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 van Hooft, Understanding Virtue Ethics, 2006, Acumen Publishing Limited, p.83~108의 요약문

 


스토아학파에서 레비나스까지 덕의 약사略史


개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구의 도덕 사상의 역사는 의무 개념을 위한 덕 개념의 점차적인 축소로 특징지어진다. 사람들에게 덕은 단순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겨졌고, 이와 같은 현상은 플라톤에게서 유래한 두 가지 주된 관념의 영향 하에서 일어났다. 즉 우리는 초월적 실재의 지도 아래에 살아야 하며, 이성을 통해서 이러한 실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서 좋음이나 정의는 단순한 개념인 것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리가 세속적이고 오류가능하며 유한한 실존 속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유는 신적인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세계관은 종교적 전통뿐 아니라 스토아학파로부터 시작되는 많은 철학자들의 저작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자연의 영원한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욕망과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에 의해 지도되는 것, 평정을 받아들이고 정념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질서에 맞추어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기독교 신학의 경우 초월적 실재라는 애매한 개념은 신이라는 보다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신은 히브리 전통에서 도덕법의 새로운 규범성을 주는 것으로 가정된다. 우리의 의무는 신의 의지 또는 섭리로서의 우주적 질서에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인간의 탁월성은 그의 세속적 욕망을 억누르고 신 또는 자연이 부여한 법칙에 따르는 것이 되며, 이는 칸트에게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만약 덕 윤리가 다시 부활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두 가지를 다시 확립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어떤 초자연적인 정당화나 규범에 호소할 필요없이 이 세계 속에서 우리의 탁월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로 감정은 이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서구 윤리학사에서 보다 중요하게 떠오르는 주제는 타인과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이 공동체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준다는 의미에서 정의라는 덕을 강조했다. 그의 우정에 대한 분석은 또한 이러한 사회성에 대한 강조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 덕스럽게 된다는 것의 요점은 개인의 행복을 달성하는 것에 있으며, 이는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에의 배려’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덕 윤리를 흄, 니체, 레비나스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데이비드 흄

