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는 한 달이면 두어 번씩 서점에 나가서 책 맛을 본 후에야 그 책을 읽을지 말지, 살지 빌려볼지를 결정하곤 했다. 신간이나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도 서가를 누비며 이 책 저 책 손대다 보면 마음에 꼭 맞는 책을 찾을 수 있었고, 그 책들을 통해 작가의 다음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밀란 쿤데라, 파트리크 쥐스킨트, 폴 오스터, 이탈로 칼비노, 슈테판 츠바이크 등이 그렇게 만난 작가들이고, 그들 대부분을 여전히 사랑한다.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기 시작한 이후로 서점에 나가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반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는 차고 넘칠 정도다. 인터넷 서점에서의 책 소개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언론 매체의 서평, 독자 리뷰, 작가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얻을 수 있다. 지금 책을 고르는 기준은 인터넷 서점 담당자의 소개글과 독자들의 리뷰이다. 그러나 역시 취향이란 차이가 있는 탓에 정작 받아 들었을 때 내 책이 아니다 싶은 경우가 간혹 있다. 그러다 보니 읽고 싶다 생각한 책이라도 당장 끌리지 않으면 보관함으로 들어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 마음이 동하거나 다음 번 서점에 나가 확인하게 될 때까지.

오르한 파묵은, 보관함에 오래 머물다 결국 삭제된 작가이다. 그의 <하얀성>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바로 보관함에 담았지만, 장바구니를 채울 때면 자꾸 건너 뛰었다. 알라딘에서는 Editor's Choice를 붙여주었고, 다른 곳에서도 뛰어난 작가라느니 훌륭한 작품이라느니 하는 글을 여러 번 봤지만, 어쩐 일인지 영 손이 가지 않더라는 말이다. 파묵의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게다가 이번에는 각종 상을 휩쓴 작품이라기에, 오래 고민하지 않고 주문했다.

<내 이름은 빨강>은 흥미로운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추리소설의 외양에, 12년 간 이어진 로맨스, 예술과 신성(神性)에 관한 대담, 두 세계의 문화적 충돌, 그리고 장(章)마다 바뀌는 화자까지. 그런데, 이상하다. 영 읽히지 않는다. 길지 않은 한 장(章)을 읽는데 한참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잠시 숨을 고른 후에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아예 읽는 재미가 없었다면, 그대로 덮어버렸을 터이다. 책을 읽다가 중간에 덮는 것이 책에 대한, 그것을 고른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결국 매일 조금씩 읽기를 계속하여 2주 만에야 끝냈다.

이 소설이 훌륭한 작품인가? 그렇다, 라고 답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16세기 터키, 유럽의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고픈 욕구와 그것이 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밀화가들의 고뇌가 세세하게 드러난다.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당연한 원근법과 사람이 주제가 되는 초상화가, 신의 섭리를 그림에 드러내야 하는 당시의 화가들에게는 불경이자 금기였다는 것, 그리하여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충격이 필경 살인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의 솜씨는 작가가 소설에서 묘사하는 세밀화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작가가 세밀화가의 작업을 따르고 있기에, 소설은 생기가 없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의 외양을 갖추고 있긴 하나,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그다지 느낄 수 없다. 누가 범인이냐고? 읽으면서 등장 인물 중 범인을 추측하긴 했으되, 누가 범인이든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살인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살인자를 범행으로 이끈 동기, 즉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킨 문화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럼 12년을 한결같이 지켜온, 셰큐레에 대한 카라의 사랑 이야기는 어떠한가? 셰큐레 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사랑한 듯 보이는 카라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셰큐레 사이에 진정한 사랑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 역시 세밀화처럼 평면적이다.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는 것은 분명 재미를 주고 있으나, 마치 모든 인물이 동일한 크기로 그려지는 세밀화마냥 주의를 산만하게 흩뜨려 놓는다. 결국 작가는,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세밀화로 이루어진 책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파묵이 훌륭한 작가라는 방증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묘사하는 대상과 동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작업을 만들 수 있는 작가가 흔치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야기 자체가 입체적이지 못하다 하더라도 그를 탓할 이유는 아니다. 내가 세밀화보다는 현대의 그림에 더 익숙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터.

