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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푸드 - 느리고 맛잇는 음식 이야기
카를로 페트리니 엮음, 김종덕.이경남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혼자 산지 이미 10년이나 되었지만, 난 요리를 할 줄 모른다. 그래도 밥먹는데 별로 지장은 없다. 전기밥솥이 있고, 즉석 국이나 찌개가 있고, 반조리된 야채에서부터 완전조리된 밑반찬까지, 가까운 할인점이나 동네 수퍼에만 가도 온갖 종류의 반찬을 손쉽게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요리를 배워보려고 했던 적도 있지만, 결국 포기했다. 일단 요리하는데 들어가는 수고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 시간이면 차라리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여간 나를 위해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차려놓은 밥상 앞에 앉으면 별로 먹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반찬은 거의 10여가지에 이르는데, 마땅히 젓가락 갈 곳이 없어 밥상 위를 헤매고 있는 거다. 언제나 똑같은 인스턴트 국에 똑같은 밑반찬들. 예전 어머니가 차려주시던, 서너가지 놓인 밥상이 그리울 때가 부쩍 많아졌다.
그래서 요즘은 다시 '요리'에 도전하고 있다. 요리라고 해봐야, 요리책에 나오는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늘상 먹는 반찬 종류이다. 콩나물국, 무국, 미역국 등 간단한 재료로 만들 수 있지만 맛을 내기가 녹록치 않은 국 종류, 삶고 데치고 손맛으로 무쳐내는 나물류, 다양한 찌개류 등. 물론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린다. 이렇게하면 겨우 두어가지의 반찬밖에 만들 수 없다. 그렇지만 먹는 즐거움은 사다놓은 음식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게다가 조금씩 '요리하는 즐거움'조차도 느끼기 시작한다.
<슬로푸드>는 각 지역의 다양한 음식과 전통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기대한 것은 슬로푸드운동의 발생과 진행과정,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 등이었다. 그러고보면 내 기대에는 어긋나는, 전혀 다른 책을 읽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러 나라의 여러 음식과 전통을 소개한 이 책을 천천히 읽다보니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나는 왜 음식 만드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나라는 산업화운동을 시작하면서 생산성향상에 열을 올렸고, 그러한 분위기는 고스란히 사회에 반영되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빨리빨리'를 외치는 나라가 없을 정도라고 하지 않는가. 음식을 만드는 일조차도 어쩐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듯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건 이런 사회 분위기 탓일게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 그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이 책에 실린 각각의 글은 그러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농작물을 가꾸고, 각 지역의 특색을 담은 다양한 방법으로 재료를 조리해서, 그 맛을 즐길 줄 아는 생활을 찾아야 한다는 거다. 생산성과 경제성에 사로잡혀 대량생산으로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획일화되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서 말이다. 게다가 음식이란 무릇 사람의 생활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므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오늘 저녁에는 무얼 먹을까,하는 고민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내 삶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