아퀴나스의 종교적 세계관과는 달리 우상파괴적인 세속주의자로서의 흄은 우리의 지식은 직접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직접적인 감각 경험을 가질 수 없는 신이나 영혼과 같은 형이상학적 요청들은 의문시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예컨대 인간 욕망과 경향에 대한 어떤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즉 흄이 주장하는 바는, 존재is에 대한 진술에서 당위ought에 대한 진술을 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흄은 또한 욕망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으로 상정된 전통적 도덕 심리학도 의문에 부친다. 이성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에 불과하며 이성 자체로는 어떤 규범이나 당위적 진술을 정초할 수 없다. 흄의 기본적인 통찰은 이성은 정념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쓰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도덕규범의 기초는 이성이 아니라 타인들에 대한 염려의 감정이 된다. 흄은 이를 동정, 애정, 인간적 감정 등으로 부른다. 덕스러운 사람은 바로 동정과 타인에 대한 염려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다. 만약 도덕지식이 형이상학적 요청이 아닌 경험에 기반을 두어야한다면, 도덕성이란 객관적인 토대라기보다는 주관적인 토대, 우리의 도덕감을 토대로 갖는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악한 행동에 대해 승인의 감정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인 행복이나 유용성을 가져오는 행동을 승인해야한다. 물론 이를 판단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문제가 아니며, 이러한 승인은 우리의 타인에 대한 동정심, 돌봄의 감정으로부터 온다. 흄은 도덕지식을 설립하는 도덕감을 가장 주된 덕으로 보았고, 여러 덕 가운데에서도 특히 타인에 대한 동정심에 주목했다. 흄의 도덕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설명은 감정을 우리 삶에 중요한 부분으로 복귀시켰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그는 대부분의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서로에 대한 선의의 감정을 갖으며, 도덕성이란 이러한 감정의 체계적인 표현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철저히 세속적인 현상으로 덕과 도덕을 보는 관점으로, 선이나 신의 계율, 자연의 이성적 질서를 분별하기 위한 우리의 순수이성에 의거하는 관점과 구분된다. 덕은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에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흄의 인간관이 낙관적인 것이었다면 니체의 인간관은 상대적으로 비관적이다. 그는 인간 존재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기는 ‘힘에의 의지’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기-주장self-assertion과 경쟁성에 대한 충동 또는 본능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기를, 지배하고 세계를 전유하고자한다. 노력과 극복과는 반대로 복종이나 겸손의 형태를 띤 어떤 것도 자연에 반하는 것일 뿐이다. 힘에의 의지는 타인들과 사물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노력이며, 가장 깊고 근본적인 의지는 자신을 타인과는 분리된, 더 우월한 것으로 단언하는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기독교의 거대 이론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고안된 (허구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실제로 이 세계는 끔찍한 곳이고 이 모든 비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은 그러한 이야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개념을 선취하면서, 니체는 이와 같은 믿음은 그저 진리에 기반을 두지 않으며 증명될 수 없는 위안, 단지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만 가치를 갖는 것에 거짓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니체 이전의 많은 견해들이 우리의 세속적 삶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고 이상화되고 완벽한 초자연적 영역을 위해 이 세계를 거부하라고 가르쳤다. 반면 니체는 많은 결점을 가진 것으로서 인간성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이 대지 위에 뿌리내린 우리의 실존을 긍정한다.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잠재력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힘에의 의지로서 우리를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경쟁적이고 공격적이며 자기-주장적인 이 표현이 도덕성과 잘 조화될 수 있는가? 니체는 도덕을 두 가지 양식,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구분한다. 먼저 주인도덕은 고유한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 지배자, 귀족과 같은 존재의 도덕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과 탁월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며, 고유한 자기조절과 자기형성을 행한다. 반면 노예 도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약하고 비참하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자들로서, 자신만만하고 강력한 자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강한 자들을 악한 것으로 부르면서 다수 속에서 안락을 찾으려한다. 이처럼 증오, 공포, 분노를 통해 무리 근성herd mentality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약함과 겸손을 축복하는 신이라는 관념은 너무나 성공적인 나머지 주인도덕을 가진 이들마저도 감화시키고 말았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힘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종국에는 노예적 정신성이 서구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노예도덕은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면서 복종과 약함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지만, 실제로는 주인을 지배하는 부정직한 것이다. 의무와 복종을 강조하는 도덕의 개념도 부분적으로는 이처럼 부정직한 것이다.

또한 니체는 힘에의 의지와 더불어 ‘자유정신’을 옹호한다. 이는 근대 유럽인들의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으로, ‘극복하는 인간’ 또는 초인übermensh의 유형이다. 이러한 귀족적 인물은 그들의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힘에의 의지를 발휘한다. 이어서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일종의 영원회귀의 윤리를 도입한다. 만약 당신의 삶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영원히 반복되어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당신의 세계 속에서의 실존과 그대로의 삶을 수용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운명애amor fati를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은 바로 자유정신일 것이다. 이러한 윤리는 어떠한 사후의 초월적인 보상이나 낙관적 인간관과 형이상학이 주는 거짓 위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정직성, 진정성authenticity, 운명애를 덕성으로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타인과의 덕스러운 관계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성품의 개념을 검토해야 한다. 20세기의 많은 대륙 철학자들이 바로 존재의 근원적 양식primodial mode of being에 대해 말하면서 이것이 윤리학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검토해왔다. 가령 사물의 존재양식에서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그것이 시공간을 차지하며 사건의 인과연쇄에 속해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우리는 능동적이며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순수한 역동이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창조적인 자기-형성이다. 이와 같은 자기-투사에 대한 강조는 니체와 실존주의 전통에서도 중심적인 문제인데, 이는 타자와의 관계라는 문제를 미제로 남겨둔다. 나의 세계 속에서 타자의 현존은 그 자체로 문제로 나타나는데, 사르트르는 이 점을 특히 명료화시켰다. 예컨대 조용한 공원 구석에서 쉬고 있는 나는 타인이 이 공간에 침입함으로써 자신이 차지하고 있던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세계의 점유, 사적인 공간의 보존을 두고 다투는 것이 타자와 관계하는 우리의 근원적 형식이라고 보았다. 사르트르는 또한 열쇠구멍을 통해서 누군가의 응시를 느끼는 경우를 분석하는데, 타인은 나의 진정성에 위협이 되기에 사르트르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타자는 지옥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관점은 타자와의 관계를 포용하는 윤리 이론의 정립을 매우 어렵게 한다. 니체적 전통과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 전통은 자기-주장에 강조점을 둠으로써 타자와의 근원적 관계에 있어 실증적인 개념을 제공하지 못한다.


