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마스님 서재에서 펌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상상계라는 쟁점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다.
루이 알튀세르, {“자본”을 읽자}

스피노자주의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
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I 이데올로기의 유령들



지난 40여 년 동안 서양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단일한 논문으로서 과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하에서는 편의상 AIE 논문이라고 줄여 부르겠다.]보다 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논문이 있을까? 지난 1980년대 말 이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마르크스주의가 퇴조하면서 알튀세르의 저작들은 점점 더 인문사회과학 논의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여기에는 물론 주지하다시피 지난 1980년에 발생한 알튀세르의 개인적 비극도 영향을 미쳤다.], 이 논문만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토론과 응용 및 변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쩌면 이 논문은 바로 알튀세르의 저작들이 퇴조하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부터 본격적인(또는 적어도 그 이전보다 더 역동적인) 이론적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필두로 여러 저작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인문사회과학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시킨 것이 바로 1990년대이며, 그 뒤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젠더 이론 및 주체의 예속화/주체화subjection 이론을 전개하면서 AIE 논문을 주요한 이론적 지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특히 Butler 1997 「서론」 및 4장 참조) 역시 1990년대의 일이다. 또 그의 제자였던 에티엔 발리바르가 호명 이론을 변용하여 “국민 형태forme nation”에 관한 독창적인 문제설정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 역시 90년대 이후의 일이다(특히 Balibar 1988; 2001 1장 참조).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처럼 다양한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되고 또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음에도 이 논문은 아직도 여전히 많은 이론적 잠재력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들에 공통적인 특징으로, 아마도 바로 이점이야말로 알튀세르의 저작, 특히 AIE 논문을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것일 듯하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 전체를 고려해봤을 때 AIE 논문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논문에 미친 스피노자 철학의 영향이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스피노자에 대해 예외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1960년대의 자신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 자기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소책자에서는 자신이 “스피노자주의자”였음을 명시적으로 고백하고 있지만(Althusser 1997, pp. 181-189), 정작 알튀세르의 가장 중요한 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AIE 논문의 스피노자주의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알튀세르의 이론 작업과 스피노자 철학의 관계 일반에 대해서는 Moreau 1997, Tosel 2005 등을 참조하고, 국내의 논의로는 진태원 2001; 2002; 2005 등을 보라. 외국의 주석가들 중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스피노자주의적 성격에 주목하고 있는 글로는 Montag 1995; 1996, Pfaller 1998 정도에 불과하다. Montag은 AIE 논문이 알튀세르의 저작 중에서도 “매우 스피노자주의적인 글”(1995, p. 65)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간략한 논의에 그치고 있다. Montag 1996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을, 특히 홉스의 정치학과 대비되는 스피노자의 정치학과 연결시켜 흥미 있는 논의를 제시하고 있다. Pfaller 1998은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이 지닌 관념론적인 측면을 지적하면서 스피노자 상상계의 무한성을 강조하고 있다. Locke 1996은 스피노자와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비(非)라캉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반대로 많은 주석가들은 AIE 논문 및 그의 이데올로기론 전체를 라캉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으로 특징짓고 있다[너무 많은 주석가들이 이런 견해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전거를 밝히는 것은 불필요할 것 같다. 대표적인 몇몇 경우를 지적해본다면, Barrett 1993; Eagleton 1991; Macey 1994. 국내에서는 양석원이나 홍준기 등을 들 수 있다. 이 주석가들의 특징은 구체적인 문헌학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을뿐더러, 지난 1993년 이래 발표된 알튀세르의 유고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특히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해명하는 데 이 유고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또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라캉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불식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진태원 2002 참조.]. 이들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준거로 삼아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을 개조하려고 했지만, 라캉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기능주의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AIE 논문이나 알튀세르의 몇몇 글들(특히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글)에 나타난 라캉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에 의지하여 AIE 논문 전체, 특히 그 논문의 후반부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에 관하여」라는 절을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으로 특징짓고 있다.


이들의 견해를 하나하나 논박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일뿐더러 지면의 한계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들 중 한 사람,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꼽힐 만한 지젝의 논의를 살펴보고 싶다. 이는 이 글 전체의 구도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우리가 서두에 인용한 제사(題詞)가 시사하듯이,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젝의 논의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관련성을 검토해보려는 이 글의 반면교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II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출세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Zizek 1989)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Zizek 1993/2007b), 「이데올로기의 유령」(Zizek 1994), 󰡔나누어질 수 없는 잔여󰡕(Zizek 1996)나 󰡔까다로운 주체󰡕(Zizek 1999/2005)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고 라캉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를 개조하거나 변형하려고 시도해왔다. 이처럼 그가 여러 저작에서 알튀세르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그의 논점은 매우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으며, 그의 다양한 논의들은 이러한 논점의 변주에 불과하다.


1) 그가 보기에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은 호명 이론에 있다. 곧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하며, 이를 통해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배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것이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근본적인 전언이다.(Zizek 1989; 1993)


2) 하지만 호명 이론은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면서 또한 그의 이론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호명 이론은 어떻게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지배 체계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지 보여주지 못하며, 모든 주체는 결국 지배 체계의 재생산 메커니즘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Zizek 1989; 1993; Dolar 1993)


3) 알튀세르가 이런 한계에 부딪치는 이유는,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본다면 그가 첫 번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론, 그가 제시하는 호명 이론은 부유하는 기표들의 의미를 고정시켜 주는 이데올로기적 누빔점에 관한 이론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도식 속에서는 모든 호명은 항상 성공하기 마련이며, 모든 주체는 항상 주인기표를 통해 호명된다.[“누빔점은 주체가 기표에 ‘꿰매어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주인기표(‘공산주의’ㆍ ‘신’ㆍ ‘자유’ ㆍ‘미국’)의 호출과 함께 개인에게 말을 걸면서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하는 지점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기표 연쇄를 주체화하는 지점이다.”(Zizek 1989, 179쪽)]


4) 반면 라캉의 이론은 알튀세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는데, 그것의 핵심은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Zizek 1989 2부 3장; 1993 1부 1장; 1996 pp. 165 이하; 2003 중 「재판 서문」 등 참조)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보면 세 번째 그래프(“케보이Che vuoi?”)는 상징적 질서인 타자Autre에 의해 부여된 자신의 역할에 대해 회의하는 주체, 곧 히스테리에 걸린 주체를 나타낸다. 이처럼 자신의 동일성 내지 정체성에 대해 회의한다는 것은 바로 주체에게 전달된 호명이 실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 번째 그래프는 그 이전까지 일관된 것, 아무런 공백이나 균열도 없는 충만하고 전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타자 자체 내에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욕망의 그래프의 두 번째 수준 전체(3번째와 4번째 그래프)는 “호명 너머의 차원을 지칭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Zizek 1989, 216쪽)[이하 인용문의 번역은 국역본이 있는 경우에도 대개 필자가 다소 수정했지만 일일이 밝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별도의 지적이 없는 한 인용문에 나오는 강조 표시는 모두 원문의 것이다.]


그러나 타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공백 내지 균열이 그보다 아래 수준의 그래프에 위치한 주체들에게 은폐되어 있는 것은 바로 “환상phantasy” 때문이다. 곧 환상은 “케보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며, 정상적인 주체들은 이러한 환상을 통해 욕망하는 법을 배운다. 환상의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일관된 의미의 질서, 상징적 질서는 불가능하며, 주체들 각자가 이러한 상징적 질서 속에서 자신들의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환상의 도식이 빗금 쳐진 주체와 대상 a의 조우로 표시되는 것($◇a)은 이를 가리킨다). 따라서 환상이 수행하는 기능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한 편으로 주체가 향락을 경험하고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타자의 공백을 메우면서 상징적 질서를 유지시켜준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적인 치료는 피분석자 또는 분석 주체가 분석가(타자)와의 동일시를 넘어서 분석가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x로 남아 있는 분석가의 욕망”(Lacan 1973, p. 246))을 대면하고 이로써 자신의 욕망을 발견할 경우에 종결된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주체가 타자로부터 배제된 대상 a가 주체 자신의 “결핍destitution”,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러한 대상 a와 분리되어 자신의 결핍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체는 자신이 충만한 주체, 아무런 공백을 지니지 않은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공백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 임상의 차원에서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뜻하는 바다.


