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끝냈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는데 후반부로 가면서는 거의 망작으로 변해가더라. 후반 몇 편을 건너 뛰고 최종회의 절반 정도를 감상하는 것으로 시청을 끝냈다.


이 작품을 정치 드라마라 할 것이면 세종과 정기준이 그 무슨 바위 위에서 호위 무사들이 대치하는 가운데 벌인 논쟁이 하일라이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좀 심심한 편이었다. 첫째, 둘의 관점은 이미 밝혀질 대로 밝혀진 상태다. 구태여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논쟁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칼로 상대의 목을 겨누다가 베지 않고 그대로 내려놓는 장면이 한 회에도 수도 없이 나오다 보니 대치 장면이 전혀 긴장감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작가가 필요한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작품은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훌륭한 배우(대표적으로 한석규)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즐거움이 아니라 민망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큰 축은 태종-세종 사이의 정치 철학적 견해 대립, 세종-정기준 사이의 정치 철학적 견해 대립이다. 그런데 세종이 태종과 대립하면서 동시에 정기준(더 정확하게는 정도전)과도 대립할 수는 없다. 곧바로 묻자면 세종은 왕권강화파인가, 그 반대인가?


이에 대한 논쟁은 한글 창제에 대한 논쟁으로 대체된다. 작가가 그린 세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세종은 봉건 군주의 한계 안에 갖혀 있는 인물인가, 그것을 뛰어넘는 인물인가?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세종은 사농공상, 반상천의 위계 질서의 옹호자인가, 아니면 그것의 최종적인 혁파를 수용하는 인물인가? 


세종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글을 만들었지만 신분 질서의 혁파는 수용할 수 없었다면, 이것이 세종의 한계이자 모순이자 고민이라면, 이 한계, 이 모순, 이 고민은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것이다.


세종이 군주의 전횡을 견제하는 장치들의 이상을 수용하면서도, 저 자신은 그런 장치들의 견제를 받고 싶지 않아했다면, 이 또한 세종의 모순이자 고민이 된다. 아, 작가들이여, 제발 이 모순, 이 고민들에 주목하라. 제발 이 모순, 고민들에 정면으로 부딪히라. 그것만이 당신들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능한 이런 질문들, 이런 모순들을 피해나갔다. 작가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고 싶지 않았던 탓, 즉, 작가의 대담성이 부족한 탓이다(천재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고민하며 괴로와 하는 세종의 입에서는 "사랑"이니 "책임"이니 하는 추상적인 낱말이 튀어나와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다. 한석규가 고민하는 척, 괴로와 하는 척 하는 사람을 실제로 고민하고 괴로와 하는 사람으로 그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진한 민망함으로 남을 뿐이었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배우의 연기를 보기 위해 본다. 배우의 연기를 충분히 감상하려면 작가와 감독의 실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배우의 연기는 그 작품의 가치와 완전히 동등하다.)


그런데 통속 사극에 이런 깊이를 요구하는 게 타당한가? 그렇다. 당신이라면 한석규가 완전 허접한 대사를 읊고 있는 꼴을 보면 기분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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