엠마뉴엘 레비나스

레비나스는 규정prescription의 집합체로서의 윤리학을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성품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윤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제공한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사르트르의 윤리학은 타자의 얼굴에 대해서까지 확장되지 못했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인지적인 방식으로 일종의 소유를 갖고 있다. 즉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자신에게 친숙한 부분으로 동화시키는 방식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지의 과정은 개념과 범주를 낯선 세계에 부과함으로써 당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저녁을 함께하는 당신의 친구의 경우, 당신은 그를 여타의 사물들처럼 동화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 특히 타자의 눈앞에서 이러한 동화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타자의 얼굴은 하나의 신비이고 인지적 범주로 포착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한 것이다. 이는 자아와 진정성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어떤 놀라운 것으로의 열림으로 나타난다. 타자라는 신비로의 열림, 그리고 이 타자의 현전은 당신의 존재 양식을 변환시키며, 이러한 타자에 대한 공경과 놀람이라는 행위나 자세는 자체로 윤리적인 성질을 갖는다. 가령 자동자판기에서 기차표를 사는 경우와 매표소에 앉아있는 어떤 사람에게 기차표를 사는 경우 이 둘은 질적인 차이를 갖는데, 매표인의 현존은 가령 인사말과 같은 예의바르고 기쁜 응답을 이끌어낸다. 레비나스의 요점은 우리의 근원적인 윤리적 존재양식이 이미 사회적 존재로서의 실존을 기초로 갖는다는 것이며, 때로 이것이 나쁜 교육으로 인해 왜곡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윤리적 존재양식은 우리의 실존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며 제거불가능한 측면이며 이는 대화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도 대화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아무런 실용적인 쓰임이나 이익이 없는 방식, 타인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심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대화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대화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라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투사를 강조하는 니체-실존주의의 전통은 말하는 자만이 있을 뿐 듣는 자가 없다. 그러나 대화가 우리 삶에 근본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존재양식은 타자에게 귀기울임으로써 존경과 열려있음을 포함하고 있다.

의무 윤리가 주장하는 이성적 사고가 전제하는 탈-개체화dis-individuate(보편화)에 대해 레비나스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결코 탈-개체화될 수 없다고 본다. 한편 니체-실존주의 전통이 개인 주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반면, 레비나스는 우리는 타자에 의해 윤리적으로 존재하도록 호출되는addressed 존재이며, 이는 나I 자신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한 당신you이라는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나는 나이기 이전에 당신이다. 나는 나의 자아로서의 실존을 타인에게 빚지고 있다. 이러한 윤리는 어떤 명령이나 규칙에 복종하거나 내 성격의 표현을 행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것에 책임responsibility을 가짐으로써 구성된다. 나는 항상 이미 타자의 부름과 호소에 응답하는 존재로서, 이러한 응답/책임성은 의사소통하고 사회적인 자로서 인간이 지닌 가장 근본적인 존재양식 중 하나이다. 레비나스는 이처럼 감정이 단순히 인간들이 우연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이룬다고 주장함으로써 흄의 이론을 심화시킨다. 또한 니체의 주장이 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레비나스는 이러한 과업은 바로 타자에 대한 책임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요약 및 결론

윤리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문제이며 감정은 우리의 윤리적 삶에 있어서 이성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는 도덕규범이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살펴본바 덕스럽게 됨은 두 가지 방향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니체 등이 자기-투사와 자기 형성을 강조했다면, 흄이나 레비나스는 타자를 돌봄caring-about-others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덕스럽게 됨의 목표가 우리 자신의 행복eudaimoniã을 달성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타인들을 염려하는 사회적이고 상호인격적인 존재가 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성은 자기-투사와 타자에 대한 근원적인 염려라는 내재적인 형식을 갖는다. 덕은 단순히 타자에 의해 요구받는 성품의 집합만이 아니라, 우리가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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