지젝은 이러한 임상적인 차원의 개념을 사회적 차원,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 적용하려고 시도한다. 이 경우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의미하는 것은 상징적 질서에 의해 부여된 동일성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그가 “행위act” 또는 “본래적 행위”(Zizek 1999, p. 266; Zizek 2007b, 428쪽)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컨대 알튀세르는 호명 이론을 통해 어떻게 각각의 주체가 이데올로기 장치들 내지 (라캉 식으로 표현하면) 상징적 질서를 통해 상징적 동일성을 부여받고 있는지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징적 동일화를 넘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환상의 차원, 곧 타자 자체의 공백을 메우는 차원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동일화,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라캉 정신분석학의 중요성은 이데올로기적인 상징적 동일화 배후에서 작동하는 이러한 환상의 차원을 밝힐 수 있게 해주고, 더 나아가 환상을 가로지르는 길을 보여주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일체의 상징적 동일화를 거부하는 “본래적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이러한 비판은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스피노자주의가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제시되는데,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책(Zizek 1993; 2007b)에서 지젝은 두 단계의 논의를 통해 이를 시도한다. 우선 그는 라캉의 11번째 세미나인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기본 개념󰡕에 나오는 언급에서 출발하여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 성격을 개괄한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스피노자는 기표 사슬의 평준화와 같은 것을 성취한다. 그는 지식의 사슬인 S2를 명령의 기표, 금지의 기표, “아니오!”의 기표인 S1과 분리시키는 간극을 제거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주인 기표 속에서 아무런 지주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서, 곧 아버지의 은유의 부정화하는 절단의 개입 이전에 존재하는 “순수 실정성”의 환유적 우주로서의 보편적 지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스피노자적인 “지혜”의 태도는 의무론을 존재론으로, 명령을 합리적 지식으로 환원하는 것에 의해, 언어행위론의 관점에서 말하면 수행문을 서술문으로 환원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Zizek 1993, p. 217; 2007b; 417쪽)

곧 지젝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유한성의 간극béance”은 소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순수 실정성”의 보편적 우주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추구한 셈이다. 그 결과 스피노자는 존재와 당위, 존재론과 의무론, 사실과 가치, 서술문과 수행문 사이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후자의 항들을 각각 전자의 항들로 환원시켰다. “그렇다면 영원의 관점에서 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현상들을 보편적인 상징적 네트워크의 요소들로 인식한다. ... 세계에 자신의 목적을 부과하는 초월적 주권자로 이해된 “신”은 내재적인 필연성 속에서 신을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입증한다. 반대로 칸트는 이론 이성에 대한 실천 이성의 우위를 긍정하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령의 사실은 환원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유한한 주체들로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명령을 서술문으로 환원시킬 수 있게 해줄 만한 관조적 위치에 이를 수 없다.”(같은 곳)


지젝의 두 번째 논의는 이러한 범신론적인 스피노자 철학이 어떻게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속에서 재현되는지, 또는 그것의 철학적 모체를 나타내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에서는 주체의 책임이라는 것을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스피노자는 명령이나 의무의 요소를 자신의 철학 속에서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세계를 인과적 사슬의 연쇄로 환원해버렸기 때문에,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주체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주체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인과 연쇄에 대한 주체의 무지에 있을 뿐이다. ““죄”는 나를 파괴적 행동으로 내몬 원인들에 대한 나의 무지를 가리키는 낡은 용어에 불과하다.”(같은 책, p. 218; 419쪽) 그런데 이러한 책임의 부재는 곧바로 타자들에게 악에 대한 책임이 모두 전가되는 것으로 변모된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주의에서는] 주체가 이러한 과정의 자율적인 담지자가 되기는커녕 부분적-측면적 연계의 연결망을 위한 하나의 자리, 수동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주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서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나”는 정확히 말하면, 나를 규정하면서 나의 자기 동일성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부분적인 객체적 동일화-모방의 연결망을 간과하는 한에서만 나 자신을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주체Subject로 인지한다.”(같은 책, p. 218; 420쪽) 이러한 메커니즘은 우리가 “탈산업적인 소비사회”라고 부르는 것에서 발생하는 바로 그것이다. 곧 “이른바 “탈근대적 주체”는 이 메커니즘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념들”을 규제하는 이미지들에 반응하면서 부분적인 정서들의 연결고리들에 의해 횡단되는 수동적 기반이 아닌가?”(같은 곳)


정리하자면 지젝에 따를 경우 알튀세르에게 주체들은 상징적 기표들의 연결망 속에서 부과된 동일성들에 수동적으로 호명되는 개인들인 것처럼, 스피노자주의에서도 주체들은 정서적 모방-동일시의 연결망 속에서 자신들에게 전달되는 이미지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정념적인 주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지젝 자신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의 긴밀한 상호연관성이라는 명확한 테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논변이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 그가 과연 “독서의 마스터”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뒤에서 보겠지만,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지젝의 언급은 지극히 상투적이며, 우리가 보기에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푸코, 데리다, 들뢰즈, 발리바르 등)에 대한 그의 비판들 역시 대개 상투적이고 피상적이다. 좀 특이한 것은 지젝의 여러 저서들을 번역한 이성민 씨는 지젝을 “‘독서의 마스터’”라고 부르면서 지젝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교한 독서를 통해 대결한다”(Zizek 2005, 642쪽)고 찬양하고 있다는 점이다.]



III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에서 이데올로기―상상계라는 쟁점



그렇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스피노자 철학 사이에는 그처럼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하는가? 분명 양자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연관성은 지젝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문제에서 알튀세르와 스피노자 사이의 연관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상상imagination” 또는 “상상계imaginaire”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상상imaginatio”이나 “상상하다imaginari” 또는 “이미지imago” 같은 용어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불어의 “imaginaire”에 해당하는 “imaginarius”라는 용어는 매우 적게 나타난다. 이 용어는 {윤리학}에서는 단 3 번, {신학정치론}에서는 6번 등장할 뿐이다. 더욱이 그 용법 자체도 현대적인 의미의 “상상계”라는 뜻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상상 이론은 주 12)의 인용문에서 알튀세르가 주장하듯이, 근본적으로 “상상계”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어떤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현대적인 용어들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곧 우리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살펴보면, 그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체계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며[스피노자의 상상이론에 관한 논의는 특히 영미권 주석가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Bertrand 1983은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데, 알튀세르의 관점과는 약간 상이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녀는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 「서문」 및 17장에서 볼 수 있는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녀가 좀더 전문적인 주석가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데 반해, 알튀세르는 상상계 이론과 정치 이론 사이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데서 생겨나는 차이로 볼 수 있다.], 반대로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의 관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조명하게 되면 라캉주의의 선입견에 가려 있던 알튀세르의 논의들이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우선 알튀세르 자신이 스피노자 철학, 특히 그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보자. 알튀세르는 1974년에 출간된 {자기비판의 요소들}에서 60년대 수행된 자신의 이론적 작업이 스피노자 철학에 준거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윤리학} 1부 「부록」이다.[나머지는 스피노자의 철학 전략으로서 “신으로부터의 출발”이라는 사례, 스피노자의 반변증법적 입장, 인식의 문제에서 반초월론적 문제설정을 보여주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habemus enim veram ideam”라는 {지성개선론}의 명제 등이다. 좀더 자세한 논의는 Althusser 1974 참조.] 특히 그가 AIE 논문에서 전개한 이데올로기론은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서 소묘된 상상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의 요점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윤리학} 1부 「부록」 및 {신학정치론}에서 우리는 분명 지금까지 사고된 최초의 이데올로기론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 특징을 담고 있다. 1)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실재성” 2)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도 3) 이데올로기의 “중심”, 곧 주체라는 가상”(Althusser 1974, p. 184) [그 이외에 {윤리학} 1부 「부록」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Macherey I; Sévérac 1997 등을 참조. 이 두 사람은 {윤리학} 1부 「부록」 텍스트를 매우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어서, 텍스트의 논의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와 분석방식이 약간 상이하고 관점에도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윤리학} 1부 「부록」을 정확하게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조해야 할 연구들이다.] 매우 간략하기는 하지만 이 세 가지 논점은 {윤리학} 1부 「부록」과 {신학정치론}을 분석하기 위한 좋은 지침을 제시해주며, 더 나아가 AIE 논문이 스피노자의 상상이론과 어떻게 이론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알튀세르가 지적한 세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1. 이데올로기의 상상적 “실재성”