어쨌거나 이번의 독서 경험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해 주었다. 어째서 그의 전작에 그토록 손이 가지 않았는지. 취향의 문제이다. 그가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 해도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에 대한 소개글을 통해 이미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 한 권으로 작별을 고한 몇몇 작가들이 있다. 오르한 파묵도 그 중 한 명이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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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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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나. <비밀 노트>를 읽는 동안, 경악이라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괴롭고 힘든 것에 익숙해진다며 서로를, 스스로를 학대하는 쌍둥이 모습은 지극히 담담하고 건조하게 그려졌고, 그러한 작가의 메마른 시선은, 어린 그들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이해되지 않음도 아니건만, 일말의 동정심조차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소년들은, 좋고 싫다는 기본적인 감정마저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은 채 팍팍한 세상을 견뎌나갈 나름의 방법을 찾는다. 그건 세상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오로지 자신들의 내부만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편을 독살한 할머니나 수간을 하는 소녀, 변태성욕자인 장교, 자신들의 몸을 탐하는 하녀 등을 비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대할 수 있으며, 자신들만의 판단으로 타인을 벌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상황이 이들을 그렇게까지 내몰았다고 말하기는, 그러나 쉽지 않다. 인간에게 이들이 보여주는 원초적인 폭력성이 내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의구하게 된다.

. <타인의 증거>에서 루카스는 혼자다. 그는 클라우스라는 형제가 있다고 말하지만, 누구도 본 적이 없으므로, 형제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는다. 루카스가 제시하는 증거는 그가 쓴 비밀 노트 뿐이다. 루카스의 주변 인물들도, 독자도, 클라우스는 루카스의 또 다른 이름, 즉 환상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런데 인간의 존재는 증거나 타인의 시선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일까. 루카스는 클라라에게, 클라라는 죽은 남편에게, 그리고 마티아스는 루카스에게 매달린다. 마치 자신의 존재 여부가 상대방에게 달려있다는 듯. 결국 삶이란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라고 등장 인물들이 처절하게 주장하는 것 같지만, 어쩐지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 드러나는 진실, 드디어 만난 형제. 형제의 삶은 <비밀 노트>나 <타인의 증거>에서 보여진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잔혹하지는 못했고, 세상을 등질 수도 없었다. 50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지난한 삶의 흔적과 외로움이다. 형제를 찾음으로써 루카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고 절대적인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만, 그의 바람은 클라우스의 부정에 의해 소멸된다. 그리고 죽음. <50년 간의 고독>에서 쌍둥이 형제는 전편들보다 훨씬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건 초췌한 삶의 외양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일 뿐, 황량한 그들의 내면에서 인간미를 찾지는 못하겠다. 바람부는, 텅 비고 스산한 거리에 서 있는, 그런 기분이다.

. 한 권을 덮으면 바로 다음 권을 잡지 않을 수 없다. 엇갈리는 진술과 모순으로 가득찬 이야기에 당혹해 하면서, 점점 증폭되는 쌍둥이에 관한 궁금증을 누르지 못하는 것이다. 세 편을 연달아 읽으면서, 한참을 달린 것 마냥 숨이 가빴다. 그러나 세 편의 작품은 각각 2~3년의 시차를 두고 출판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세 편을 각각의 작품대로 따로 읽어도 무방할 듯 하다. 쌍둥이 형제의 존재가 사실인가 아닌가와 관계없이 각 작품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심장하고 매력적이다.

다섯. 원제는 <커다란 노트> <증거> <세 번째 거짓말>이라고 한다. 역자가 옮긴 제목 <비밀 노트> <타인의 증거> <50년 간의 고독>은 작품의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는 한다. 그러나 작가의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와 그로 인해 형성된 분위기에 비교하자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생각이다.

여섯. 이만큼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표지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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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렐라 2004-11-01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나머지 원본의 표지들도 찾아봤는데...그것도 좋더군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건 좀 심플한데 그쪽은 어두운 색조라고 할까...작품 전체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더라고요^^

urblue 2004-11-02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시체렐라님.
원본 표지들은 못 봤는데, 아무렴 아동용 표지로 만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
 
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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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을 때 생기는 문제는, 도무지 그의 글을 느긋하게, 온전히 즐길만한 여유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언제나 시작은, 이번에는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야지, 마음먹지만, 조금씩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확 빨라지는 것을 제어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아 있는 페이지가 얼마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면, 낭패감마저 느낀다.

어떤 소설은 결말이 못내 궁금해서 기어코 마지막 부분을 먼저 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폴 오스터의 경우엔, 결말이 아니라 이야기의 진행 자체가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한다. 별개인 듯 보이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것들이 서로 이어진 고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접점이 이루어질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책을 통째로 삼켜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진다.

