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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달 동안 소설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본시 책 속에서, 특히 소설 속에서 세상을 배워왔지만, 최근의 내 관심은 한 개인의 상상에서 비롯된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내 옆의 사람들,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체다. 따라서 이 세계의 실상을 알려주는 사회과학 계통의 책들만을 읽게 된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소개하면서 보르헤스와 미하일 엔데를 언급했고, 소개글에서는 스페인 작가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궁금했지만, 또 다시 광고에 속는 건 아닌가 싶어 참았다. 읽는 동안 재미있더라도 읽은 후 남는 게 없다면 요즘 보고 있는, 책상 위에 위태롭게 쌓여 있는 책더미를 줄이는데 집중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결국 내 인내심의 바닥은 아주 얕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암전(暗轉). 잠깐의 공백 혹은 단절에 이어 머리 속에 떠오른 건 단 한 문장이었다. “이런 게 소설이었어!”
소설은 작가가 상상해낸 허구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 우리 삶의 단면 혹은 여러 층위들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인생의 의미와 진실을 깨닫게 해 준다. 내 기준으로 좋은 소설이란 이런 것들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은근히 드러내고, 읽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보장하며, 읽고 난 후에는 긴 여운과 아우라를 남기는 작품이다. <바람의 그림자>는 내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는 진짜 소설이다.
모든 사건은 어느 새벽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찾게 된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시작된다. 다니엘이 고른 책은 하필 이제는 단 한 권 밖에 남지 않은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였고, 다니엘이 책에 완전히 빠져들어 작가와 작가의 다른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훌리안 카락스를 둘러싼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간다. 한편으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한 훌리안 카락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중반의 바로셀로나에서 소년으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다니엘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인생 유전이라 하던가. 한 사람의 일생은 그 사람만의 유일하고 특별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앞선 세대의 삶이 녹아 들어 있는 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개인은 존재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모두 드러낸다. 그러하기에, 다니엘의 성장 과정에서 훌리안의 모습을, 나아가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책을 좋아하는 소년이 주변 사람들과 다양한 형태의 우정을 쌓아가고, 첫사랑에 가슴 아파하며, 세상의 부조리함 혹은 야만스러움과 부닥뜨리고,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 라고 요약해 놓고 보니, 역시 다른 소설들이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작가의 능력은 이런 일반적인 주제나 소재를 어떻게 버무려놓느냐에 있을 것이다. 사폰의 솜씨는 탁월하다. 다양한 등장 인물들의 성격이 세세하게 살아나고, 여러 사건들은 순환적 구조로 매끄럽게 이어진다. 읽다 보면 짐작할 수 있는 통속적인 내용과 해피 엔딩조차 소설의 흐름과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게다가 책과 독서,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곳곳에 드러난다. 다니엘은 <바람의 그림자>를 처음 보고서 ‘그 책이 수년 동안이나,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첫사랑 못지않게 가슴 떨리는 만남이다. 내게도 이런 만남이 있었을 것이다. 흘러버린 시간의 저편에서 언젠가 나 역시 내게 그토록 많은 흔적을 남긴 ‘진정으로 마음을 열어준 첫번째 책’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훌리안은 ‘이야기란 작가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고 말한다. 다니엘이 훌리안의 책을 보고 훌리안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듯, 나는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라는 작가에게 호감을 느낀다. 이 사람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매혹적인 소설을 썼을까. 훌리안과 다니엘의 삶과 사랑에 비친 사폰의 그림자를 본다.
‘만일 내가 아주 우연히 저 무한한 묘지 사이에 있는 이름 모를 단 한 권의 책에서 온 우주를 발견했다면, 더 많은 수만 권의 책들이 알려지지 않고 영원히 잊혀진 채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어찌 소설 읽기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