이 테제는 스피노자에서 상상은 감각 및 이성이나 지성과 구별되는 하나의 인식 “능력facultas”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임을 뜻한다. 여기서 세계라는 것은 인간의 삶의 공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알튀세르는 이미 1963년 고등사범학교에서 했던 강의에서 스피노자의 상상 개념에 대해 이런 식의 해석을 제시한 바 있고[“[스피노자에서] 상상계는 데카르트에서처럼 심리학적 범주로 인식되지 않고, 세계가 그것을 통해 사고되는 범주로 인식된다. 스피노자에게 상상계는 더 이상 심리학적 기능이 아니며, 헤겔 식의 의미에서 한 요소, 곧 심리학적 기능들이 삽입되어 있는, 이 범주들이 그로부터 구성되는 하나의 전체다. ... 상상은 마음의 능력, 심리학적 주체의 한 능력이 아니며, 하나의 세계다.”(Althusser 1996c, p. 114)], 1964년에 발표되고 1년 뒤인 1965년에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좀더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데카르트주의자가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달을 “보았”듯이 또는―그들이 이에 집중하지 않았다면―보지 못했듯이, 사람들은 결코 의식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의 한 대상처럼, 자신들의 “세계” 자체처럼, 그렇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살아간다.””(Althusser 1996a, 280쪽/240쪽) 매우 도발적인 이 테제는 스피노자의 철학, 특히 {윤리학}이나 {신학정치론}의 원문을 통해 정확히 입증될 수 있으며, 여기서 언급된 “2백 걸음 떨어져 있는 달을 “보았”듯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윤리학} 2부 정리 35의 주석에 나오는 사례를 가리킨다.

태양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이 우리로부터 200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오류는 단순히 이런 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상상하는 중에 우리가 태양의 진정한 거리 및 이러한 상상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있다. 왜냐하면 나중에 태양이 지구 지름의 600배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이처럼 가까이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진짜 거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의 변용은 우리의 신체가 태양에 의해 변용되는 한에서 태양의 본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Spinoza 1999a, 158~159쪽―강조는 인용자) [이 사례에 대한 좀더 상세한 분석은 진태원 2006 5장 참조]

이데올로기가 상상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또 스피노자에서 상상은 인식의 한 가지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조건 자체, 인간학적 장 그 자체라는 것은 2절에서 살펴본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지젝의 언급이 얼마나 허술한 주장인지 잘 보여준다. 지젝은 멘델스존과 야코비의 논쟁 이래 독일 관념론의 기본 신조처럼 전승되어온 스피노자주의=범신론이라는 도식을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스피노자가 “유한성의 간극”은 소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순수 실정성의 보편적 우주의 인과연쇄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추구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스피노자 철학에 관해 이보다 더 상투적인 비난도 없을 것이다. 󰡔윤리학󰡕 1부 「부록」이나 󰡔신학정치론󰡕이 보여주듯이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인간의 삶, 인간 사회의 삶은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더욱이 지젝이 주장하듯이 이러한 상상은 단순히 무지의 표현이자 인식의 진전에 따라 소멸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고유한 변용에 따라 세계를 체험하고 살아가는 한에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 얼마나 진전된 인식을 얻든 간에 우리는 여전히 세계를 “인간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ordinem & concatenationem affectionum corporis humani”(E II P18s)”에 따라 체험하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곧 스피노자에서 자연이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ordo & concatenatio rerum”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이를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따라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지젝 식의 표현을 따른다면 바로 “유한성의 간극”에 대한 스피노자적인 표현과 다르지 않다.

2.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도

이것은 목적론이 어떻게 자연을 전도시키는가에 관한 스피노자의 분석을 가리킨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목적론이 모든 편견의 뿌리를 이루고 있음을 지적한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고 하는 모든 편견은 오직 다음과 같은 점에 의거하고 있다. 곧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자연 실재들은 자신들이 그러듯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고 가정하며, 더 나아가 신 자신이 모든 것을 어떤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인도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deum omnia propter hominem fecisse, hominem autem, ut ipsum coleret.(E I App.; G II 78―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목적론은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상상적 투사(投射)projection의 형태를 띠고 있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행위한다는 것을 본성적인 사실로, 그 자체로는 해로울 것이 없는 자연적 사실로 간주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에 고유한(또는 특정한 생물들에게 고유한) 목적 지향적 행위방식을 다른 모든 자연 실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연 실재들은 어떤 목적에 따라 운동하지 않으며 관성 원리에 따라 작용하고 반작용할 뿐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는 자연에는 작용인(물론 동역학적 관점에서 파악된)만이 작용하고 있을 뿐 목적인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 실재들에 대해 이를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방식을 자연에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투사가 신에게 적용될 때, 목적론은 완결된 형태를 띠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 실재들이 어떤 목적에 따라 행위한다면, 자연 전체를 목적론적 관점에 따라 계획하고 질서지은 어떤 존재자,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목적론은 필연적으로 목적론적 질서의 주재자인 어떤 신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듯이 “자연을 완전히 전도하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이라는 관점에 따라 달리 표현해볼 수 있다. 변용의 질서와 연관, 곧 상상계가 인간의 경험과 인식의 원초적인 인간학적 조건을 이룬다면, 이러한 상상계가 낳는 가상성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사물 그 자체의 질서와 연관으로 착각하는 데 있다. 곧 어떤 실재들의 변용 내지 이미지와 그 실재들 자체를 혼동하는 것, 다시 말해 실재들의 변용이나 이미지, 실재들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그 실재들 자체의 질서와 연관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바로 가상의 근본적인 뿌리가 존재한다. 스피노자의 고유한 용어법대로 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 또는 결과만을 사고할 뿐, 그러한 결과를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제하는 것, 바로 여기에 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의 고유한 효과 중 하나는 자신을 산출한 원인을 배제하는 데 있다.


