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준 소논문 마감 시한이 오늘까지다. 그런데 아직도 500 단어 정도를 더 써야 한다. 오늘 안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기 때문에 오늘까지는 끝날 것 같다.

오늘 할 일은 논고의 초반부 존재론과 후반부 형이상학에 일관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명제가 뜻을 갖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밝히면 내가 할 일은 다 끝난다. 시작이 럿셀의 판단 이론이었으므로 마무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형이상학적 주체라는 개념은 명백히 쇼펜하우어적 영향 아래 윤리적 가치의 담지자로 비트겐쉬타인의 철학 안으로 유입되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동기와 이러한 유입은 마땅치 않아 보인다. 나는 형이상학적 주체라는 개념 아래, 말하자면 명제 이론적 주체가 포섭될 수 있을지를 탐색해 보았고 마침 문헌적 증거를 찾았다. 나는 이러한 관점(말하자면 세계관)이 물리학적 관점, 예를 들면 비트겐쉬타인이 자주 인용하는 헤르츠의 역학적 세계관과 융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문득 쟁점이 옮겨짐을 느낀다. 나는 비트겐쉬타인이 자신의 철학적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을, 말하자면 럿셀식의 인식 주체-객체 구도에서 탈피하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을 19 세기 과학사의 한 논쟁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럿셀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헤겔식 관념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과학사에서는 그러한 반발이 마흐에게서 발견된다. 둘의 성향과 관점은 다르지만 인식 대상(주로는 감각 자료) 위에 자신들의 전체 체계를 쌓아 올리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마흐의 격한 경험론적 성향에 반대한 주요한 인사 중 하나가 헤르쯔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럿셀의 순진한 경험론에 진저리를 낸 사람이 바로 비트겐쉬타인일 것이다. 그렇게 헤르쯔와 비트겐쉬타인이 만나는 것 같다.

주체-객체의 구도는 이들에게 사라진다. 그 직접적인 귀결은 사고의 자율성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명제는 뜻을 가질 수 있다. 럿셀에게서 명제의 의미는 완전히 실재에 귀속된다. 그러나 비트겐쉬타인에 있어 명제는 완전한 의미에서 실재와 동등하다. 다만 실천에 있어 명제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 될 수 있으려면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제한이 있을 뿐이다.

사고는 실재와 구별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신비롭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물리학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가 그렇다. 모든 예술은 음악을 궁극으로 삼는다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던가? 물리학은 마치 수학을 궁극으로 삼는 것 같다. 완전히 비물질적인 세계. 내 눈 앞의 이 사과보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 원자들이 더 실재적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식의, 어떤 것이 더 실재적이냐는 질문은 시대착오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이다. 답을 한다면 종이 위에 적힌 수식 하나가 우주 전체만큼이나 실재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런 환상이나 미신없이 이런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만큼 진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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