고마워요 순오기님~~ ^_^

네꼬 2008-01-2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인간적이라며, 의외로 좋아한다

웃다가 뜨끔.
저는 만날 실수만 하면서 이걸 강요해요. "내가 이러니까 인간적이지? 좋지?" 하고요. 돌아오는 대답은 이래요; "그냥 평소에 너무너무 인간적이거든?" -_-

웬디양님, 저 다면적인 사람 쫌 좋아해요. 그런 거 매력이예요.

웽스북스 2008-01-24 18:55   좋아요 0 | URL
흐흐흐 인간적이라는 말의 부정적 측면이 마구 강조된 대화네요 ^_^

저도 의외로 깨고 이런 사람 좋아해요
근데 전 시간이 좀 걸려요 ㅎㅎ

하늘바람 2008-10-0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같은 제목인데 정말 재미있네요. 마법의 횡단보도라. 언젠가 제가 어디 소재를쓸지 몰라요 쩝.
사실 저도 그랫답니다.
그런데 저와 정반대인 사람만나서 고생 중입니다.

웽스북스 2008-10-03 12:17   좋아요 0 | URL
어머, 여기까지 읽어주시고.. 이렇게 고마울 때가요 ^_^

언젠가 어디 소재를 쓰기 전에 알려주시기만 하면 저야 매우 감사하죠.
정반대면.. 남편분께서는 횡단보도 건너기 전엔 정갈하다가 밖에만 나가면 흐트러지시는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