알튀세르의 경우는 어떨까? 이 점에 관해서도 양자 사이에는 놀랄 만한 유사성, 아니 동일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 AIE 논문의 이론적인 의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에서 하나의 단절을 이룩하고 있다는 점에 있는데, 그것은 그 논문이 정확히 이데올로기를 기만이나 조작, 허위의식으로 간주하는 관점, 또는 포이어바흐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발생 원인을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의 소외 속에서 찾는 관점과 단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해석들은, 그것들이 전제하고 의존하는 테제, 곧 이데올로기에서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 반영되는 것은 인간들의 존재조건, 따라서 실재 세계라는 테제를 글자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Althusser 1995, p. 296; 1991, 109쪽―강조는 인용자)

더욱이 이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점, 곧 “완전히 실증주의적인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를 “순수한 환상으로, 순수한 꿈으로, 다시 말하면 무로 이해”(같은 책, p. 294; 104쪽)하는 관점과도 정확히 단절하는 것이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인간들”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서로 표상/재현/상연하는se représentent” 것[이 표현의 의미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평은 진태원 2002, 379쪽 참조]은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조건들, 그들의 현실 세계가 아니며,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에게 표상/재현/상연되는représenté 것은 그들이 이 실존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다. 실재 세계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 따라서 상상적 표상/재현/상연의 중심에 잇는 것은 바로 이 관계다(같은 책, p. 297; 109쪽)” “représenter”라는 단어의 독창적인 용법은 논외로 한다면, 스피노자의 상상에 대한 논의와 알튀세르의 주장 사이의 이론적 연관성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3. 이데올로기의 “중심”: 주체라는 가상

이 테제는 목적론적 가상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을 세계의 중심, 자연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인간들의 착각이 놓여 있음을 가리킨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스피노자의 분석은 크게 두 가지 논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스피노자는 신이 목적론적으로 행위한다는 가정의 밑바탕에는 좀더 근본적인 상상적 투사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에 관한 투사다. 앞에서 인용한 󰡔윤리학󰡕 1부 「부록」 인용문에서 강조한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상호 의존 관계는 이중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첫째는 “신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신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특별히 총애하며, 인간을 위해 모든 것, 모든 자연 실재들을 창조했다. 이는 곧 신이 인간에게 자연 만물을 자신의 수단으로,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그들은 자연 만물을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이 수단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이 수단들을 공급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러한 수단을 자기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마련해준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E I App.; G II 78)


그러나 그렇다면 왜 신은 이처럼 인간을 총애하는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이러한 특권, 인간이 모든 것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는가? 그 이유는 두 번째 의존 관계를 통해 해명된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숭배하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신은 인간으로부터 숭배를 받기 위해, 공경을 받기 위해, 인간을 위해 자연 만물을 창조했으며, 또 인간에게 그것들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게 된다. 그러나 왜 신이 인간의 숭배, 인간의 공경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왜 무한한 신, 지고하게 완전한 신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숭배,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부록」에서 이 질문에 답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그 이전에 목적론 자체를 가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목적론을 타당한 것으로 전제했을 때에만 의미 있게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러한 질문과 답변을 불필요한 것으로, 신학자들의 가상, 심지어 “착란delirare”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물론 스피노자가 이러한 목적론적 가상이 지니는 실제적인 효력을 무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스피노자의 목표는 이러한 가상의 효력을 부각시키는 게 아니라, 가상을 낳는 인간학적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을 뿐이다. 사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5장과 17장, 특히 17장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모세의 중개를 통해 야훼와 맺는 계약, 다시 말해 우리가 방금 말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의 원형을 이루는 신과의 계약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둘째, 그 대신 그는 관점을 바꿔서 목적론적 가상을 낳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신과 인간의 특별한 상호 의존 관계를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스피노자는 목적론을 낳는 본질적인 인간학적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해야 하는 것, 곧 모든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충동을 의식한다는 것을 기초로 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E I App.; G II 78) [“satis hic erit, si pro fundamento id capiam, quod apud omnes debet esse in confesso; nempe hoc, quod omnes homines rerum causarum ignari nascuntur, & quod omnes appetitum habent suum utile quaerendi, cujus rei sunt conscii.”]

스피노자는 이 문장에서 두 가지 본질적인 점을 대비시키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 태어난다는 것, 따라서 인간에게는 본유 관념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고, 또 이러한 충동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첫 번째 논점은 상상 개념 자체에서 따라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모든 인식은 항상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단지 외부 실재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의 신체 및 인간 자신의 정신에 대한 인식까지도 이러한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2부 정리 19와 정리 23 참조). 그런데 이러한 신체의 변용의 질서와 연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신체의 역량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며(2부 정리 14), 신체의 변용들을 인식하는 정신의 소질, 능력도 그에 따라 변화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아이 또는 유년 시절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에[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윤리학󰡕 5부 정리 39의 주석일 것이다. 스피노자의 인식론 및 윤리학을 이해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스피노자에서 아이/유년시절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연구는 매우 드물다. 정리 39의 주석에 대한 논평은 Macherey V, pp. 184-85를 참조하고, 아이/유년시절의 문제에 관한 최근의 좋은 논의는 Zourabichvili 2002 2부 참조.], 인간이 탄생의 시점에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유관념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인간은 “실재의 원인에 대해 모르고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경험론자들, 특히 홉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인간의 본질은 충동 또는 욕망이기 때문에, 인간은 무지한 채로 태어나지만 본성적으로 어떤 충동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이 충동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간학적 조건에서 비롯한 이 양자의 괴리가 좁혀지지 않는 상태에서는(이는 인간이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 인간은 목적론적 가상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고, 이를 자연 현상들에 대해 투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목적론적 가상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가상은 한편으로 원인에 대한 무지와 다른 한편으로 결과(충동)에 대한 의식 사이의 괴리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의 중심, 곧 주체라는 가상은 주지하다시피 “호명” 테제를 통해 제시된다. 지젝을 비롯한 많은 라캉주의 주석가들은 적어도 호명 테제에서만큼은 알튀세르가 라캉에게 분명한 이론적 빚을 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라캉의 이론을 잘못 해석해서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호명 테제에 나오는 몇몇 표현들, 특히 대문자 주체와 작은 주체들 사이의 “거울 관계” 내지 “거울 구조”라는 표현은 라캉의 용어법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가령 알튀세르의 표현법은 라캉의 11번째 세미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차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주체는 타자Autre의 장에 예속됨으로써만 주체일 뿐이다.”(Lacan 1973, p. 172) 단 라캉은 대문자 주체 대신 대문자 타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용어법 자체는 라캉에서 유래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 자체는 라캉적이라기보다는 스피노자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는 우선 알튀세르가 호명 테제를 예시하기 위해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모세가 신과의 계약을 맺고 이를 바탕으로 히브리 국가를 구성하는 사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은 “주체Subject”이고 모세 및 신의 백성인 수많은 주체들은 신의 대화자-피호명자, 곧 그의 거울들이고 반영들이다. 인간들은 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지 않았던가? 모든 신학적인 성찰이 증명하듯이 신이 인간들 없이 완벽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 인간들이 신을 필요로 하고 주체들이 “주체Subject”를 필요로 하듯이 신은 인간들을 필요로 하고 “주체”는 주체들을 필요로 한다.”(Althusser 1995, p. 317; 1991, 124쪽) 그런데 이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 17장에서 히브리 신정국가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이중적 계약의 사례 바로 그것이다.


이 점을 이론적ㆍ정치적 측면에서 좀더 부연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제사로 인용한 󰡔“자본”을 읽자󰡕의 한 구절에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이하 3절의 내용은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 「역자 해제」 중에서 270-276쪽의 내용을 다소의 수정을 거쳐 전재한 것이다.]

