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cal revolt"...?

 

 

 



 

 

아래는 서동진의 글의 일부

 

(...)정치란 사회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하는 행위이고, 정치적 주체화란 바로 사회를 존재의 질서로서 수용하고 인정하길 거부하고 그것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보편성을 폭로하고 중지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이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라고 굳이 불려야하는 이유는 사회적 주체란 특정한 집단의 속성이나 자질, 성향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인 반면 정치적 주체란 그런 경험적 사실들로부터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디우같은 이가 즐겨 쓰는 랭보의 표현처럼 “논리적 반란(logical revolt)”이다. 그것이 논리적인 이유는 목적론적인 주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숨겨진 역사적 논리의 필연적인 자기전개로서 정치적 변화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실체화될 수 없고, 어떤 특정한 주체의 자리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형식적인 지위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권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자살해야했던 내 대학 시절 또래의 여대생을 덮쳐누른 것은 그 무엇으로도 물리칠 수 없는 비열하고 타락한 세계를 두고 모두를 감염시키고 있던 윤리적 자명함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히 투쟁이고 운동이다. 랭보의 시구에서 따온 말을 자신들의 투쟁의 좌표로 삼고 나아가 조직의 이름으로 내건 프랑스의 전직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정치 그룹의 이름이 “논리적 반란(logical revolt)”이었다 한다. 언젠가 읽은 그의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 할 어느 글에서 바디우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이들 가운데 그리고 끝까지 투쟁했던 이들이 과학자들이었음을 이야기하며 왜 그들이 그랬는지 치밀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랭보의 말처럼 지극히 논리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현실주의가 왜 논리적인 것의 절차를 따르는 일이지 모든 개연적인 변이를 핑계대며 비논리적인 헛소리와 망상에 빠지는 것이 아닌지를 역설하는 그의 오랜 주장을 반향한다. 그러나 아마 우리는 여기에 한 명의 반파쇼 낙천주의자로, 혹은 어떤 연민의 투사와도 거리가 먼 외로운 논리적인 투사로서 프리모 레비를 추가하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자비와 긍휼, 혹은 연민으로부터 운동을 개시하고 연장할 수 있다는 말은 헛것이다. 광우병과 관련한 촛불집회를 보면서 그것을 예찬하는 수많은 얼빠진 신문기사와 칼럼 따위를 읽으면서 나는 운동을 좀 먹는 운동으로서의 그것에 대한 환멸을 되돌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반대 혹은 저항을 어떻게 형식화할 것인가가 말 그대로 위기에 몰린 지금,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연민이라면 우리는 그저 구호기구와 자선단체 그리고 선량한 사회사업가를 가지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역사가 한 치도 바뀐 적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가로막았음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미얀마에서, 케냐에서, 아니 사하라사막 이남의 모든 곳에서, 미디어의 눈길이 닿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세계를 향해 우리가 얻는 것은 비참함의 소식과 그를 위한 구호와 사랑의 부탁이다. 역사가 멎어버린 것 같은 느낌은 그래서 더욱 생소하고 더욱 잔인하게 분명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8-10-1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갈게요

바라 2008-10-1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담아온 것인데요 뭘.. 원래 '니체인가 바울인가'(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160&stext=%EB%8B%88%EC%B2%B4)와 '무엇을 할 것인가 또는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http://www.homopop.org/log/index.php?pl=258&stext=%EC%B4%9B%EB%B6%88)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