확실히 폴 오스터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다양한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주제 아래로 통합해 나가면서, 극적인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아, 그러나,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이 내게는 문제다. 그의 소설에는 항상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등장하고,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는데, 그런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보고 싶은데, 다음 페이지에 대한 궁금함을 못 이겨 그만 다 잊어버리고 책장을 넘긴다.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고 나면, 그의 소설을 절반밖에 누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환상의 책>에 이어 <신탁의 밤>도, 너무 빨리 끝내서 못내 아쉬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폴 오스터 특유의 소설 속 소설이 등장한다. 화자인 소설가 시드니 오어는 우연히 구입한 파란 노트에 소설을 쓰기 시작하고, 그 소설의 주인공인 편집자 닉 보언은 실비아 맥스웰이 쓴 <신탁의 밤>을 읽는다. 시드니 오어의 삶과 그가 쓴 소설이 나란히 진행되면서, 독자는, 그가 쓴 소설과 그 소설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소설 <신탁의 밤>의 내용이 어떻게 그의 삶과 연결되는지를 볼 수 있다. <환상의 책>에서 폴 오스터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 과연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는, 소설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말한다. 소설이 단지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구체화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건 아마도,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일련의 고찰일 것이다. 이 사람의 글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가진 필력과 더불어, 글쓰기에 관해, 인생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한다는 데에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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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haGreen 2004-08-1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폴 오스터 작품은『공중 곡예사』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아주 빨라지게 된다는 것에 동감합니다^^

urblue 2004-08-11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중곡예사, 아주 좋아합니다. 뉴욕 삼부작, 리바이어던, 환상의 책까지, 폴 오스터는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작가라니까요. ^^
 
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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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노통의 장점은 확실히 뛰어난 유머 감각에 있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 자체를 어떻게 끌고 가는가 하는 것보다는 인물들의 생각과 말 속에서 더욱 큰 재미를 느끼게 된다.

폼페이의 멸망이, 미래의 누군가가 폼페이를 보존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라고 생각하는 작가 아멜리 노통. 그녀는 이 비밀을 알아챈 대가로 26세기로 납치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감시자이자 폼페이를 멸망시킨 장본인과의 대화. 시간 여행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폼페이가 멸망한 것이 79년인가 2579년인가 하는 논쟁들이 나오지만 사실 그것들에 대해 이해하든 못하든 크게 상관은 없다. 이 책의 진짜 재미는, 노통과 감시자가 쏟아놓는 여러 가지 독설에 있으니까 말이다.

독재자가 지배하고, 지능과 미모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남북 문제의 심각성을 없애기 위해 ‘남쪽’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버린 사회, 그것이 미래의 모습이다. 미래의 인간 셀시우스는 이 모든 것들이 과거부터 존재해왔던 것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 노통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딱 그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계급은 존재하고, 남북 문제는 나날이 심각해지고, 위쪽의 인간들은 아래쪽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노통이 남쪽에 대한 연민과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대해 셀시우스는 그것이 위선일 뿐임을 드러낸다.

노통과 셀시우스가 서로를 조롱하는 대화는, 실은 노통 자신을 포함한, 북쪽 세계에 대한 비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비난조차, 굉장히 재치있기 때문에, 어쨌거나 웃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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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 21세기 게릴라의 전설
베르트랑 데 라 그랑쥬 지음, 박정훈 옮김 / 휴머니스트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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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초, 어느 뉴스 프로그램의 해외 리포터가 멕시코에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봉기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리포터는 멕시코에 거주하고 있기는 했으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커녕 멕시코 혁명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는 듯 했다. 앵커와 리포터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으로 인해 멕시코의 치안 상황이 매우 불안하다는 말로 꼭지를 마감했다.

전화니 방송이니 인터넷이니, 문명의 이기는 날로 발전하여 지금은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리포터는 멕시코가 긴장 국면에 놓여있는 듯 말했으나, 실제로 그런 기미를 다른 곳에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치아파스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난지도 벌써 10년이지만, 그간 무력 충돌이 일어난 것은 1994년 1월 1일의 첫 전투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멕시코 정부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으로 인해 골치를 앓는 것은 사실일 테지만 현재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뉴스에서 얘기한 이상, 사람들은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전보다 훨씬 덜 하긴 하지만, 여전히 언론은 막강한 권력이다. 사파티스타의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누구보다 잘 활용한 게릴라이다. 신문, 잡지, 인터넷 등 언론 매체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전세계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책, <21세기 게릴라의 전설, 마르코스>의 저자들은 부사령관이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언론이 잘못된 정보로 진상을 호도하고 있다고 여긴다. 저자들이 밝히는 집필 동기는 명확하다. 부사령관에 의해 통제되고 왜곡되는 정보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실을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전달하는 정보는 과연 진실이고 올바른가? 동일한 정보조차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입장과 태도에 따라 다른 사실을 전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제시되어 있긴 하지만, 애초부터 그들이 사파티스타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결론이 달라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저자들은,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 중 상당 부분을 마르코스 개인을 비난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사파티스타 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분석이나 건설적인 비판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탄생과 무장 봉기, 그리고 그 후의 이러저러한 사건들은 중구난방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기자 출신인 저자들이, 언론을 지나치게 잘 활용한 부사령관을 개인적으로 힐난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면, 괜한 억측일까?

사족 한 가지, 내용 자체가 뒤죽박죽에 혼란스러운 건 그렇다 치자. 번역도 별로 매끄럽지 못한 데다가 교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오자와 잘못된 문장을 만나는 건 진짜로 짜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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