읽기라는 문제, 따라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던 인물인 스피노자는 또한 역사이론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Althusser 1996b, p. 8. 강조는 알튀세르)

스피노자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 중에서 제일 덜 주목받고 있지만, 또한 제일 놀라운 사례 중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주장은 겉보기에는 매우 당혹스러운 주장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역사에 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또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혀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주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엉뚱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역사철학이 18세기 말 계몽주의 이후, 특히 독일 관념론에서 하나의 철학적 주제로 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알튀세르의 지적은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라는 비난까지 받을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은 그것 혼자서만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에 관한 철학”과 결부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후자가 없이 전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이 양자를 결부시켰다는 점이야말로 스피노자의 고유한 철학적 업적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읽기”라는 문제, “글쓰기/기록하기”라는 문제와도 결부시키고 있다.


왜 알튀세르는 스피노자가 거의 언급하지도 않은 그의 “역사이론”에 주목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역사이론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더 나아가 이는 “읽기”나 “글쓰기/기록하기”의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처럼 의문들은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알튀세르는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다른 언급들과 마찬가지로, 대담한 주장을 한 마디 던져놓은 다음, 마치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른 논의로 성큼 건너뛰고 있다.


바로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와 정치󰡕에서 흥미 있는 통찰을 제공해주는데, 왜냐하면 그는 󰡔신학정치론󰡕에서 하나의 역사이론(“역사철학”이 아니라)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그는 성서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있는 󰡔신학정치론󰡕 17장만이 아니라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을 시도하고 있는 전반부(곧 1장-15장)의 분석 역시 하나의 역사이론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그는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차 수준의 역사”(또는 스피노자의 표현대로 하면 “비판적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서는 히브리 백성들의 상상에 기초를 둔 하나의 역사적 담론이며, 스피노자의 성서 비평은 이러한 역사적 담론에 대한 이차적 담론, 곧 비판적 역사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그는 성서는 바로 서사敍事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서사는 히브리 민족의 고유한 역사적 기록/글쓰기의 관행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글쓰기/기록”이라는 문제, 그리고 이에 대한 “읽기/독해”의 문제를 역사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로 제기한 최초의 인물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역사이론을, 알튀세르 식으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 곧 대중들의 상상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킨다. 발리바르의 분석에서 직접적인 것의 불투명성/상상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우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가 있다. “이러한 이차 수준의 서사는 재구성될 수 있는 한에서의 사건들의 필연적인 연쇄과정 및, 자신들을 움직이는 원인들 대부분에 대해 알지 못하는 역사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역사의 “의미”를 상상하는 방식을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Balibar 2005, 152쪽) 대중들의 상상은 비판적 역사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비판적 역사의 소재를 이루는 성서 내지 히브리 인민의 삶 자체가 상상의 요소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중들의 삶이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실제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이를 상상에 따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앞서 논의한 대로 스피노자의 일반적인 인간학적 테제,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욕과 욕구는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야기시킨 원인들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윤리학󰡕 1부 「부록」)는 테제에서 따라 나온다.


그 다음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의 기초가 되었던 정치적 상상의 요소가 있다.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 17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히브리 국가의 구성이 일종의 계약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이중적인 계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곧 이는 주권자와 신민들 사이에 맺어지는 정치적 계약이면서 동시에 야훼라는 신에 대한 개개의 신자들(곧 개개의 히브리인들) 사이에 맺어진 종교적 계약이기도 하다.[이 점에 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Balibar 1985; 진태원 2004 참조] 따라서 히브리 백성들에게 신은 종교적인 경배의 대상이면서 또한 정치적 주권자이며, 신의 계율에 대한 위반은 동시에 국법의 위반을 의미했다. “요컨대 시민법과 종교는 서로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국가는 신정 국가라 불릴 수 있었다.(Spinoza 1999b 17장 7-8절, p. 546)”


스피노자 자신이 말하고(“이 모든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의견opinione magis quam re에 속하는 것이다.” Spinoza 1999b 17장 8절, 모로판, 546)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라는 것은 물론 하나의 허구다. 하지만 이러한 허구는 매우 실제적인 효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허구를 통해 하나의 국가가 구성될 수 있었고, 적어도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랄 만한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가 이처럼 중요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을 각 개인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히브리 민족 전체의 신으로, 따라서 히브리 국가의 유일한 주권자로 만듦으로써, 각자가 신에게 바치는 절대적 헌신과 복종이 동시에 국가에 대한 헌신과 복종으로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이중적 계약이 필요한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는 무엇보다도 오랜 노예 생활 때문에 스스로 국가를 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한 히브리 인민들의 “미개인 같은rudis”(Spinoza 1999b 5장 10절, p. 222) 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허구에 기초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역사적으로 유일한 국가인 것처럼, 일반적인 설명적 가치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발리바르가 보여준 것처럼 좀더 일반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 곧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에 대한 법적 관점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정의 이중적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정은 한편으로 민주정과 등가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을 통해 신에게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자신들을 신의 백성으로 재인지함으로써, 히브리인들 모두는 신 앞에서 동등한 신의 백성들, 신의 시민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상적 민주정”은 민주정의 핵심인 집합적 권리, 집합적 주권을 “다른 무대”로 옮겨놓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곧 신정에서 인민들 스스로가 동등하게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신이라는 진정한 주권자가 초월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한에서다(곧 신의 거주지로서 신전이 특별한 경배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따라서 신정은 집합적인 주권이 초월적인 신의 자리, 비어 있는 상징적 자리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제 고유한 의미의 민주정으로 되돌아가 보자. 개인들이 신과의 동맹이라는 허구(곧 주권의 상상적인 자리 이동) 없이도 명시적인 “사회계약”에 따라 직접 집합적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명되면, 문제는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대중들의 미신은 차치한다 해도, 이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권리의 동등성과 의무의 상호성 위에 구성된 민주 국가는 개인적 의견들의 결과인 다수결 법칙에 따라 통치된다. 그러나 다수결 법칙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권자가 공적인 이익과 관련된 활동을 명령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존중받을 수 있게 만드는 절대적 권리를 지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 외에도 또한 야심들보다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선호하는 것, 곧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Balibar 2005, 77쪽)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일회적인 것에 불과한 히브리 신정국가는 사실은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중요한 보편적 교훈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첫째, 법적 제도만으로는 민주주의(또는 국가 일반)는 충분한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으며, 대중들의 정념적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별도의 메커니즘 내지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하지만 정념적 삶을 조절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종교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히브리 신정국가가 개인들의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함으로써 상당한 기간 동안 정치적 통합을 이뤄내긴 했지만, 이러한 국가의 통합, 일체화는 그 자체가 정념적인 양가성에 지배받고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끼리의, 국민들끼리의 놀라운 유대는 신과의 동일시/정체화를 매개로 한 서로에 대한 정념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랑의 이면은 초월적인 신의 감시와 처벌에 대한 공포와 잠재적인 적으로서 이웃에 대한 일반화된 증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예수는 이처럼 종교적 삶과 정치적 삶을 일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삶을 정치적, 교권적 권위로부터 분리하여 이를 각자의 믿음과 판단에 따른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문화혁명을 이룩했다. 하지만 이는 신자로서의 개인들을 정치적 권위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자체로부터 분리시켰으며, 또 그에 비례하여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신의 말씀을 내면화된 도덕법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셋째, 상상계가 개인의 삶 및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요소로 존재하는 한에서 대중들은 ‘자기 자신’(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과 합치할 수 없다는 것, 곧 대중들은 온전한 자율적 주체로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상상계가 인간의 삶의 장소 그 자체인 한에서, 다시 말해 환원 불가능한 인간의 유한성의 조건 그 자체인 한에서,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 또는 민주주의의 성립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전제되어 있는 대중들의 자기 통치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인가? 겉보기와는 달리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자기 통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는 항상 경향적으로만, 갈등적인 운동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곧 이는 유토피아로서의 민주주의 대신 현실적인 운동으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의 가능성을 마련해준다.


이제 우리가 위에서 출발했던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의 문제로 되돌아가보자. 지금까지의 분석은 알튀세르가 AIE 논문에서 제시한 호명이론이 외양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것이 채택하고 있는 몇몇 용어법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전개한 이론적 분석과 놀랄 만한 이론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1) 이는 우선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 및 그것을 원용한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분석은 알튀세르의 AIE 논문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분석, 국가의 형성과 재생산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2) 더 나아가 알튀세르가 대주체와 작은 주체들(및 그 매개자로서 정치 지도자) 사이에 존재하는 호명 관계라고 부른 것은 스피노자가 히브리 신정국가의 구성 및 그것이 보여준 놀랄 만한 지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이중적인 계약관계와 정확히 합치하는 것이다.


3) 히브리 신정국가에 대한 스피노자의 분석은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수많은 오해와 달리 상상계 내부의 관점을 표현하는 것임을 시사해준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은 기능주의적인 관점을 대변하는 것으로 널리 비판받아왔다. 다시 말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각각의 “개인들”이 “주체들”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미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배 체계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사고할 수 없게 만든다고 비판받아왔다(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젝의 비판은 종래에 제기되던 비판을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좀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AIE 논문이 불러일으킨 논쟁(및 오해)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AIE에 대한 노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데올로기 내부에는 항상 계급투쟁이 존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의 기능이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것이라면 그 이유는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것은 투쟁이 있기 때문이며, 이 투쟁은 결국 계급 투쟁에, 때로는 가까이에서, 그러나 대개는 멀리서 응답하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반응이다.”(Althusser 2007, 332쪽) 그런데 계급투쟁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항상 집단에 대해, 또는 더 나아가 대중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반면 호명 이론에서는 집단이나 대중들이 아니라 항상 개인이나 주체(또는 복수로 개인들이나 주체들)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의 메커니즘은 항상 사회적 투쟁의 현실적 장이 추상된 가운데, 집단이나 대중들이 이미 개인들이나 주체들로 해체된 가운데 사고되는(또는 “상연되는représenté”) 것임을 말해준다. 물론 이는 이러한 추상이나 해체가 전혀 허구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과의 계약에 대한 상상계가 히브리인들에게 지극히 실재적이었듯이, 이데올로기의 상상계 내부에서는 이는 지극히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라캉적인 의미에서 상징적인 차원이나 실재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은 알튀세르를 비판하면서 지속적으로 “상징적 동일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알튀세르에게 이는 용어모순과 같은 표현이다. 그에게 주체가 지니고 있는 동일성은 상상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며, “동일시identification” 역시 상상적인 것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특히 󰡔마르크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 참조. 이 글은 아마도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가장 주목받지 못한 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1996년 서문」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이 글이 일종의 “도둑맞은 편지”일 것이라고 쓰고 있다. Balibar 1996 참조.]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알튀세르에게 상상계란 라캉적인 의미의 상상계, 또는 좀더 그릇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젝의 의미에서의 상상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무의식의 주체라는 차원이 없다고, 호명 이전에 존재하는 주체를 사고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론의 논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라캉적인 도식이나 최근에는 지젝 식의 해석을 그것에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 주체는 상상적인 주체, 하지만 삶의 기반으로서 상상계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동일성을 갖고 살아가는 주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와 관련하여 알튀세르가 차이를 보이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자에게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식(히브리 신정)으로 나타났던 것이 후자에게는 보편적인, 초역사적인 메커니즘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보여주듯이 히브리 신정이 보편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알튀세르가 이를 호명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알튀세르가 호명의 메커니즘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곧 지배 계급의 예속의 메커니즘으로만 사고했다는 점이다. 히브리 신정의 경우 호명은 대중들의 무능력을 전제한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상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히브리 인민들의 집단적인 생존의 전략(무의식적인?)이었으며, 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발리바르 식으로 표현하면(Balibar 1991), 히브리 신정국가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대중들의 해방에 대한 열망의 (얼마간 가상적인)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스피노자 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민주주의적인 경향의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가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과 응용의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간파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점일 것이다.


물론 이는 지젝(및 다른 비판가들)이 주장하듯이 알튀세르에게 호명의 메커니즘이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사고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알튀세르는 이미 AIE 논문 말미의 “보론”에서 이데올로기 내부에서는 항상 계급투쟁이 진행된다는 것, 곧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중적인 저항이 항상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고, AIE 논문이 불러일으킨 논란에 대해 답변하는 글(Althusser 1976)에서는 이 점을 좀더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 이론이 기능주의적이라거나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비판은 적절한 것이 못된다. 다만 알튀세르는 호명은 개인들 및 대중들의 실존과 행동의 상징적 지주이면서 동시에 장애물을 이룬다는 것, 따라서 호명 그 자체가 계급투쟁 및 지배와 저항의 쟁점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해명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IV. 지젝의 난점들



지젝의 작업은 라캉의 정신분석학, 특히 그의 후기 작업의 요소들을 도입함으로써 현대 이데올로기론의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 지젝 이전까지 이데올로기론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주로 상상계-상징계라는 쌍을 통해 논의되었는데, 이는 라캉의 작업이 (옳든 그르든 간에) 대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특히 그의 호명이론을 매개로 도입되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지젝은 이전까지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실재계”의 차원을 과감하게 이데올로기론으로 이끌어들이면서 이데올로기론 및 알튀세르와 라캉의 관계에 대해 전혀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사실 라캉의 후기 작업이 RSI론[이는 각각 “le Réel”, “le Symbolique”, “l'Imaginaire”, 곧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의 약자표시다]으로 통칭되는 삼원성(특히 실재계를 중심으로 한)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미권에서 지젝 이전의 라캉 수용은 불완전하고 다소 왜곡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젝의 진정한 독창성은 라캉의 이론(및 독일 관념론 철학)을 이데올로기론 및 사회이론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드문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드문 예외들 중 특히 장 클로드 밀네의 작업을 들 수 있다. Milner 1983.],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실재계를 포함한 라캉의 RSI론 전체를 이데올로기론과 사회이론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 그것이 현대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반면 지젝은 다수의 저작들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이 이데올로기론 및 문화분석론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젝의 이론적 작업에 난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는 특히 그가 시도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개조에서 잘 나타난다. 가령 그는 우리가 위에서 제시했듯이 알튀세르의 이론에 대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우월한 이유를 이 후자가 호명을 넘어서는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특히 AIE 논문에서 호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을 이론화함으로써, 그의 의도와 달리 자본주의적인 재생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기능주의에 빠져든 반면,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나 “무의식의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 상징적 질서의 공백을 드러내고 호명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젝이 주장하듯이 라캉의 이론이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환상을 가로지르기”가 단지 정신분석학의 임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상을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증상과의 동일시를 완수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전가된 속성들 속에서 우리의 사회체계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귀속된 ‘과잉분’ 속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확인해야 한다.”(Zizek 1989, 223쪽) 반복되는 “해야 한다”의 명령형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지젝에게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궁극적으로 윤리적 문제라는 점이 드러난다. 윤리는 물론 비판적인 지식인들이나 대중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며, 올바른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이론 또는 사회적 분석의 차원에서 윤리적 명령이 어떤 의의를 지닐 수 있을까? 특히 이데올로기론의 차원에서는 윤리적 명령이 어떤 의미에서 중요할까? 이는 “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지 “우리는 호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식의 명령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하지만 “환상을 가로지르기”라는 해결책이 제기하는 좀더 중대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환상을 가로지르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환상을 가로지르’면서 동시에 증상과의 동일시를 완수”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엔 항상 상징적 질서로 통합될 수 없는 어떤 적대적인 갈등이 가로지르고 있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의해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Zizek 1989, 220쪽) 우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핵심이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실소를 자아내는데, 과연 오늘날 누가 이처럼 아름다운 “통합주의적 관점”,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적 통일체”(같은 곳)로 바라보는 관점을 믿을지, 또 과연 지배 계급이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런 식의 관점을 설파할 것인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좀더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대한 지젝의 관점 자체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유대인을 하나의 물신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예로 든다. 곧 유대인은 “이 통합주의적인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 간의 거리”를 메우기 위한 물신,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라는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바꿔 말해서 환상은 이데올로기가 자기 자신의 균열을 미리 고려해 넣는 방식이다.”(같은 책, 221쪽)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지젝이 말하는 사회적인 환상 또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라면, 결국 환상이란 기만적인 조작 및 그것이 산출하는 허위의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마도 지젝이나 지젝주의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환상이 작동하는 것은 의식 내지 담론의 수준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 향락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곧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우리의 향락 자체를 구조화하는 방식이다. 유대인의 예를 든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유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배척하는 것은 이런저런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들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바로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다면, 우리가 앞서 제기한 질문이 다시 제시된다. 이러한 사회적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적 환상이 기만이나 허위의식의 문제라면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원칙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사실상으로는 매우 힘들지 몰라도). 비판적인 분석과 대중적인 계몽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환상이 의식이나 담론의 차원이 아니라 향락의 수준에 위치하고 있다면, 곧 우리 욕망의 가장 집요하게 내밀한 차원의 문제라면, 이것을 어떻게 가로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된다. 어떻게 어제까지 그토록 증오했던 유대인들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될까? 유대인(또는 오늘날이라면 이주 노동자들)은 우리 사회의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사실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일깨우면 될까? 유대인(이주 노동자들)이 실제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과 무관하다는 경험적인 자료들을 축적해서 입증하면 될까? 하지만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정서와 인식, 욕망과 지식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지젝의 관점에서 과연 이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지젝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바로 이것일 텐데, 지젝은 이 문제에 대해 줄곧 윤리적 태도,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믿고 또 그것을 추구하려는 윤리적 태도(그의 표현대로 하면 “행위”)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렇다. “버틀러와 대조하여, 라캉이 내기에 걸고 있는 것은, 심지어/또한 정치에서도, 바로 그 근본적인 환상을 ‘횡단’하는 좀더 근본적인 제스처를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적 중핵을 교란시키는 그와 같은 제스처만이 본래적 행위인 것이다.”(Zizek 1999, p. 266; Zizek 2005, 428쪽; Zizek 2007a). 좋은 이야기다. 그런데 대중들의 저항 없이 어떻게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지 않고서 어떻게 대중들의 윤리적 각성 및 저항을 기대할 수 있을까?[지젝에 대한 좌파 이론가들, 특히 숀 호머의 비판을 반비판하면서 토니 마이어스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다른 한편으로, 호머는 지젝이 강조한 ‘행위’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진실한 방법’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행위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바꾼다고 할 때, 행위의 출현 이후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젝은 진술 불가능한 것을 말하기보다는 행위의 가능성 자체를 지속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다. 지젝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정치적 공간이 구조화되는 방식은 점점 더 행위의 출현을 힘들게 한다.” 그래서 지젝은 자본주의적 삶의 지평을 끊임없이 이론화함으로써 행위를 위한 장소를 규명하는 데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한다.”(마이어스 2004, 225쪽) 마이어스는 몇 가지 측면에서 기본적인 혼동을 보여준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의 출현 이후 어떤 세계가 나타날지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행위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아는 것이다. 지젝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대중의 행위가. 둘째, 혁명 이후, 그날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말과 혁명의 가능성, 변혁의 가능성을 위해 현재 존재하는 세계의 구조들을 분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마이어스는 지젝이 “자본주의적 삶의 지평을 끊임없이 이론화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지젝이 하고 있는 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대중문화적인 현상 및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같은 정치적 현상들에 적용하여 그 현상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현상들을 예시하는 것 또는 좀더 후하게 말하면 라캉을 원용해서 현상들을 분석하는 것(이때의 분석은 아마도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의 분석에 더 가까울 것이다)은 세계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구조적인 분석이 없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세계의 근본적인 변혁을 감히 꿈꿔볼 수 있을까? 셋째, 마이어스는 지젝이 행위를 위한 장소를 규명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고 말하고 있고, 지젝 자신은 진보 정치를 위해 수동성으로 물러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것도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윤리적 행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지배 계급 중 누가 지젝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윤리적 행위를 두려워하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지젝이 강조한 ‘행위’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진실한 방법’으로 확대 해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아니 지젝에게는 수동적인 대중과 다른 대중들multitudo에 대한 관점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더욱이 환상의 물질적인 지주로 기능하는 각종 물질적 장치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관념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으로는 Sato 2007 5장을 참조할 수 있다.]


지젝이 최근의 작업(특히 Zizek 2003 「재판 서문」; 2005 및 여러 저작)에서 집요하게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전망, “본래적인 행위”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면서도, 정작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윤리적 명령을 반복하는 데 그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이데올로기론에서의 퇴보를 나타내는 징표가 아닐까? 이를 좀더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지젝에게 상상계 또는 그가 좀더 강조하는 용어대로 하자면 환상은 스피노자나 알튀세르와 달리 그것이 지닌 가상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상적인 것은 사회적 적대를 봉합하고 왜곡하고 기만적으로 쟁점을 전위시키는 것일 뿐, 개인들의 삶의 기반, 장소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이 스피노자나 알튀세르에서 이데올로기적 상상은 정치적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데 반해, 지젝에게는 지배 계급의 조작의 소재가 될 뿐이다.


2) 이데올로기론에서 알튀세르적인 단절의 지표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적인 물질성에 대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테제를 통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제시한 고전적인 테제, 곧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의식의 문제이며 물질적인 역사와 달리 아무런 독자적인 실재성도, 역사성도 갖지 않는다는 테제와 단절을 이룩할 수 있었다. 또한 이 테제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개념으로 이어져,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의식에 직접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물질적인 장치를 통해, 관습적인 의례와 규율 장치를 통해 작동하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관한 테제는 이데올로기가 역사적으로 규정된 물질적 장치들을 통해 제도화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주며, 이는 정치적 투쟁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스피노자에서도, 적어도 󰡔신학정치론󰡕에서 상상계는 항상 물질적인 장치들이나 제도 및 의례들과 관련해서 사고되고 있다. 반면 지젝에게는 물질적인 장치들이나 제도들에 대한 분석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ㆍ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분석들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유효성을 입증하는 사례들로 제시될 뿐이다.[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지젝이 처음 제시하고(Zizek 1989) 지젝 자신(Zizek 1997 3장) 및 로베르트 팔러(Pfaller 2002)가 좀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장치 및 제도들을 분석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V.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지젝은 자신의 여러 저작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기반하여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의 한계를 비판해왔다. 또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서는 이러한 한계가 스피노자주의의 한계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서 스피노자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스피노자 철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판단하는 점에서는 지젝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대부분의 라캉주의자들의 맹목적인 비판보다 훨씬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주의=범신론이라는 상투적인 도식에 입각한 그의 비판은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비판일 뿐만 아니라 스피노자의 상상이론이 지니는 중요성과 독창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심각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의 생각과 달리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라캉의 정신분석학과는 다른 기반, 특히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에 기초하여 구성되고 발전되었으며, 라캉의 이론이 얼마간 알튀세르에게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자의 토대 위에서 변형되고 재구성된 상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한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특성 및 그것의 정확한 강점과 난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이 글은 2008년 3월 15일 서양근대철학회 창립 1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처음 발표했으며, 3월 31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월요모임에서 다시 발표한 바 있다. 첫 번째 발표회에서 귀중한 논평을 해주신 홍기숙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두 차례의 발표회에서 좋은 지적을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참고문헌



마이어스, 토니(2004).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박정수 옮김 (서울: 앨피).
진태원(2002). 「라깡과 알뛰쎄르: ‘또는’ 알뛰쎄르의 유령들 I」, 김상환ㆍ홍준기 옮김, 󰡔라깡의 재탄생󰡕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4).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 서울대학교철학사상연구소 편, 󰡔철학사상󰡕 제 19집.
(2005). 「대중들의 역량이란 무엇인가?―스피노자 정치학에서 사회계약론의 해체 II」, 󰡔트랜스토리아󰡕 제 5호.
(2006).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서울대학교 철학박사학위 논문.
Althusser, Louis(1974). Éléments d'autocritique, Hachette;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ed. Yves Sintomer, PUF, 1997에 재수록(인용문 쪽수는 이 후자의 책에 의거한다).
(1991).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서울: 솔).
(1993). Ecrits sur la psychanalyse. Freud et Lacan, ed. Olivier Corpet & François Matheron, Paris: Stock/IMEC.
(1995). Sur la reproduction, Paris: PUF.
(1996a). Pour Marx, Paris: Découverte(19651); 󰡔맑스를 위하여󰡕, 이종영 옮김, (서울: 백의).
(1996b). Lire le Capital, Paris: PUF(초판은 19651).
(1996c). Psychanalyse et sciences humaines. Deux conférences(1963-1964), eds., Olivier Corpet & François Matheron, Paris: Le Livre de Poche.
(2007).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서울: 동문선).
Balibar, Etienne(1985). “Jus-Pactum-Lex: Sur la constitution du sujet dans le TTP”, Studia Spinozana 1.
(1988). "La forme nation: histoire et idéologie", É. Balibar et I.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s ambiguës, La Découverte.
(1991). “Non-contemporanéité: Politique et idéologie”, in Écrits pour Althusser, Paris: La Découverte;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윤소영 옮김 (서울: 이론).
(1996). “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 in Althusser 1996a.
(2001). Nous, citoyens d'Europe?, Paris: La Découverte.
(2005).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서울: 이제이북스).
Barrett, Michèle(1993). “Althusser's Marx, Althusser's Lacan”, in E. Ann Kaplan & Michael Sprinker eds., The Althusserian Legacy, Verso.
Bertrand, Michèle(1983). Spinoza et l'imaginaire. PUF.
Butler, Judith(1997).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Callari, Antonio & Ruccio, David F.(1996). ed.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Essays in the Althusserian Tradition. HanoverㆍNH: University Press of New England.
Dolar, Mladen(1993). “Beyond Interpellation”, Qui Parle 6.2, 1993.
Eagleton, Terry(1991). Ideology: An Introduction, LondonㆍNew York: Verso.
Lacan, Jacques(1966). Écrits, Seuil.
(1973), Le séminaire XI. Les quatre concepts fondamentaux de la psychanalyse, Paris: Seuil.
(2001), Autres écrits, Paris: Seuil.
Lock, Grahame(1996). “Subject, Interpellation, and Ideology”, in Antonio Callari & David F. Ruccio(1996).
Macherey, Pierre(1994~1998). Introduction à l'Ethique de Spinoza, vol. 1-5, PUF(본문에서는 Macherey I ~ V로 약칭).
Milner, Jean-Claude(1983). Les noms indistincts, Paris: Seuil.
Montag, Warren(1995). “The Soul Is the Prison of the Body”: Althusser and Foucault, 1970-1975”, Yale French Studies 88: Depositions.
(1996). “Beyond Force and Consent: Althusser, Spinoza, Hobbes”, in Antonio Callari & David F. Ruccio(1996).
Moreau, Pierre-François(1997). “Althusser et Spinoza”, in Pierre Raymond ed., Althusser philosophe, Paris: PUF.
Pfaller, Robert(1998). “Negation and Its Reliabilities: An Empty Subject for Ideology”, in Zizek(1998).
(2002). Die Illusionen der anderen. Über das Lustprinzip in der Kultur, Frankfurt am Main: Suhrkamp.
Sato, Yoshiyuki(2007). Pouvoir et Resistance: Foucault, Deleuze, Derrida, Althusser, Paris: L'Harmattan.
Sévérac, Pascal(1999). Éthique, Spinoza, Ellipses.
Spinoza, Benedictus de(1925). Spinoza Opera, vol. 1-4, ed., Carl Gebhardt, Heidelberg: Carl Winter, 1925.(G로 약칭)
(1999a). Ethique, trans. Bernard Pautrat, Paris: Seuil.
(1999b). Traité théologique-politique, ed., Fokke Akkerman, trans., Pierre-François Moreau & Jacqueline Lagrée, Paris: PUF.
Tosel, André(2005). 「스피노자라는 거울에 비추어본 맑스주의」, 󰡔트랜스토리아󰡕 제 5호.
Zizek, Slavoy(1989).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ㆍNew York: Verso;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서울: 인간사랑).
(1992).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LondonㆍNew York: Verso.
(1993). Tarrying with the Negative: Kant, Hegel,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Duke University Press.
(1994). “The Spectre of Ideology”, in Idem ed., Mapping Ideology, LondonㆍNew York: Verso.
(1996). The Indivisible Remainder, LondonㆍNew York: Verso.
(1997). The Plague of Fantasies, LondonㆍNew York: Verso.
(1998), ed., Cogito and the Unconscious, Durham: Duke UP.
(2003).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박정수 옮김 (서울: 인간사랑).
(2005).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7a). 󰡔How to Read 라캉󰡕 박정수 옮김 (서울: 웅진 지식하우스).
(2007b).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이성민 옮김 (서울: 도서출판 b).
Zourabichvili, François(2002). Le Conservatisme paradoxal de Spinoza: Enfance et royauté, Paris: PUF.



 

국문 요약

이 연구는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어떤 의미에서 스피노자주의적 이데올로기론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대개 라캉주의적 이데올로기론으로 알려져왔으며, 더욱이 실패한 라캉주의 이론으로 비판받아 왔다.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저작들에서 이러한 실패의 이유를 알튀세르와 스피노자주의의 연관성에서 찾고 있으며,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양자의 공통적인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필자의 주장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의 본질적인 이론적 연관성을 지적하고 있는 점에서는 지젝이 옳지만, 그 연관성의 실제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문제의 핵심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상계' 개념의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상상계 개념은 스피노자의 인간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새롭게 해명하는 데에도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난점들은 스피노자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유물론적 상상계 개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핵심 주제어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 상상계, 호명, 환상, 변용의 질서와 연관, 신정국가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lucidate in what sense the Althusserian theory of ideology is a spinozistic one. It has been generally considered as a Lacanian theory, and even criticized by some commentators as a failed one. Slavoy Zizek found the reasons of its failure in the theoretical connections between the Althusserian theory and the Spinozism, and criticized their common limitations from the viewpoint of Lacanian psychoanalysis. In my thought, he was surely right to find the essential theoretical relation between Althusser and Spinoza, but he totally failed to understand its meaning and significance. I think the point is to clarify the meaning of "the imaginary" in the philosophy of Spinoza. "The imaginary" is important not only to understand Spinoza's anthropology, but also to bring a new light on the Althusserian theory of ideology. Then, I hope, one can explain the difficulties of Zizek's own theory of ideology in the light of the materialist concept of the imaginary which is shared by Spinoza and Althusser.

key words: Slavoy Zizek, ideology, the imaginary, interpellation, fantasy, order & connection of affections, state of theocracy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